사랑과 운명의 한 끗 차이 / 달빛 (한 끗 차이)

세번째2019. 12. 3. 01:48

사랑과 운명은 한 끗 차이

 

" 끝이 같더라도, 난 다시 널 사랑할 거야. "

 

W . 달빛

 

***

 

" ... 하! " 

" ... " 

" 윤산하! " 

" 어? "


왜 이렇게 넋이 나갔어, 또. 물어오는 빈의 말은 마치 음소거라도 되는 양 들리지를 않았다.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생긴 붉은 실과 이어진 민혁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했다. 민혁은 평소 생글생글 웃으며 두루두루 잘 지내는 성격 덕에 사람들과는 별 허물없이 지냈고, 그런 민혁을 산하는 정신없이 눈으로 쫓기 바빴으니까. 
왜 그런 말이 있지, 자신의 새끼손가락과 연결된 붉은 실의 상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말. 산하는 원래 미신은 잘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생긴 붉은 실과 그런 자신의 붉은 실의 끝에 서 있는 운명의 상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딱 필요한 관계만 이어오며 살아온 산하에게 자신이 전학 간 학교에서 민혁이 내 온 호의는 점차 혼자만의 호감으로 커져갔다. 솔직히 처음엔 좀 귀찮았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낯가림이 있는 산하에게 누군가가 다가오는 게 달갑지만은 않았으니까. 그래도 결국엔 계속해서 자신이 우리 반 반장이랍시며 다가온 민혁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엔 없었지만. 민혁이 계속해서 산하에게 보여준 호의에 산하의 마음이, 그저 전학생이 빨리 적응하길 바라는 민혁과는 별개의 마음으로 흘러가는 산하의 마음에 산하는 자기 자신도 헷갈리는 이 감정을 정의 내리기도 직전에 발견한 건 붉은 실 이었다.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에 연결된 붉은 실.


자신과 붉은 실로 연결된 민혁을 발견했을 땐 마냥 좋다기보단 복잡했다. 그리고 막상 이 붉은 실의 상인 민혁은 둘을 이어주는 붉은 실을 보지 못한다. 산하는 이 사실을 알기까지 조금 오래 걸렸다. 민혁이 말을 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알아. 산하와 민혁이 붉은 실로 연결된 그날 민혁은 산하에게 운명이 있는 것 같냐고 알 수 없는 질문만 해 댔으니까. 하지만 민혁이 하는 행동을 봤을 땐 민혁은 붉은 실을 볼 수 없단 걸 확신했다. 산하는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정의 내리기도 직전에 붉은 실을 발견했을 땐 이미 둘은 고등학교를 졸업해 같은 학에 지원해 선택한 과만 달랐을뿐더러 민혁에겐 학에 오고 나서 애인이 생겼다. 같은 과 선배라 했나, 민혁에게 첫눈에 반했다며 민혁을 잘 챙겨줬더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민혁도 금세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산하는 혼자만의 감정으로 산하의 감정을 숨겨갔다. 그래도 민혁은 학에 들어오고 나서도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데다 이렇게 잘 통하는 친구는 너밖에 없는 것 같다며 민혁은 산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일이 종종 있었고, 이게 무슨 의도치 못 한 희망고문인지 산하는 민혁이 민혁의 애인과 있는 문제들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 그래서 그랬다니까, 으휴 진짜. " 

" 니가 서운할만했네. " 

" 그치, 아 진짜 너밖에 없다 산하야 "


알면서 그러는 건지, 오늘따라 유난히 더 민혁이 야속했다. 별다른 답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어도 신나게 이야기 하는 민혁이 오늘따라 미워 보였다. 


