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주부전 / 히모 (별주부전)

네번째2020. 4. 11. 00:10

 

향단아 그냇줄을 밀어라 / 괌하 (춘향전)

네번째2020. 4. 10. 23:22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ㅋㅋㅋㅋㅋ]

[아 잠시만] 02 : 35

 

 

[] 02 : 35

[뭐해?] 09 : 03

[바빠?] 17 : 10

 

 

성훈아 자?

 

 

손끝이 전송 버튼 주변을 맴돈다. 공연히 눈에 띈 액정 구석의 먼지만 문질러 닦아낸 나는 이내 얕게 숨을 내쉬며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덮어놓았다.

 

자겠지, 미국은 지금 한창 새벽일 테니까. 벌렁 침대에 몸을 던지자 시린 하늘 가득 벚꽃 잎이 흐드러진 광경이 액자에 담긴 그림마냥 창문에 걸려 있었다. 나의 어제와 오늘과 지난 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동안 나만 쏙 빼놓고 어느새 봄이다. 이성훈이 떠난 후로 맞는, 두 번째 봄.

 

그래도 자기 전에 연락 좀 해주지.’

 

바쁠 테니까 내가 이해하자며 혼자 마음을 달래 보아도 성훈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휴대폰이 끝도 없이 눈을 감고 있을 때면, 나 역시 액정 속 암흑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누구는 저 때문에 매일 얕은 쪽잠만 자고 수면부족에 시달리는데. 더 급한 쪽이 나인가 보지.

 

또다시 가라앉는 기분에 침대 옆에 떨어져 널브러진 병아리 인형을 주워 꽉 끌어안았다. 그새 연락이 왔을까 켜본 화면에는 행복하게 웃고 있는 우리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질 뿐인, '우리'.

 

보고싶어, 성훈아.”

 

 

 

**

 

 

 

.”

“...”

!!"

"? , 미안. 뭐라고?"

 

원망 섞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어김없이 원망 섞인 얼굴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또 그 사람 연락 기다려요?"

"."

"그 사람이 무슨 이몽룡이라도 돼요? 왜 형만 기다려요."

"내가 춘향이 팔자인가 보지."

"그럼 난 뭐예요?"

"글쎄. 향단이?"

 

속도 모르고 놀리는 산하가 얄밉기도 했지만 걱정해주는 마음은 알고 있었다. 아랫집 꼬마였던 녀석이, 훌쩍 커버려선 남 팔자까지 걱정해주는 대학생이 되었다. 공부도 뒷전이더니 보란 듯이 나와 같은 곳에 진학한 것도 용하다. 기어코 민혁이 형네 학교에 가겠다 우겨 담임선생과 부모님을 얼척없게 만들던 고삼 윤산하를 떠올리자 새삼 웃음이 돋았다.

 

"그래서 왜?"

"교양 과제 했냐고 세 번은 물었거든요."

"무슨 과제?"

"최 교수님 과제요. 내일 낮까진데."

"... ."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정말 정신을 놓고 살긴 하는 모양이었다. 하다하다 산하에게 한 소리 들을 짓을 하다니. 과제를 까맣게 잊은 것보다도 윤산하가 무시하는 게 더 불쾌해서 한숨이 절로 배어나왔다. 인생 뭘까... 봄이 왔는데, 유학간 애인은 잠수나 타고, 과제도 밀렸고, 윤산하놈은 이제 신이 나서 날 놀려먹겠지.

 

"형 오늘 오후 내내 수업 있잖아요."

 

우와, 내 시간표까지 꿰고 있네. 울화가 치밀어 쳐다본 산하의 얼굴은 뜻밖에 장난기 대신 염려를 띠고 있었다.

 

"나 자료 쓰고 남은 거 있는데."

"그런데?"

"그거 주면,"

"...?"

"나랑 주말에 데이트 해줄래요?"

 

 

 

 

그러마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한낱 학점의 노예일 뿐이고, 산하와 시간을 보내는 건 솔직히 나쁘지 않다는 걸 아니까. 거창하게 데이트라기에 무슨 계획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저녁 때가 다 되도록 산하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혼자 미리 밥을 먹어야 할지 말지 울리지 않은 휴대폰과 눈치싸움을 하던 내가 전화를 걸자 그제서야 집 앞 포장마차로 날 불러냈다. 그리곤 평소와 다름없이 마주앉아 돼지껍데기에 소주나 들이키는 게 전부였다.

 

나도 모르게 기대라도 했던 건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날 더 비참하게 만든 것은 윤산하의 연락을 기다리는 내내, 성훈에게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우울은 우울을 먹고 불어났고, 나는 공기만 들어찬 나를 채우기 위해 술을 들이부었다. 윤산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했고, 나는 형식적인 대답을 마주던졌다. 머리도 속도 엉망이었다. 분명히 기억나는 건 그 다음부터다.

 

", 좀 천천히 마셔요."

 

잔을 빼앗으려 손을 뻗는 산하에게 화를 내려던 순간,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그 때 나는 그걸 확인하지 말았어야 했다. 성훈의 SNS에 올라온 영상을, 그 안의 성훈을, 그의 품에 안겨 입을 맞추고 있던 이름 모를 여자애를.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잠시만'은 점점 길어졌고 때로는 한나절이 될 때도, 또 며칠이 될 때도 있었다. 불안이 커질수록 나는 성훈을 몰아붙였다. 그의 말이 텅텅 비어버릴 때까지, 결국 이렇게 날 목조를 때까지.

 

영상은 몇 초 되지 않아 삭제되었고, 그토록 기다리던 성훈의 연락이 쏟아졌다. 그의 이름 옆에 숫자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나는 한 층씩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온 몸이 조각나는 끔찍한 기분에, 내 어깨를 감싸는 윤산하를 붙잡고 그대로 입술을 물어버렸다. 나는 그렇게 내가 여기에 있다고, 날 봐달라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외쳐댔다. 그래야 내가 나를 놓지 않을 것 같아서, 나조차 나를 잃고 싶지 않아서.

 

산하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를 붙잡고 집으로 끌고 들어갈 때도,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부벼댈 때도 내게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그의 손길은, 마냥 따뜻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이용했다.

 

 

 

**

 

 

 

 

", 미안해요."

 

짧게 끊어지는 교성과 숨소리 끝에 정적만 이어지던 공간 속에서 산하가 입을 열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무어라도 떠올리면, 내가 받은 상처가, 너에게 준 상처가 전부 진짜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미안, 미안해요.. 형 기다릴 거 아는데, 반지가 없어서.."

"무슨 소리야."

"미안해요. 반지가 없어져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미안.."

"...."

 

취했나. 나보고 천천히 마시라더니. 난 정신도 못 차리는 애를 데리고 뭘 한 거지. 조금씩 돌아오는 현실감에 뼈를 타고 두려움이 퍼졌다.

 

"그래도 말할래요."

"."

"좋아해요."

"?"

"내가, 이도령은 못 돼도, , 그래도 향단이가 더 낫지. 나는 형 절대 안 떠나요. 맨날 옆에 붙어있는데.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

"향단이도 기회 한 번 주시면 안 되나요, 아가씨."

"누가 아가씨냐.."

 

메말라 갈라진 곳 위로 서서히 무언가 움트기 시작한다. 기다림과 기다림으로 지쳐가던 땅에, 나는 누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봄이 찾아온다. 생각지도 못하던 씨앗이, 생각지도 못하던 양분을 먹고 언제 이렇게 자라났나. 곧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가지가 굵어지면 그네를 매달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그런 기적이 생긴다면.

 

"향단아,"

신구미호전 / 뫄 (구미호전)

네번째2020. 4. 10. 23:21

 

 

 

, 꼰대 너 지금 어디야.”

피씨방이지 뭘 물어.”

어디. 내가 찾아간다. .”

역삼 케이 피씨방.”

 

-

 

평화로운 역삼 대학교의 어느 봄날이었다. 색색의 과잠을 입고 캠퍼스를 헤매는 새내기들을 보며 내심 흐뭇해하는 산하는 어김없이 학교 앞 어느 피씨방으로 향한다. 바람이 적당하고, 햇살은 따사롭고 오늘은 왠지... 친구들 없이도 치킨을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햇살 #벚꽃 #헌내기

인스타 스타 지망생인 산하는 피씨방 가는 길의 감성도 놓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눈에 띄게 훤칠하다는 걸 아니 캠퍼스 안에서 있을까 말까 한 존재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 여럿 울리는 산하의 미소 안엔 피씨방에서 먹을 치킨마요 덮밥과 라면 한 그릇 생각이 가득하다. 친구들이 수업 끝나고 오기 전까지 솔로 몇 판하고 랜쿼드를 돌리기로 했다. 연강 전공 수업을 쿨하게 드랍하고 꿀 교양 하나 들으러 떨래 떨래 학교에 오는 산하가 뭣 하러 학교에 다니나 싶지만 학교 앞 피씨방 매점 음식 맛이 그렇게 좋다고학식도 아니고 학교 앞 피씨방에 식사하러 오는 게 주 목적이었다. 무튼 그렇게 해서 친구들과 시간 공백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치킨 두세 마리쯤 먹을 때 되면 친구들과 게임을 할 수 있었다.

랜쿼드 첫 게임 중 팀원 하나가 계속 속을 긁는데 한 마디도 안 지고 대꾸하는 게 안 봐도 고딩이었다. 참다못한 산하가 으름장을 놓는데 스스로도 어이없고 유치해서 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 꼰대 너 지금 어디야.”

피씨방이지 뭘 물어.”

너 어디 피씨방. 내가 너 찾아간다.”

역삼 케이 피씨방.

몇 번.”

“0321.”

재수 없게 하필 내 생일이야.’

? 나도 너 재수 없어.”

 

들었는지 어쨌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0321번으로 성큼성큼 나섰다.

 

야 고딩.”

아 씹 놀래라. 아저씨 내 스토커야?”

 

앳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심정으로 툭툭 쳐서 불러냈더니. 웬걸 치킨 먹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산하가 그토록 찾고, 원하던 바로 그 트윙크 보이가 앉아있는 것 아닌가. 그래도 미자는 안 된다며 마컨 하면서 학교로 돌려보내려 했다.

 

에효내가 너 학생이라 봐줬다. 얼른 학교 들가라. 그리고 학생이 학생답게 교복 입고

누구보고 꼰대래. 그리고 어른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와 진짜 상또라이네....’

스물하나?”

그건 어떻게 알았대?”

니 팔뚝에 대문짝만하게 19라 써 있길래.”

. 그러는 어른은 연세가 어떻게 되시길래.”

“... 스물 둘.”

?”

 

-

 

내가 왜 여기에

 

친구들에게 팀플하러 간다는 구라까지 치며 민혁과 밥 먹으러 온 산하는 아무래도 뭔가에 홀린 것 같다 생각했다. 둘은 밥집에 오는 동안 벌써 통성명까지 마쳤다. 민혁은 근처에서 혼자 사는 역삼대 학생이라 했고 심심하면 놀러오라 초면에 초대까지 했더랬다. 아무래도 첫눈에 반한 것만 같은 산하는 그런 말을 서슴지 않게 하는 민혁 덕에 그렇고 그런 생각의 끝까지 갔다 왔다.

민혁은 자신이 좋아하는 밥집이 있다며 산하를 이끌었고 민혁과 왠지 모르게 잘 어울리는 파스타 집에 들어왔다. 산하는 학교 다니면서 처음 와보는 식당이었는데 그럴 만도 한 것 같았다. 남자 둘이 파스타라니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라니. 괜히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밥은 먹었어? 밥 먹자고 해놓고 이걸 이제 묻네.”

.. 아뇨...”

 

무언가에 홀린 듯 민혁이라는 저 사람과 함께 있으려 거짓말을 술술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 형 아니 저 꼰대한테 말린 것만 같았다. 한 살 밖에 차이 안 나면서 무슨 열 살은 차이 나는 것 마냥 어른처럼 구는 게 조금 귀엽기도 했다.

 

무슨 과 다니세요?”

 

고심해서 꺼낸 한 마디가 저거라니. 속으로 열 번은 대가리를 박았다.

 

역사. 말 놔도 되는데. 아까는 뭐 한 대 칠 기세더니만.”

, 그건 그럴 만 했지요.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렇담 그건 미안. 목소리가 좋길래 얼굴을 좀 보고 싶어서. 불러낸 거라고 생각해.”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그렇다고 진짜 현피를 떠요?”

생각한 것보다 더 잘생겨서 놀랐어.”

참나.”

 

웃지 않으려 해도 올라가는 광대를 어찌 막으랴.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수 없었다. 계속 플러팅 아닌 플러팅 멘트를 날리는 저 형아가 진짜 나랑 같은 생각인가 긴가민가했다.

 

나 먼저 시킨다?”

.”

로제 파스타에 이거 한 잔 주세요. ?”

저도 같은 거로 주세요.”

내가 뭐 시킨 줄 알고.”

사람 먹는 거 시켰겠죠.”

큭큭, 맞아.”

왜 웃어요?”

맞는 말 하길래. 웃겨서.”

 

참 알다가도 모르겠는 형이라고 생각했다.

 

끝나고 뭐해?”

 

솔직히 끝나고 뭘 해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한지 한참 돼서 진짜 뭘 해야 하는지 금방 생각나지 않았다. 어려운 질문이 될 줄이야. 학교, 피씨방, 집의 단조로운 반복이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구나 싶었다. 딱 한 달 밖에 안됐는데도 말이다.

 

집에 가야죠.”

재미없네, 그건.”

형은 뭐 할 건데요.”

그러게.”

뭐야. 재미없어.”

 

길어진 정적을 깬 건 웨이터의 인기척이었다. 음식을 준비해주겠다는 말이 반가운 건 처음이지 싶었다. 미팅 나가서도 원래 이렇게 어색해한 적 없는데.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는 게 원래 이런 건가.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 잠만요.”

“?”

저 사진 좀.”

안 그렇게 생겨서 별걸 다 하네.”

아까 들어와서 찍어달라 할걸. 여기 분위기 좋은데.”

 

민혁은 말하면서 여러 각도로 핸드폰을 들이밀며 이것저것 찍는 산하가 퍽이나 귀여웠다.

 

형 뭐해요. 빨리 먹어여.”

, 그래. 맛나게 먹어라.”

 

제가 찍은 거 볼래요?”

갑자기?”

저 인스타 하거든요. 팔로우 해주세요. 이럴 때 팔로우 수 늘려야죠.”

뭐 인스타 스타 머시기라도 되나? 한번 보자.”

지망생이라고 해두죠. 솔직히 이 팔로워 수가 말이 안 됨.”

많은데? 근데 나 인스타 없어.”

 

의외에 의외를 달리는 민혁의 발언에 당황한 산하는 아무 말이나 던졌다. 이렇게 생겨놓고 인스타를 안 하는 건 불법이라 생각했다. 여태 이런 얼굴을 혼자 거울로만 보고 있었다니. 인스타 했으면 이미 꼬셔서 만났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어도 친구 정도는 되었겠지.

 

? 형도 인스타 했으면 인기 많았을 것 같은데.”

그럼 네가 만들어 줘.”

밥 다 먹구여.”

이따 우리 집 갈래?”

오 갑분집. 그래여.”

 

이 시뻘건 레드 와인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생각할 여념이 없었다. 일플은 진짜 처음인데. 자만추 진짜 처음인데. 산하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민혁의 귀에도 들렸는지 먹는 내내 코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귀엽고 잘생기고 어린놈이 자기 한 번 어떻게 해보겠다고 머리 쓰는 걸 보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그냥 산하가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

 

형 혼자 여기 산다구요?”

.”

와 형 진짜 수상한 거 알죠.”

근데 왜 따라왔어.”

“...하핫.”

라면 먹, 이건 너무 고리타분한가. 차 마실래?”

저 원나잇은 안해요.”

그럼 책임지던가.”

 

형은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다. 사람한테 한 번도 말려본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형은 정말 어쩔 수 없게 만든다. 계속 나를 다 안다는 듯이 군다. 그런 모습이 너무 얄미운데 또 나를 이렇게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나 싶어서 자꾸 마음이 간다. 근데 이렇게 만나는 사람은 정말 처음인데. 이러다 잠깐 잠든 사이에 장기 팔리러 나가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말 몇 마디로 전에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만드는 형은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너는 좀 아깝긴 하다.”

 

-

 

민혁에게도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구백 년 넘게 살았으면 이제 사는 게 좀 지겨워질 법도 한데 뭔 놈의 세상에 신문물이 끊이지 않는지. 예전에 그 피씨방이 아니라길래 오늘은 벼르고 벼르던 곳에 가보기로 했다. 원체 꼼꼼하고 계획적으로 산 탓에 그냥 피씨방도 아니고 물이 좋은 피씨방을 탐색해서 고르고 골라 드디어 오늘 가는 날이었다. 피씨방 꿀팁 이런 것도 조금 공부하고 갔다. 절대 처음 가본다고 그런 거 아니고 실수할까 봐 그런 거였다. 집이 좋은데, 뭣 하러 그런 데를, 굳이, 갈 이유가 있었겠는가.

 

걔 생일이... 여기 앉으면 되겠다. 왜 안켜지지? ? 꿀팁에서 아무도 충전 먼저 하라고 말해주지는 않았을까. 민혁은 그 자리에 앉아서 애꿎은 기계만 째려보고 있었다.

 

야 어디 앉을거임?”

삼이일. 아 맞다 나 정기권 다시 사야 함.”

오키 먼저 가 있음.”

 

삼이일. 자리를 뺏길 위험에 처한 민혁이 다급해졌다.

 

안돼액!”

아 씨 뭐예요.”

삼백이십일 번 내 자리야.”

뭔 소리야.”

내 자리라고. 근데 컴퓨터가 안 켜져 그러니까 딴 데 가.”

되게 불친절하게 친절하신 분이네.”

 

민혁의 간절한 눈빛이 통했는지 원래 자리 주인처럼 행세했던 사람이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근데... 저 컴퓨터에서 해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던 민혁에게 구세주 같은, 한 줄기의 빛, 사장님이 나타났다.

 

? 저기 안 돼요? 충전은 해보셨어요?”

충전이요?”

예 충전하고 자리 선택을 하셔야죠. 젊은 분이 문물에 좀 약하시네.”

집에 컴퓨터가 있어서 이런 데 올 일이 없었습니다.”

아 예. 여기서 하심 됩니다. 키오스크 쓸 줄은 아시죠?”

지금 젊은 사람 무시하는 겁니까?”

아니, 피씨방 처음 온다는 남학생은 처음 봐가지고 신기해서.”

아무튼 감사합니다.”

아 예.”

 

민혁이 제대로 표현은 안 했지만 사장님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덕분에 걔를 더 약을 올리면서 게임을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사장님 땡큐. 젊은 사람 그 말도 땡큐.

목요일, 두 시, . 짤랑대는 방울 소리와 함께 등장한 멀대같은 아이. 산하가 피씨방 안으로 들어왔다. 민혁을 지나쳐서 익숙한 자리에 앉았다. 정갈한 가방, 쫙 빼입은 슬랙스, 기본 티에 청재킷만으로 돋보이는 산하의 얼굴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 달 전 친구가 완전 민혁의 취향이라며 보여준 셀카 몇 장에 흥미가 생겼고 산하 얼굴 하나 때문에 처음으로 혼자서 SNS 계정도 파보았더랬다.

근데 네가 한 번 잡아먹고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 얼굴 인재이지 않으냐. 심지어 어려. 엄청 어려.”

너도 나한테는 한참 어려.”

, 그러네.”

만나면 나도 보여줘. 실물 궁금하네.”

내걸 너한테 왜 보여주니.”

걔도 참 딱하다. 잘생긴 게 죄네.”

 

산하의 학교를 알아내고 동선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자만추처럼 보일까 그게 걱정이었지. 그렇게 생각해낸 게 게임이었고 친구에게 하나하나 배워가며 게임 아이디를 만들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진짜 무슨 스토커 같다. 근데 요즘 싱싱한 애들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이어야지. 사람, 아니 사람이 되고 싶은 여우가 좀 많이 간절해서.

 

산하가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일이 만약 다 꾸며진 일이라는 것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저 원나잇은 안해요.’ 출생연도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민혁이 보기엔 얼마나 귀여운 발언이었을까. 저 옆에 누워있는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꿈나라 여행 중인 저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민혁은 산하의 얼굴을 몇 번 쓰다듬고 방을 나섰다.

 

 

 

 

 

 

 

to be continued...

미녀와 야수 / 유니 (미녀와 야수)

네번째2020. 4. 10. 21:49

 

Beauty and the Beast

이상한 나라의 토끼 / 익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네번째2020. 4. 10. 20:47

콩쥐팥쥐전 / 햄보끄 (콩쥐팥쥐전)

네번째2020. 4. 10. 20:46

콩쥐는 죽었다. 팥쥐는 죽.

 

 

 

 

 

 

 

 

 

콩쥐의 어머니가 죽자 계모가 자신이 낳은 딸 팥쥐를 데리고 콩쥐의 집으로 들어온다.

,

신발을 발견한 원님이 콩쥐에게 돌려주면서 결국 콩쥐와 혼인한다. 그러자 질투가 난 팥쥐가 콩쥐를 유인하여···

 

 

 

-혁아

어 아저씨 안녕하세요!”

-니 웬일로 일찍 일어났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오 책 좀 읽었나보제

모기에 물렸습니다.”

-그랬구나. 그랬어. 아버지는?

아빠 아직 주무셔용

-이따 점심 먹고 아저씨 집으로 와달라캐라

넹 들어가세용

 

 

 

 

아침 댓바람부터 철봉에 매달려 있는 이 남자의 이름은 박민혁. 아직 이른 봄이지만 아침바람 따위 두렵지 않은 낭랑 19.

아추추 들어가야겠다.”

 

 

..여튼 열아홉이다. 코가 빨개져서는 훌쩍 거리고 나서야 슬리퍼를 찍찍 끌며 집으로 올라갔다. 꽁꽁 얼어 감각도 없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누르고 잽싸게 들어가자 느껴지는... 스팸냄새.

 

 

 

 

아빠!”

-어디 갔다 오냐

놀이터요

-오늘 아침 기온이 마이너스란다 마이나스!

아빠 아들 열아홉이다~”

-가시나야 수저나 논나

그놈의 가시나 가시나... 내가 진짜...”

-우리 딸내미 많이 먹어라

아빠 좀!”

-ㅋㅋㅋ

으이그 또또 스팸 또또 후라이 좀 건강하게 좀 무라고

-또 시작이나 니는 애기가 입맛이 왜 그러냐

아빠는 아저씨가 입맛이 왜 이라는데

-쪼끄만 게 뽀시락 대기는

 

 

 

 

 

결국 굳이굳이 김치찌개를 끓여온 민혁이 두부를 볼에 한가득 욱여넣고서는 입을 오물댔다.

 

 

 

 

아 맞다

-

아까 재원 아저씨가 점심 먹고 오라 하던데여

-재원이? 알았다.

-아빠한테 응이 뭐고

-쪼끄만 게

아빠 아들이거든

-쪼끄만 게

 

 

 

 

그릇을 싹싹 비우고 소파에 흘러내려 있었는데 배도 부르겠다, 해도 떴겠다. 눈이 슬슬 감기고 금세 바닥으로 굴러가서는 또 새근새근 잘만 잔다.

 

벨소리에 놀라 눈을 뜬 민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두시. 아빠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아씨 아빠 좀 깨워주지...

.

.

.

-혁아 아빠 간다

... 어디여..”

-재원이

웅 아라써,,,”

-빨리 인나라

...”

.

.

.

민혁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렸을 뿐 아빠는 분명 깨웠다. 학교도 안다니겠다, 동네에 친구도 없겠다. 민혁은 해가 떠있는 따뜻한 시간에 놀이터로 가서 고양이를 쓰다듬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근데 벌써 두시라니. 고양이랑 놀 시간을 두 시간이나 버렸다. 집업 하나 걸치고 또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니 아침과는 정반대로 덥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날이 좋았다. 놀이터 구석의 작은 단상위로 자연스럽게 올라가 주머니 안에서 굴러다니는 아몬드 일곱 개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가만히 앉아있으니 고양이 한 마리가 무릎위로 올라와 앉았다. 그동안 참치를 갖다 바친 성과였다. 뿌듯해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다른 열아홉들이 민혁을 보면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이게 하루의 전부였다. 아침엔 일어나서 밥 먹고 TV보고 낮엔 밥 먹고 나와서 고양이 보고 저녁엔 밥 먹고 자고. 고양이들이 너무 예쁜 탓도 한 몫을 했고, 고양이 핑계를 대고 산하를 기다리기도 했다.

 

 

 

 

 

 

작년 가을 오후 세시. 민혁은 평소보다 뜨거운 날씨에 맨투맨을 입고 나온 걸 후회하며 단상에 대자로 누워 고양이들에게 밟히고 있었다.

 

 

 

 

저기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동그란 까만색.

 

 

 

 

깜짝이야

그 고양이

누구세요

안아 봐도 돼?”

... ... 아니 근데 누구세요?”

 

 

 

 

하복입고 삼선에 갈머까지 세트로... 이야 이 새끼 가관이네 하고 얼굴을 보고 눈이 멀었습니다. 절대 잘생겨서 눈이 먼 게 아니라요, 해가 밝아서 눈이 멀었다고요. 아시겠어요? 절대 해가 밝아서가 아니라 쟤가 잘생겨서요. ...?

 

 

 

 

이름이 뭐야?”

박민혁이요.”

민혁이?”

네 근데 누구시냐고요

민혁이 쓰다듬어 봐도 돼?”

? 아뇨 그건 좀

.. 그래...”

...”

한번만...”

.. ...

“(쓰담쓰담)”

... 걔 말고 제가 민혁이거덜랑요

 

 

 

 

싸늘하다. 가슴에 비숑이 날아와 꽂힌다.

 

 

 

 

이름이 민혁이야?”

.”

이름 예쁘다.”

... ...”

나는 산하야. 윤산하.”

... ..~”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

...

“?”

?”

“”

 

 

 

 

싸늘하다

 

 

 

 

세살이요

?”

?”

너 세 살..?”

아니 고양이가..”

..”

“”

 

 

 

비숑비숑

 

 

 

저는 열아홉 살인데요...”

열아홉 살?ㅋㅋㅋ

네 몇 살이신데요.?”

형 오늘 날씨 진짜 덥죠

?”

 

 

 

 

그게 둘의 첫 만남이었고.

눈이 쌓여 눈 위를 아장아장 걷고 있을 때

 

 

 

 

 

 

 

 

동복에 후리스. 그리고 여전히 검정삼선. 머리는 눈 마냥 하얘져서는 온 산하였다.

 

 

 

 

? 산하! 또 왔네? 여기 사나

아뇨

뭐야

보고 싶었어요.”

코나 닦아라

 

 

 

 

이게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

 

 

 

 

 

 

 

 

오늘은 그냥 티 한 장에 슬랙스. 그래도 여전한 검정 삼선. 머리는 아직 하얗네.

 

 

 

 

왔나

보고 싶었어요.”

신발 끈 풀렸다.”

묶어조

넌 뭐부터 배울래.”

ㅋㅋㅋㅋㅋ아 왜용

너는 학교 안다니냐?”

그러는 형은요

난 안다녀

?”

안다니냐고

다녀요.”

지금 두신데? 목요일인데? 왜 여기 있냐?”

오늘 개교기념일이라 학교 안 갔어요.”

전에는

전에? 아 그 땐 아파서 조퇴

지랄하넹..”

진짠데..”

야 김밥 좀 사와라

이제 하다하다 삥도 뜯는 거예요?”