" 배고파. 우리 밥 먹으러 가자 " 

" 오늘은 돈까스 어때 " 

" 와 메뉴 선정 박. 완전 찬성 "


왜 이렇게 잘 통해. 무슨 운명인 것 마냥 ㅋㅋㅋㅋㅋㅋ 민혁이 무심코 내뱉은 민혁의 한 마디는 산하에게 아프게 다가왔다. 오늘따라 무슨 생각인지 민혁이 애인과 헤어졌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혼자만의 심통까지 났다. 네가 헤어졌으면 좋겠어. 네가 그 사람과 잘 안됐으면 좋았을걸. 유치한 심술인 걸 알면서도 민혁의 잘못도,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닌 걸 알아도 괜스레 민혁에게 서운해졌다. 애인과 싸웠다면서도 저 끝에 지나가는 그 사람을 보며 금세 얼굴을 붉히는 민혁에 괜히 더 미안해졌다. 어디서부터 올라오는 건지, 시작점도 모를 죄책감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민혁아, 네 운명의 상래. 그래서 민혁아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그 사람이랑 헤어지게 될 수도 있어. 전부 나 때문에.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 한 말들이 입안에서 어지럽게 맴돌았다.


ㆍ 


" 너 유학 가라. "

"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

" 그냥 갔다 오라면 조용히 갔다 와 "

" 아버지!!!!!!! "

" 시끄러워. 조용히 해라 "

 

집안에 하나 있는 아들 새끼라고는... 저렇게 놀기만 해서야.. 전혀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산하의 아버지에게 산하는 늘 걸림돌이었다. 이번에도 전혀 예정되어 있지 않은 계획을 무턱고 산하에게 요구하며 산하의 숨통을 조여왔다. 그때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땐 자신과 같은 잔뜩 물기 젖은 목소리를 한 채 말을 하는 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 때문인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민혁이 애인과 헤어진걸.


" 나 진짜 어떻게 해야 해 산하야 " 

" 나한텐 전부인 사람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ㅇ.. "


민혁의 부름에 산하는 고민 없이 바로 옆에 걸려있던 코트를 걸치고 나갔다. 그리고 지금, 산하의 앞에 보이는 민혁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비어버린 술잔과 함께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랑과 운명은 정말 한 끗 차이라고, 사랑과 우정도 정말 한 끗 차이라더니. 처음엔 이해하지 못 했다. 지금 이 순간 무교인 산하는 신이 있다면 절실하게 민혁의 운명이 자기가 아니였으면 좋겠다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와 멀어져서 네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뭔들 못 하겠어 내가. 자신의 새끼손가락과 마주앉은 민혁의 새끼손가락을 연결 한 붉은 실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나한텐, 나한텐 정말 전부인 사람이야. 근데 그 사람이... 말을 마치 지도 못 한 채 엉엉 우는 민혁이었다. 민혁이 꽁꽁 숨기고 있던, 숨겨오던 아픈 부분을 마주하니 말문이 막혔다. 니가 이렇게 힘들어할 동안 난 뭘 한 거야.. 민혁을 좋아한다면서 혼자 힘들어할 동안 뭘 한 건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난 있잖아, 정말 그 사람이 전부였어. 운명이라는 말 솔직히 잘 안 믿었는데, 진짜 이 사람이 내 운명이다 싶을 정도로 사랑했어. 그 사람이 원하는 모습으로 맞춰가면서 내가 사라지는 것쯤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민혁의 말을 들으면서 정말 갖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자신조차도 모르고 있던 민혁이 꽁꽁 숨겨오던 아픈 부분을 자신보다 먼저 알아낸 그 사람은 민혁을 보듬어주었다. 내가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겁이 많은 사람이야, 산하야 나는.. 나는 무서운 게 너무 많아. 주변 사람들도 무섭고, 스쳐 지나가는 내 감정들도 무섭고 하다못해 분명 나인데.. 내가 너무 무서워. 분명 이건 내가 아닌데,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나를 잃어가는 거 같아서 무서워. 점점 내 모습이 사라지는 거 같아서.. 애초에 내 모습은 세상에는 있지도 않은 것처럼 사라지는 게 제일 무서워.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 산하야... 민혁의 아픈 부분은 생각보다 깊었고 어두웠다. 어떻게 그게 괜찮아 민혁아. 니가 너를 잃어갔던 순간부터 그건 괜찮지 않은 거야. 미안해, 미안해 민혁아. 내 이기심에 네가 그 사람과 헤어지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못된 생각을 했어. 그 말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네가 이렇게 힘들어할 걸 알면서도 네가 조금 더 힘들었으면 좋겠어. 그 사람을 원망하면서 날 찾을 수 있게. 내뱉지도 못할 말들을 삼켜내었다. 목구멍에 뱉지도 삼키지도 못할 말들이 모여 목소리도 제로 나오지 않는 기분이었다. 민혁은 가장 믿고 의지하던 하나의 관계가 무너지니 이내 곧 자신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단단한 줄 알았던 민혁을 단단히 받쳐주고 있던 그 사람이 사라지자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민혁아 좋아해. 진짜 너무 많이 좋아해. 흘러들어간 술에 취한 건지, 산하는 꺼내지도 못 한 말이 머리에 맴돌며 머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네가 왜 헤어졌는지 내가 아는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좋아한다고 해. 산하는 울다 지쳐 테이블에 기 잠든 민혁을 보니 자꾸 숨이 막혀 괜히 뿌연 연기로 가득 찬 천장을 바라보았다. 민혁이 민혁의 애인과 헤어진 게 다 이 붉은 실 때문인 것만 같아서. 우리가 사실은 서로 운명이라 네가 그 사람이랑 헤어진 거라고, 사실로 처음부터 모든 걸 말하고 마주할 민혁의 얼굴이 무서웠다. 산하는 말했다. 좋아해 민혁아, 미안해.


민혁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산하에겐 오히려 당사자인 민혁보다 더 힘들었다. 오히려 민혁이 괜찮은 척을 하는 모습이 가장 아프게 다가왔다. 민혁을 제정신으로 마주하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죄책감에 숨이 막혀와 도체 어디서부터 사실을 말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내가 네 운명이야, 그래서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됐어. 단언하긴 힘들지만 민혁이 잘 지내던 애인과 헤어지게 된 이유로 산하는 이것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민혁에게 바른로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할 수 있었다. 근데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어서. 울렁거리는 속에 산하는 한참이나 속을 게워냈다.


민혁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 사람을 잃고 나서 하도 괜찮아, 괜찮을 거야. 자기최면을 걸어온 탓인지, 아니면 본래 자기 모습을 돼 찾아온 덕인지 생각보다 괜찮았다. 한 가지 괜찮지 못 한 점이 있다면 애인과 헤어져 산하와 술을 마신 그날, 민혁은 산하가 하는 말을 들었다. 


" 좋아해 민혁아, 미안해 "


눈물만 났다. 산하의 감정을 듣고도 모른 척 무시해 버리는게, 산하의 감정을 알면서도 전부 짓밟는 것만 같아서 미안해서 그랬나. 도체 언제부터 자기를 향해 그런 감정을 품었는지, 미안했다. 지나가다 산하를 마주치면 쌓여있는 말들이 마구 뒤엉켜 쏟아져 내릴까 의도적으로 산하를 피해 다녔다. 물론 정리되지 못 한 감정으로 어지러운 건 민혁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산하를 피했을까, 이건 정말 못 할 짓인 것만 같아서 그만뒀다. 죄책감만 들어서. 그래서 둘은 평소로 함께 학식을 먹고, 다른 수업을 듣고, 집으로 가는 길도 함께 했다.


" 민혁아 " 

" 응 " 

" 유학 가게 됐어, 나 "


아버지가 가라고 해서 가는 유학인지, 사실로 민혁에게 말할 자신이 없어 도망치는 유학인지 산하는 도저히 분간할 길이 없었다.


" ... 아버지가 그러신 거지? "


산하는 나오지도 않는 웃음을 살풋 보여주며 말했다.