배고파 점심도 못먹었따고

알았어요. 기다려봐

진짜 갈라고?”

사달라면서요--”

웅 갔다왕

말리진 않네..”

뭣하러

그래요...”

ㅋㅋㅋ아냐 안 먹어도 돼

내가 먹고 싶어서 그래요 급식 안 먹고 나왔어

개교기념일이라며

갔다 올게요.”

양아치새끼...”

 

 

 

 

아파트 단지에서 내려와 민혁의 시야에서 벗어난 산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혀나아 어디야?”

-저 학교

형 김밥 두 줄만 사다주라

-.? 아니.. 어딘데요?

몰랑

-?

ㅋㅋㅋ여기 거기야 어디지 너 전 여친 알바 하는 데.”

-씨유요?

어 거기 옆 아파트.”

-언제 또 거기까지 갔어요..

아아아 형 배고파아아아 얼른와아아앙

-과학인데..

동혀이 가오 다죽었눙..”

-ㅋㅋㅋ가요

 

 

 

 

전화를 끊은 산하는 벽에 기대어 놀이터를 바라봤다. 얌전히 앉아서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찰랑거리는 동그란 뒷통수가... 진짜 귀엽다.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저 형은 뭔데 저렇게 귀여워? 짜증나네? 아 진짜? 귀엽네?!?

한참을 앓다가 갑자기 산하는 미친 듯이 제자리에서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에서 저를 부르며 달려오는 노란 머리가 보였다.

 

 

 

 

-!

좀 빨리 오지

-학교에서 여기까지 그냥 걸어와도 12분인데 저 지금 10분만에 왔거든요

ㅋㅋㅋ알았어 이제 가

-근데 왜 두 개나 사요?

알아서 모하겡~ 가 얼릉

-알았어요 갈게요... 형 혹시 여친 생겼어요?

그런 거 안 만들어ㅋㅋ 안가냐?”

-ㅋㅋ아 알았어요... 근데 땀은 왜 흘려요?

싸울래?”

-갈게요!

 

 

 

 

산하 손 한번 흔들어주고는 강아지마냥 순해져서는 다시 민혁한테 달려갔지. 아무것도 모르는 민혁 땀 흘리는 산하보고 눈 동그래져서 벌떡 일어나

 

 

 

 

야 천천히 갔다 와도 되는데

배고프다면서요. 아니 여긴 김밥천국도 없어요?”

나가면 바로 고봉민 있는데...”

“...말을 해주지

그걸 못 본 니가 병신...”

“...먹어요

ㅎㅎ

 

 

 

 

동현이 보면 고소각인 연기 완벽하게 해내고 숨 돌리면서 고양이 쓰다듬고 있는데 손 위로 날아온 초록색 막대기? 엥 하며 민혁 바라보니 ㅎㅎ... 거리고 있다. 아니 이게 왜 거기까지 가지..? 하면서 산하 손 위에서 오이(a.k.a. 초록색 막대기) 건져낸다.

 

 

 

 

형 오이 안 먹어요?”

응 맛없어

나이가 몇 갠데 편식을 해요

오이 좋아하냐? 와 그런 앤 줄 몰랐는데. 실망이다.”

“...?”

ㅋㅌㅋㅋㅋ니도 먹어

알았어요

?”

너 집 나왔지

 

 

 

 

숨이 턱 막혀 사례가 들렸다. 갑자기? 맞는 말이긴 한데, 형은 맨날 세상 순한 얼굴로 콕콕 찌르더라.

 

 

 

 

에이 뭔..~ 나 엄마 없음 못살아요.”

아닌데... 냄새 나는데...”

형 가출했어요?”

뭐래 집 나가면 개고생 모르냐 집이 얼마나 따뜻하고 좋은데

형은 엄마랑 사이 좋나보네 부럽다

없어

?”

없어 엄마

 

 

 

 

아빠 없다는 얘기. 한 번도 입술을 깨물지 않고 말한 적이 없는데. 형은 엄마가 없다는 얘기도 무슨 잘 지냈냐고 물어보듯 아무렇지 않게 했다.

 

 

 

 

어 미안해요

괜찮아 엄마 기억도 없어 나 태어나고 두 달도 안돼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대.”

그럼 아빠랑 둘이서만...?”

응 둘이서만

..

ㅋㅋㅋ꼴에 눈치는 보이나 보다? 재혼은 안하셨어. 엄마한테 미안해서 그러나 했더니 아니라하고,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나 해도 아니라하고, 그럼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했더니 그건 또 안된다하대. 뭐 해도 나 스무 살은 꼭 넘기고 결혼하겠단다.”

그렇구나.. 그래도 좀 부럽다

여기서 뭐 부러울 대사가 있었나?ㅋㅋㅋ

“...난 아빠가 없어요.”

그래서

?”

그래서 어쩌라고 위로라도 해주리? 내 처지에,ㅋㅋ

 

 

 

 

형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를 꺼냈는데, 형은 당황하지도 않는다. 왜 이 형 앞에만 있으면 혼미해지는 지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그건 다 니 잘못이야

“?”

아버지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니가 문제라고.”

“”

애초에 생각이 그따구인데 어떻게 엄마랑 잘 살겠냐고

 

 

 

 

담임이 저 말 할 땐 들리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지. 형한테 들으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게 다 잘못된 것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산하야 말리지 말자. 저 형도 나한테 별 도움이 안되겠구나.

 

산하는 모든 일을 합리화 시키는 습관이 있다. 자기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게끔. 조금 다른 감정을 느끼긴 했지만 민혁에게도 다를 것 없이 민혁이 한 말을 모두 자기 합리화 시켰다. 형은 내 편이 아니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형이 잘못된 거야. 형은 못된 사람이야.

 

 

 

 

형은 내 편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또 철없는 소리한다 초딩이

진짜 쪼끄만 게

안 작거든!”

 

 

 

 

대화를 마무리 짓고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대충 얼버무리고 가려고 했는데 안 작다고 발끈하는 꼴을 보니 와중에 귀엽다는 생각에 또 피식 웃었다. 민혁이 싫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자각을 했음에도 웃는 자신을 보고 속으로

윤산하 미쳤다. 나 미쳤다 어떡하냐 진짜. 박민혁 미친놈

 

민혁을 욕하면서도 산하의 눈에선 꿀이 떨어졌다. 미친놈이다 미친놈.

 

 

시간은 벌써 세시가 지났고 산하와 민혁은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며 돌아섰다. 형 들어가는 거 보고 가겠다는 산하 굳이 버스까지 타는 꼴을 보고서야 민혁은 집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생각해봤는데 아침부터 영 찝찝했다. 재원아저씨가 아빠를 부른 게. 두 분이 원래 자주 얘기를 나누긴 하지만 그냥 뭔가 오늘은 영 감이 안 좋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찝찝해서 12층인 집이 아닌 8층에서 열림 버튼을 눌렀다. 아저씨집인 806호에 귀를 바짝 대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 그래봤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겠냐며 다시 엘베에 탄 민혁은 가볍게 집으로 갔다. 세시쯤이면 아빠가 집에 있어야 하는데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가벼워졌었던 가슴이 순식간에 다시 쿵 하고 무거워졌다. 왜 하필 지금 없는 건지 일단 아빠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방문을 열려던 순간,

 

 

손을 먼저 씻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당.

 

물기를 대충 옷에 닦고 다시 방에 들어가려던 민혁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얼었다. 방안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아저씨랑 같이 있었구나. 평소였으면 들어가서 인사하고 자연스럽게 물도 떠다드렸겠지만 오늘은 뭔가 불안해서, 별건 아니겠지만 잠깐 멈췄다. 너무 탐정놀이인가.

 

 

 

 

-그래도 아직 애한테도 좀 미안하고

-누구 혁이?

 

 

 

 

아저씨의 입에서 민혁의 이름이 나오고 민혁은 살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열아홉밖에 안됐는데 아직은 안 되지

-벌써 열아홉이네. 늦었어 지금이라도 알려줘야지

-그런가, 늦었나.?

-니 말대로 내년에 스무 살 돼서 아한테 알리면. 스물 평생을 살면서 엄마가 지 낳느라 죽은지도 모르고 니만 믿었는데, 잘 키운 아들 나쁜 거 배워오면 어쩌려고. 스물이면 고삐 풀려서 뵈는 것도 없다.

-...난 모르겠다. 머리 아프다.

 

 

 

 

엄마가 지 낳느라 죽은 지도 모르고.

그랬구나. 우리 엄마는 나를 낳느라 돌아가신 거구나. 딱히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드는 생각이라 해도 왜 별 생각이 없지? 그 정도였다.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빠가 나왔다. 그리고 아저씨도 나왔다.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는 내 눈을 피했다. 아저씨가 나를 안으며 말했다.

 

 

 

 

-니 왜 우나 다 들었나, 괜찮다. 괜찮다 혁아.

 

 

 

 

사실 민혁은 엄마가 저로 인해 죽었단 얘기를 듣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너무 놀란 탓이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단 사실조차 자각 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놀란 바람에. 엄마가 나 때문에 죽었구나 라는 죄책감보단 엄마가 죽었다. 라는 말을 듣고 슬퍼하는 자신에게 놀라서였다. 지금껏 엄마라는 말에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없어요. 라고 대답하던 민혁이었기에

 

엄마 없이 자란 애란 말을 들어도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사실 느끼지 못했던 게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비워진 엄마의 자리라 놓아버린 거였는데. 민혁도 궁금했다. 나는 왜 엄마를 원하지 않는 거지? 한참을 돌고 돌아도 그에 대한 답은 항상 이거였다. 나는 엄마가 필요 없구나. 그도 그럴 것이 엄마 없이도 너무나 잘 살아왔으니까, 부러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줄로만 알았다. 6학년 겨울방학이었다. 방학식을 끝내고 교과서, 실내화, 한 달 치 우유와 학교에서 썼던 여러 물건들. 책가방 한 개론 턱도 없는 짐들이었다. 아빠 오늘 야간근무다. 오늘 아침에 소금김만 대충 접시에 담아 식탁에 내려둔 아빠는 야간근무라는 말만 남기고 구두를 탁탁대며 집을 나섰다. 민혁은 친구들과 손 인사를 하며 책가방과 학교에서 빌린 종이백들을 들고 교문을 나섰다.

 

 

 

 

-야 안 무겁냐? 아빠 안 오셔?

-저 새끼 애미 없잖아ㅋㅋㅋ얼른 와 병신아

-..

 

 

 

 

무서울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6년간 봐온 친구들. 나름 적당한 관계를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걔네한텐 불쌍한 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듯 했다. 그리고 중학교 입학식을 한 날을 기점으로 민혁은 더 이상 학교라는 곳을 가지 않게 되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민혁은 펑펑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 못가겠다고. 저긴 지옥이라고. 차라리 죽어서 천국을 가겠다고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서지도 못하고 눈은 부어서 뜨지도 못한 채로 아빠한테 빌었다. 그렇게 민혁은 자퇴를 했고 그동안 받지 못했던 아빠의 관심이 쏟아졌다. 자퇴를 하고 한동안은 사람을 못 만났다. 그냥 아빠랑 단 둘이 집에 있는 게 좋기도 했고 그러다 아빠와 마트에 갔다 오는 길에 우연히 길고양이를 발견했다. 그 후로 쭉 놀이터에서 고양이를 키우다시피 했고 그 해 한여름. 밤에 집에 있자니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아서 2시에 아빠 몰래 밖으로 나와서 단상에 앉아있었다. 골목에서 학생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저런 애들한테 내가 고개 숙일 필요가 없었구나. 그 후로 종종 새벽에 나오고 골목에서 오가는 이런 저런 말들에 저절로 독해진 것 같다.

 

 

아저씨에게 안겨 울다가 정신이 드는 순간, 아저씨의 어깨 너머로 아빠와 눈을 마주쳤다. 아빠가 눈을 피했다. 그동안 굳게 믿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내 눈을 피했다. 그동안 가장 듬직했던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저씨의 품에서 빠져나와 집을 나갔다. 집에 있으면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아서. 민혁아. 기다려봐. 아빠가 어깨를 잡아 나를 세웠고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가 밉지 않았다. 싫지도 않았다. 왜 그랬는지도 잘 알고 있지만 이성을 놓아버렸다. 아빠 지금까지 나한테 거짓말 한 거예요? 그렇게 당당한 얼굴로? 내 말을 들은 아빠는 초점 잃은 눈으로 나를 주시했고 손에 점점 힘이 빠지더니 팔을 축 늘였다. 이번엔 내가 먼저 눈을 피했다. 아빠를 뒤로한 채로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1층에서 올라오고 있다. 씨발 진짜 되는 일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계단으로 미친 듯 달려 내려갔다. 아빠가 오길 바라면서도 잡히지 않길 원하면서. 아파트를 빠져나오자 옷 속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에 긴장을 해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그렇지만 놀이터까지 또 달렸다. 사냥꾼에게 쫒기는 사슴처럼 긴장을 하고 있었다. 단상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다리에 힘이 다 풀려 앉아 있기도 힘들어 힘없이 쓰러졌다. 막상 나오니 더 숨이 막히는 듯 했다. 정신을 차리고 숨을 쉬어 보려 해도 심장이 자꾸 뛰어 조절이 안됐다. 결국 다시 허리를 세웠다. 쓰러지면 숨이 안 쉬어지는데, 일어나면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숨이 가쁜 와중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형 피나요 하지 마

 

 

 

 

뒤에서 들리는 말이었다.

 

 

 

 

?”

입술 깨물지 말라고요.”

 

 

 

 

민혁이 고개를 돌리니 산하가 서있었다. 오전과 똑같은 차림으로. 산하를 보자마자 민혁은 참았던 눈물이 결국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멀찌감치 서있던 산하가 머리를 긁더니 조심스레 다가와 살짝 안고서는 민혁을 토닥여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숨 쉬어요

엄마, 산하야, , 엄마 내가, ,”

응 엄마가, 천천히 얘기해요. 괜찮아. 진정하자

 

 

 

 

연신 괜찮다며 토닥여주는 산하에 민혁은 진정이 되어 어느새 꽉 안은 산하의 허리를 놓아주고서는 큼큼 댔다.

 

 

 

 

이제 괜찮아요?”

“..

 

 

 

 

동생 앞에서 너무 철없이 군 것 같아 조금 후회됐다. 쟤는 뭘 안다고 토닥여 주고 있어...

 

 

 

 

왜 이러고 있어요, 해도 다 졌는데

 

 

 

 

민혁은 숨을 몇 번 가다듬고 산하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아빠가 미운 것도 아니고 왜 그랬는지도 다 이해 되는데 그냥 답답해서...”

그랬구나.. 놀랐겠다. 괜찮아요 그럴만했어. 잘못한 거 아니네 뭐

그치..? 근데 아빠두 놀라가지고..”

형 걱정이나 해요. 눈 팅팅 부어가지곤

왜 뭐... 근데 왜 아직두 여기 있냐

? 이제 곧 가려고 했어요.”

너 옷에서 담배 냄새 나..”

골목에 있다 와서 그런가 봐요ㅋㅋ

골목에 있었어?”

 

 

 

 

그냥 순수한 의도로 물은 것 같은데 젖은 얼굴로 올려다보니 괜히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말을 돌렸다.

 

 

 

 

뭐 형사에요?ㅋㅋㅋ 그냥 있었어요. 내가 그런 거 할 애 같아요?”

충분히...”

쪼그만 게

주글래 쪼매나

 

 

 

 

훌쩍대는 와중에도 할 말은 하는 형이 오늘도 오지게 귀여웠다. 저거 어떡해. 확 들고 튀어버려.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민혁이 먼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 안되겠다. 먼저 간다.”

갑자기요?”

아빠 걱정되잖아.. 나 진짜 나쁘게 쳐다봤는데...”

별 게 다 걱정이다... 알았어요 가 봐요

또 보자 언능 들어가고

 

 

 

 

민혁이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까지 확인을 하고서야 산하는 뒤를 돌아 땅에 떨어진 담뱃불을 밟아 껐다. 골목에서 한 대 피우고 있었는데 형 소리가 나서 그대로 달려왔다. 냄새 날까 봐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는데 너무 서럽게 우는 거야. 그래서 대충 담배 던지고 안아줬지.

 

 

민혁은 집에 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아빠에게 얘기를 들었다. 사실 아빠도 지금 재혼 계획이 있고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결혼을 하려면 너한테 엄마 얘기를 정말 솔직하게 해야 할 것 같고 지금은 네가 너무 어려서 상처받고 아빠를 미워할까 봐. 그래서 성인이 되고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생각이 컸을 때 말해주려 했다고. 충분히 이해됐다. 어쩌면 더 편안했다. 이제 아빠도 내가 아닌 다른 동반자가 생겼다니까 더 안정됐다.

 

 

솔직하게 다 털어놓은 아빠는 그날 이후로 눈치도 보지 않고 자주 나가 그 분을 만났다. 민혁은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뿌듯했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무거웠다. 산하가 그 날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자주 만나진 못했어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전화를 했던 산하인데 문자 한 번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을 하던 민혁은 습관 때문에 산하가 그 날 저의 얘기를 듣고 달라진 거라고 생각했다. 쟤도 똑같은 애였구나. 또 나를 무시하는구나. 잘 알지도 못하는 애한테 다 털어놓는 게 아니었는데, 나름 좋은 아이였다고 생각했던 산하였기에 민혁은 꽤 충격이 컸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간에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갔다. 어느새 아빠는 준비가 다 되어있었고 이제야 민혁에게 새어머니가 되실 분을 소개 시켜준다고 했다. 차에 타서 그 분의 집으로 가는 길에 민혁은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아빠에게 쉴 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옆 동네에 살고, 그 분도 사고로 남편을 잃으셨고, 민혁 또래의 아들이 한 명 있다고 했다. 민혁은 새어머니와 새 형제가 생긴다는 사실이 부끄럽거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가 더 컸고 그 쪽에서 자신을 싫어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멀리가지 않아 차를 세웠다. 평범한 아파트였다. 옆엔 바로 학교가 있었다. 산하도 여기에 다니려나.. 민혁은 밉긴 하지만 산하를 떠올렸다.

 

 

혹시 꿈인가, 차에서 내리니 아파트 입구에서 저에게 손을 흔드는 산하가 보였다. 산하와 마주치자마자 민혁은 쪼르르 달려가 장난스레 멱살을 잡으며 물었다.

 

 

 

 

너 여기 살아??”

왜 전화 안했어?”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잖아;;”

나 오늘 아빠 그 분 보러 왔어

ㅋㅋㅋ천천히 얘기해도 돼요. 나 여기 살고, 사정이 생겨서 전화는 못했고, 아무 일 없이 잘 살고 있었고, 그거 나도 들었어요.”

 

 

 

 

느릿하게 걸어오던 아빠가 민혁에게 물었다.

 

 

 

 

-친구니?

! 여기 산대 놀이터 자주 놀러와 고양이도 엄청 좋아한다?”

-그래? 앞으로 여기 자주 올건데.. 우리 민혁이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

아빠 가자!”

-그래, 가자

나도 같이 가요 심부름 갔다가 들어오는 길이에요

그래! 가자

 

 

 

 

방방 들뜬 민혁은 산하와 아빠의 손을 꼬옥 잡고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

 

 

 

 

아빠 몇 층이야?”

-5

너는?”

나도 5

오오 신기하네

 

 

 

 

셋은 그렇게 같이 5층으로 올라갔고 민혁은 아빠를 앞세워 걸었다. 계속 졸졸 따라오는 산하에 민혁은 가 봐도 된다고 했다. 우리 집 가는 거예요ㅋㅋㅋ 이쯤 되면 눈치 챌 법도 한데 민혁은 또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며 걸었다. 그렇게 가장 끝 집까지 가서야 아빠는 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아 떨린다.. 산하야 이따 보자!”

 

 

 

 

민혁은 집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산하가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풀어서 문을 열었다.

 

 

 

 

?”

왜요?”

너가 왜

우리 집,”

 

 

 

 

박민혁 인생 한번 스펙타클하네.

 

 

 

 

아빠 나 잠깐 밖에 좀

같이 가요

“..나와

 

 

 

 

흥분해서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방방 뛰며 따지는 민혁에게 산하는 하나하나 천천히 답변을 해주었다.

 

 

 

 

그니까 니가 내 동생이 될 거고, 알면서 안 알려줬다?”

?”

형은 왜 그렇게 흥분 했는데요 내가 싫어요?”

니가 싫은 게 아니라, 아니 오히려 좋아. 좋은 동생 생겨서 좋지 근데 좀 당황스럽잖아. 너는 왜 말 안 해줬는데. 넌 내가 싫어?”

네 싫어요

 

 

 

 

그렇게까지 걱정하던 일이이었는데, 결국 싫다는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이 때까지 잘 지내놓고서 내가 형인 건 싫어?”

“”

“”

“”

형을 좋아하는 것도 힘들어요. 근데 우리 형을 좋아하라고 하면 나는 좀 아플 것 같아. 형이 그냥 형이었으면 좋겠어. 우리 형 아니었으면 좋겠어.”

 

 

 

 

산하는 담담한 듯 고백을 했다. 사실 긴장했지만 꽉 쥔 손 따윈 민혁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민혁은 멍하니 땅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산하에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못들은 걸로 할게. 둘만 아는 거야.”

“...

 

 

 

 

다시 올라가는 엘베 안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5층 문이 열리고서야 산하가 한마디를 했다.

 

 

 

 

괜찮아요. 못들은 척 해요.”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 못들은 척을 하냐고. 서둘러 빠져나와 앞장 서 걸었다. 그래봤자 다리는 산하가 한 뼘 더 길었다. 산하가 비밀번호를 눌러주는 동안 민혁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괜찮다구요ㅋㅋ 긴장 풀어요.”

 

 

 

 

웃으며 말해주는 산하에 민혁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일은 수월하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결국 산하와 민혁은 형제가 되었다. 아직 산하에게 아빠, 민혁에게 엄마라는 말은 어색했지만 아저씨 이모로도 부모님들은 만족해했다. 산하도 민혁도 그 날의 고백은 잊은채로 사이좋게 지냈고 집도 합쳤겠다. 항상 집에 친구들을 불러오는 산하 덕에 민혁은 친구도 많이 생겼다. 그리고 오늘도 해가 떴다.

 

 

 

 

-산하야 밥 먹고 가

 

 

 

 

아직 자고 있는 가족들을 깨우지 않으려 조용히 학교에 가려던 산하는 어머니에게 붙잡혔다. 오랜만에 엄마와 단 둘이 나누는 얘기였는데 다시 짜증이 났다.

 

 

 

 

배 안고파요

 

 

 

 

산하가 대답을 해준 것만 해도 엄마는 기분이 좋았다. 말없이 사라져 말없이 일을 저지르던 전과 비교하면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래, 일찍 들어와. 요즘 일찍 들어오더라 좀 뿌듯해?ㅎㅎ

오늘 동현이네서 자

-아직도 걔랑 노니?

아 어쩌라고

 

 

 

 

결국 또 싸한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엄마를 뒤로한 채 엄마에게 들리지 않게끔 작게 욕을 지껄이고 산하는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산하가 문을 닫는 소리에 잠에서 깬 민혁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이모! 여덟시에요?”

-어 일어났니? 응 여덟신데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밥 먹어야 돼요.. ... 계란찜 어때요

-ㅋㅋㅋ좋지 앉아있어

에이 앉아계세요 제가 할게요

-그럴래? 고맙다

 

 

 

 

잘 키운 자식 하나, 남의 자식 안

부럽다. 진짜 부럽다. 아빠랑 단 둘이 살면서 어쩜 저렇게 바르게 컸을까.

 

 

산하는 집 밖으로 나와서는 인생 최대의 고민거리가 생겼다. 지금 골목을 들어가느냐 학교로 가느냐. 아침부터 담배냄새가 산하를 자극했다. 끊으려고 했는데 왜 하필 오늘 피고 있는지. 고민은 고민이고 답은 정해져 있었다.

 

 

 

 

형은 무슨 아침부터 이러고 있어

-? 산하 오랜만이다?

불 좀

-형 안녕하세요

어 오랜만

-니 학교 갈라고? 이야 내가 윤산하 교복 입는 꼴도 다 보고ㅋㅋ

-형 사람 됐잖아요.

-?뭔 소리야

언제는 사람 아니었냐.”

-아니었지..

김지훈 손절

-ㅋㅋ뭔데 뭔 일이 있었는데

울 엄마 결혼했잖아. 그 댁 아드님이 너무 순수한 바람에~”

-ㅋㅋ윤산하 개불쌍해

오늘 동현이집 갈 건데 같이 갈래 동현아?”

-?

-헐 나두 갈랭

-저 오늘 과외 있는데

아 공부 잘하는 놈;; 뭐야 나 오늘 엄마한테 니네 집에서 잔다 했는데

-죄송..

오늘은 또 뭐하냐...”

학교 가서 공부해야지

 

 

 

 

갑자기 나타나서는 세상 평온한 얼굴로 산하 입에 물려있는 담배를 뺏었다. 그것도 박민혁이.

 

 

 

 

형 그게,”

형도 가서 공부해요. 김동현 너도 임마

-민혁앙 보고 싶었어

아 형 제발;”

 

 

 

 

산하가 이런 짓 하는 거 민혁은 모르는데. 자연스러운 민혁에 벙쪄 있었다. 학교 가라며 골목에서 친구들을 내쫓은 민혁은 산하를 등지고 콜록거렸다. 아 맞다 형 담배냄새 싫어하는데, 급히 민혁의 손에서 담배를 뺏어 하수구 사이로 넣어버린 산하는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할까.

 

 

 

 

학교 가 이런 거 하지 말고. 그리고 쟤 집 가서 자고 오기만 해봐라 너

...

학교 네 시 반에 끝나는 거 다 아니까 35분 전에 들어와

아 그건

뭐 이모한테 일러바쳐?”

알았어요.”

 

 

 

 

민혁 덕에 8교시 끝나고 방과후까지 다 마친 산하는 PC방으로 저를 끌고 가는 친구들을 뿌리친 채로 집으로 향했다. 민혁에게 칭찬받을 생각을 하니 광대가 저절로 올라갔다. 또 놀이터에 있겠지? 귀여운 뒷통수를 상상하니 얼른 뛰어가 뽀뽀를 휘갈겨주고 싶었다. 거의 도착했을 때 형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무슨 쪼꼬미야 만날 작대 내 이래봐도 어?”

-귀엽다ㅠㅠ

말같지두 않아 진짜..”

 

 

 

 

까맣고 동그란 머리를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헤집어 놓았다. 지훈이 민혁을 쓰다듬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장 오진다고 자기 입으로 횟집 차릴 거라던 지훈이 그 땐 마냥 웃겼다. 근데 그 때랑은 다르지. 우리 형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형이기도 하니까

 

못들은 걸로 한다고 했을 때 웃으며 괜찮다고 했는데, 하나도 안 괜찮았다. 그 맑은 얼굴이 그렇게 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법적으로 가족이 된 그 날부터 산하는 민혁을 마음속에서 비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오늘은 형이 너무너무 예쁘니까 내일부터 비워야지 하다가 비워내기는커녕 결국 더 깊어졌다.

 

정말 좋아하는 민혁의 뒷통수인데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지훈이 저를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지자 민혁에겐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싸늘한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훈이 살풋 웃으며 고개를 살짝 꺾어보였다. 산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살살 다가갔다. 민혁이 뒤를 돌아 산하를 불렀다. 하필 왜 지금 부르냐고 형

 

 

 

 

윤산하! 너 왜 이제 와! 다섯시거든--”

 

 

 

 

차마 민혁에게 반박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을 꾸욱 감았다.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가관이네.