" 응, 그런 거 같네. "


티는 내지 않아도 민혁을 안심 시키기 위해 괜히 빙빙 돌려 말했다. 민혁은 산하에 해 잘 알았다. 산하도 그런 민혁을 마다하진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관계에서 민혁은 산하의 집안 사정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혁은 산하에게 별다른 위로의 말만 뱉어냈다.


" 응.. 몸 조심히 다녀와 산하야 " 


가벼운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민혁은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자꾸만 한 끗 차이로 자꾸 틀어지는 둘 사이는 왠지 서글펐다. 사랑과 운명은 정말 한 끗 차이라더니, 예전에 들었던 말이 요즘들어 왜이리 자주 생각이 나는지, 아주 작은. 좁혀지지 않는 한 끗 차이로 엇나가는 게 오늘따라 유난히 와닿았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둘은 말할 수도 해결할 수도 각자의 고민으로 울렁거렸다.


" 조심히 가. " 

" 응, 얼른 들어가 "


더 가까운 민혁의 집에 도착하고 민혁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산하는 뒤돌아 얘기했다. 


" 민혁아 " 

" 응 " 

" 좋아해 "


등 뒤에서는 이어질 민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내 젖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왜 울어, 민혁아. 나.. 나는... 응, 괜찮아 민혁아 왜 울어... 둘은 한참을 정적 속에서 산하는 민혁을 달랬고, 민혁은 눈물을 참았다. 너 조금 뒤면 나 안 본다고 이러는 거지 그래서 그런 거지. 그만. 거기까지 해. 유학 갔다 와서 나 안 볼 것도 아니잖아 너. 민혁은 떨리는 목소리로도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가기 전에 얘기해 주고 싶었어. 미안해. 민혁은 산하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이런 마음으로 자신과는 깊이부터 다른 산하의 마음을 받기엔 너무 미안했다. 그날을 처음으로 산하와 친해진 걸 후회했다. 그냥 둘 걸. 전학생 오는 게 한두 번이라고 그때는 왜 그렇게 산하가 신경 쓰였는지, 분명 자신이 베푼 호의에 끝내 연결된 관계인 걸 알기에 사춘기 온 학생처럼 괜히 그때의 자신이 미워졌다.


집에 도착하고 지긋이 손끝의 붉은 실을 바라보고 있는 건 오랜만이었다. 분명 창문도 닫혀있고 바람이 나올 곳은 막혀있는데도, 우리의 손끝에 걸린 붉은 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 실과 손가락들이, 사람과 사람이 운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는 자신을 거울로 보고 있으니 손이 닿으면 끊어져 버릴 듯 붉은 실이 얇은 붉은 실이 흔들리는 건지, 너희의 관계가 더는 지속되지 못한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는지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사랑에, 운명의 장난에 두통약을 달고 살았다. 늘 지끈거려오는 머리 탓에 도통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붉은 실이 흔들리는 건지 아니면 붉은 실로 연결된 산하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 건지, 그날 밤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네가 나처럼 내 생각에 하루라도 더 뒤척였으면 좋겠어. 하루라도 네가 나만큼 내가 신경 쓰여 미치겠으면 좋겠어. 창문을 열면 스며드는 달빛에도 내가 생각나 눈물이 날 만큼 가슴이 답답했으면 좋겠어. 차라리 네가 우리의 운명을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어. 근데 이게 무슨 이기적인 생각인지,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만약 우리의 운명을 알게 되어도, 우리의 결말을 알게 되어도 네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민혁아 내가 생각한 우리의 끝과 너에게 돌아올 답이 같더라도, 난 또다시 널 사랑할 거야. 종이에 한 자 두 자 적어가는 글씨들이 떨어지는 눈물에 번져갔다.


산하는 유학 날이 다가올수록 위태로워 보였다. 두 사람의 운명의 실 위에서 외줄 타기라도 하는 양 툭 치면 곧 떨어져 사라지기라도 할 듯 불안해 보였다. 예상과는 반로 오히려 유학 당일날은 평온했다. 묵묵히 일어나 준비된 짐을 챙겼고, 조용히 공항으로 향했다.


민혁은 그러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일찍 떠진 눈에 새벽부터 일어났을 땐 창밖엔 해가 뜨고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생전 처음 보는 붉은 실이 새끼손가락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이런 게 어딨어. 고작 이 실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던 애인과 헤어지게 된 거라는 이유까지 생각이 미치기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에서 이 붉은 실의 끝에 걸린 운명의 상가 윤산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운명의 붉은 실로 이어져 있어서 그런지, 실의 끝부분에 연결된 사람을 보지 못했음에도 상당히 느낌이 익숙했다. 오래 전부터 연결돼 있었다는 듯이. 상가 이 붉은 실의 끝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무모한 일을 저질러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겉옷을 챙겨 입고 무작정 밖으로 나와 손끝에 이어진 붉은 실을 따라 걷고 있었다. 온갖 교통수단을 이용해도 공항 쪽에 가까워지는 게 영 불안하면서 초조해져 손톱을 물어뜯었다. 분명 오늘은 산하의 유학 날이었고, 공항 쪽에 다다랐을 땐 팽팽하던 붉은 실이 느슨해져 바닥에 뒹굴었다. 문을 열었고 손가락에 얄팍한 실로 연결된 상를 확인했을 때


" 윤산하 "


이래서 머리가 아프지 않은 거였어. 어쩐지 오늘은 괜찮게 지나가나 했다. 손과 손에 붉은 실이 연결된 채 마주한, 어느 한 쪽만 보는 것이 아닌 모두가 알아버린 우리의 운명을 함께 마주한 민혁은 울고 있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젠 내가 꼴도 보기 싫다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하려나, 아니면 사람을 가지고 노니 재미있었냐는 흔한 사가 나올까 무서워 사실을 알게 된 민혁을 마주하기 두려워 손이 떨렸다. 심장 박동 수가 급격히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입 밖으로 빠져나올 것 같다는 게 이런 말이었는지 몸소 느끼고 있을 때, 어쩌면 산하보다 더 슬픈 표정을 한 민혁이 달려와 산하를 끌어안았다.


" 왜 말을 안 했어.. 왜..  " 

" ... " 

" 좋아한다면서 왜 말을 안 한 거야 "


흐느끼는 민혁이 숨을 고르기를 기다렸다. 이어지는 답은 분명 자신을 향한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서.


" 혼자 얼마나 힘들었어 " 

" ... " 

" 혼자 얼마나 아파했어 "


혼자서 얼마나 끙끙 앓았어, 날 좋아한다면서 죄책감에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텨냈어. 미안해.. 미안해 산하야. 너한테 모질게 굴어서 미안해. 네가 날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외면했어. 무서웠어 널 잃을까 봐. 예상 밖이었다. 산하는 심장이 떨어져 바깥에 나뒹구는 기분이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감기 기운도 있었나 생각하다 보니 오히려 민혁보다 되려 눈물이 났다. 어떻게 넌 이 상황에서 날 걱정하는 거야 민혁아. 네가 애인이랑 헤어진 것도 모두 이 실타래 때문인데 어떻게 내 생각부터 하는 거야. 어떻게 원망 한 번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날 위로하는 거야. 민혁을 달래기 위해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덜덜 떨려왔다. 목이 막혀 목소리도 내기 힘들던 목이 답답한 응어리가 빠져 정확하지 못 한 발음으로 전하지 못 한 말들이 쏟아져 내렸다.