 

 

 

 

들어가자

-벌써 가게? 형 좀만 더 놀아주라

형두 집 들어가요 부모님 걱정하신다

-울 부모님 맞벌이라 늦게 들어오셔..

 

 

 

 

지랄났다. 산하는 지훈의 말을 조용히 듣다가 헛웃음을 치고는 민혁의 팔을 당겨 일으켰다.

 

 

 

 

그래도 들어가 봐야죠? 우리 부모님은 걱정하시는데

-ㅋㅋㅎ그래 내일 보자.

 

 

 

 

민혁의 어깨를 꽉 잡고 집으로 갔다. 이걸 확 진짜..

 

 

 

 

지훈이 형 부모님 맞벌이시구나..”

 

 

 

 

집으로 올라가는 와중에도 형은 김지훈 걱정뿐이었다. 맞벌이는 무슨 지가 지발로 집 나와놓고선 부모님이 뭐.. 진짜 좆같네 이걸 확 때려버려?

때리기엔 동그란 게 너무 쓰다듬어주고 싶게 생겼다. 결국 말 한마디 못 꺼내고 집에 도착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민혁은 점점 통화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밖에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학교 끝나고 집 앞에서 둘을 보는 일도 많아졌다. 고양이와 산하가 다였던 민혁의 하루가 이젠 다 지훈이라 생각하니 산하는 점점 초조해졌고 민혁과 지훈의 사이는 점점 위험해졌다.

 

오늘도 산하는 학교에 가기 전 골목에 들렀다. 매일매일 골목에 있는 애들은 비슷했다. 그리고 오늘은 지훈도 있었다.

 

 

 

 

어 형 오랜만이네요

-. 안녕ㅋㅋ

-지훈이형 또 횟집 개장했다면서요.

-ㅋㅋㅋ어 애기들 존나 귀엽다

 

 

 

 

지훈이 산하를 쳐다보며 말했다. 평소였다면 욕부터 내뱉고 주먹을 날렸을 산하인데, 민혁을 생각하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여튼 박민혁 사람 빡치게 하는데 다재다능하다 왜 이런 새끼랑 엮여서는. 피하는 게 답이라는 생각이 든 산하는 부들부들 손을 떨며 일어났다.

 

 

 

 

먼저 간다.”

-벌써 가려구? 윤산하 사람 다 됐네

ㅋㅋ요즘 사는 게 좀 좆같아서

-?

글쎄요

-ㅋㅋ가 봐

-왠지 오늘은 두시에 산하가 보고싶네~..ㅋㅋㅋ

 

 

 

 

애써 지훈을 뒤로 한 채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도 온통 민혁과 지훈 생각뿐이었다. 민혁에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존재인 게 너무 화가 나고 답답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민혁을 가지는 것과 그 사람에게 민혁이 받을 상처가 너무나 뻔히 보였다. 이래도 민혁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게 산하를 고통스럽게 했다.

요즘 산하의 하루는 골목 학교 골목 집 이었다.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 아픈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학교를 마치고 산하는 초점 없이 걸어 골목에 도착했다. 아침에 나오면 저녁까지 죽치고 있는 지훈인데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야 지훈이형은?”

-몰라요 새벽에 약속 있다고 준비해야 된다고 나가던데

 

 

 

 

저것도 혹시 민혁 얘기가 아닐까, 지금도 둘이 같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골목에 들어선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아파트 단지로 올라갔다. 설마 설마 했는데 민혁이 놀이터에 없었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 기분을 설명할만한 욕이 없었다. 이젠 모르겠다 하고 단상에 앉았다. 산하의 머릿속은 이미 갈 때까지 가버렸고 아무 생각도 대처도 떠오르지 않았다.

 

 

 

 

산하야

 

 

 

 

박민혁 씨발 장난하나

눈앞엔 자다 깨 부스스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민혁이 있었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뻔뻔하고 사악할 수가 있지 산하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형 요즘 뭐하고 ,”

 

 

 

 

민혁이 앉아있는 산하에게 그대로 다가가 폭 안겼다.

 

 

 

 

왜 안 왔어.. 걱정했잖아... 낮잠자고 일어났는데.. 다섯시 반이나 됐는데 왜 집에 없는데..”

 

 

 

 

웅얼웅얼 털어놓는 민혁에 산하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사람 하나가 뭐라고 자기가 이렇게까지 놀아나는지. 안타깝게도 민혁은 너무 예뻤다. 따지고 보면 잘못한 것 하나 없는 착하고 순수한 형일 뿐이다. 그렇게 또 산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같이 손을 잡고 집으로 가서 도라에몽을 보며 귤을 까먹었다. 이러니 산하가 아무 말도 못하지. 민혁은 도라에몽 하나 보는데 쉴 새 없이 밝게 웃었다. 민혁을 만나고 짜증나게 귀엽다는 말만 벌써 서른 번째다.

 

저녁을 먹고 산하는 오늘 하루 누구 덕에 좋지 않은 컨디션에 바로 잠에 들었다. 혹시 도망갈까 품에 민혁을 가두고서.

 

 

 

 

...”

?”

오늘 왜 지후니형 보러 안 갔어요...”

내가 뭐 만날 지훈이형이랑만 붙어 다녀야 되냐

맞잖아요.. 맨날 그 새끼랑만 있으면서...”

말 이쁘게 하랬지

치이...”

좀 놔줘 어디 안 도망가

도망갈 것 가튼데...”

ㅋㅋㅋ안 간다고

그럼 손은 잡고 자요...”

알았어

 

 

 

 

그렇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게 잘못이었다. 지금 박민혁은 그 때의 순수하기만 했던 박민혁이 아니다. 악몽을 꿔 잠에서 깼더니 민혁이 옆에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민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210분이었다.

 

 

 

-왠지 오늘은 두시에 산하가 보고싶네~..ㅋㅋㅋ

 

 

 

그래 다섯시에 일어났으면서 그 이른 시간에 순순히 같이 자주는 게 말이 되냐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에 머리를 박고 소리를 질렀다. 곧 죽을 사람처럼 베개를 꽉 쥔 손은 비현실적으로 하얘졌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겉옷도 입지 않은채로 반팔에 반바지 차림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엘리베이터는 쳐다도 보지 않고 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불안함에 아까부터 계속 물어뜯은 입술은 이미 터져 피가 송글송글 맺혔다. 놀이터에 민혁이 없었다. 산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놀이터에 없으면 민혁이 지훈과 있을 곳은 딱 한군데뿐인데.

 

맞았다. 골목으로 달려가니 그 곳엔 지훈과 민혁이 혀를 섞고 있었고 둘의 입술 사이로 흰 연기가 피어나왔다. 담배라 하면 질색하던 민혁은 어디가고 지훈의 목에 팔을 둘러대는 민혁의 꼴이 가관이었다. 더 볼 필요도 없었다. 산하는 무작정 걸어가 민혁의 손을 잡아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 지훈이 민혁의 반대쪽 손을 확 끌어당겨 셋은 멈춰 섰다.

 

 

 

 

-뭐하냐

내가 묻고 싶은데

-키스하잖아

씨발 그니까 왜

-뭐 잘못된 거 있냐? 너네 형이랑 내가 키스하는 게 뭐 잘못된 거 있냐 아님 뭐 좋아해?

-?

왜 몰랐어? 알았잖아 나 박민혁 좋아하는 거

산하야, 형이 다 설명해줄게 일단 가자

박민혁 가만히 있어. , 형은 이따 봐.”

 

 

 

 

산하는 한 번 더 민혁을 자기 쪽으로 당겨 뒤에 세웠다. 처음 보는 산하의 모습에 민혁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야 지 형을 좋아하는 게 더 문제 삼을만한 거 아니냐?ㅋㅋ

그래서 난 쟤가 내 형이 아니었음 좋겠다고

-그래도 니 형인 걸 내가 어쩌라고 더러운년아 어차피 놀아주다 버릴 앤데 좀 기다렸다 뺏지 그렇게 아깝냐?

 

 

 

 

결국 산하는 터져버렸다. 이성을 놓고 달려들어 죽으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지훈의 피를 보고서야 민혁의 말이 들렸고 쓰러진 지훈을 한 번 더 발로 차고 나서야 산하는 말없이 민혁을 끌고 놀이터로 올라갔다.

 

놀이터에 도착하자마자 산하는 민혁에게 다짜고짜 혀를 섞어댔다. 순식간에 들어온 산하에 민혁은 산하를 쳐냈다.

 

 

 

 

산하야 진정해

 

 

 

 

산하는 민혁의 말을 무시한 채로 다시 입을 갖다 댔다. 피 맛이 비릿하게 났다. 벗어나려는 듯 자꾸 밀치는 민혁에 신경질이 나 뒷통수를 꽉 쥐고 허리에 팔을 감았다. 민혁이 수차례 산하의 가슴팍을 두드리고서야 산하가 밀려났다. 민혁은 숨을 헐떡대며 물기 가득한 눈으로 산하를 올려다봤다.

 

 

 

 

왜 밀쳐요 저 새끼는 되고 나는 안 돼? ? 아까 쟤가 하는 말 못 들었어?”

들었어. 다 들었어

왜 형이 그딴 말을 듣고 있는데. 내가 그러라고 이렇게 아껴줬냐고 병신아

응 나 병신이야 저딴 말 들어도 좋아. 내가 너한테 저런 말해도 너 나 계속 좋아 할 거잖아 아니야?”

씨발 맞는 말만 하네 형 담배 냄새만 맡아도 기침하면서 지금 담배 빨던 애랑 키스한 거예요?”

골 때리네 나는 왜 안 되는데요?”

그냥 아니야. 아닌 건 아닌거야 산하야. 너랑 난 그냥 아니야. 안 돼. 그리고 형은 이딴 사랑도 좋아. 김지훈이 싸이코에 개쓰레기여도 형은 좋아. 니가 아무리 욕 해봐도 넌 아니야.”

그런 거면 말 하지 그랬어요. 나도 싸이코에 개쓰레기 같은 거 잘해요

그게 아니잖아 산하야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린다는 말 알아요?”

“”

가질 수 없는 게 어딨어ㅋㅋ 다 뺏을 수 있어요. 내가 망가지던 형이 망가지던 간에 다, 다 가질 수 있어

미친놈아...”

원했던 거 아니에요? 후회할 것 같으면 그냥 지금 말 바꿔도 돼요 사랑한다고 한번만 하면 돼

싫어

하라고

안한다고

계속 그렇게 해봐요 다 잃고 둘만 남았을 때 누가 쓰러질지

 

 

 

 

 

 

 

 

 

 

 

 

 

 

 

 

 

 

 

 

그러자 질투가 난 팥쥐가 콩쥐를 유인하여···

 

죽이고는··· 콩쥐인 양 행세한다.···환생한 콩쥐가··· 팥쥐를 괴롭히자 팥쥐는··· 불태운다.··· 다시 콩쥐로··· 콩쥐의 시신을 찾아 살려 내고··· 팥쥐를 죽여··· 죽는다.

 

 

 

 

 

 

 

 

 

 

 

 

 

 

 

 

 

 

 

 

 

 

 

 

 

 

 

 

 

 

산하야 그만해

그 때 사랑한다고 하지 그랬어. 내가 말했잖아 후회할거라고

사랑해

응 나도요. 이제 그만할게. 근데 형한테 남은 게 뭐가 있지? 다 잃었잖아요. 내말이 다 맞잖아 결국 우리 둘밖에 없을 거라고.”

회자정리 거자필반 / 연두 (이생규장전)

네번째2020. 4. 10. 20:42

송도(지금의 개성)에 사는 젊은 총각 이생(李生)은 공부하러 학당에 다니다가 노변에 사는 양반집 처녀 최씨녀를 알게 되었다. 서로는 시를 주고받는 등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처음에는 부모의 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최씨녀의 애정과 굳은 노력으로 마침내 극복하고 서로 혼인하게 되었다. 이생의 장원급제로 둘의 행복은 절정에 달하게 되지만 홍건적의 난으로 양가의 부모는 물론 사랑하는 최씨녀까지 죽고 간신히 이생만 살아남게 되었다. 깊은 슬픔에 사로잡혀 있는 이생 앞에 최씨녀가 환생하여 나타나는데, 열렬히 사랑한 이생은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다시 예전처럼 함께 수년간을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최씨녀는 이승의 인연이 다했다고 말하며 사라지고, 이생은 너무 놀라 최씨녀의 뼈를 찾아 묻어 주었다. 그 뒤로도 이생은 최씨녀를 매일같이 그리워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

 

 

개성에 사는 열여덟 살 산하는 국학에 다니는 재원이었다. 얼굴이 말끔하고 재주가 비범하며 학문에 뜻이 있어 국학에 다닐 때 길가에서도 부지런히 글을 외우곤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집안의 뜻을 따라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그는 본디 시를 쓰고 글공부에 타고난 재주가 있어 윤 씨 가문에 먹칠은 하지 않겠다며 인정받는 수재였다.

어디 글공부에만 소질 있으랴. 훤칠한 키, 수려한 외모, 젊잖고 품위 있는 행동은 여러 여인을 홀리기에 적합했다. 물론 질투심에 뒤에서 기생오라비라고 수군대는 재원들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국학에서 치르는 시험에서 장원을 받는 것으로 대 갚아 주었다.

 

 

하루는 김 씨네 대감이 윤 진사네에 찾아왔는데 그 집 종이 보기에도 꼭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길래 일단 안으로 들여보냈다. 김 대감을 반갑게 맞이한 윤 진사는 이런저런 담소라도 나눌까 싶어 차를 내오라 했지만, 김 대감의 목적은 오롯이 윤 도령이었다.

 

 

윤 도령, 윤 도령 안에 있는가!”

윤 도령은 어인 일로 찾는가?”

내 그럴만한 일이 좀 있었네. 혹 이리로 불러줄 수 있겠나?”

 

 

이틀 전, 김 대감은 열일곱이 넘어가는 제 딸에게 최 씨네 외아들과 혼인할 날을 잡아놨으니 그리 알라고 통보한 이후부터 난감한 일을 겪게 되었다.

 

 

화월아, 내 저기 사는 최 씨네 외아들과 혼인할 날을 잡아 왔다.”

? 최 씨네 아들이면 최 현이요?”

너도 이제 한 사내의 여인으로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니.”

아버지 전 이미 저와 혼인할 상대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게 누구더냐?”윤 진사님 댁 장남 윤산하 도령이요. 전 윤 도령이 아니면 아무하고도 혼인하지 않을 겁니다.”

 

 

화월은 시장 구경 갔다가 제 주머니를 털어가려는 도둑을 잡아준 산하에게 반해버렸고, 그 이후로 그를 수소문해서 어디 사는 누구인지까지 알아내어 미리 짝으로 정해뒀다. 알고 보니 윤 씨 가문과는 어른들끼리 안면이 있는 사이기에 오히려 잘된 일이라며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게 상책이라고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윤 도령이 글밖에 모르는 샌님이라는 사실은 마을 사람들 전부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흑심을 품고 들이대는 여인들도 있었다. 화월처럼. 김 대감은 윤 도령이 여자와 혼인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부탁이라도 해볼까 싶어 길을 나섰다.

 

 

윤 도령 오랜만이네. 그간 잘 지냈는가?”, 김 대감님께서도 안녕하셨는지요.”나야 뭐 늘 똑같지. 그나저나 윤 도령은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는가? 혼인할 나이가 지난 것 같아 말이네.”

저는 아직 배울 것이 많습니다. 또한, 이 시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혼인은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생긴다면 할 생각입니다

 

 

단호한 산하의 말에 집으로 돌아온 김 대감은 화월을 어떻게 타일러야 할지 고민이었다.

 

윤 도령은 도통 여자에게 관심이 없더구나. 애야, 그만 이 아비의 말을 좀 들어다오. 내 한평생 소원이란다. ?”

아버님께서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렇지만 저도 최 도령과의 혼인에 관한 것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화월도 산하에 대해 알아보면서 그가 혼인에 관심이 없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다. 매일 집 아니면 국학, 가끔 뒤뜰에서 시 쓰는 것 말고 누구와 만난다던가 다른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가령 그가 혼자 있을 때를 틈타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갔을 때도 산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피하곤 했었다.

제대로 말 한 번 못 걸어본 화월이었지만, 첫사랑은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일은 일단락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

 

 

산하는 국학에 갈 때마다 항상 어떤 집을 지나가는데, 하도 고요해서 사람이 살긴 하는지 매번 의구심을 품고 지나쳤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그 집 앞을 지나던 중, 벚꽃이 만개하여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아름다워 잠시 감상하던 그 사이로 한 사내가 수를 놓다가 바늘을 잠깐 멈추고 시를 읊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창에 홀로 비겨 수놓기도 귀찮구나. 꽃 숲의 꾀꼬리 다정도 하네. 마음에 부는 봄바람 원망하고자 바늘 멈추고 생각에 잠겼도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내를 본 산하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에게 더 다가가고 싶었지만, 담이 높고 안채가 깊어 까치발을 들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를 어찌할까 궁리하다가 흰 종이에 답 시를 적어 담 안으로 던졌다.

 

 

고운 임 외로운 꿈 수고롭게 하지 마오. 행여 운우(雲雨)되어 양대(陽臺)에서 만나보세.”

(*운우: 구름과 비를 아울러 이르는 말)

(*양대: 해가 잘 비치는 대)

 

 

밖에서 부스럭대는 소리에 남자가 제 종을 시켜 밖을 내다보라 하니, 웬 종이를 들고 왔다. 시를 읊던 사내는 산하의 시를 보고는 기뻐하며 얼른 답 시를 써서 담 밖으로 던져주었다.

 

 

님이시여 의심 마오. 황혼 가약 정합시다.”

 

 

그날 밤 산하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처음 본 사내의 시에 홀려 답 시를 보낸 행동이 제가 생각하기에도 충동적이었지만 후회가 되진 않았다. 어서 이 긴 밤이 다 지나, 그 크고 반짝이는 눈을 또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단아한 목소리로 시를 읊던 그를 떠올리니 가슴 한 켠이 간질이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왠지 잠들지 못할 것 같다.

 

 

-

 

 

평소엔 잘 들여다보지도 않던 거울을 꺼내와 몇 번씩이나 얼굴을 확인하던 산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국학을 다니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를 생각할수록 이렇게나 심장이 뛰는데 얼굴을 마주하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름도 나이도 심지어 가장 중요한 얼굴을 모르는데 가슴에 품고선 그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것이다.

 

 

혼자 김칫국 한 사발을 들이키고는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연신 부채질을 하던 산하는 이 민망함을 피하고자 국학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렇게 점잖은 도령이 헐레벌떡 어디론가 뛰어가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그의 뒤꽁무니가 닳도록 쳐다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모든 질문에 답했을 산하인데, 오늘은 웬일인지 집중을 못 하고 계속 한숨을 쉬며 딴소리를 하자 국학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호되게 한 소리를 들었다. 주변 재원들 모두 놀랐으나 정작 본인은 무덤덤했다. 머릿속엔 온통 시 읊던 그 남자를 만날 생각으로 꽉 차 있었으니까.

 

 

어김없이 어제 그 집 앞을 지나는데 보장 좀 보태자면 태어나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뛴 적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고도의 긴장 상태였다. 소리를 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손엔 땀이 흥건했다. 이런 상태로는 그를 만나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못 해 창피만 당할 것이라 확신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누워서 다짐했다. 내일은 꼭 그에게 말을 걸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한 지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일주일 째 되던 날, 더 미루면 그 또한 자신의 얼굴을 까먹을까 봐 오늘은 꼭 그를 불러낼 것이라고 국학에서 나오면서부터 할 말을 중얼중얼 댔다.

 

 

유난히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조금 더 속도를 내서 발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그날 그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산하는 집 앞에 서서 그를 부를까 말까 수 없이 고민하다가 용기 내서 슬쩍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거기, 누구 있으십니까? 꽤 큰 소리에 안에 있던 종이 나왔다. 누구십니까? 아뿔싸 계획이 틀어졌다. 그때 그 남자가 나와야 멋있는 말을 하면서 다가가는 건데. 산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만 도르륵 굴리고 있었다. 준비해 온 말들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여 하얀 백지상태가 된 지 오래였다.

 

 

누구시오? 뉘신데 한밤중에 찾아왔소?”

이 집에 크고 화려한 눈을 가진 사내가 있지 않습니까?”

, 민혁 도련님 말씀이신지..”, 그분 좀 만나러 왔습니다.”

, 잠시만 여서 기다려주시지요.”

 

 

남자는 말을 마치곤 집 안쪽으로 들어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집 안쪽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복숭아나무에 꽃이 화려하게 피어있었고, 남자는 머리에 꽃을 꽂고 놀고 있었다. 발소리가 들렸는지 남자는 입을 뗐다.

 

 

복숭아 가지 속 꽃 피어 화려하고 원앙새 베개 위 달빛도 곱구나

 

 

이에 산하가 답했다.

 

 

어쩌다 봄소식 누설되면 무정한 비바람에 가련하지 않을까.”

 

 

당신과 부부가 되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 하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중에 비밀이 누설된다고 하더라도 저 혼자 책임을 지겠습니다.”

 

 

민혁은 그 말을 하며 고개를 돌려 산하를 쳐다보았다. 키는 멀대같이 큰데 얼굴은 하얗고 홍조처럼 볼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얼굴이 토마토 인양 붉어진 산하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토록 상상만 해오던 일이 오늘에서야 일어났다. 박민혁입니다. 당신은요? 윤산하 라고 합니다. 복숭아 꽃이 흩날리는 바람 소리만이 둘을 에워쌌다.

 

 

산하의 걱정과 달리 첫 만남은 순조로웠다.

 

 

-

 

 

문제는 그 이후였다. 맘같아선 몇 날 며칠이고 민혁과 같이 있고 싶은데 제가 하는 일이 아무래도 국학을 다니며 공부를 하는 일인지라 집 가는 길에 잠깐 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혁의 집으로 달려갔다. 민혁과 안면을 튼 이후로 산하의 평범했던 일과가 조금씩 달라졌다. 말 그대로 지옥이었던 제 일상을 바꿔준 민혁과 같이 시장에 나가서 구경도 하고 뒷동산에 누워 풀냄새도 맡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도 하고. 엄격한 아버지께선 절대 용납 못 하실 것들이었지만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제 종에게 일러뒀다. 요즘 과거시험 준비로 국학에서 늦게 돌아오니 그리 알라고 말이다.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지만 그 집 종은 우리 도련님께서 그럴 리가 없어! 라는 생각으로 그냥 넘어갔다.

 

 

제법 날씨가 더워졌다. 그간 정인지 애정인지 모르는 것을 쌓아온 둘은 장난을 할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졌다. 대청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산하는 입술부터 맞댔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누가 윤산하를 글밖에 모르는 샌님이라고 했던가. 산하에게 첫 키스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18년간 처음 느껴보는 짜릿함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풀린 눈으로 숨을 몰아쉬다가 다시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 시각, 우연히 길을 가다가 익숙한 뒷태를 본 화월은 그 자리에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엔 도통 관심이 없다던 윤 도령이 남자와 입을 맞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남자가 어깨를 밀어내자 그제서야 소매로 입술을 벅벅 닦으며 머쓱한 듯이 웃어댔다.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입도 다물지 못하고 집으로 뛰어온 화월은 아까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반복됨을 느꼈다.

 

 

그러나 화월은 머리가 좋았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은 남도 갖지 못하게 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이 사실을 윤 진사네에 알려, 윤 도령을 난감하게 만든 뒤,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자신과 혼례를 치르도록 말이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개성 전체가 발칵 뒤집힐 테니 아마 엄청난 효과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윤 진사는 누구에게서 온 지 모를 서찰을 보고는 당장 윤 도령을 잡아 오라고 크게 화를 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산하는 그날 아버지께 죽도록 퍼 맞았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사내새끼랑 뒹굴고 있냐면서 꼴도 보기 싫으니 어디 산골짜기로 내려가라고. 다음 날 윤 진사는 산하를 바로 울주로 내려보냈고, 민혁은 저녁마다 대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지만 끝내 만날 수 없었다.

 

 

-

 

 

며칠이고 몇 달이 지나도 산하가 찾아오지 않자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닌지 제 종을 시켜 알아보니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오래전에 울주로 내려갔다고 했다. 그 말에 민혁은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모든 게 다 제 탓인 것만 같아서. 아무것도 먹지 않아 몸은 점점 야위어 가는데 미안함은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어렵사리 산하가 사는 곳을 알아 왔음에도 민혁은 눈물만 쏟을 뿐, 별다른 것을 하진 않았다. 그 집 종은 걱정이 되었는지 민혁의 부모를 모셔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서로 주고받은 시를 보여줬다. 본인에게 묻는 게 낫겠다 싶은 부모는 민혁에게 도대체 윤산하가 누구냐고 물었다.

 

 

어찌 숨기겠습니까? 수만 놓던 제게 먼저 다가와 준 소중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분이 오지 않는 건 다 제 탓입니다. 그러나 한이 쌓여 쓰러진 연약한 몸이 맥없이 홀로 있으니 생각은 날이 갈수록 더욱 나고 병세는 점차 위중하여서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부모는 직접 윤 진사네에 찾아갔다. 찾아온 손님이 제 아들과 뒹굴던 사내새끼 부모라는 걸 들은 윤 진사는 매우 탐탁지 않아 했으나 일단 자신의 체면이 있으니 정중한 척 들어오라고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우리 아이가 어려서 바람이 났다 하여도 학문에 정통하고 얼굴이 유달라 장차 대과에 급제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릴 것이니 함부로 혼사를 정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예물과 의장을 저희 쪽에서 담당할 것이오니, 다만 좋은 날을 택해 화촉의 예를 치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애가 쓰러져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사온데 이렇게라도 부탁드립니다.”

 

민혁 부모의 끈질긴 설득 끝에 윤 진사는 둘의 혼례를 허락했다. 윤 진사는 민혁이 선비 놀음하는 가난한 도령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집안 재력에 속으로 땡잡았다고 생각했다.

 

 

-

 

 

산하와 민혁은 혼례를 치렀다. 몇 달 동안이나 떨어져 있던 탓에 둘은 한 시라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둘의 혼례는 비밀리에 진행되었지만 둘 다 어딜 가나 튀는 얼굴인 데다가 매일같이 붙어있으니 안 들킬 리가 없었다. 특히 산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은 개성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나갔는데, 여자 얘기만 하면 얼굴이 붉어지더니 남색을 밝히는 거였냐며 더럽다고 모두 입을 모아 수군댔다. 사람들에게 소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바가 아니다. 물어뜯다가 다른 사냥감을 찾으면 발길을 돌리는 법이니까.

 

 

민혁은 그런 산하가 걱정됐지만, 산하는 오히려 당당했다. 제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빌어먹을 유교가 그런 편견을 갖게 했다면서 말이다. 산하는 걱정하지 말라며 민혁에게 입을 맞췄다.

 

 

요즘 산하의 관심사는 개성에 퍼진 저의 소문도 아니고 글공부도 아니었다. 바로 민혁과의 잠자리였다. 전에 만날 때만 해도 입 맞추는 것 말고는 상상도 못 해봤는데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면서 아직까지 한 번도 한 이불 속에서 잔적이 없었다. 좀만 분위기를 잡아도 민혁이 피하니까 산하는 항상 꼬리를 내리는 편이었다. 그런 산하의 마음을 알긴 하는지 자연스레 이불 두 개를 깔고 눕는 민혁이 원망스러웠다. 심지어 등지고 눕는다니!

 

 

물론 민혁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매일 밤 산하를 등지고 누워서 눈총을 받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 나이 먹어서 손잡는 것도 처음이고 입 맞추는 것도 처음인데 안는 일을 해봤을 리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오히려 눈만 마주쳐도 얼굴이 달아올라 쳐다도 못 보겠는 게 아닌가!

민혁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산하가 갑자기 민혁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 또 이렇게 신호를 보낸다.

 

 

잠이 안 와?”

나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돼요?”

무슨 소리야, 잠이나 자자.”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면서 왜 자꾸 그래요...”

 

 

산하는 집요했다. 오늘은 꼭 성사시키리라고. 민혁이 두려워하는 것쯤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서방님 소리 듣는데..욕망 앞에선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처음으로 동침을 하던 날 둘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날 밤, 달빛이 문틈 사이로 비춰와 촛불을 집어삼켰고 그 속엔 남정네 둘이 껴안은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산하는 다음 해에 대과를 거쳐 높은 벼슬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걸으며 나날이 행복한 날을 보낼 줄로만 알았다.

 

 

-

 

 

신축년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공해와 개성을 함락시켜 사회적으로 큰 혼동을 주었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모조리 죽었다. 산하의 부모는 가까스로 개성에서 빠져나왔지만, 민혁의 부모는 산 깊은 곳으로 도망치다가 도적들에게 붙잡혀 결국은 목숨을 잃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뒤뜰에서 서로 꽃반지를 만들며 놀고 있던 둘은 밖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에 큰일이 났음을 감지하고 눈치를 살피다가 뒷산으로 가는 지름길로 도망쳤다. 갈대밭에 숨어 숨소리도 내지 않고 끌어안은 채 벌벌 떨고 있는데 민혁이 다리에 힘이 풀려 엉덩방아를 찧고야 말았다. 눈앞에 서성이고 있는 도적들이 우리를 죽이겠지, 차갑게 식은 몸뚱어리는 길가에 내팽개쳐지겠지.

 

 

, 꼭 살아야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민혁은 산하를 도망가게 하고 자신이 미끼가 되어 도적들에게 죽었다. , 혼례를 올린 지 1년 되던 날이었다.

한바탕 일어난 소동이 잠잠해지자 산하는 아까 그 갈대밭으로 갔다. 그곳엔 민혁이 잠들어 있었고 산하는 곤히 잠든 민혁을 껴안고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

 

 

윤산하는 죽지 못해 살아있었다. 민혁이 죽은 뒤로는 벼슬도 그만두고 해가 질 때까지 무덤 앞에 앉아만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무덤 앞에서 민혁의 이름을 불러대니 주변 사람들도 처음엔 안타까워했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정도에 나중엔 모두 혀를 찼다.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온 산하는 차게 식은 바닥에 앉아 또 눈물을 흘렸다. 평생 함께하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비겁하게 도망친 자신이 한심했으면서도 자신도 칼에 찔려 죽을까 봐 두려웠다. 제일 행복해야 하는 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었다.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산하는 민혁이 곁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불도 두 개를 깔고 자신은 다 낡아빠진 신을 신으면서 시장에서 예뻐 보이는 신은 죄다 사 와서 민혁의 무덤 앞에 두고 갔다. 민혁 덕에 바뀐 일상이 제자리를 찾았다. 어쩌면 그 전보다 더 지옥일지도 모르겠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중 낭하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민혁이었다. 이제 헛것을 보나, 생각하고는 제 앞에 있는 민혁에게 물었다.

 

 

어디 있었던 거예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민혁은 산하의 손을 잡아 오며 말을 꺼냈다.

 

 

내 몸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승에 다시 태어나 남은 인연은 너랑 맺을 거야. 우리 평생 함께하기로 했잖아. 다시 행복하게 살자...”

 

 

손까지 잡아 오며 대답하는 민혁에 그가 죽었다는 건 이미 뇌리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산하는 벼슬 같은 건 다 잊고 민혁과 금슬을 누리며 살아갔다. 민혁이 귀신이 된 줄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은 혼잣말하며 걸어가는 산하가 드디어 미쳐버렸다고 했지만, 산하는 마냥 행복했다. 산하 혼자 일상으로 돌아와 민혁과 손도 잡고 입도 맞추고 배도 맞췄다.

 

 

그러나 그 행복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

 

 

하루는 민혁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 가약도 곧 끝나는데 넌 또 혼자 남겨져서 어떡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저승길은 피할 수 없어. 천연이 정해진 상태에서 내 몸은 너랑 잠깐 만난 거야. 내가 어떻게 너랑 계속 살 수가 있겠어..”

 

 

산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젠 행복할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내가 혼자 남겨진다니. 민혁이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데.

 

 

나 혼자 여생을 살아서 뭐하겠어요. 저도 따라갈래요.”

나는 귀신의 명부에 실려서 미련을 가지면 벌을 받게 돼. 내 뼛조각들은 무덤 옆에 뿌려져 있을 거야. 많이 사랑했어 산하야...”

 

 

그 말을 끝으로 민혁은 자취를 감췄다. 몇 년간 환상 속에서 살다가 마주한 현실은 너무나도 참혹했다. 전처럼 민혁이 찾아올 줄 알고 한없이 기다린 산하도 끝내 병을 얻어 죽었다.

 

-

 

 

전생체험을 마친 산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쏟아냈는데 깨어나 보니 다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어서 괜히 부끄러워졌다. 특히 제 애인인 민혁이 큰 눈에 눈물을 머금고 괜찮냐며 손을 잡아 오길래 울지 말라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나니 박사님께서는 전생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컸지만, 유교 사상과 전쟁으로 인한 죽음으로 잘 이어지지 못해서 현실에선 오래도록 사랑하라고 이어진 인연같다며 설명해주셨다. 그 말에 산하와 민혁은 서로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전생에도 서로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때처럼 또 헤어지게 될까 봐 두려웠다. 아직도 그런 편협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아이돌이라는 직업 특성상 마음 놓고 연애를 할 수 없을뿐더러 동성 간의 연애는 둘 다 처음이었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이게 사랑이 맞는지, 우정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들의 관계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특히나 민혁은 매일 들킬까 봐 마음 졸이며 남들 앞에선 일부러 산하와 닿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름의 배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산하는 그런 민혁이 걱정되었고, 그래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여러 가지 찾아보다가 전생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민혁보다 자신이 더 많이 울긴 했지만 말이다.)

 

 

숙소로 돌아온 둘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산하는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건 아닌지 민혁의 눈치를 봤다.

 

 

니 왜 자꾸 내 눈치봐

? 아닌데여

 

 

할 말은 많은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둘 다 아무말이나 하는 걸 본 빈이 답답하다- 답답해- 라고 큰소리를 내며 방을 나갔다. 그런 빈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친 둘은 한참을 바라만 보다가 동시에 웃음이 터져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민혁은 그동안 자신이 남들 눈치 보느라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고, 산하는 그런 민혁의 얘기를 들어주며 다 괜찮다고 꽉 끌어안아 주었다. 다시 한번 사랑을 확인한 둘이 입을 맞췄다. 평소보다 더 진하고, 깊게.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면서도 눈은 서로만을 쫓고 있었다.

 

 

전생에 이어진 인연이 맞닿았지만,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둘은 전생에서 못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사랑하려 한다.

가엾은 애정 / 다람 (데미안)

네번째2020. 4. 10. 20:35

가엾은 애정

 

 

-

 

 

 

우리가 이렇게 눈 마주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자연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일지도 몰라.

인간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도록 진화하고 있어.

이게 모두 자연의 큰 그림일지도 몰라.

자연이 온 힘을 써서 가장 완벽한 지성 체를 만들어냈더니

서로를 죽이고 싸우고

다른 존재까지 위협하면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해치고 있잖아.

이런 인간들이 더는 번식하지 못하도록

우린 자연이 만들어놓은 덫에 완전히 빠져버린 걸지도 몰라.

인간은 이 지구 안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 중 하나일 거야.

외롭게 죽어갈 거야.

인간의 종말 안에서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눈을 보고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엉키고 있지.

불난 집에 기름 붓듯.

동물의 생존 방식 번식 방법과 정반대로 행위를 하는 거야.

우리의 쾌락을 위해서.

사랑이라는, 저 너머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알고 있었던 자연의 섭리와 완전히 다르게.

오만한 인간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수억 수천의 생물들이 제자리를 찾고.

지구는 다시 싱그러워지겠지. 진화해가겠지. 우리 없이도.

고작 70억뿐인 개체가 아닌 셀 수 없이 많은 지구 안의 친구들을 위해.

그러니 우린 더 열심히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해.

 

 

 

나의 은신처이며, 나의 비밀이며, 나의 피난처인

나만의 싱클레어에게.

 

너의 친구이며, 너의 비밀이며, 너의 길 안내자인

너만의 데미안이.

 

 

 

 

 

 

 

*영상에서 쓰인 영화의 장면은 소설 데미안과 무관한 내용임을 알려드립니다.

<후기>

합작에 따로 후기를 쓸 기회가 없어 본문에 추가하고자 합니다.

데미안은 소설 데미안의 세계관 안에서 신적인 존재이며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데미안은 소설 안에서 소설 밖의 청년들에게 가르침과 영적인 사고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세계관 안에서 데미안이 싱클레어의 영적인 공간에서 현실 세계로 빠져나와 싱클레어와 잔디밭에서 뛰어놀길 원했고 함께 성모 마리아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길 원했습니다. 어쩌면 종교와 특정 교리에 무지한 어리석은 해석이자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이 글은 소설 데미안의 세계관과는 다른 세계관에서 살아가는 제가 보여주는 또 다른 데미안입니다. 세계적인 거장에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 그럴 리 없음.

소설 데미안의 기승전결이 예전부터 제가 좋아했던 꽃 마리골드의 꽃말-우정, 예언, 가엾은 애정, 이별의 슬픔,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과 많이 닮아 그 중 하나인 ‘가엾은 애정’을 제목으로 사용한 것 입니다.

LOVE IS NOT OVER / RUA (작은 아씨들)

네번째2020. 4. 9. 09:29

 

 

다음엔 더 웃는 얼굴로 만나요.

우리 그땐 좀 더 오래 사랑해요

 

 

 

 

 

LOVE IS NOT OVER

윤산하 X 박민혁

 

 

 

 

 

"좋은 아침이에요, 민혁 씨."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병실 안으로 들어온 윤산하가 말했다. 내가 앉아있는 침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내 몸을 꼼꼼히 살피더니 밤새 어디 불편하지는 않았죠? 걱정 어린 얼굴로 물어왔다. 그러곤 차트에 몸 상태를 기록하고 수액량을 조절하는 그였다. 괜찮으냐고 물어볼 때만 해도 꽤나 기분이 좋았는데 그 뒤에 이어지는 그의 업무적인 태도에 왜인지 마음이 상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그러자 그가 차트를 내려놓고 내쪽을 응시했다. 계속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책을 코에 박을 듯이 가까이 가져다 대자 지켜보고만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민혁 씨, 나 안 봐줄 거예요? 그의 열렬한 눈빛에 못 이긴 척 책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한줄기의 따사로운 햇살처럼 환하게 웃어주었다. 드디어 봐줬네요. 그의 말에 괜히 부끄러워진 내가 다시 책을 들어 올렸다. 그가 미안하다며 나를 말려왔다. 알겠어요. 나중에 읽을게요. 하고 책을 덮어 침대 옆 선반에 올려두었다

 

민혁 씨는 항상 그 책을 읽으시네요. 내가 올려둔 책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선반 위에 올려진 낡은 책은 이 병원에 돌아올 때쯤 샀던 책이다. 이 곳에 오래 있었던 만큼 책도 오랜 세월이 지나 많이 헤져있었다. 모서리 부분은 너덜너덜했고 표지에는 손떼가 가득했다. 볼품없는 모양새였지만 그렇기에 더 애정하고 많이 읽어온 책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붉은 커버에 황금빛 제목이 아직도 멋있었다. 작은 아씨들. 주인공인 네 자매, 그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조가 생각이 나 배시시 웃음이 났다. 말괄량이의 쾌활한 성격인 그녀는 무척이나 재미있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니 그도 놀랐는지 잠시 굳어있다가 곧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미안하다며 사과를 해왔다. 살과 살이 잠시 맞닿았을 뿐인데 왜 인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뭔가 설레는 느낌이었다. 괜찮아요. 익숙하지 않은 감정에 당황한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머쓱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앞서 나갔네요.

 

그를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 가면 오후 늦게 쯤에야 다시 볼 수 있을 텐데. 그를 이렇게 보낼 순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를 불렀다. 선생님.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조금만 더 있어주세요. 내 나름대로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볼에 열기를 식히려 손 부채질을 하고 있자 그가 내 손을 붙잡아왔다

 

"링거 꽂은 손 움직이면 붓는 거 알잖아요."

 

부끄러웠던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왼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나 보다. , 미안해요 하고 사과를 하자 그가 아까부터 서로 사과만 한다며 웃어왔다. 그의 웃음이 나에게도 전파된 모양인지 입꼬리가 마구 올라갔다. 둘 다 웃음이 터져서 서로 마주 보고 그렇게 몇 분을 웃었다. 별 다른 이유 없이 웃긴 이 느낌이 꽤나 즐거웠다

 

그가 간병인 용 의자를 끌어다가 와서 풀썩 주저앉았다. 민혁 씨가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했는데. 그것보다 좀 더 오래 있다가 갈게요. 그래도 되죠? 그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선반에 올려놓았던 책이 내 눈에 들어왔다.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서둘러 고개를 돌렸지만 그 책의 표지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자꾸 시선이 그 책으로 갔고 점점 신경 쓰였다. 입이 근질거리는 느낌이었다. 뭔가를 말해주고 싶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냥 그때는 그랬다.

 

, 저 책이요. 내가 운을 띄우자 그가 책을 바라보았다. 이 책이 왜요?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에요. 작은 아씨들. 그러자 그가 그렇구나. 그럼 민혁 씨는 이 책의 어떤 점이 가장 좋아요? 꽤 오랫동안 읽어온 책 같은데. 하고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조의 밝고 쾌활한 점이 좋아요. 그녀의 말괄량이 적인 행동이 유쾌하고 재미있어서 그녀를 보고 있으면 즐겁거든요. 그의 대답에 신이 난 내가 말했다.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니 그는 내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고 지금껏 아무한테도 하지 않은 이야기인데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졌다. 그의 눈빛 때문이었고 그래서 나는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리고, 저는 베스한테 동질감을 느껴요. 왜냐면 베스는 저랑 되게 비슷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것부터 오래 살지 못하고 떠나는 것 까지요. 그래서 동질감을 느끼고 한편으론 그 아이가 부러워요."

 

왜냐고 물어봐도 될까요? 그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 말했다. 그는 나의 이야기에 완전히 집중한 듯 보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너무 고마웠다. 베스의 곁에는 아픈 그녀를 돌봐주고, 걱정해주는 이가 여럿 있잖아요. 특히 밤낮으로 그녀의 곁에 있어준 조가 있잖아요. 하지만 저는.... 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목 끝까지 울음이 차올랐다. 필히 서러움 때문일 것이다. 아프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채 병원에서 썩다 가는 자신이 불쌍했고 그래서 서러웠으니까. 따스한 가족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부러웠으니까. 결국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이불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아오더니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말아요. 민혁 씨한텐 제가 있잖아요. 그의 말에 훌쩍이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나의 물음에 살포시 웃은 그가 그렇게 눈치가 느려서 어쩌냐고 말해왔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그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뭐지? 하고 고개를 기우뚱하고 있으니 그가 아기 수달 같다며 귀엽다고 했다. 은근 나를 놀리는 것 같아 무슨 소리 인지나 빨리 말해달라고 틱틱대니 알겠다고 답한 그가 대뜸 내 어깨를 잡아왔다

 

"민혁 씨를 걱정하는 사람, 그게 나라고요."

"?"

"베스에게 조가 있다면 민혁 씨에겐 제가 있어요. 비록 가족은 아니지만 민혁 씨가 아프면 민혁 씨를 걱정해주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웃어줄 수 있는 저라는 사람이 민혁씨 곁에 있어요."

 

그의 말에 속에서 뭔가가 북받쳐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밀려오는 지난날의 서러웠던 감정들에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린아이 마냥 엉엉 울어댔다. 그런 나를 끌어안고 토닥여주는 그의 다정함에 눈물이 더 쏟아져 나왔다. 그의 품 속에서 한참을 울다가 숨을 겨우 고르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 제일 처음 보인 것이 그의 젖어있는 의사 가운이었다. 얼마나 울어댄 것인지 어깨 한 부분이 흠뻑 젖어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하자 그가 괜찮다며 가운을 벗어 팔에 걸쳤다. 그런 그에게 의문이 들었다. 그저 환자와 주치의 관계일 뿐일 텐데 나에게 이리 잘해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역시 불쌍해서 그런 건가. 그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급속도로 다운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나의 기분을 벌써 파악했는지 왜 그래요 민혁 씨 하고 물어오는 그였다. 방금까지 나를 달래주던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 물어보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왜 저한테 잘해주세요...?"

 

, ? 그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혹시, 제가 불쌍해서 그러시는 거예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의 말을 듣던 그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그래서 아, 역시 그런 거였구나 하고 속상함을 느끼고 있자 그가 정말 그렇게 보여요? 내가 민혁 씨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아요? 하고 화난 표정으로 말해왔다. 그의 말에 당황한 내가 어버버 거리자 그가 화를 참으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곤 말했다. 민혁 씨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지금까지 빙빙 돌려 말한 건데. 불쌍하다고 느꼈다면 미안해요. 그의 말에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것 같았다. 결국 이 사람도 그런 거였구나. 속상함이 파도치듯 몰려왔다

 

"근데 이제는 솔직하게 말해야겠네요. 저 민혁 씨 좋아해요."

 

내가 너무 불쌍해서 그랬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내가 상상한 것과 정반대의 말이었다. ?! 놀라서 병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치고 말았다. 그랬더니 그가 그럴 줄 알았다며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민혁 씨한테 유독 다정하게 굴었던 거. 다 민혁씨 좋아해서 그런 거예요. 베스에게 조가 있다면 당신에겐 제가 있다고 한 이유도 같아요. 민혁 씨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조가 베스를 아끼는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당신을 아끼고 있으니까요. 그의 진심 어린 말에 입이 굳은 듯 움직이질 않았다. 선생님.... 겨우 입을 떼어 그를 부르자 그가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역시 부담스러웠죠..? 미안해요 부담스럽게 해서. 그럼, 먼저 가볼게요... 정말 미안해요 민혁 씨."

 

병실을 나가는 그의 넓은 등이 오늘따라 작아 보였다. 그의 눈에 가득 차 있던 눈물과 물기 가득했던 목소리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윤산하, 산하 선생님. 나를 좋아하는 윤산하 선생님. 귀가 점점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없어졌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왜 업무적인 태도에 마음이 상했었는지. 왜 그렇게 설렜는지. 왜 보내기 싫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도, 선생님 좋아하는구나

 

홧홧한 얼굴을 식히려 손 부채질을 하는데 링거 꽂은 손 움직이면 붓는 거 알잖아요. 하고 말해왔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진정해야 한다며 잊어보려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기도 했으나 잊혀지기는커녕 그가  더 떠올랐다. 저 하늘 위에 닿을 듯 활짝 올라간 입꼬리와 내 손을 붙잡아오던 그의 크고 길쭉한 손가락들. 더 빨개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록 붉었던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진정하자. 진정해. 라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 틈으로 삐져나온 얼굴이 마치 잘 익은 토마토 같았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이 행복한 감정에 들떠 얼른 오후 진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아 빨리 가라. 우리 산하 선생님 오시게

 

그가 만졌던 귓바퀴를 만지작 거리며 병실 문이 활짝 열리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슴 부분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된 찢어질 것만 같은 통증에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떻게든 버텨보려 입술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어봤지만 입술이 터져 비릿한 피맛만 느껴질 뿐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저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통증이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쁘고 설레었었는데. 지금은 너무 아파서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다. 이 통증이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너는 곧 세상을 뜰 사람이라고 연애나 사랑은 꿈도 꿀 수 없다고. 나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잔혹한 현실에 그리고 무자비한 고통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찾았다. 선생님, 선생님 도와줘요. 꿈이라면 빨리 깨버리고 싶었다

 

 

 

 

 

*

 

 

 

 

 

꽤 오랫동안 잠들었던 것 같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겨우 눈을 뜨고 눈알을 도르륵 굴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혹시라도 아까 일들이 모두 꿈이었을까 싶어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병실 위 침대에 누워있었고 내 손목엔 당연하다는 듯이 주삿바늘이 꽂혀있었다. 꿈이 아니구나. 아직도 고통이 가득한 현실이구나. 이제 그만 끝내고 싶은 현실이었다. 슬픔에 가득 찬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혁 씨, 괜찮아요? 그토록 기다려온 윤산하의 목소리였다. 급하게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자 그가 수척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런 몰골이냐고 묻자 내가 사흘 동안 깨어나지 않아서 미련하게도 사흘 내내 내 곁에서 병간호를 했단다. 나는 이제 끝내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는 내가 깨어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했다. 그런 그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미안해요 선생님.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고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이 미안했다. 그는 이러한 내 마음도 모르고 뭐가 미안하냐며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이런 따스함이 좋으면서도 도통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나도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그게 너무나 어려웠다. 말을 듣지 않는 몸 때문이었다. 이런 내가 그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까. 떠난 후에 그를 더 힘들게 하진 않을까. 함께해서 행복했던 시간보다 함께했던 날들을 추억하며 슬퍼하는 시간이 더 길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그럼에도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마음이 자꾸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고백하고 싶었고 그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바닥만 천장만 쳐다보고 있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곤 말했다. 미안해요, 나 아직도 불편하죠. 앞으로는 안 올게요. 주치의 선생님 바꿔달라고도 제가 말씀드릴게요. 사흘 동안 내 걱정만 했을 그인데 그는 또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옷깃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선생님, 선생님은 이런 저를 봐도 제가 좋아요?"

"그럼요."

 

그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의아했다. 가족들조차도 버리고 간 저인데. 과연 이런 내가 좋을까. 그래서 부러 더 물어댔다. 저 앞으로 얼마 안 남았는데 그래도 좋아요? 그런 나의 질문에 그는 알아요. 제가 주치의잖아요. 하고 대답해왔다. 앞으로 같이 있을 시간보다 혼자 있을 시간이 더 많을 텐데도요? 그가 놀란 듯 눈을 꿈뻑이다가 씨익 웃으며 말해왔다. 그 말은 민혁 씨도 저한테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나의 물에 물음으로 답해온 그였다

 

"선생님은 의사잖아요. 더 좋은 사람이랑 만날 수 있을 텐데 왜 저라는 어려움을 택하시려고 하세요? 저는 그게 너무 궁금해요."

"좋아해서요."

 

그의 깜빡이 없는 직구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물었다. , 왜요? 왜 저를 좋아하세요? 아직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는지 삑사리가 조금 났다. , 일단 민혁 씨는 너무 귀여워요. 아기 수달 같은 모습도 귀엽고 책에 집중하는 모습도 귀여워요. 주사 놓을 시간만 되면 입술을 삐죽 내미는 것도요. 그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 그게 뭐냐고 묻자 그가 살풋 웃고는 말했다. 그러게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민혁 씨가 좋아요. 또다시 훅 들어온 그에 얼굴을 붉히자 그가 내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갑자기 가까워진 얼굴에 고개를 반대편으로 훽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입술만 앙 다물고 있으니 그가 나는 민혁 씨가 너무 좋은데. 이 이상은 욕심인가요? 하고 물어왔다

 

"안아줘요."

 

한참의 고민 끝에 안아달라는 네 글자를 겨우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허락의 의미인가요? 그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물어보는 것이었다. 알면서 물어보지 말고 빨리요. 하고 그를 재촉하자 그가 허리를 숙여 누워있는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누군가의 품에 안기는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는데 역시 너무나도 좋았다. 손으로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조차도 그처럼 다정하고 따듯해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포근한 느낌에 눈이 절로 감기는 듯했다. 그의 온기가 가득한 품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

 

 

 

 

 

"저 왔, 민혁 씨!! 민혁 씨, 괜찮아요?!"

 

다시 찾아온 고통에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곧 선생님 회진 오실 시간인데, 그전에 멈춰야 할 텐데. 하고 제발 멈춰달라고 빌고 또 빌었건만 하늘은 내편이 아닌가 보다. 그가 다급하게 들어와서 내 몸을 살피더니 진통제를 가져오겠다며 나갔다. 혼자 있기 싫어서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몸이 또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러지 못했다.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아파하는 와중에도 그가 보고 싶었고 그가 이런 내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했다.

 

금방 달려와준 그가 나를 토닥여주며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흐윽, . 눈물을 흘리는 나에 그가 어쩔 줄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명준 쌤이 들어왔다. 민혁아, 괜찮아? 하고 물어오는 명준의 목소리에 당황이 묻어있었다. 명준이 링겔대에 진통제 수액을 걸고 알코올 솜으로 팔을 소독하면서 너는 애가 이렇게 아픈데 당장 주사를 놔야지 뭐 하고 있었냐며 산하를 타박했다. 그러자 그가 손이 너무 떨려서 주사는커녕 진통제 수액 잡기도 힘들었다고 말해왔다. 고개를 살짝 위로 올려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괜찮은 척 침대 모퉁이를 잡고 있었지만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명준이 주사를 놔주고 수액량을 지켜보더니 이제 조금 괜찮냐고 물었다. 아까보다는 한결 나은 느낌에 괜찮다고 답해오니 오늘은 절대 안정하라는 말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 나가가 전에 산하를 붙잡고 혹시라도 더 아파할 수 있으니 잘 지켜보라며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고 했다. 명준이 나가고 난 후 산하는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 정말 괜찮은 거 맞냐고 물어왔다. 그런 그의 말에 네, 정말 괜찮아요. 라고 답했다. 하지만 통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에 미간이 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줘요.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게 해줘요. 나한테 기대 줘요. 그가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며 말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내 표정을 보았나 보다. 아니라고 진짜 괜찮다고 말해도 계속 걱정하는 그에 괜히 미안해졌다. 어떡하지 고민하다 사심이 살짝 섞였지만 그를 웃게 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선생님, 저랑 외출하실래요? 저 선생님이랑 추억 쌓고 싶은데."

 

내 말에 그가 이 상황에 할 말이냐고 헛웃음을 지어왔다. , 빨리요 하고 칭얼대자 그가 역으로 질문해왔다. 제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할 거예요? 그런 그의 반응에 손으로 입을 막고 놀란 척 말했다. 제 데이트 신청 거절하시는 거예요? 아니요. 제가 어떻게 민혁 씨를 거절해요.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외출할 생각을 하니 내가 더 들떠서 요즘 꽃피는 시기 아니에요? , 저 벚꽃 보고 싶어요. 유리창 너머로 말고 직접. 막 꽃잎도 줍고 싶어요. 하고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응응 그래요. 우리 다 하자요.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던 그가 말했다. 흥분해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금세 흐트러진 이불을 그가 다시 차분하게 정리해주었다. 그러고는 내 배를 토닥여주었다. 한숨 푹 자라는 의미였다. 그런 그에게 알겠어요. 대신, 손 잡아줘요. 하고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가 또 선수를 빼앗겼다며 궁시렁대면서도 내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행복한 봄날의 오후였다

 

 

 

 

 

*

 

 

 

 

 

", 이게 뭐예요."