울지 마 민혁아. 딱 4년이야. 아버지도 허락하셨어,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조금 참자. 4년 후에도 우리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면 그때 만나자. 너무 많이 울지는 마. 마지막 인사가 이런 말이라 미안해. 금방 다녀올게. 이 말을 끝으로 산하는 미련 없이 뒤돌았다. 민혁도 저 멀리 사라지는 산하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뒤엔 그로 뒤돌아섰다. 더 바라보기엔 원치 않을 미련이 생길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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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산하가 떠난 지 벌써 3년이 조금 넘었다. 4년이라고 했지,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우리는 그날 마지막 인사를 기점으로 단 한 번의 연락도 하지 않았다. 네가 됐건, 내가 됐건 연락하면 너무 보고 싶어서 당장 그곳으로 갈 거 같아서. 처음엔 산하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민혁의 손가락에 이어진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실을 바라만 보고 있는 건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았지만 말이다. 하루를 마무리 짓고 침에 누워 새끼손가락을 바라보면 좀 신기했다. 이렇게 얇아 보이는데 이 실의 끝엔 네가 있고 내가 있는 게, 이렇게 얇은 실로 운명이라는 명목하에 두 사람을 묶어 둘 수 있는 게 오늘따라 신기했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아도 도통 잠이 오지를 않았다. 전화... 해 볼까. 수차례 고민 끝에 낸 결론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해 보자 였다. 세 번의 연결음도 채 지나치기 전에 산하는 전화를 받았다. 잠시 정적이 있었지만 이내 먼저 입을 열었던 건 산하 쪽이었다. 


" ... 오랜만이야 민혁아 " 

" 어... 그러게 " 

" 왜 전화했어? "


변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변명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가? 그냥 오늘따라 유난히 네가 생각이 나서라고 말하기엔 부끄러웠다. 그나저나 여기랑은 시차가 꽤 차이 날 텐데. 괜히 전화 했나 고민하고 있을 찰나, 산하는 입을 열었다.


" 아, 아니다. 괜찮아 " 

" 응? 뭐가.. " 

" 보고 싶었어. " 

" ... " 

" 전화하기엔 너무 염치없는 거 같아서.. 그래도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 민혁아. "


뭐가 아니라는 거지.. 생각하는 민혁에게 산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굳이 왜 전화를 했는지, 4년이라는 시간을 다 채워가는 이 상황에서 왜 지금에서야 전화를 한 건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굳이 용건이 있어야 전화하는 사이도 아니고, 민혁에게 먼저 연락 온 이 순간이 산하에게는 큰 의미였으니까.


" 여전히 바보네, 넌. " 

" ... " 

" 진짜 그때나 지금이나 바보야, 바보. 나는 너 엄청 기다렸는데. 그때도 지금도. "


정적이 흘렀다. 바보는 너무했나? 윤산하 삐졌어? 분위기를 느낀 민혁은 말을 이어나가기 위해 괜한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아니, 바보 맞네. 그때나 지금이나 바보 맞아. 산하도 웃으며 받아쳤다. 이렇게 쉬운 걸 왜 우리는 지금까지 안 한 거야. 


" 앞으로는 전화 자주 할게. " 

" 나도 " 

" 그리고 " 

" 응? " 

" .. 아직도 나 기다려? "


... 그럼, 기다리지. 아직도 너 기다려. 아직도 너 기다리고, 앞으로도 너 만나기 전까지 계속 기다릴 거야. 기다릴 수 있어. 민혁의 확신 있는 목소리에 어디인지 모를 설렘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산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알겠어, 얼른 갈게. 보고 싶다. 늦었는데 얼른 자. 피곤하겠다. " 

" 알겠어, 너도 잘 자. " 

" 민혁아 " 

" 응 " 

" 좋아해 "


.... 나도. 끊을게, 잘 자. 이번엔 어느 한 쪽이 말한 게 아닌 두 사람이 함께였다. 좋아한다는 말에. 자신도 좋아한다고 화답했다. 우리가 언젠간 좋아한다는 말에 사랑한다고 답할 수 있겠지? 민혁은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을 허공에 던졌다. 너도 나 기다려줬잖아, 계속. 오늘도 역시 끝내 말하지 못 한 한마디가 민혁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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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겨져 윤산하? 일주일 남았어.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고. " 