 

내가 말하는 외출이라 함은 병원 밖 저 멀리의 어느 곳에 가는 것이었는데. 지금 내가 있는 곳은 꽃이 만개한 공원도 꽃밭들로만 이루어진 꽃놀이 축제도 아니었다. 활짝 핀 꽃들을 보면서 도시락도 먹고 솜사탕도 먹고 싶었는데. 여기는 병원 뒤에 있는 작은 공터였다. 벚꽃이 있기는 했으나 그렇게 많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도 얼마 없었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면서 입을 삐죽이자 그가 몸 상태가 나아지면 그때 가자고 했다. 언제 나아질지도 모르고 영영 나아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큰데도 불구하고 희망을 북돋아주는 그가 너무했다. 지금도 휠체어에 링거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겨우 나왔는데 나아질 리가 없잖아. 말을 안 듣는 몸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내 몸 진짜 미워. 작게 중얼거리자 되려 미안하다면서 내 손에 비틀즈를 쥐어주는 그였다. 평소에는 못 먹어서 안 달 난 비틀즈였지만 영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주사 바늘이 꽂혀있는 손목이 이 순간은 영원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영원이란 없다. 이 생각이 내게 미치는 영향은 꽤나 컸다. 보통 사람들도 영원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생각이 깊어지고는 할 텐데 점점 몸이 쇠약해져 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나는 좀 더 와 닿는 게 달랐다. 지금 이 순간이 언제든지 끝나버릴 수 있다는 느낌이 항상 내 뒤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내 삶이 종결되는 그 순간을 두려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첫 호흡을 하는 그 순간부터 이 삶이 금방이라도 끝날 것 같다고 느껴왔으니까. 그런데 그를 만난 이후로 점점 두려워졌다. 그와 함께 쌓아가는 추억이 늘어날수록 더 그랬다. 이 얼굴을 보는 것도 얼마 안 남은건가. 심란한 마음에 그의 얼굴을 관찰하듯 꼼꼼히 살펴보고 있으니 그가 저위의 벚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얼굴만 보지 말고 저 벚꽃도 좀 봐봐요. 기왕이면 하늘이랑 반반씩 해서 봐봐요."

"........"

"푸른 하늘에 핑크빛 꽃잎이 잘 어우러져서 예쁘잖아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해온 그였지만 나는 오히려 고개를 푹 숙이고 비틀즈 봉투만 주물럭 거렸다. 약간의 미안함과 설렘 때문이었다. 여기가 우리 병원 근처에서 벚꽃 제일 예쁜 데인데. 진짜 안 볼 거예요? 그가 속상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고 벚꽃을 바라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잎들을 보고만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꽃잎이 다 떨어졌을 때면 나도 이 세상에 없진 않을까. 괜히 엄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계속 드는 암울한 생각에 산하에게서 약속을 받아내고 싶은데 말을 꺼내지를 못하겠어서 우물쭈물하고만 있었다.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또 금세 알아차린 그가 무슨 할 말 있어요? 아니면 어디 아파요? 하고 물어왔다. 하지만 방금까지 활짝 웃으며 행복을 그리고 있었던 그에게 그런 말을 할 배짱이 나에겐 없었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조금 추워서요. 하고 둘러대자 그가 겉옷을 벗어 나에게 걸쳐주었다. 얼른 들어가요. 춥겠다. 그가 휠체어 손잡이 부분을 잡고 말했다. 가디건 위에 가디건을 걸치고 있는 모양새가 웃겼지만 복잡한 머리 때문에 입 밖으로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아직도 내 손에 들려있는 비틀즈를 꽉 쥐고 눈을 감았다. 그가 부드럽게 휠체어를 끄는 소리만 들렸다.

 

 

 

 

 

 

 

 

 

 

따끔해요. 그가 내게 말하곤 손목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살짝 인상을 구긴 나를 보고 작게 웃던 그가 반창고로 바늘을 손목에 고정해주었다. 다 됐다. 하고 트레이에 사용한 알코올 솜과 쓰레기들을 담고 정리하는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말을 해야 하나, 말하야하나 망설이다가 겨우 산하 선생님.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왜요? 시선을 내게로 돌린 그가 말했다. 그를 불렀으니 이제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손을 쥐었다 폈다만 반복했다. 결국엔 아니에요. 라며 고개를 다시 창가 쪽으로 돌렸다. 해가 쨍쨍한 것이 날이 무척 밝았다. 화창한 날씨에도 난 이런 병실에 틀어박혀있네. 나 자신의 비운을 통탄해하고 있기도 잠시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혁 씨, 저랑 아래층 도서관 가실래요? 민혁 씨 책 읽는 거 좋아하잖아요. 하고 내 손을 잡아오는 그였다

 

그의 손에 이끌려 도서관에 온 지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는 벌써 지루해진 것인지 책에 집중한 나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가 내 귓가에 민혁 씨, 책이 그렇게 재밌어요? 하고 소곤거려왔다. 책의 클라이맥스 부분을 읽고 있었던 내가 책에 몰입하느라 그의 말에 설렁설렁 대답하니 그가 삐졌는지 볼을 잔뜩 부풀린 채로 책상을 똑똑노크하듯이 두들겨왔다. 사실 그의 볼이 빵빵해진 그 시점부터 내 몸속의 모든 세포가 다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지만 날 좀 봐달라며 애원하는 그가 너무나도 귀여워서 부러 관심이 없는 척 책장을 넘겼다. 그러자 그가 그의 손으로 내 책을 가리고는 말했다. 민혁 씨 책 말고 나도 좀 봐줄래요? 애가 타는 얼굴을 들이밀어오는 것은 덤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제는 자기 보지 말고 경치 보라 더니 하고 틱틱거리니 그가 불쌍한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는 응? 나 보고 싫어요? 하고 물어왔다. 책을 완전히 덮고 그와 눈을 마주친 내가 말했다. 아니요. 이제 당신이 제 전부인걸요. 그런 제가 어떻게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 하겠어요. 책에 분위기에 취했는지 내가 생각해도 능글맞다 싶은 말이었다. 그의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저두요 하고 수줍게 말해오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그가 나를 볼 때도 이런 느낌인가 싶어 흐뭇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갑자기 내 허를 찔러왔다

 

"근데요. 어제 하려던 말은 뭐예요?" 

 

? , 아니 그런 거 없는데요. , 진짜 없어요. 진짜예요. 당황한 내가 말까지 더듬으며 아니라고 둘러대 봤지만 이미 그렇게 반응한 거 자체가 뭐가 있다는 거라고 말해오는 그의 말에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있잖아요, 선생님. 십여 분간의 고민 끝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 저랑 약속 하나만 해주세요. 하고 말한 내가 몸을 옆으로 돌려 옆에 있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무슨 약속이요? 그가 물어왔다. 내가, 없어도 행복하게 살겠다고 약속해줘요. 내 말에 그가 속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때문에 그랬어요? 내가 걱정돼서?"

"..."

"민혁 씨,"

"사실 저는,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오래 살지 못할 운명이라는 느낌이 크게 들었었거든요. 근데요. 지금은 너무 두려워요. 선생님이 나 때문에 힘들어할까 봐. 아파할까 봐 두려워요. 그러니까 약속해줘요. 나 없이도 행복하게 살겠다고."

 

끝내 터진 울음에 손을 얼굴을 가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그런 나를 감싸 안아주었다. 내가 왜 힘들어요. 내가 왜 아파. 내가 처음에 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런 거 까지 다 감수할 마음으로 민혁 씨 좋아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민혁 씨가 떠난다고 해도 내 곁에는 항상 민혁 씨가 있어요. 내 마음 한켠엔 항상 당신이 자리 잡고 있다구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데 민혁 씨가 이렇게 울면 어떡해. 그가 내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멈추지 않는 울음에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부비며 히끅거리고 있자 그가 딸꾹질이 안 멈추네요 하고 말해왔다. , 히끅, 안 멈춰, 히끅, .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딸꾹질 멈추게 하는 좋은 방법이 있는데. 그렇게 말해온 그에게 그게 대체 뭐냐고 묻자 그가 알고 싶어요? 하고 배시시 웃어왔다. 히끅, . 알려주세요. 내가 답하자마자 그가 고개를 숙이곤 나에게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놀란 내가 허리를 뒤로 해 고개를 내빼자 그가 내 허리를 붙잡고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으나 그는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이러다 부딪히겠다 싶어 두 눈을 꾹 감으니 그가 내 눈물이 흘러간 자리를 핥았다. 그러고는 내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 , 하고 숨을 들이키느라 벌어진 입 사이로 그의 혀가 들어왔다. 입천장부터 시작해서 치열을 훑던 혀가 나의 혀와 엉켰다. 물컹물컹한 혀가 나의 혀를 감싸 오는 것이 느껴졌다. 부끄러우면서도 좋은 기분에 그의 어깨를 꼭 부여잡고 그의 혀를 쫓아가기 위해 애썼다

 

점점 숨이 가빠오는 느낌에 그만, 하라고 했으나 떨어질 틈을 주지 않는 그에 내 말은 결국 입속으로 먹혔다. 헐떡이던 내가 한계를 느끼고는 그의 어깨를 세게 쳤다. 그제야 나를 놓아준 그에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와중에도 그와 나의 입술이 떨어지면서 생긴 은색실이 부끄러워 눈을 꾹 감고 손에 쥔 담요를 꽉 쥐었다. 손에 핏줄이 설 정도로 힘을 주자 그가 내 손에 깍지를 껴오며 부끄러 하지 말라고 했다. 파르르 떨리고 있는 내 속눈썹 위로 그가 쪽, 뽀뽀를 해주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눈을 뜨자 그가 드디어 떴다. 하고 해맑게 웃어왔다. 그런 그의 얼굴에 나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번에는 내 볼에 뽀뽀를 하고는 말했다. 민혁 씨, 우리 미래 말고 현재를 봐요. 왜 미래를 생각해요. 나랑 지금 뽀뽀도 하고 키스도 하면서 행복하면 되는거지. 그러면 되는 거지. 그의 말에 내가 그의 볼을 잡고 말했다. 맞아요. 선생님 말이 다 맞아. 우리 지금 당장 행복하자요. 그러자요. 그러고는 다시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그와 나의 두 번째 키스였다

첫 키스는 짭짤했고 두 번째 키스는 달았다

아마도 눈물과 사랑 때문이겠지

 

 

 

 

 

 

**

 

 

 

 

 

아침이 왔을 때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병실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매일같이 침대 옆 선반 위에 놓여있던 책 또한 사라져 있었다. 방안은 무척 고요했고 창가 너머의 벚나무는 어느새 벚꽃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이 남아있었다. 항상 웃으며 나를 반겨주던 그는 미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그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민혁 씨 하고 이름을 불러봐도 반응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가 자세히 보였다. 살포시 감긴 눈이. 움직이지 않는 가슴께가 보였다. 설마. 아닐 거야. 아니겠지. 하고 그의 손을 잡아봤지만 이미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따듯했던 그의 손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그에게 항상 괜찮다고 했지만 실은 괜찮지 않았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그 때문에 잠 한숨 자기도 힘들었다. 그가 내 곁에서 사라질까 당연히 두려웠고 겁도 났다. 그렇지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그 불안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 참아냈고 견뎌냈다. 그의 곁에 자석마냥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다 딱 하루. 집에 옷을 가지러 잠깐 돌아갔다 온 것인데. 아주 잠깐이었는데. 그 사이에 그는 내 곁을 떠났다

 

영원이란 없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이 이렇게나 빨리 다가올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닥에 쿵 하고 주저앉아도 그게 뭐냐며 웃어줄 그가 없었다. 손에 들려있던 쇼핑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과 닿은 충격으로 인해 반듯이 서있던 쇼핑백이 기우뚱하고 옆으로 기울었다. 안에 가득 들어있던 비틀즈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를 위해 사 온 것인데. 그것을 먹어줄 그가 없었다. 나는 작별인사도 못했는데. 이렇게 가는 게 어딨어요. 그의 손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렇게 그의 침대에 고개를 처박고 한참을 울었다. 침대보가 흥건해질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 내 눈물을 닦아줄 그도 없었다

 

슬퍼서 죽어버릴 것만 같은데 그 와중에도 몸은 착실하게 반응했다. 오래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더니 다리가 저려왔다. 털푸덕, 바닥에 다리를 어정쩡하게 피고 앉으니 무릎에 툭 하고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직 눈에 물기가 가득했기에 시선이 흐릿했다. 손으로 눈가를 훔치고는 붉은색의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작은 선물상자 위에 윤산하, 내 이름 석자가 쓰여있었다. 떨려오는 손으로 상자를 열어보니 속에는 편지와 장미, 그리고 책이 들어있었다. 민혁이 항상 읽던 그 책이었다. 붉은 장미를 지나 곱게 접혀있는 편지를 꺼내 들었다. 민혁이 남긴 편지를 따라 읽었다

 

 

 

 

 

To. 산하 선생님

선생님, 저예요. 박민혁쌤 애인이요. 하핫 이미 알고 있으려나

 

민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눈앞에는 뒷목을 잡고 머쓱해하는 그가 그려지고 있었다

 

 

여기 있는 꽃 명준 쌤이 사다준 장미인데 어때요? 예뻐요?? 안 예쁘다고 하면 삐질 거예요. 사실 내가 직접 전달해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못 할 것 같아서 이렇게 편지로 남겨요. 글씨가 이상해도 좀 봐줘요. 손에 힘이 안 들어가서 그런 거예요. 나 원래는 글씨 예뻐요

 

그가 나를 결백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편지가 될 수 있으니까 하고 싶은 말을 쓸게요. 나 선생님한테 하고 싶은 말 되게 많거든요. 일단은, 고마워요. 선생님이 제 곁에 있다는 말 듣고 너무 감동했어요. 나한테 다정했던 사람, 산하 선생님이 처음이었거든요. 지금까지 잘 대해준 사람이 없어서 내가 불쌍해서 그러는 줄 알았어요. 그 점은 미안해요

 

미안하면 다시 돌아와 줘요.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리고 또 고맙고 신기한 거. 내가 말 못 하고 끙끙거리면 선생님이 항상 먼저 말해줬잖아요. 그래서 고마웠어요. 근데 내가 뭔가 말 하고 싶은지 어떻게 알았어요? 나 그게 되게 신기했는데. 의사 선생님이라 통찰력이 높은 건가? 암튼 되게 신기했어요

 

어떻게 못 알아봐요. 내 관심사는 오직 민혁 씨인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고 있는 게 안 보이겠어요? 슬프면서도 웃음이 났다. 생각을 하면 얼굴에 다 드러난다는 것을 그는 끝까지 몰랐다.  

 

 

아 팔 아프다. 손목을 안 쓰다가 쓰니까 아픈가 봐요. 그러니까 얼른 말하고 끝낼게요. 혹시라도 내가 깨어있으면 쪽팔릴 수도 있구 하니까마지막으로 선생님이 미래 말고 현재를 보라고 했잖아요. 왜 미래를 보냐고. 근데요. 그때는 말 안 했는데 그거 다 현재가 너무 행복해서 그런 거였어요. 지금 뿐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선생님이랑 행복하고 싶어서. 그 마음이 너무 커서 그랬어요.

 

겨우 진정시킨 눈물이 다시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깨어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제 다 과거가 되어버린 그와의 추억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시는 현재가 될 수 없는 과거. 이 말이 이토록 슬픈 말인지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선생님 나간 지 얼마 안 됐는데 너무 보고 싶다. 나 진짜 20년 넘게 살면서 삶에 미련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요. 사실 미련 진짜 없었는데 선생님 때문에 생겼어. 책임져요

 

책임질게요. 책임질 테니까. 그 눈 좀 떠줘요

 

 

그래도 선생님이랑 함께해서 행복했어요. 내 삶에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다 선생님이랑 함께 했을 때에요. 고마워요 선생님.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 선생님 생각하니까 눈물 난다. 왜 이러지.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봐요

 

나야말로 고마워요. 민혁 씨 덕분에 내가 더 행복했어요. 내 삶에 다시없을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편지지에는 눈물 방울이 가득했다. 조금 더 바랜 자국은 그의 것이었고 축축한 자국은 나의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선생님이랑 함께하는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는데. 역시 지금은 무리겠죠? 그러니까 우리 다음을 기약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먼저 선생님을 찾아갈게요. 고백도 제가 먼저 할게요. 그니까 꼭 저 기억하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해요

 

씁쓸하게 웃어오는 그가 눈에 선했다. 약속이라며 손에 소지와 엄지를 걸어올 그가 눈에 선했다

 

 

사랑하는 산하 선생님, 다음엔 더 웃는 얼굴로 만나요. 우린 그땐 좀 더 오래 사랑해요. 오래 행복해요.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해요. 마지막으로 나랑 다시 만나기 전까지 행복해요선생님을 사랑하는 민혁이가. 2020411일 토요일에

 

 

 

눈물을 뚝뚝 떨궜다. 정말 다음이 있다면 우리 꼭 만나요. 그때는 정말 좀 더 오래, 좀 더 많이 행복하자요. 사랑하자요. 그의 입술에 마지막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주머니 속에 항상 가지고 다니던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정사각형의 상자를 열면 두개의 반지가 있었다. 가운데에 하트가 새겨진 은색의 커플링이었다. 진작 건네줬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민혁의 차갑게 식어버린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는 꼭 맞았다. 사랑에 눈이 멀다. 당신이 없는 삶은 끔찍하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낼게요. 당신이 그러라고 했으니까. 사랑에 눈이 먼 나는 그 정도는 견뎌낼 수 있어요. 대신 꼭, 우리 다시 만나요. 민혁의 반지 위로 입술을 포개었다. 싸늘한 손이었지만 내게는 따스하게 느껴졌다

 

 

 

 

 

HUNTING BLOOD / 라온 (빨간망토와 늑대)

네번째2020. 4. 9. 09:27

[산밤] HUNTING BLOOD

 

 

 

W. 라온

 

 

 

===

 

 

 

평범하기 그지없는 시골의 작은 보트미어 마을, 그곳을 지켜주는 아주 크고 웅장한 산 사이 아주 깊은 산골짜기. 깊은 그 산골짜기는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산은 크지만 산골짜기까지 그렇게 가파르지도 않고 오르는데 험난한 길도 아니었다. 거기다가 마을 끝자락에서부터 시작되는 길이 하나 있어 길을 잃을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 산을 오르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가끔가다 그 마을에 처음 온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몇 번 가긴하지만 가는 길에 포기하고 하산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포기하지 않는 경우는 모른다.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그 길로 한 남자가 두 달에 한 번 시내로 내려온다. 항상 기분 나쁜 빨간 망토를 두르고 망토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식자재를 잔뜩 사들고 올라간다. 그를 따라 올라간 길 끝에는 한 오두막이 자리하고 있었다. 꽤 낡아 보이는 외관과 관리를 안 했는지 우둘투둘하게 껍질이 잔뜩 올라온 목재들로 봤을 때 그냥 평범한 오두막 같았지만. 그런 오두막 옆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사냥도구들과 등골이 서늘해지는 햇빛 한 점 없는 숲속 분위기 때문인지 평범해 보이는 오두막이 오싹하게 보이는 것이 평범하게 느껴졌다. 그 오두막에 사는 사람은 빨간 망토뿐이었다. 언제 이 마을에 왔는지, 이름이 뭔지, 어떻게 생겼는지, 몇 살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은 오직 빨간 망토를 두르고 다닌다는 것. 하지만 그가 두르고 다니는 빨간 망토는 다른 망토들과 조금은 아니, 많이 달랐다. 원래 가슴 부근까지 덮어야하는 망토는 그의 허벅지의 반을 덮을 정도로 내려와 있었다. 망토의 색은 사과의 산뜻한 빨강이 아닌 피로 물들인 것 같이 얼룩덜룩 헸고 핏빛이 감돌았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짐승의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빨간 망토 또는 핏빛의 망토라고 부른다.

 

마을에 겨울이 찾아오고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내리던 날, 어느 한 남자가 보트미어로 이사를 왔다. 차분한 갈색 머리에 하얀 눈을 닮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사 온지 일주일도 안 돼서 마을 사람들 모두와 친해졌다. 물론 빨간 망토를 제외하고. 이 친화력 좋은 사람의 이름은 윤산하. 24살의 아주 젊은 남자이다. 음악 공부를 하다가 진절머리가 나 머리를 식히기 위해 조용한 시골의 보트미어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을 향한 산하의 미소는 순수했지만 그의 어두운 동공은 항상 다른 곳을 향해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는 추운 겨울, 추운 날에도 보트미어는 활기차게 움직였고 집에서 여유를 즐기던 산하는 문을 열어 지나가는 마을 아줌마들과 이것저것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주머니. 저기 저 길은 뭐예요?”

, 저거? 총각. 저기가면 큰일 나니까 가면 안 돼. 알겠지?”

 

마을 아줌마는 산하의 물음에 얼굴빛이 급격히 안 좋아졌고 산하는 그 얼굴을 읽으려 노력했다. 산하는 어느 정도 예상을 할 수 있었다. 방금 산길을 통해 내려온 빨간 망토를 보고 말이다.

 

저곳이 가면 못 살아 돌아오는 길이야. 가다가 중간에 돌아온 사람은 있어도 갔다가 온 사람은 한명도 없는 그런 곳이라고!”

왜 이렇게 심각하세요? 그럼 저 사람은 왜 저 길로 다니는 거예요?”

어머나. 벌써 두 달이 지났네. 빨간 망토랑 엮여서 좋을 거 없으니까 얌전히 있어 총각.”

빨간 망토?”

 

산하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문에 자신의 몸을 기대어 빨간 망토를 유심히 바라봤다. 순수한 호기심의 눈빛이 아니었다. 뭔가 아주 작은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의 눈빛과 같았다. 여유로운 표정과 비릿한 미소는 마을 사람들을 살갑게 대하던 평소의 산하와는 달랐다. 마을 아줌마들은 빨간 망토가 내려온 것을 보고 서둘러 발길을 옮겼고 산하는 아랑곳 않고 빨간 망토를 관찰하던 순간 빨간 망토가 두르고 있던 망토가 바람에 날렸고 산하를 바라보려는 듯 고개를 돌리는 빨간 망토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빨간 망토는 아무렇지 않게 산길을 올랐고 산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산하는 문을 닫고 소파에 앉았다. 심각한 표정의 산하는 찰나에 마주한 빨간 망토의 눈동자를 되새기고 있었다. 자신을 맹수라고 생각한 산하의 기를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눌러버린 망토와 닮은 검붉은 눈동자는 소름 돋게 오묘했다. 산하는 폐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고 설레는 긴장감으로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산하의 입 꼬리는 서서히 올라갔고 산하의 눈동자는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찾았다.”

 

 

 

 

***

 

 

 

 

산하는 보트미어에서 태어났다. 보트미어가 불에 타 이전의 모습을 잃기 전, 그저 평범한 작은 시골 마을이 아니었다. 보트미어는 인간과 늑대인간이 같이 살던 마을이었다. 아주 옛날, 늑대인간이 도시에서 추방되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정착하여 살고 있던 보트미어에 전쟁으로 도망쳐 온 인간 무리들이 우연히 보트미어를 발견하였고 하필 그때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늑대들과 마주쳐 일부 인간들은 겁에 질렸고 다른 인간들은 늑대인간들과 싸우기 위해 횃불을 들었다. 그런 인간들에게 늑대인간의 우두머리인 신 씨는 인간 무리의 수장인 박 씨에게 서약을 맺자고 제안했고 갈 곳 없이 떠도는 인간들은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 후로 보트미어에서는 인간과 늑대인간이 같이 공존하며 살게 됐다. 그 후로 인간과 늑대인간은 평화롭게 살아왔다. 아주 평화롭게. 그러는 중에 산하가 태어났다. 마을에 태어난 늑대 아이는 산하 혼자였고 산하는 자연스레 인간 아이들과 어울려 자랐다. 인간 아이들은 산하가 늑대일 때 노는 것을 좋아했고 절로 산하는 하루의 절반을 늑대의 모습으로 지내기도 했다. 그렇게 산하가 6살이 되던 해에 보트미어에는 붉은 기운이 밀려왔다.

 

그날은 평소처럼 아주 평범한 하루였다. 아니, 평소보다 더 평소 같았다. 산하는 인간 아이들과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가 놀았다. 흙투성이가 되도록 산을 굴렀고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아이들은 각자의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한 산하는 너무 신나게 놀았던 탓인지 무거운 눈꺼풀을 견디지 못하고 잠에 들고 말았다. 산하가 잠에서 깼을 때는 벌써 어두워질 즈음이었고 산하의 부모님이 산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산하는 털레털레 걸어 나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식탁에 앉았다. 산하는 오늘 저녁이 고기라는 것을 눈을 뜨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산하의 옆에 앉은 산하의 아버지는 산하에게 내일은 같이 사냥을 나가자며 말을 걸고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겨우 눈을 뜬 산하는 밥을 먹고 거실 바닥에 냅다 들이 누워 버렸다. 그때, 낯선 향기가 풍겨왔다. 산하의 부모님은 마을 입구에서 느껴지는 낯선 향기에 산하에게 집에 얌전히 있으라며 당부를 한 후에 밖에 나가 상황을 살폈다. 아직 어린 산하는 낯선 향기를 눈치 채지 못 하고 무슨 일인지 몰래 창문 틈으로 마을을 살폈다. 마을 입구에서 느껴지는 낯선 향기를 다들 맡았는지 마을 어른들은 거의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머무는 한 곳에는 한 남자가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마을 쪽으로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었다.

 

멈춰라! 여기는 우리 구역이다!”

 

늑대들의 우두머리인 신 씨는 그 남자를 멈춰 세웠다. 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을 확인했다. 늘어트린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검붉은 눈동자는 소름 돋게 오묘했다. 그 눈빛을 본 사람들은 모두 흠칫 놀랐다.

 

더러운 짐승 냄새 사이에. 달콤한 피 냄새가. 나는구나!”

 

곧바로 그 남자는 자신의 송곳니를 드러내었고 그의 눈에는 광기와 살기가 가득했다. 신 씨는 그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눈치 챘고 마을 어른들과 함께 마을 입구에서 그 남자를 막아섰고 태광이라는 늑대가 인간들을 대피 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들이 집 밖을 나오자마자 인간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애초부터 늑대보다 빠른 뱀파이어를 막기란 무리였기에 순식간에 인간들이 죽어갔다.

 

이 몇 년 만에 맛보는 피란 말인가.”

 

그는 황홀경에 빠져 비틀거릴 때, 창문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산하와 눈이 마주쳤다. 산하는 순식간에 죽어간 자신의 친구들의 모습에 공포에 휩싸임과 동시에 검붉은 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산하는 자신을 들이닥치는 살기에 몸을 움츠려 눈을 피했다. 그는 그런 산하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 폭소를 내질렀다. 마을 어른들은 모두가 늑대로 변해 그 남자와 싸울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 싸움이 시작됐다. 마을 어른들은 그를 얕보고 있었다. 한 명이니까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는 다른 먹잇감을 찾기 위해 처절히 싸웠고 싸우다 다치더라도 쓰러지지 않았다. 쓰러지는 쪽은 오히려 늑대들이었다. 그의 손에 잡혀 늑골이 아스러지고 폐부가 찢기며 동맥이 끊어져 맥없이 푹푹 쓰러졌다. 산하는 집 안에 숨어 그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부모님이 쓰러지고 마을 어른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슬픔과 분노로 가득 담았다. 그리고 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고 산하는 망설이지 않고 집 뒷문을 통해 달아났다. 그는 달아나는 산하를 굳이 잡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작은 횃불을 들어 사체들을 태우기 시작했고 마을이 불로 가득할 때 그는 산으로 올라갔다. 산하는 그 남자가 자신을 쫓아오지 않는 것을 느끼고 달리는 걸음을 멈춰 불에 타는 보트미어를 바라봤다. 언젠가는 이곳에 다시 오리라는 복수를 가지고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났다.

 

지금의 보트미어에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지금 보트미어 사람들 역시 떠돌이 생활을 하다 까맣게 타버린 보트미어를 마주했고 그곳에 새로 집을 지어 새로운 보트미어를 완성한 것이다.

 

 

 

 

***

 

 

 

 

산하는 거실 바닥에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미동조차 없이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눈을 떴고 산하의 눈동자는 맑은 회색빛이 감돌았다. 산하는 보트미어를 떠난 후 뱀파이어 헌터들의 손에서 자랐다. 어린 산하가 길에 외진 길목에 쓰러져있는 것을 헌터들이 발견했고 산하는 그들과 살게 해달라며 구걸하여 그들의 손에서 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밑에서 도시에서 활개 치는 뱀파이어들을 잡는 요령을 배웠고 산하는 도시에서 가장 유능한 뱀파이어 헌터가 되었다. 그 후 어른이 된 산하는 다시 보트미어로 돌아왔다. 그 남자를 잡기위해. 죽이기 위해.

산하가 그 남자를 발견한지 한 달이 넘었고 그 한 달 동안 산하는 배워왔던 것을 토대로 빨간 망토를 잡을 계획을 세웠다. 중간 중간 도시에 가서 필요한 것들을 사오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산하가 그간 준비해왔던 계획을 실행할 날이 다가왔다. 산하는 아주 평온했고 들뜨지 않았다. 보트미어에는 밤이 다가왔고 자정이 되기까지 10분 남짓 남아 있었다. 산하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신의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뭔가 이질적인 물건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혈액 냉장고였다. 혈액 냉장고에는 꽤 많은 혈액 팩들이 들어있었고 산하는 서늘한 전혈 서너 개를 집어 들고 서랍에 넣어두었던 회색 술이 달린 손에 딱 들어맞는 작은 은도를 집어 들어 집을 나섰다. 자정이 지나자 마을은 모두가 죽어버린 듯이 고요했다. 산하는 망설임 없이 산길을 올랐고 산길은 평소보다 더 오싹했다. 산길을 오른 지 꽤 시간이 지나고 산하는 고개를 들어 앞을 확인했다. 산하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달빛을 가득 받고 있는 오두막이 보였다. 산하는 그 오두막을 보자 숲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혈액 팩을 찢어 오두막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바닥에 뿌리기 시작했다. 헌팅 블러드. 뱀파이어를 잡기 위한 사냥용 피를 이용한 트랩이었다. 피는 아직 녹지 않은 눈 위로 스며들어갔고 그 색은 마치 그 남자의 눈을 연상케 했다. 산하는 뿌리고 남은 혈액을 자신의 몸이나 얼굴에 묻혀 자신의 냄새를 없앴다. 산하가 숲으로 숨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빨간 망토는 다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그는 사방에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인간의 피 냄새에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산하는 그때를 노려 그를 덮쳤고 빠르게 은도를 꺼내 심장에 정확히 꽂으려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산하는 달빛에 빛나는 은도는 한없이 아름다웠다. 그런 은도의 칼끝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일까, 공포심일까. 하지만 산하는 마주한 빨간 망토의 눈을 보고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생기 없이 어둡게 죽어가는 눈을 하고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로 허망하게 하늘만 바라봤다.

시발, 무슨. 절로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처참한 그를 보고 산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도를 손에 꽉 쥐고는 그냥 누워만 있는 그를 바라봤다.

 

당신, 나 알지

누군데, 네가

나 몰라? 당신이 처음 보트미어에 온 그날. 생각 안 나나 봐?”

 

그 남자는 힘없이 일어나 오두막으로 걸어갔다. 들어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산하는 그런 그를 경계하면서도 그를 따라 그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들어간 오두막의 내부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몇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식탁, 병원에서 온 것 같은 침대와 침대 근처 벽면에 걸려있는 빨간 망토뿐이었다. 그는 의자를 끌어 털썩 앉아 집을 구경하는 산하를 빤히 바라봤다. 짙은 쌍꺼풀과 가로로 째진 눈매는 검붉은 눈동자와 아주 잘 어울렸다. 산하는 그의 시선을 느꼈고 그와 또 다시 마주했다.

 

네가 그때 보트미어를 도망치던 늑대니.”

기억하네. 그럼 내가 왜 온지도 알겠네.”

나를 죽이러 온 건가.”

 

그는 여전히 맡아지는 피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도 잠시 다시 평온한 얼굴을 했다. 산하는 그런 그가 괘씸했다.

 

근데 왜 그 꼴인데.”

 

의외의 답이라 생각했는지 그는 영문 모를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 손에 죽어야지. 왜 혼자 죽을 궁리를 하고 있냐고 죽이러 온 사람 허무하게

 

산하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그를 올려다봤다. 산하의 하얀 손에 은도가 들려있었다. 죽여. 그는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자신을 죽이라고. 그의 눈동자의 빛깔이 잠시 달라졌고 자신의 앞에 있는 산하의 볼에 손을 얹고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했다.

 

사냥감을 바로 앞에 두고 망설이는 헌터는 아무도 못 죽여.”

시발.”

 

산하는 손에 들린 은도를 빼내서 그의 허벅지에 꽂아 넣었다. 은도로 인해 그의 살이 타들어갔고 그는 괴로운 듯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산하는 분노에 숨을 헐떡였고 허벅지를 잡고 있는 그의 턱을 잡아들었다.

 

못 죽이는 게 아니라 안 죽이는 거지. 곧 죽을 꼴을 하고 있는 사냥감은 맛이 없잖아. 안 그래?”

 

산하는 재미있다는 냥 웃었고 그는 고통에 숨이 가빠졌다.

 

마을 사람들을 죽인 건 고의가 아니었어.”

, 그 많은 사람들을 실수로 죽였다는 거야 지금?”

 

산하가 그날 본 그는 분명 정신이 멀쩡히 있었고 두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의 목을 물어뜯었다. 그런 그가 지금 고의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날은 몇 년 동안 굶주린 탓에 정신을 잃어서. 나도 내가 어떻게 이 마을까지 왔는지, 내가 누구를 죽였는지 기억도 없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내 앞은 이미 불 바다였다고 그리고마을에서 멀어지는 늑대 냄새만 났을 뿐이야.”

 

그걸 어떤 호구새끼가 믿겠냐 했더니 그게 산하였다. 산하도 속으로 저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를 본 순간 모든 것을 믿고 싶어졌다. 저 붉은 눈동자로 인해 몇 년을 고생을 했지만 지금 그의 눈동자는 오로지 진심만이 가득한 것 같았다. 산하도 모르게 그를 믿어보고 싶다고 생각 했다. 산하는 가져온 작은 가방에서 아직 쓰지 않은 혈액 팩 하나를 식탁에 툭 던졌다.

 

죽지 마. 넌 내가 죽일 거니까.”

?”

이유는 됐고, 이름이나 알려줘

이름?”

응 매일 올 거야. 피 수혈해주러. 그니까 알려줘

박민혁.”

 

산하는 바로 오두막을 나갔고 민혁은 식탁에 놓인 피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민혁은 손을 뻗어 혈액 팩을 집어 들고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입 안에서 팍 터져 나오는 피에 미친 듯이 혈액 팩을 쥐어짰고 민혁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순간 정신을 잃을 뻔 한 걸 간신히 참은 민혁은 산하가 찌른 허벅지를 바라봤다. 천천히 상처가 아물고 있었고 민혁은 그 상처를 만지며 산하를 생각했다. 왜 본인을 살리려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이질적인 감정에 민혁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내일도 온다고 했는데.”

 

민혁은 뭐 없는 집을 둘러보며 정리할 것들을 찾았다. 그런 민혁의 뒷모습이 왠지 설렘 가득해 보였다.

그 다음 날, 산하는 잘 밤에 부모님께 고했다. 저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을 용서하라고. 당신들의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싶었지만 그 아들이 당신들의 원수를 마음에 두었으니 그 죄는 달게 받겠다며 기도했다. 산하는 약속대로 매일 밤마다 민혁에게 혈액 팩을 전해주러 산길을 올랐다. 처음에는 팩만 전해주고 산을 내려갔지만 민혁의 들어오라는 말에 산하는 쭈뼛거리며 오두막을 들어갔고 그 후로 산하는 민혁의 허락 없이도 오두막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산하는 처음부터 민혁에게 반말을 했고 그게 어느 순간부터 거슬렸던 민혁은 산하에게 물었다.

 

왜 말이 짧아?”

? ?”

여기에 너 말고 누가 있는데

, 나한테 이라는 말을 듣고 싶은 건가?”

 

이라는 단어를 듣자 민혁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했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민혁을 보며 산하는 깔깔거렸고 민혁은 그런 산하를 노려볼 뿐이었다. 근데 그 나이면 아저씨 아닌가? 그 말을 뱉은 산하는 결국 민혁에게 맞고 말았고 둘은 그냥 친구하기로 했다. 민혁에게 손해인 것 같았지만.

밤이 되자, 산하는 산길을 올라 익숙하게 오두막 문을 열어 민혁과 간략히 인사를 한 후에 가방에서 혈액 팩을 꺼내 민혁에게 던져 주고는 민혁의 침대에 누워 팩을 뜯는 민혁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민혁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혈액 팩을 뜯어 컵에 따르고 와인인 양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어느새 빤히 바라보던 산하는 침대에서 일어나 민혁이 앉은 식탁으로 다가갔다.

 

이게 그렇게 맛있냐?”

 

산하는 민혁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민혁보다 하얀 손가락을 컵에 넣어 피에 콕 찍었다. 그 손가락을 혀로 가져가 묻어있는 피를 살짝 핥은 산하는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

 

, 비려. 맛있냐?”

 

산하는 민혁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고 살짝 고개를 돌려 가만히 서있는 민혁의 볼부터 눈까지 천천히 노골적으로 바라봤다. 민혁은 너무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회색 눈동자에 어찌할 줄을 몰라 그냥 가만히 귀만 붉히고 있었다. 산하는 그런 민혁의 귀를 확인하고 민혁에게서 떨어져 근처 의자에 앉았다.

 

너는, 나 언제 죽일 건데?”

 

따뜻한 봄 같던 분위기가 순간 싸늘해졌다. 공기에 베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산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눈을 치켜떠 앞에 있는 민혁을 바라봤다. 아무 말도 뱉지 않았다. 하지만 민혁에게 물었다. 정말로 죽고 싶은 거냐고. 민혁은 손에 들린 잔과 시선을 탁자에 뒀다. 민혁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산하에게 답했다. 정말로 죽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민혁의 입은 거짓을 말해야 했다.

 

지금 죽일래?”

, 내 눈보고 얘기해

 

민혁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리고 피를 담은 잔에 붉은 하늘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영롱한 소리를 내며 피와 섞여갔다. 민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산하의 부모를 죽였으니, 산하의 손에 죽어야 하고. 자신이 산하의 모든 것을 가져갔으니, 산하에게 이런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된다고. 민혁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산하의 손에 죽는 것밖에는.

 

사랑해

 

민혁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산하를 바라봤다. 산하의 표정을 복잡해보였다. 산하는 일어나 민혁에게 다가가 민혁의 볼에 남은 눈물자국을 다정하게 닦아냈다. 민혁의 마음에 포근하게 아려왔다.

 

안 돼.”

뭐가 안 되는데?”

넌 나를 죽여야 되잖아

 

왜 내가 너를 죽여야 돼. 산하도 감정이 벅차오르는지 속에서 따뜻한 숨을 뱉어냈다. 산하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민혁을 사랑하기로 했고 그래서 죄책감을 가졌지만 아들의 행복을 당연히 빌어줄 부모님을 생각했다. 민혁에게 이 말을 하러 오는 모든 길이 가시밭길이었지만 꿋꿋이 걸어 이 말을 하러 왔다. 해피엔딩을 꿈꾸며 말이다. 하지만 저 둘을 얽맨 실은 그리 단순하게 풀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모든 걸 가져갔잖아. 네 주변의 모든 걸.”

그게 왜. 나는 다 상관없는데 왜

네가 상관이 없대도 우리는 결국 이렇게 눈물을 흘릴 거야. 결코 행복하지 못해

 

가줘, 산하야. 산하는 오두막을 나갔고 민혁은 오두막에 남아 가까스로 참아냈던 눈물을 조용히 흘렸다. 오두막 밖에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 일이 있고나서 산하는 더 이상 산길을 오르지 않았다.

 

 

 

 

***

 

 

 

산하가 산길을 오르지 않은지 14일이 되던 날, 산하는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머릿속에 민혁 걱정만 하면서. 그때, 누군가 산하의 현관문을 경쾌하게 두드렸고 산하는 터덜터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산하는 자신의 앞에 있는 영훈, 민석, 상현을 보고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여길너희가 왜 와?”

 

그들은 산하와 같은 소속 헌터였고 아직까지도 산하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들은 산하에게 네가 보고 싶어 왔다며 이사도 해놓고 집들이도 안 하고 서운하다는 등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산하는 문 앞에 서서 어리둥절하게 그들을 바라봤고 그들은 손님을 세워둘 거냐고 말하며 현관을 막고 서있는 산하를 무시한 채 산하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 셋은 처음 보는 산하의 집에 신이 났는지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의미 없는 감탄사들을 내뱉었다.

 

, 너희 언제까지 있을 거야

우리? 여기서 같이 살 건데.”

지랄하지 말고 미친놈아.”

 

며칠 안 있다가 갈 거야. 세 사람은 마치 쌍둥이처럼 소파에 앉아있었다. 산하는 앉을 틈도 없이 꽉 들어 찬 소파를 애처롭게 보고는 그 셋에게 밥이나 먹자며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며칠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산하의 집 냉장고에는 먹을 만한 식자재는 없었다. 그 냉장고를 보고 세 사람은 돌아가면서 산하에게 잔소리를 퍼부었고 산하는 작작하라며 장바구니를 챙기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에게 얌전히 있으라는 호통과 함께. 산하는 마을 중앙 시장에서 저 세 짐승들에게 뭘 해먹일까 생각을 하며 먹을 만한 것들을 보고 있었다. 산하가 적 양파를 고르고 있을 때, 산길에서 빨간 망토를 뒤집어 쓴 민혁이 내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민혁이 내려오자 다들 재해라도 난 듯 피해갔고 민혁은 양파를 보고 있는 산하의 곁으로 갔다. 아무런 말없이 그저 가려진 망토 틈새로 산하를 바라만 봤다.

 

당분간 내려오지 마. 헌터들 와 있어.”

.”

먹을 건 오늘 밤에 가져다줄게. 올라 가.”

보고 싶었어. 산하야

 

온다고 해놓고 왜 안 와. 기다렸잖아.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와 망토 안에 그늘진 곳으로 살짝 씩 보이는 쓸려 붉어진 눈 밑이 산하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산하는 그런 민혁의 어깨를 잡아 뒤돌아 세워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 오늘은 갈게. 지금 자신의 집에 민혁을 헤칠 사람들이 가득하기에 민혁을 돌려보내야만 했다. 저들의 목표가 민혁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민혁의 정체를 알아 챈 순간 은도를 꺼내들어 하이에나 마냥 민혁에게 달려들 것이 뻔한 것을 산하는 모를 리 없었다. 민혁은 힘없이 산길을 올랐고 산하는 민혁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걸어가는 민혁을 바라봤다. 산하는 민혁이 사라지자 그제야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산하는 밤에 민혁에게 갈 수 없었다.

영훈은 산하의 옷장에서 남아있는 혈액 팩을 다 꺼내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 사이 민석과 상현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어딘가를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훈이 산하의 방에서 나오자 세 사람은 산하의 집을 나갔고 산하는 소파에 누워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저 세 사람이 보트미어에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민혁을 죽이기 위한 것. 보트미어에 뱀파이어가 사는 것 같다는 의뢰를 받은 지 오래였고 언제 가야하나 날을 기다리던 중에 산하가 보트미어로 떠난다는 것을 듣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보트미어로 올 수 있었고 때마침 그날 운 좋게 시장으로 내려와 준 덕에 민혁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하가 자신들을 경계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 챈 상현이 산하에게 수면제를 쏴 잠에 들게 한 것이다.

그들이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산하는 비몽사몽한 채로 눈을 떴다. 다행스럽게도 들개용 수면제를 쓰지 않았기에 그리 길게 잠에 들지는 않았다. 산하는 눈을 뜨자마자 혈액 냉장고를 확인했고 그 안이 텅 비어있어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산하는 다급히 집을 뛰쳐나갔다. 하지만 먼저 올라가버린 그들을 앞지르기란 무리였다. 그들은 이미 민혁의 오두막에 도착했고 헌팅 블러드를 깔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오두막을 중심으로 나무 뒤에 숨어 있었고 민혁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민혁은 오두막에서 무기력하게 산하를 기다리다 밖에서 진동하는 진한 피 냄새에 산하와 만났던 밤이 생각 났고 혹시나 산하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싶어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순간 느껴지는 살아있는 인간의 피 냄새에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 조심스레 냄새를 느꼈다. 살아있는 인간의 냄새만 가득했고 짐승의 냄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민혁은 잠시 이상한 생각을 해봤다. 산하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불러들인 사람들인가 하고, 하지만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짐승의 냄새에 그 생각은 영구 삭제되었다. 민혁은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숨어 창문을 통해 밖을 봤다. 창문으로 볼 수 있는 시야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섣불리 나가선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민혁은 답답해져만 갔다. 그때 꽤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 14일 전, 그날 밤 민혁의 눈을 퉁퉁 불게 만들었던 그 소리. 민혁의 가슴에 꽂혀 들어온 산하의 말, 도망쳐. 민혁은 들리지도 않은 그 말에 다급하게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지만 나가자마자 민혁의 온 몸을 감싸며 옭아매는 피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져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영훈은 주저앉은 민혁을 발견했고 활을 잡아 당겼다. 그때, 그런 영훈의 시야를 가린 어떤 그림자. 늑대의 모습을 한 산하였다. 영훈은 활시위를 놨지만 둘 중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고 영훈은 종적을 감추었다. 민혁은 풀려가는 정신 줄을 악착같이 잡고 있었고 그런 민혁의 앞에 산하가 나타났다. 산하는 민혁을 자신의 등에 태워 산을 올라갔다. 피 냄새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민혁은 자신을 내려달라는 듯 산하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고 산하는 민혁을 내려줬다. 다리에 힘이 없는지 땅을 밟은 민혁은 흙바닥에 가만히 앉아 땅만 바라봤다.

 

괜찮아?”

, 너는?”

나야 뭐, 괜찮지

 

겨우 말을 나눈 둘 사이는 처음 만난 사이보다 더 어색했고 산하와 민혁 역시 어색하다는 것을 피부로도 느낄 수 있었다. 산하는 조심히 민혁의 옆에 앉았고 민혁은 손끝을 뜯으며 옆에 앉은 산하의 눈치를 봤다.

 

, 나 안 볼 거야?”

?”

나 오랜만에 왔는데 얼굴도 안 볼 거냐고.”

아니, 방금.”

~ ?”

 

그렇게 부르지 마. 산하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민혁은 무릎을 끌어안았다. 산하의 눈에는 붉게 물든 민혁의 귀만 보였다. 까만 밤, 붉은 눈을 가진 남자에게 홀려 사랑에 빠진 회색 눈을 가진 남자. 자신의 눈처럼 붉은 피를 가져다주는 늑대에게 사랑이라는 심오한 감정을 느껴버린 뱀파이어. 죽음을 시작으로 만나 결국엔 사랑으로 끝나는 뻔한 엔딩이지만 이런 뻔한 엔딩 속에 간질거리는 봄바람이 언제나 새롭게 느껴진다.

 

, 그래서 나랑 사귈래?”

이미 그러는 거 아니었냐.”

사랑해,

나도, 산하야

 

달빛이 가득히 축복을 보내는 아래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입을 맞대어 감정을 공유한 그들은 행복하지 않을 시간이 없었다.

 

 

 

-END-

일상 판타지에 로맨스 두 스푼 / 천랑 (신데렐라)

네번째2020. 4. 9. 09:26

일상 판타지에 로맨스 두 스푼

w. 천랑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구전동요가 있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샤바 하이 샤바 얼마나 울었을까 샤바샤바 하이 샤바 왕자님은 언제 만날까

 

그 구전동요의 기본이 되는 동화 내용과 지금의 내 상황이 놀랍도록 딱 들어맞는다. 어머니는 나를 낳으시고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재혼을 하시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사고로 돌아가셨다. 호적상 새어머니인 여자와 형이라고 부르기도 싫은 것들은 한순간에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날 속된 말로 갈궜다.

 

신데렐라와 조금 다른 점이라 하면 요리도 청소도 무엇 하나 잘하지 못하는 탓에 내가 꼴 보기 싫었던 그 여자가 선택한 방법은 방임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비 걸고 때리던 그 여자 아들들은 내가 아무 말 없이 뚫어져라 쳐다보자 지들 혼자 쫄아서 욕을 퍼붓다 가버렸다.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눈깔 그렇게 뜨지 말라고 했던가. 이건 삼백안이라는 거다 이 찌질이들아.

 

솔직히 처음엔 동요 내용처럼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러나 지금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신데렐라의 내용과 딱 맞는다면 그다음 내용도 같아야 하는 거 아닌가. 왕자님을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 내 경우에는 공주님이겠지. 현실과 동화는 왜 이렇게 같으면서도 다를까. 아니, 현실이 더 가혹한 것 같다. 차라리 동화 속에서 사는 게 나을지도.

 

그건 좀 무리고.

누구세요?

 

내 방에 그 여자와 그놈들이 올 리는 없었다. 게다가 시간도 늦었고. 누구도 올 리 없는 내 방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건 꽤 공포스러웠다.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언제나와 같은 방 풍경과 전원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불이 켜져 있는 스탠드뿐이었다.

 

...전원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불이 켜져 있는 스탠드? 조심스럽게 다가가다 빛을 뿜어내는 것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사그라지는 빛에 다시 눈을 뜨자 눈앞에는 웬 처음 보는 꼬맹이가 서있었다.

 

? 요정이지. 넌 신데렐라도 안 봤니?

신데렐라..? 요정..?

가혹한 현실에 눈물짓는 주인공을 도와주는 요정! 그게 바로 나지.”

 

이게 무슨 상어가 전화선 뜯어 먹는 소리. 그냥 멀뚱하니 서서 눈만 깜박이고 있자 자신이 요정이라고 주장한 꼬맹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못 믿는구만. 널 동화 속에서 살게 해주기는 무리고, 동화 일부를 네 일상에 추가시킬 순 있어.”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누구도 쉽게 이해하지 못할 소리만 해대니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것보단 주거침입죄로 신고를 해야 하려나. 핸드폰을 어디 뒀더라.

 

어디 보자... 오케이, 이렇게 하면 되겠다. 비비디 바비디 부!”

 

유치한 주문을 비꼴 새도 없이 꼬맹이가 등장할 때와 같이 밝은 빛이 쏟아져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진짜 뭐냐고 이게. 이러다 시력 약해지면 손해배상은 해주는 거냐고. 속으로 투덜거리다 눈을 뜨자 그 꼬맹이의 모습 대신 조그만 불빛이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그 불빛에서 꼬맹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의할 점은 12시가 되기 전에 누구 집이든 들어와 있어야 해. 네 집이든 친구 집이든. 12시가 넘어도 밖에 있고 싶으면 왕자와 진실한 사랑의 키스를 하면 됨.

 

진실한 사랑의 키스는 또 뭐야. 진짜 동화인 줄 아나.. 하긴 이미 요정이랍시고 나타난 것부터가 동화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왕자와 진실한 사랑의 키스라... 아니 잠깐.

 

잠깐만, 왕자라고? 난 남자인데?”

그럼 안녕! !”

!”

 

소리를 지르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꿈이었어?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시계를 보고 서둘러 등교할 준비를 했다. 그 이상한 개꿈 때문에 알람도 못 듣고 지각하게 생겼다. 태어나서 최대는 아니지만 꽤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고 대충 세수와 양치를 했다.

 

아침밥은 원래 먹지 않으니 그대로 가방을 주워들고 집을 나섰다. 그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었다간 체할 게 뻔하니까. 자다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로 뛰자니 죽을 맛이었다.

 

마음이 급하니 몸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해 평소엔 잘만 피해가던 장애물도 유난히 더 거슬렸다. 그러다 결국 한 아저씨와 부딪혔다. 부딪힌 어깨가 아팠지만 시간이 없어 얼른 고개를 숙이고 죄송합니다를 외치며 학교로 뛰었다. 뛰어가며 생기는 약한 바람에 바닥에 흩날린 벚꽃잎들이 걸음마다 팔랑이는 모습이 만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예뻤지만 그걸 보고 낭만적인 생각을 하기에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전속력으로 뛴 덕에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해 지각은 면했다. 오늘따라 교실까지 올라가는 계단은 또 왜 이렇게 많아 보이는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고등학교 3학년이 심적으로 얼마나 힘든데 육체적으로는 좀 편하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1층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데 간발의 차로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왔다는 걸 알리려는지 교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학기 초라 아직 수험생이라는 자각이 없는지 제각기 모여 떠들고 있던 아이들이 선생님을 보고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갔다.

 

전학생이 왔다.”

 

선생님의 한 마디에 겨우 조용해진 교실이 다시 떠들썩해졌다. 순식간에 시장 바닥이 된 교실에 선생님은 다시 한 번 출석부로 교탁을 두드리며 진정시켰다. 저러다 교탁 무너지겠네.

 

조용히 해야 소개하지.”

 

전학생이 온 게 이 정도로 난리 칠 일인지. 하긴 고등학교 3학년에 전학이라니 흔치 않은 일이긴 했다. 교실은 어렵사리 진정됐지만 전학생에 대한 궁금증으로 수군대는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선생님은 차라리 빨리 소개하는 게 나을 것 같았는지 교실 문밖을 향해 들어오라고 하셨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애는 남자애였다. 남자애들의 탄식과 여자애들의 감탄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전학생은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겼다. 교복을 입고 있어도 마냥 마르기만 한 게 아니라 탄탄한 몸매라는 게 드러났다. 키는 나보다 작아 보이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인기가 많을 법했다.

 

무표정인 데다 세 보이는 첫인상에 여자애들이 냉미남이라고 수군대는 걸 들으며 마음속으로 동의하다 전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흠칫 놀라자 전학생이 별안간 눈을 휘며 웃어왔다. 활짝 벌어지는 입술은 마치 반가운 누군가를 만난 것 같았다. 살짝 위로 올라간 입꼬리가 남자애이긴 하지만 예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동시에 여자애들이 끙끙 앓았다. 웃으니까 냉미남은 무슨 완전 귀엽다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 애는 내가 그 애의 입술, 정확히 말하면 입꼬리를 보다 다시 시선을 올려 눈을 봤을 때에도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결국은 내가 먼저 머쓱하게 눈을 피했다.

 

조용. 자기소개하렴.”

안녕. 난 박민혁이야. 잘 부탁해.”

 

박수 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나는 박수도 치지 않고 공책 하나 올려져 있지 않은 깨끗한 책상만 뚫어져라 봤다. 조금 전 눈 맞춤에 이유도 없이 기분이 이상했다.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다. 예를 들면, 필통이라도 올려놓을까 하는 생각 같은 거.

 

그럼 민혁이 자리는..

선생님, 저는 산하랑 같이 앉고 싶어요.

 

갑자기 불리는 내 이름에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모르는 아이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을 때의 기분이란, 정말 당황스러웠다. 어디서 본 적 있나 생각해 봤지만 생전 처음 보는 애였다. 박민혁은 선생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싱글싱글 웃으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내게 건넨 말.