" ㅋㅋㅋㅋ 진정해 민혁아. 나도 안 믿겨져. 시간 엄청 빠르네. " 

" 뭐야, 예전엔 버릇처럼 보고 싶다고 하더니 이젠 아니야? " 

" 아니, 보고 싶지. " 

" 그럼 좋아하는 건? " 

" 여전하고. "


사실 한 번의 통화 이후로 하루에 한 번씩 밥 먹듯 이어진 통화에서 둘은 보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민혁이 깜빡하고 하지 않아도 산하는 늘상 입버릇처럼 보고 싶다는 말을 내뱉었다. 사실상 산하가 먼저 민혁에게 사랑한다고 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괜히 확인받고 싶었다. 두 사람이 함께 하기까지 길게 돌아온 길들에 이제는 지름길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산하의 귀국 날이 하루 남았던 날에는 산하도 민혁도 왠지 모를 설레임에 새끼손가락의 붉은 실을 바라보다 날을 샜다.


산하의 귀국 당일 민혁은 일찍 일어나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학을 가기 전 산하와 지금의 산하를 똑같이 할 수 없었다. 산하를 보고 얼굴이 빨개지면 어쩌지. 이런 부질없는 고민들을 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지나 비행기 도착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민혁은 4년 전 자신들이 헤어진 공항으로 가기 전, 잠시 꽃집에 들렀다. 역시 꽃은 오바였나.. 라는 생각은 잠시 치워두고 열심히 꽃을 고르기 시작했다. 무슨 꽃이 잘 어울릴까, 너에게. 고민하고 있을 찰나 눈에 들어온 꽃은 분홍색 안개꽃 이었다. 이걸로 꽃다발 만들어 주세요.


" 분홍색 안개꽃은 꽃말이 사랑의 성공이에요. "


굳이 별다른 답은 하지 않았지만, 꽃집 사장님께 살풋 웃어 보이니 이내 사람 좋은 미소로 답해주셨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꽃말 마저도 너를 닮은 것만 같아서. 감사합니다. 꽃을 받아 들고 나오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공항에 다다랐을 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민혁의 예상보다 공항에 일찍 도착해 30분쯤 산하를 기다렸을 때 저 멀리서 산하가 보였다. 울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이상하게 산하를 보니 눈물이 나왔다. 4년 전 그때가 생각나서인지, 이유는 민혁도 모른다. 애써 눈물을 참고 천천히 걸어와 자신의 앞에 서 눈물을 닦아주는 산하에게 예쁘게 웃어 보이며 꽃다발을 건넸다.


" 귀국 축하해 "
" 보고 싶었어. "


아 어떡하지.. 산하는 이내 민혁을 꼭 끌어안고 말했다. 너무 좋아서 어떡해 진짜.. 얼굴만 봤는데 이렇게 좋아서 어떡해.. 민혁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 너 귀 엄청 빨개. " 

" 그건 너돈데? "


분명 장난스럽게 놀리는 말투였지만, 산하는 빨개진 귀와 얼굴을 가리는 데 급급했다. 아니다. 이제..


" 이제 안 피할래. "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악 열이 끼치는 기분이었다. 잔뜩 빨개진 얼굴로 자신이 준 꽃다발을 안고서 민혁의 앞에 서 예쁜 말만 뱉어는 산하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산하와 마주 보고 선 민혁은 꽃다발을 잡고 있는 산하의 오른손을 빼 자신의 새끼손가락과 산하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다 알기라도 한다는 듯 산하는 민혁을 향해 웃어 보였고, 민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 윤산하 " 

" 응, 민혁아 " 

" 귀국 축하해. "


그리고... 이제 나랑..
걸고 있던 두 손가락이 얽혀 두 사람의 손이 맞잡혔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