 

나 책 없는데 같이 보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문장인데도 기분이 참 이상했다. 평범한 문장이라서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침조회가 끝나자마자 반 아이들은 박민혁에게 모여들었고, 사람이 많은 걸 좋아하지 않는 나는 잠시 화장실로 피난 갈 수밖에 없었다.

 

나오긴 했지만 딱히 할 건 없어서 쉬는 시간 내내 세면대 하나를 차지하고 손만 주구장창 씻었다. 비누를 묻히고 물로 씻기를 반복하면서. 종이 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까지도 박민혁의 주변에는 아이들이 몰려 있었다.

 

박민혁은 내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종이 쳤다며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했고 반 아이들은 그 말에 따랐다. 그 모습이 참 익숙해 보였다. 자리에 앉아 수능특강을 꺼내는데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박민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산하야, 애들이 나보고 왕자님이래.”

.. 그래..”

어떻게 알았을까.”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왕자님이라니. 도대체 그 짧은 10분 동안 뭘 하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건지. 그런 오그라드는 별명이 맘에 든다고 저렇게 웃으면서 자랑하는 건 더 이해가 안 갔다.

 

어떻게 알았을까 같은 소리나 하는 거 보니 자아도취에 빠져도 아주 푹 빠졌나 보다. 나 같으면 쪽팔려서 고개를 들지 못했을 거다. 내 무미건조한 반응에도 박민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무어라 종알종알 말을 잇다 선생님이 들어오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전 학교에선 뭐로 공부했는지 수능특강이 없는 박민혁은 이번에도 내 책을 같이 봤다. 붙어 앉은 박민혁에게선 좋은 향기가 났다. 포근하고 은은한. 무슨 남자애한테서 이런 향기가 난담. 섬유유연제인가. 은근히 가까운 거리가 신경 쓰였다.

 

문득 고개를 숙이고 책을 보는 박민혁의 머리가 동글동글해서 한번 만져보고 싶었다. 쓰다듬으면 화낼까 싶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놀랐다. 19년 평생 다른 남자애 머리를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건 다 박민혁 머리통이 너무 동글동글한 탓이었다.

 

괜히 내 머리만 헝클어뜨리다 문제가 어려운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검지로 입술을 쓰는 것에 시선이 입술로 향했다. 손가락에 눌린 아랫입술이 붉고 통통했다. 말랑해 보이는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런 날 깨닫고 얼른 시선을 돌렸다. 난 남의 입술을 왜 보고 있는 거야.

 

아무튼 참 이상한 애였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이상하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박민혁은 내 책 여백에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예의 그 웃음을 지으며 내게 보여줬다. 슬쩍 본 책에는 벚나무와 흩날리는 벚꽃잎이 그려져 있었다. 꽤 하는 그림 실력에 내심 놀랐지만 드러내진 않았다. 이상하게 내 책에 허락도 없이 낙서를 한 셈인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떤 반응을 해줄지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길래 마지못해 고개 한 번 끄덕여 줬더니 또 웃었다. 왜 자꾸 이렇게 웃는 거야. 진짜 신경 쓰여. 결국 한 시간 내내 박민혁 신경 쓰다 수업이 끝났다. 박민혁이 전학 오고부터 정말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 그리고 이거.”

 

수업이 끝난 후 일어서려는 내 팔을 잡은 박민혁이 교복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내 명찰이었다. 의자에 걸어둔 마이를 보니 명찰이 없었다. 어디선가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걸 왜 박민혁이 갖고 있는 거지.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박민혁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네가 떨어뜨리고 갔어. 벚나무 줄지어 있는 길에.”

 

그 길이라면 내가 등하교할 때마다 지나는 길이었다. 아침에 어떤 아저씨랑 부딪혔을 때 떨어졌나. 그래서 내 이름을 알았나보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거두었지만 아직 의문은 남아있었다.

 

왜 그때 안 주고?”

어차피 우린 만날 테니까.”

 

박민혁은 의아하게 보는 내게 한 번 웃어주고는 처음 들어보는 멜로디를 작게 흥얼거리며 교실을 나갔다. 기분이 정말로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생각만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다는 말 아니면 이 느낌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침을 먹지 않은 데다 뛰기까지 해서인지 배에서 자꾸만 꼬르륵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날 때마다 박민혁이 보는 게 느껴져서 쪽팔렸다. 이번 쉬는 시간에는 종이 치자마자 박민혁이 어딘가로 가버려서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시간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참 다행인 일이었다. 하마터면 손바닥 피부가 다 벗겨질 뻔했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눈을 감고 엎드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인기척이 나더니 누군가 톡톡 건드려 깨웠다. 배고파서인지 잠이 오지 않던 터라 바로 눈을 뜨자 박민혁이 어디서 났는지 생크림 빵과 바나나 우유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생크림 빵이랑 바나나 우유.”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

매점에서 사 왔어. 너 배고픈 거 같아서.”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들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 빵과 우유까지 챙겨주니 더 쪽팔려서 귀가 뜨거워졌다. 어차피 한 시간 후면 점심시간인데. 빨개진 귀를 눈치챌까 괜히 퉁명스레 대답했다.

 

“...신경 꺼.”

너 이거 먹을 때까지 나 숨참을 거야.”

맘대로 해.”

“......”

“......”

 

다시 엎드렸다가 조용해져서 슬쩍 보니 코와 입을 막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숨을 참고 있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황당하게 보다가 숨이 넘어갈 것 같아 먹어! 먹는다고! 소리치며 빵 봉지를 뜯었다. 박민혁이 그제야 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죽는 줄 알았다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얘 도대체 뭐야?

 

매점은 어떻게.. , 애들이 알려줬나.”

매점쯤이야 많이 봐서 어딘지 알고 있지. 너 매점에서 바나나 우유랑 생크림 빵 제일 좋아하잖아.”

그건 또 어떻게...”

“...애들한테 물어봤어.”

 

내 취향을 알 정도로 친한 친구도 없는데 누구한테 물어봤다는 건지. 박민혁이 씨익 웃더니 우유도 마시라며 바나나 우유의 초록색 껍질을 까서 건넸다. 그 웃음이 미심쩍었지만 배가 고파 빵과 우유에 집중하느라 그냥 넘어갔다. 박민혁에 대한 내 첫인상은 이상한 애. 자꾸 눈길이 가고 자꾸 신경이 쓰이는 이상한 애였다.

 

 

 

 

 

 

 

 

 

 

박민혁은 전학 온 첫날부터 일주일이 다 된 지금까지도 온종일 나만 따라다녔다. 거의 뭐 태어나자마자 처음 본 게 나인 새끼오리처럼 내 뒤만 졸졸. 그뿐이랴, 오늘은 학교가 끝나고도 박민혁은 내 뒤를 쫓아왔다. 이상한 느낌을 주는 애가 자꾸 따라다니니 나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너 왜 나 따라와?”

네 방 가보고 싶어서.”

 

박민혁은 가는 길이 같다는 흔한 변명 대신 직구로 던졌다. 솔직한 점은 칭찬받을 만했으나 안타깝게도 난 누군가를 집에 데려가는 걸 무척 싫어했다. 그 집구석을 누가 보여주고 싶겠어. 모진 말 듣는 거 구경시켜줄 일 있나. 물론 이젠 나도 가만있진 않지만 어찌 됐든 콩가루 집안인 걸 굳이 남한테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안 돼.”

? 나도 너 덕질하는 거 보면서 그 라키라는 사람 팬 됐단 말이야. 난 앨범 하나도 없는데 같이 보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라키는 내가 좋아하는 솔로 가수였다. 내 지옥 같은 삶에서 그나마 숨 쉴 틈을 주는. 내가 라키의 팬인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몰랐다. 그 여자와 그놈들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 사실을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애가 알고 있다는 건 무슨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난 널 구해주러 온 흑마 탄 왕자님~”

 

역시 이상한 애. 하여간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왕자님은 무슨. 온몸에 돋은 소름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 타이밍을 재다 전속력으로 튀었다. 박민혁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안 그래도 잿빛인 내 인생에 호러라는 장르까지 추가됐나 보다. 생각할수록 무서웠다.

 

산하야! 내가 뭐 잘못 말했어?! 흑마 안 타고 와서 그래?!”

 

뛰어가는 내 뒷모습에 대고 그렇게 소리치는 게 들려서 더 무서웠다. 평소보다 매우 이른 시간에 집에 도착한 나는 도착하자마자 침대 밑에 숨겨둔 하늘색 덕질 상자를 확인했다. 다행히 누군가 연 흔적은 전혀 없었고 모든 물건이 무사했다. 근데 연 흔적이 없는 게 다행인 게 맞나. 그럼 박민혁은 이걸 어떻게 안 거지.

 

박민혁에게 의구심을 가지던 것도 잠시 라키 형의 첫 번째 미니앨범을 펼쳐보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덕후가 다 그렇듯 잘생긴 내 최애로 가득한 앨범을 보고 있자니 금세 빠져들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얼굴만 보고 있는데도 너무 재미있었다.

 

그러고 보니 라키 형과 박민혁이 좀 닮은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딴 생각은 머리를 흔들어 지워냈다. 비교할 가치도 없지. 어떻게 라키 형이랑 비교해. 라키 형의 미니앨범을 보며 실실 웃다가 덕질 상자에 소중히 넣어놓고 뚜껑을 닫아 다시 침대 밑에 밀어 넣었다. 앨범을 보느라 몰랐는데 어느새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저녁은 대충 식탁에 놓인 식빵과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우유로 때웠다. 배가 차지 않는 것보다 요리해 먹다가 누구라도 마주치는 게 더 불편했다.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웠다. 문득 약 몇 시간 전의 박민혁이 떠올랐다. 그러자 안 그래도 씻고 나와 서늘한 몸에 또다시 소름이 돋았다.

 

뭐지. 왜지. 전학 온 첫날부터 이상하던 박민혁은 여전히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박민혁이 전학 오기 전날 밤 이상한 꿈을 꿨던 것을 생각해냈다. 그 무슨 요정이라는 꼬맹이 나오는 꿈. 그냥 개꿈이라고 치부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둘 다 내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이상한 일이었다. 이 세상 그 누가 이런 일들을 연달아 겪겠어.

 

그 꼬맹이가 뭐라고 했더라. 깨자마자 늦어서 정신없었고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억지로 머리를 굴리다 기억해낸 것은 동화 속 설정 어쩌구랑 12시가 지나면 누구 집이든 집 안에 있을 것, 그리고 그걸 풀고 싶으면 왕자와 진실한 사랑의 키스를 하라고 한 것이었다. 그래도 중요한 건 까먹지 않고 나름 다 기억하고 있는 내가 기특했다.

 

그 꿈이 개꿈이 아니라 진짜 그 꼬맹이가 요정이었고, 동화 속 설정이 추가됐고, 12시가 지나도 밖에 있고 싶으면 왕자와 키스도 해야 하는 거라면? , 그것도 진실한 사랑의 키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나한테 일어나는 거지.

 

진짜 구렸다. 이런 건 유아들 판타지 만화에서도 안 써먹을 법한 설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박민혁이 자기가 흑마 탄 왕자님이라던데. 그럼 박민혁이 왕자라고? 에이 말도 안 돼... 대한민국은 대통령제인데 왕자는 무슨.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아주 만약에 박민혁이 왕자라고 해도 내 사생활을 알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냥 한 말이겠지. 어쩌다 맞아 떨어진 거지. 나는 완벽한 논리를 바탕으로 박민혁은 이 일이랑 전혀 관련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박민혁은 그냥 이상한 애였다. 그건 그렇고 동화 속 설정은 뭐가 추가됐다는 거고 집 밖으로는 왜 나가지 말라는 건지. 12시가 지나도록 밖에 있을 일은 없을 것 같긴 한데.

 

거지같은 현실 좀 바꿔 달라고 했더니 거지같은 건 여전하고 호러에 미스터리까지 추가됐다. 이건 저주 아니냐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뭐가 더 없나 유추해보던 나는 미처 잊고 있던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꼬맹이의 저주 아닌 저주를 풀려면 왕자와 키스해야 했다. 왕자. 그러니까 남자랑, 키스를.

 

나는 이 야밤에 마치 갓 잡은 대왕 물고기마냥 펄떡거렸다. 그러나 펄떡일 때마다 침대에서 듣기 싫게 스프링이 끼익 거리는 소리가 들려 무서워져서 금방 얌전히 누웠다. 침대 바꾸고 싶은데 그 여자가 바꿔줄 리 없지. 없는 형편에도 본인이 쓸 100만 원짜리 핸드백은 막 긁으면서 나한테 들어가는 돈은 10원도 아까워하는 사람인데.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박민혁이랑 눈이 마주쳤다. 피할 생각도 미처 못 하고 몇 초 간 마주쳐서 못 본 척 다시 나갈 수도 없었다. 나를 본 박민혁이 벌떡 일어나 내게 팔짱을 끼고는 팔을 조물거렸다. 스킨십이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정말이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산하야. 어제는 내가 미안. 흑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 성에 흑마가 있는 왕자님이라고 했어야 했는데.”

 

진짜 내가 뭘 잘못했지.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박민혁이랑 같이 있다 보면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흑마 어쩌고가 아니라 어떻게 내가 라키 형 팬인 걸 알고 있는지 그걸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닐까. 진짜 골 때리네 얘.

 

사실 그래서 오늘은 흑마 타고 오려고 성에 연락했는데.. 집사님한테 혼났어..”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박민혁. 그래, 내가 졌다. 말 해봤자 나만 머리 아프지 그냥 말을 말기로 했다. 하도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이제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것 같았다.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같이 라키 형 덕질할 사람도 생기고 좋네.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박민혁을 떼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봤자 짝꿍이 박민혁이었다. 박민혁이 내 옆자리에 앉더니 무언가를 내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생크림 빵과 바나나 우유였다. 이걸 왜 내 책상 위에 올려놓는지 몰라 박민혁을 보니 너 아침 또 안 먹었을 것 같아서 샀다며 해맑게 웃었다.

 

사오지 마. 이러니까 꼭 빵셔틀 시키는 거 같잖아.”

내가 주고 싶어서 그래.”

?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박민혁이 검지로 입술을 쓸며 말없이 웃었다. 바짝 깎은 손톱을 스치는 붉은 입술. 자연스레 손가락을 따라갔다가 입술을 마주하고 지레 놀라 박민혁의 귀 언저리로 시선을 돌렸다. 됐다. 또 웃는 거로 때우고 말 안 해주려나 보지.

 

이상하게 저 웃는 얼굴만 보면 가슴이 간질거려서 제대로 못 쳐다보겠다. 진작 포기한 나는 책상에 놓인 생크림 빵을 집어 봉지를 뜯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안에 생크림이 가득한 것이 만족스러웠다.

 

산하야 너 그거 알아?”

.”

“...어떻게 알았어?”

난 다 알아.”

 

됐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심술이 나 무슨 말 할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다 안다고 했다. 빵만 먹었더니 퍽퍽해서 옆에 놓인 바나나 우유를 까서 들이켰다. 박민혁이 준비성 철저하게 빨대도 챙겨온 걸 봤지만 빨대로 먹는 건 맛이 안 났다.

 

쓸데없지만 내 나름의 철학, 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박민혁은 자신이 쓰려고 가져왔던 거였는지 빨대를 자기 몫의 바나나 우유에 꽂았다. 어차피 박민혁은 모르겠지만 괜히 머쓱해서 바나나 우유만 몇 모금 더 넘겼다.

 

네가 아는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할걸.”

“......”

나 너 좋아해.”

“......?”

너 성인 되면, 우리 결혼 할래?”

“??????”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바나나 우유를 뿜을 뻔했다. 입을 다급히 틀어막아 겨우 꿀꺽 삼키고 보는데 박민혁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박민혁은 나를 좋아한다는 대형 폭탄을 투하한 것도 모자라 졸업하면 결혼하자는 핵폭탄까지 연달아 터뜨려 놓고도 태연했다. 마치 오늘 오후에 비 온대와 같이 일상적인 말을 한 것처럼.

 

이거 지금.. 프러포즈인 거지..? 프러포즈 형태를 띠고 있는 박민혁의 고백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원래 좀 이상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좀은커녕 보통 이상한 게 아니었다. 더 이상한 건, 저 말을 듣고 없던 정도 떨어지는 게 아니라 미친 듯이 뛰는 내 심장이었다. 너무 놀라서 그래. 그게 아니라면 이유가 없으니까.

 

어떻게 말해야 하지. 사귀자는 것도 아니고 결혼하자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해? 아니, 그렇다고 사귀자고 하면 사귄다는 건 아닌데. 나랑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난 남자 안 좋아하는데. 남자랑 남자가 어떻게 사귀고 어떻게 결혼해. 근데 얘는 뭐 이렇게 태연해? 아니, 아니, 잠깐만. 지금 박민혁이 날 좋아한다는 거잖아. 난 남자인데?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온갖 의문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박민혁은 처음 봤을 때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이 있듯 왠지 저 웃음을 무너뜨리기가 망설여져 한참을 머뭇대다 겨우 말을 꺼냈다.

 

.. 그게.. 난 남자 안 좋아해..”

나도 남자 안 좋아해. 난 너 좋아해.”

 

망설인 것이 무색하게 3분 만에 두 번째 고백이었다. 얼굴이 펑 달아올랐다. 싫다거나 더럽다는 생각 대신 그냥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마구 부풀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마 고백 같은 걸 처음 받아봐서 이러는 거겠지. 그럴 거야. 그냥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나도 박민혁처럼 이상해진 것 같아서.

 

난 잘 모르겠고..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거짓말. 알면서.”

..?”

알겠어, 네 답.”

 

박민혁은 그대로 교실을 나갔다. 몇 모금 마신 것 같지도 않은 바나나 우유도 놓고 나갔다. 쉬는 시간 4분 남았는데. 이대로 교실로 돌아오지 않을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다르게 박민혁은 종이 치자 교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내 옆에. 슬쩍 훔쳐본 눈가가 붉었다. 감정을 완전히 가라앉히지 못했는지 무언가 참는 듯 입술을 꾹꾹 물었다.

 

괜한 죄책감에 수업에 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근데 나 진짜 모르겠어. 너는 나와 같은 남자인데 나는 왜 네 고백에 이렇게 가슴이 뛰었는지. 왜 이렇게 네가 자꾸 신경 쓰였는지. 왜 네 웃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는지. 다른 남자애한테 사귀자는 말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면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넌 그렇지가 않아. 지금까지 이상함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이 사실 이상함이 아니라 다른 이름을 가진 감정이라면,

 

...진짜 말도 안 되는데, 진짜 어이없는데 설마 내가 널 좋아하는 거야..? 그렇다면 어떡하지. 난 벌써 너를 울려 버렸는데.

 

 

 

 

 

 

 

 

 

 

그 고백 이후로 날 피할 것이라 예상했던 박민혁은 날 피하지 않았다. 하긴, 박민혁은 늘 예측 불가능한 애였다. 그 뜬금없는 고백처럼. 박민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날 대했다. 여느 날과 같이 내게 꼭 붙어서.

 

웃으며 생크림 빵과 바나나 우유를 건네는 박민혁이 언제나와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나도 널 좋아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애매해진 상황에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박민혁이 그냥 없던 일로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렇지 않아도 갑작스레 인지하게 된 박민혁을 향한 감정에 혼란스러운데 평소와 같아도 너무 같은 박민혁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박민혁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해버리니 마음을 숨기는 게 쉽지 않았다. 손끝만 스쳐도 스친 곳에 열이 올라 흠칫 놀라며 황급히 손을 뗐다. 오히려 박민혁은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냥 고백도 아니고 프러포즈를 했다가 거절당한 사람치고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어제의 나를 원망했다. 이렇게 금방 인정할 거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챘으면 좋았잖아. 왜 멍청하게 거절하고 나서야 깨달은 건지. 거절해놓고 내가 생각해 봤는데 너 좋아하는 게 맞다며 다시 말 꺼내기도 이상하잖아.

 

산하야 내일 봐! 하며 반대쪽으로 뛰어가는 박민혁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가끔씩 박민혁이 뒤돌아볼 때마다 보고 있지 않은 척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박민혁이 코너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 바보 같은 짓을 반복했다.

 

담 위로 언뜻언뜻 보이는, 뛰는 걸음마다 나풀대던 박민혁의 갈색 머리칼마저도 사라진 걸 확인하고 그제야 뒤를 돌아 집으로 갔다. 분명 내가 가는 길과 반대편으로 간 걸 봤는데 박민혁은 집에 가는 길 내내 나를 따라왔다. 자꾸만 떠오르는 박민혁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방에 들어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팔로 눈을 가리고 박민혁 생각을 떨쳐내려 애쓰는데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우악스럽게 열리더니 갑자기 멱살이 잡혀 몸이 끌어올려 졌다. 그 여자 아들 중 한 명이었다. 어디서 심기가 뒤틀렸는지 오늘따라 시비를 걸었다.

 

귀찮아서 한숨만 푹 쉬자 다짜고짜 구타해오는 것에 이를 앙다물었다. 평소 같으면 몇 번 툭툭 건들다가 가만히 있는 나에 지 멋대로 도취감에 빠져 갔을 텐데 오늘은 싸가지 없게 왜 그딴 눈으로 보냐며 얼굴에 주먹을 날려 광대를 맞았다. 광대는 멍이 들게 분명했다. 차라리 지금까지 하던 대로 없는 사람 취급하지.

 

내가 광대를 손으로 감싸기만 하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자 갑자기 무차별적인 폭력이 시작됐다. 얼마든지 반격할 수는 있지만 괜히 일 키우고 싶지 않았다. 엄연히 피해자는 나임에도 때리고 난 후의 상황은 모두 저 사람한테 유리하게 돌아갈 테니까.

 

차라리 좀 맞고 빨리 끝내는 게 나았다. 그래도 가드는 올렸다. 웬만하면 얼굴은 피하고 싶었다. 얼마나 맞았을까 저 놈이 박차고 들어오면서 닫히지 않은 문 밖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하고 저녁 먹어~”

 

. 실소가 나왔다. 모든 상황이 개떡 같았다. 알면서 폭력을 방관하는 태도가. 별일 아니라는 태도가. 그 여자 아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나를 내버려두고 쿵쾅대며 나갔다. 온몸이 쑤셔왔다. 맞을 때보다 더한 통증이 뒤늦게 밀려왔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만신창이일 게 분명했다. 욱신거리는 팔을 겨우 들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입안이 터졌는지 비린 피 맛이 났다.

 

몸을 일으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 천천히 짐을 챙겼다. 가출한다고 알아줄 리도 없고 집을 나간 걸 안다면 아주 좋다고 파티를 열 것들이지만 그들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나가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이 지옥에 계속 있고 싶지 않았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어디로 갈지 생각은 안 해봤지만 일단 이곳을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었다. 교복과 필수품, 알바로 모아둔 비상금을 가방에 넣고 조금 망설이다 라키 형의 앨범 한 장을 챙겼다.

 

무작정 나왔지만 갈 곳은 없었다. 찜질방도 피시방도 미성년자는 10시를 넘으면 있을 수 없었다. 보호자가 있어도 안 된다는 곳도 있는데 하물며 나는 보호자도 없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 반이었다. 문득 생각난 건 요정의 당부였다. 12시 후에는 누구 집이든 집에 있으라던.

 

12시 후에 집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단지 개꿈일 뿐이라고 생각해 보려 했지만 조금 두려워졌다.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깨면 자연스레 잊혀지는 다른 꿈들과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12시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나 마음만 급하고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집에 다시 들어갈 바엔 차라리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게 나았다. 이참에 그게 꿈인지 진짜인지 알 수도 있고 좋네. 그저 하염없이 걷다보니 마포대교가 나왔다. 밤이라 더 깊고 어두워 보이는 강물이 꼭 심연 같았다. 한 번 빠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멍하니 한강 물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어 한강 물 온도를 검색해봤다. 9.6. 차갑겠지? 물론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궁금해서. 누구 좋으라고 아깝게 내 목숨을 버려. 게다가 내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는 꽤 잘생겼다. 이 얼굴을 하고 열아홉 살에 죽는 건 내 손해였다. 아직 박민혁이랑 연애도 못 해봤는데.

 

시간은 다가오는데 갈 곳은 없어 다리 난간에 기대 까만 물만 바라보고 있자니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꼭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서. 그때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놀라서 심장이 멎을 뻔했다. 익사는 무슨, 심장마비로 죽는 줄.

 

뒤돌아본 곳에는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박민혁.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박민혁이 틀림없었다. 믿기지 않아 놀라서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보고만 있으니 박민혁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 집에 갈래?”

 

12시가 되기 10분 전, 마법처럼 내 앞에 나타난 박민혁. 가로등 불빛에 비친 내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것을 봤을 텐데도 박민혁은 별말 없이 손만 내밀었다. 모자를 쓰고 있는 데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 박민혁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일까 아니면 조금 다르게 무표정일까. 박민혁이 웃어도 기분 이상하고 무표정이어도 기분 이상하고.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내민 손을 잡고 싶었다. 그래서 잡았다. 마음 가는 대로.

장화홍련전 / 소잉 (장화홍련전)

네번째2020. 4. 9. 09:23

 

 

장화홍련전

w. 소잉

 

 

 

 

 

 

 

 

 

 

어슴푸레한 밤, 달빛만이 잔잔한 연못 위를 비추고 있었다. 고요한 밤, 사람들은 하나둘씩 제집으로 들어가 잠든지 오래였고, 귀뚜라미 찌르르 울리는 소리만 작게 울려 퍼졌다. 까맣게 뒤덮인 밤하늘에는 별들이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날도 그러했다.






어느 맑은 가을날, 사람들은 새로 부임했던 원님이 또 도망갔다는 소식에 저들끼리 모여 쑥덕거렸다. 다음 원님은 과연 며칠이나 갈 수 있을는지, 이러다 아무도 이 마을에 오지 않으려 하면 어쩔는지. 패를 갈라 다음 원님이 며칠 만에 뛰쳐나갈지를 두고 돈을 거는 이들도 몇몇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 전부터 고을에 부임해오는 원님들은 죄다 귀신을 봤다는 헛소리만 늘어놓고는 줄행랑을 쳤다. 매번 짧으면 하루, 길면 사흘 만에 도로 돌아가 버리는 원님들에 고을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 근데, 진짜로 우리 고을에 귀신이 있는 것 아녀? "

" 아이참, 그건 또 무슨 소리여 이 양반아. 내가 이 고을에서 오십 년을 살았어, 오십 년을! 귀신은커녕 귀신 치맛자락도 비춰본 적이 없당께? "

" 혹시 모르는 것이잖어~ 원님들이 저렇게 하루도 못 버티고 싹 다 나가버리는 것을 보면, 분명히 뭔가 있긴 있는 것 같은디.. "

" 에헤이 거 이상한 소리 그만하쇼! "



이 고을에 부임했던 원님들도 그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귀신은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 말라며 자신이 그런 것에 겁을 먹을 줄 아냐고 큰소리를 뻥뻥 쳐댔지만, 이튿날이 되면 모두 하나같이 혼이 빠진 채로 고을의 입구를 나섰다. 그러다 보니 소문은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져 한양의 양반 자제들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 윤 진사, 자네 그 소식 들었는가? 저 멀리 한 고을에 글쎄 말일세. 부임하는 원님마다 첫날밤에 귀신을 보고는 겁에 질려 자리를 내놓고 도망을 간다는데, 윤 진사는 어떻게 생각하오? "

" 귀신이라. 참으로 재밌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귀신은 그저 상상 속에나 존재할 뿐, 실제로는 코빼기도 안 비추는 존재이건만. 또한 귀신이 있다 한들 잘 타일러 돌려보내면 될 것인즉슨, 자리를 내놓고 도망을 간다니.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





윤 산 하. 그것이 윤 진사의 이름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명망 있는 가문의 자제로써 총명한 머리, 뛰어난 글짓기 실력으로 여러 곳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시를 읊으면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편안해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고, 그가 곧고 매서운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면 아무리 높은 관리라 한들 꼬리를 내렸다. 그는 워낙에 신념이 뚜렷하고 믿음이 강직한지라 원체 자신이 직접 본 일이 아니면 쉽사리 믿질 않았고, 그로 인해 귀신은 물론이거니와 미신도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 치부해왔다.





" 그렇다면 윤 진사가 그 고을에 원님으로 부임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윤 진사가 귀신을 믿지 않는다면 귀신을 보아도 놀라지 않을 터이니, 각지에 떠도는 흉흉한 이 소문들도 사라지고, 윤 진사는 사람들의 믿음을 얻고! 이것이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

"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 뭘 그리 고민하오? 요컨대 사내대장부로 태어났다면 후에 묘지에 남길 업적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혹, 다시 생각하니 윤 진사도 귀신이 무서운 것인가? "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김 진사께서 그토록 원하신다면야, 제가 한 번 가보겠습니다. "



옆에서 속을 살살 긁어오는 김 진사에 홧김에 자신이 직접 그 고을의 원님이 되어보겠노라, 라고 말해버린 윤 진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김 진사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김 진사는 윤 진사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모두 윤 진사의 말을 들었느냐는 둥, 윤 진사라면 그럴 줄 알았다는 둥 큰소리를 쳤다.




" 어쩌자고 그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




어느덧 그 고을로 떠나기 전날 밤이 되었고, 윤 진사는 어둠으로 뒤덮인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자고 김 진사의 말에 분개해서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괜스레 느껴지는 찝찝함에 고개를 내둘렀다. 이런 자신의 마음도 모르는지 유난히 밝게 떠오른 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윤 진사였다.






내일이 다가오지 않길 바랐건만, 야속한 해는 매일 그랬듯 제시간에 동쪽에서 솟아올랐다. 동이 트자마자 출발한 윤 진사를 태운 말을 뒤로 그의 하인 수십 명과 짐을 실은 말들이 이어졌다. 편치 않은 마음을 다잡고 한양을 떠난 지도 어느덧 보름이 지났고, 마침내 저 멀리서 고을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 ...이 곳인가, "



윤 진사를 비롯한 그의 일행이 고을에 다다르자 한 남자가 그들을 시끄럽게 맞이했다.



" 아이구, 윤 진사님 오셨습니까!? 귀한 분이 이렇게 누추한 곳에 부임하시다니 저로서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요. "



실실 웃으며 자신을 소개하는 이는 윤 진사의 밑에서 일을 볼 김 아전이었다. 만나자마자 사탕발림으로 아부를 떨어대는 김 아전에 윤 진사는 벌써부터 자신의 고된 앞날이 보이는 듯 했다. 김 아전을 따라 관아로 가 짐을 푼 윤 진사의 일행은 길고 긴 여정을 마쳤다.






첫날이라 일이 없던 터라 윤 진사는 하인 몇을 데리고 고을 구경에 나섰다. 실로 아름다운 고을이었다. 뒤에는 높은 산이, 앞에는 맑은 강이 흘러 배산임수의 조건을 완벽히 갖추었다. 냇가에서는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어른들은 작은 정자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새참을 노나 먹었다. 이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니 윤 진사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게 되었다.


' 이런 곳에서 자연을 즐기다 돌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


그렇게 고을의 절경에 취해 이리저리 구경을 다니다 보니 해가 떨어진 지 오래요, 벌써 달이 휘영청 떠올라 은은하게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윤 진사는 시간이 늦은 것을 깨닫고 관아로 돌아갔다.




" 도련님, 평안히 주무시옵고,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



하인들은 인사를 하고는 행랑채로 들어가고, 넓은 사랑채에 홀로 앉은 윤 진사는 호롱불을 켜놓고 먹을 갈았다. 이내 붓을 들고는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 윗사람의 바르고 곧음이 중요하니, 항상 신중하게 행동하고 끊임없이 바른길로 걸어가면 어찌 하늘이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않겠는가. ]




윤 진사가 글을 다 써갈 무렵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병풍이 넘어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가려던 차에, 문득 김 진사의 말이 생각났다. 모든 원님이 부임한 지 하루도 안 되어 귀신을 봤다며 도망을 갔다고 하였다. 그 말인즉슨 원님이 새로 부임한 날 밤마다 귀신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윤 진사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려 애써 글에 집중하려 하였으나, 계속해서 기괴한 소리를 내며 불어오는 바람과 흩날리는 낙엽 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윤 진사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하고 제 자리를 정리했다. 이부자리에 누우려 호롱불을 끄려던 찰나에, 어디선가 바람이 휙 불어와 호롱불이 꺼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울음이 섞인 말소리.





" 원님.. 원님.. 부디 저를 가엾게 여겨 저의 한을 풀어주십시오.. "




턱 막혀오는 숨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실로 귀신이 제 앞에 나타난 것인가. 온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아직 창창한 앞날이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이 나이에 벌써 이렇게 세상을 뜨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니 이왕 이렇게 된 거 귀신의 얼굴이나 마주해보고 죽자고 다짐하게 되었다. 윤 진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다시 호롱에 불을 붙였다. 다시 밝아지는 주위에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봤더니 한 소년이 윤 진사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톡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작은 체구와 깡마른 몸, 창백하고 핏기없는 얼굴. 윤 진사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눈에는 한이 맺혀 금방이라도 눈물이 투두둑, 하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울음이 가득한 소년의 눈에서 시선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의 눈동자만을 바라보다 소년이 먼저 입을 뗐다.



" 제가.. 무섭지 않으십니까? "




소복을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을 생각하던 윤 진사 앞에 나타난 소년은 무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섭다고 하기에는 소년이 너무나도 투명하고 순수해 보였다. 품에 안으면 한 팔에 들어올 것 같은 소년이라서, 제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아서, 오히려 동정심이 새어 나왔다.



" 어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

" 지금까지 오셨던 원님들은.. 모두 저를 보고는 하얗게 질려 도망가셨습니다. 제가 무서운 게 아니라면, 그분들이 대체 왜 그러셨겠습니까. "



울먹거리는 소년에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년을 품에 안을 뻔한 윤 진사,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소년에게 제 앞에 와서 앉으라 말했다. 소년은 잠시 멈칫하는 듯 하더니 쭈뼛쭈뼛 걸어와 윤 진사를 앞에 마주하고 조심스레 앉았다. 윤 진사에게 소년은 보면 볼수록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이름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인지. 이런 사소한 질문부터 깊은 질문까지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 .. 이름이 무엇이냐, "

" 박민혁.. 이라 합니다. "

" 민혁, 민혁이라.. "




" 고운 이름이구나, "




윤 진사의 말에 소년, 민혁은 움찔하고 놀란다. 제 이름을 저리 다정하게 불러주는 이도, 제 눈을 깊게 바라봐주는 이도 없었다. 민혁은 가슴 속에서부터 일렁이는 울컥함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감추려 애를 썼다.



" 왜 울지 않으려 하는 것이냐. 네 눈은 이미 눈물로 가득 차 있는데, 어째서 그토록 눈물을 가리려 하느냐. "




윤 진사의 말에, 결국 울음이 터져버리고 마는 민혁이었다. 지금껏 모두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거나 혀를 차기 바빴는데, 윤 진사는 그렇지 않았다. 진심 어린 목소리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윤 진사로 인해, 민혁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굵은 눈물을 방울방울 흘렸다.




" 원님은 저같이 별 볼 일 없는, 살아있지도 않은 미천한 것에게 왜 이리 잘해주시는 것입니까. "



가까스로 눈물을 추스른 민혁이 윤 진사에게 되물었다. 매번 원님들을 찾아가 제 한을 풀어달라고 애원했지만, 모두들 저를 보고서는 화들짝 놀라 꽁무니를 빼기 바빴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라는 생각으로 윤 진사의 앞에 모습을 비추고는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고 그저 도망가지 않기만을 바랐는데. 그는 제 이름을 물어봐 주고, 제가 얘기를 할 때면 가만히 앉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살아생전에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저를 보며 이름이 곱다 해주고, 상처로 가득 찬 자신을 알아준 이도, 윤 진사뿐이었다.





" 아파 보였다, 네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참으로 안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네 눈 속에서는 그저 아픔밖에 느껴지질 않는구나. 그 아픔은 세상을 떠나게 된 원통함으로부터 온 것이냐, 그간 살아오면서 느꼈던 슬픔이 겹쳐진 것이냐. "

" 혹 괜찮다면, 네가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구나. "




민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입을 떼기 시작했다. 어려서의 민혁은 여느 아이들과 같이 화목한 가정에서, 부모님께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살아갔다. 부유하지 않아도 어머니 아버지와 민혁, 셋이 웃고 떠들며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갔다.


그렇게 행복한 날들을 보내던 것도 잠시, 민혁의 어머니는 하루하루 생기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용하다는 의원을 불러봐도 무슨 병인지를 알아내지 못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술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하고, 어머니의 병세는 점점 안 좋아지던 그 무렵의 어느 날.


민혁은 어머니께 밤새 잘 주무셨는지 인사를 드리려 방으로 들어갔다.




" 어머니, 밤새 평안히 주무셨습니ㄲ, "



그러한 민혁의 눈에 비춘 것은, 여기저기 피를 토한 채로 싸늘하게 식어버린 어머니였다.





" ...어머니, 사람들이 다들 울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우시고, 큰어머니도 우시는데... 근데 저는, 저는.. 눈물이 나오질 않습니다.. 제가, 이상한 것입니까...? "



이상하게도 민혁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 무거운 것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을 뿐. 주변 어른들은 울지 않는 민혁을 보며 독한 놈이라며 수군댔다. 앞에서는 안 됐다며 동정심 어린 눈빛을 보내던 이들도 뒤에서는 민혁을 손가락질하며 파렴치한 냉혈한으로 몰아갔다.



사람들의 시선과 곱지 못한 말들은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어린 소년의 심장을 찢어버렸다. 시간이 흐르고 민혁은 그런 것에 무뎌져 갔지만, 한 번 조각조각 찢어진 소년의 심장은 다시 원래대로 맞춰지지 못했다.





몇 해가 지났고, 민혁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전과 달라진 것은 키가 조금 컸고, 깊고 반짝이던 눈망울이 이젠 한으로 가득 차 보는 사람들마다 눈을 피하고 고개를 내두르는 것, 그것뿐이었다. 민혁의 아버지는 집을 나가 종일 술병을 옆에 끼고 살았고, 그 때문에 민혁은 사람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텅 빈 집에서 일어나고, 또 홀로 외로이 잠을 청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 인사해라, 네 어머니 될 사람이다. "



몇 달간 집에 들어오지 않던 아버지가 민혁에게 던진 첫 마디였다.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더러 어머니가 될 사람이라 말했다. 민혁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보다 두 살 아래인 그 여자의 아들은 민혁의 동생이 되었다. 처음엔 그이들과 같이 살게 된 이후로는 아버지가 집을 잘나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민혁의 앞에는 또 다른 지옥들이 끊임없이 펼쳐진 채 그를 맞이했다.




" 넌 내 말이 우습니? 내가 새어머니라고 깔보는 거야? 어머, 얘 눈 또 이렇게 뜨는 것 좀 봐. 어디 눈을 그렇게 치켜뜨고 어른을 올려다봐! "



짝,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아버지 앞에서는 항상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던 새어머니는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여기를 닦아라, 저기를 쓸어라 하며 민혁을 한껏 부렸다. 동생이라는 아이는 그런 민혁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하루 온종일 드러누워 자고 먹고 놀고 만 반복했다. 민혁은 조금이라도 싫은 체를 하면 뺨을 맞기 일쑤였고, 고된 하루가 끝나면 매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몇 달이 지나갔다. 해가 내리쬐던 여름은 물러가고 어느덧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날이 되었다. 아버지는 외출하시고, 동생은 놀러 나가고, 새어머니는 손님과 함께 차를 마시고. 민혁은 손님 눈에 띄지 말라는 새어머니의 분부를 듣고 제 방에 틀어박혀 있다 손님이 안채로 들어가자 그제야 밖으로 나와 마당의 눈을 쓸었다. 홀로 마당을 쓸며 해야 할 일을 곱씹던 민혁은 우당탕하고 열리는 대문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 ...! 손, 손에.. 피..! "



대문 앞에는 손뿐만 아닌 온몸에 피를 묻히고 창백하게 굳어있는 동생이 보였고, 파르르 떨리는 그의 두 손에서는 피가 한 방울씩 투둑, 하고 떨어졌다.



"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내가 조용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ㄴ, "



뒤이어 밖으로 나온 새어머니도 그 광경을 보고는 멈칫하더니 곧 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버선발로 동생에게 뛰어갔다.



" 무슨, 이게 무슨, 일이냐.. "

" 어머니, ㅈ, 제가 사람을, 죽인 것 같습니다.. "




사건은 그러했다. 제 벗과 함께 놀러 나간 민혁의 동생이 한 패거리와 싸움이 붙었고, 싸우던 도중 동생에게 밀쳐진 이가 돌에 머리를 박아 그대로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새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서둘러 손님을 배웅했고, 이내 민혁의 동생과 함께 안채로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아마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듯 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마루에 앉아있던 민혁은 착잡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제가 저지른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생이라는 아이가 사람을 죽였다니. 마음씨 착한 민혁으로서는 착잡할 만도 하였다.






그렇게 며칠간 새어머니와 동생은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오래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께는 말씀을 드리지 않은 듯했다.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일주일째, 민혁은 새어머니와 동생이 함께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며칠 만에 안채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하였다. 한참 후, 방에서 나온 동생은 자꾸만 민혁의 쪽을 쳐다보다 눈을 피했고, 새어머니는 그런 동생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민혁은 멀어져가는 그 둘을 바라보다 아버지의 부름에 방으로 달려갔다.



" 민혁아, "

" 네 아버지. 말씀하시지요. "



굳은 얼굴로 자꾸만 뜸을 들이는 아버지에 민혁은 눈치를 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 내 너를 그리 키웠더냐, "

" 예....? "

" 끝까지 모른체 하려는 것이냐! 네 어머니에게 모두 들었다. 밖에 나돌아다니며 싸움을 한 것도 모자라, 사람을 죽여! "




그제야 민혁은 알게 됐다. 왜 새어머니와 동생이 그리 오래도록 방 안에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두 동생의 잘못을 저에게 떠넘기기 위한 것이었다. 저의 동생이 제 눈을 피한 것도, 몰래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것도. 이렇게 되리란 것을 알아서였으리라. 머리를 무언가로 얻어맞은 듯 온 세상이 울렸다. 이미 초점을 잃은 시야는 자꾸만 뿌예졌고, 아버지의 말은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 더 말할 것도 없겠구나, 당장 짐 싸서 나가거라. 그 두꺼운 낯짝을 디밀며 이 집에 들어올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아라. "




제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모두 새어머니가 꾸민 짓이라고. 크게 소리 내어 뱉고 싶은 말이 가득한데, 목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민혁은 아버지의 방을 나온 그 길로 대문을 나섰다. 아무것도 없이, 찬 바람이 매몰차게 부는 길을, 얇은 옷 한 벌만 걸치고 그저 걷고 걸었다. 많고 많던 생각들을 하나둘씩 지우고, 있어 봐야 독이 될 뿐인 감정들도 버려내며.



나는 왜 이렇게 기구한 삶을 살게 됐을까, 왜 세상엔 내 편이 없는 걸까. 같은 생각도 사라지고 체념 아닌 체념을 하며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게 저의 운명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다시 돌아간다 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것이라고.





눈보라가 몰아치던 밤, 그렇게 민혁은 눈밭에 쓰러진 채로 희미해져 가는 세상을 뒤로했다.







" 세상을 떠나면 저승으로 향하는 것이 맞지만, 저와 같이 가슴에 맺힌 한이 너무나도 큰 혼령들은, 누군가 한을 풀어주기까지 이승을 떠나질 못하여.. 지금껏 이렇게 이승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




민혁은 이야기를 끝마치고 난 후에도 아무 말이 없는 윤 진사에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윤 진사는 민혁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민혁이 윤 진사의 품에 안기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이윽고 뒤통수를 감싸오는 윤 진사의 손길에 민혁은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는 꼴이 됐지만, 윤 진사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가만히 민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미안하구나. "





얼마 동안이나 그러고 있었던 것일까. 윤 진사는 다시 민혁의 눈을 바라보고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너를 너무 늦게 알아서, 더 빨리 너를 알아주지 못해서. 자신이 조금만 일찍 이곳에 왔더라면 민혁을 그 괴로운 곳에서 구해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쓰라렸다. 민혁 또한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품 속, 따뜻한 온기에 가슴이 저려왔다.




" 내가 어찌해야.. 너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것이냐. "




민혁의 한을 풀어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줄 것 같은 윤 진사였다. 그만큼 민혁이 안타깝고, 또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평범한 아이들처럼 해맑게 웃으며 살아갈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불행으로 가득 차다 못해 넘친 삶을 살고 또 죽어서까지도 제게 상처만을 남겨준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민혁에 자신의 마음도 아파왔다.



" 무엇이든 네 한을 풀기 위한 것이라면 내 힘써서 도와줄 것이니, 얼른 말해 보아라. 네 부모와 동생에게 죄를 물어 벌해주기를 원하느냐. "

" 아닙니다, 제 가족들은 그저 내버려 둬 주십시오.. 단지, 무덤을 하나 파고 그 앞에서 제 혼을 기려주셨으면, 합니다. "

" 정말 그것이면 되겠느냐, 그것이면 너의 한이 다 풀리겠느냐. "





굉장히 소박했다. 몇 년 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제 삶을 짓누르고 밟아 결국 못 쓰게 만들어버린 깊은 상처들인데. 무덤을 파고 혼을 달래주기만 하면 된다니. 새어머니와 동생이 제가 아팠던 만큼만 아프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게 해달라, 같은 것을 예상했던 윤 진사는 뜻밖의 대답에 놀라 한다.




" 네 새어머니와 동생이 밉지도 않느냐, 그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한창 아름다울 나이에 이승을 떠날 일도 없었겠거늘... "

" .. 사실 조금은 미운 것 같습니다. 아니, 밉습니다. 저를 두고 먼저 떠나버리신 어머니도 밉고, 모든 것을 제게 덮어씌운 새어머니와 동생도, 아버지도.. 헌데 어찌하겠습니까, 하늘이 정한 제 운명이, 이토록 기구한 것을.. 다시 돌아간다 해도 어차피 바뀌지 않을 운명인데, 미워하고 탓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 죽도록 미워하는 것보다는, 잡으려 애를 써봐도 손 틈새로 흘러가는 물처럼 그냥 흘려보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





덤덤히 말하는 민혁이였지만, 그의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직도 제 삶을 되돌아보면, 너무나 끔찍한 악몽 같았다. 그런 민혁의 마음을 아는지, 윤 진사는 다시 한번 민혁을 제 품 안에 안았다.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지만, 민혁의 귀에는 윤 진사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왔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창호지 틈 사이로 들어오는 약한 빛에 민혁은 윤 진사의 품에서 제 몸을 빼냈다. 동이 트고 있었다. 민혁은 서둘러 제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원님께서 제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셨으니, 제 한을 풀어주신다면 소리 없이 조용히 고을을 떠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



윤 진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민혁의 옷자락을 잡았다. 민혁을 계속 제 눈 속에 담고 싶었다. 어디 가지 않고, 제 옆에만 붙어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큰 욕심이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이기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 민혁아, "

" 오늘 밤도, 내게 와줄 수 없겠느냐. "

" 내일 밤도, 사흘 후에도.. 너가 매일 밤마다 이곳으로 와줬으면 좋겠구나, 떠나기 전까지만이라도.. "




윤 진사의 절절한 눈과 마주한 민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시는 누구든 사람과 가까운 관계를 맺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해왔는데, 그 생각들은 모두 다 작은 파편들로 쪼개져 사라진 것 같았다. 저절로 입이 열렸고,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 그리하겠습니다. "




그제야 제 옷자락을 잡은 손이 떨어졌고, 아직 서로에게 다 말하지 못한, 하고 싶은 말들을 꾹꾹 눌러 담은 채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저 멀리 흐려져 가는 민혁의 뒷모습을 향해 살며시 손을 뻗어보는 윤 진사였다.








뜬눈으로 밤을 지샜지만 오늘은 유난히 몸이 가벼웠다. 밖으로 나가니 쾌청한 가을 하늘이 탁 트인 채 윤 진사를 맞이했다. 가을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 서늘한 바람도 이곳저곳에서 불어왔고, 마당에는 낙엽들이 떨어져 굴러다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하인들도 하나둘씩 나와 저마다 할 일을 하러 흩어졌다.




" 도련님, 김 아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 들라 하여라. "




하인이 대문을 열자 곧 김 아전이 나타났다. 김 아전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윤 진사를 마주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져 곧장 윤 진사의 앞으로 달려왔다.




" 어찌 아직도 이곳에 계신단 말입니까? "

" 꼭 내가 다른 곳으로 가길 바랐던 것 같소. "

"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옵고, 여태까지 오셨던 분들은 항상 이튿날이 되자마자 부랴부랴 짐을 싸 다시 한양으로 향하셨기에.. "




모두 민혁을 보고 놀라 도망치듯 뛰쳐나온 것이겠지. 윤 진사는 아른거리는 지난 밤의 기억에 벌써부터 민혁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해가 떠올랐는데, 어찌 어둠이 몰려오는 밤까지 기다려야 할까. 민혁의 생각은 애써 뒤로 하고 김 아전에게 물었다.




" 혹시 이 고을에 박민혁이라는 소년이 있소? "

" 저어기 저 논 뒤편에 사는 박 씨의 아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 아이는 몇 개월 전에 사라졌다가 후에 눈밭에서 죽은 채 발견됐습니다. 어렸을 때만 해도 밝고 총명했는데, 어머니를 잃고 나서부터 말도 잘 하지 않다가.. 결국 그렇게 됐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한데, 그 아이는 갑자기 왜...? "

" 아무것도 아닐세. 누가 하는 이야기를 주워듣다 괜한 호기심이 생겼나 보오. "




김 아전에게 민혁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코가 시큰해져 왔다. 흰 눈밭에 쓰러져있는 민혁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듯 했다. 얇디얇은 옷 한 벌만 걸치고, 창백하게 식어있는 민혁의 모습.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풍경이었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윤 진사가 원님으로 부임한 지 이틀째. 지난밤의 일이 너무나도 생생해 아직도 손을 뻗으면 민혁을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늘따라 시간이 느리게 굴러가는 것 같았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언제쯤 민혁을 볼 수 있을지 생각하며 민혁을 그리워하는 윤 진사였다. 그러던 중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와 관아의 대문 앞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윤 진사의 귀에 들려왔다. 이번 원님은 도망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온 듯했다.



" 뭐시여, 귀신이고 뭐고 모조리 뻥이었던 것이여? 이번 원님은 아무 일도 없어보이는구만. "

"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왔던 원님들은 다 혼비백산해서 버선발로 뛰쳐나갔는디.. 귀신을 봤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것 아녀? "

" 에잉 다른 원님들이 다 도망간 것을 보면 엄청나게 무서운 귀신 아니겠는가! 그런 귀신을 보고도 저렇게 편안하다면 사람이 아니여.. "



귀신을 본 것도 맞고 사람인 것도 맞는데. 대놓고 떠벌릴 수는 없으니 속으로만 생각하며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는 윤 진사였다. 워낙 규모가 작은 고을이라 처리해야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집마다 호구 조사를 한다던가, 세금으로 낼 곡식을 걷는다던가. 이마저도 김 아전과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하니 윤 진사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고을을 거닐다 불현듯 민혁의 생각이 나 김 아전에게 말을 걸었다.



" 이보시오 김 아전, 내 하나 부탁할 것이 있소. "

" 예 원님, 뭐든 부탁하십쇼. 전부 원하시는 대로 맞춰드리겠습니다! "



지치지도 않는지 쉬지 않고 알랑방귀를 뀌어대는 김 아전에 윤 진사는 고개를 젓다 이내 말을 이어간다.



" 혹시 이 고을에 빈 땅이 있소? "

" 빈 땅이야 널리고 널렸습죠...! "

" 그렇다면 빈자리를 찾아 무덤을 하나 만들어 줄 수 있으시오? 최대한 조용히. "

" 예? 무덤을 파달라뇨...? "

" 이 고을이 풍수지리가 좋아 부모님의 무덤 자리를 봐두려 하오. 기왕이면 기운이 좋은 곳으로 알아봐 준다면 고맙겠소. "

" 아이구, 그런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제가 며칠 이내로 싹 준비해놓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쇼. "



정정하신 부모님의 무덤 자리를 벌써부터 알아놓다니. 윤 진사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애꿎은 옷매무새만 다듬었다. 단순한 김 아전이었기에 별 의심 없이 그대로 믿는 듯했다. 양심에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민혁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일이니.








윤 진사는 해가 떨어지자 서둘러 하인들을 행랑채로 들여보내고, 김 아전도 집으로 돌려보냈다. 민혁을 다시 보게 될 생각에 어느 때보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민혁이 오기 전까지 글공부나 하자, 하고 책을 폈지만, 머릿속이 이미 민혁으로 가득 찬지라 도통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책을 덮고 세월아 네월아 하며 민혁을 기다렸다. 몇 시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윤 진사는 목을 빼고 민혁을 기다리다 저도 모르게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잠이 들어버렸다.






" ... 원님? "



윤 진사는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는지 민혁이 저를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종일 꿈에만 그리던 민혁을 드디어 눈에 담게 된 윤 진사는 민혁을 향해 눈이 휘어지도록 활짝 웃어 보였다.



" 민혁아, 와주었구나. 혹여나 네가 다시 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였다. "

" 다시 오겠다고 약조하였으니, 지켜야지요. "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며 말하는 민혁이였다. 쌍꺼풀이 진하게 진 큰 눈, 살짝 상기된 뺨과 그 밑으로 붉은 입술이 윤 진사의 눈에 들어왔다. 앵두같이 발그레하고 오동통한 입술이 자꾸만 시선을 끌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람을 홀린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지금껏 봐왔던 기생들이 빨갛게 칠해놓은 입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톡 치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붉게 물든 입술.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민혁의 입술을 집어삼키고, 탐하고 싶었다.



" 왜 그리 빤히 쳐다보십니까, 부끄럽습니다.. "



민혁도 윤 진사의 시선이 제 입술에 고정돼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 윤 진사를 만났던 날부터 알았다. 자신이 그를 보고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감사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것을. 처음 느껴보는 복잡하고 또 난잡스러운 감정이었다. 곧 이승을 떠날 운명인데, 어쩌자고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되어버린 것일까.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민혁이었지만, 제 손가락에 매여 있는 붉은 실의 끝에 윤 진사가 있었으면 했다.





" 참으로 곱구나. 곱다, 고와.. "



결국 민혁의 입술에 손을 뻗어버린 윤 진사였다. 천천히 민혁의 입술을 쓰다듬어 보았다. 길고 얇은 손가락이 입술을 스칠 때마다 살짝씩 벌어지는 민혁의 말캉한 입술과 흔들리는 동공이 이성을 자꾸만 흔들었다. 민혁은 벌써 윤 진사의 손가락에 제 입술을 맡긴 지 오래였다. 부드럽게 입술을 헤집으면서도 저를 똑바로 바라보던 윤 진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이번엔 누구도 눈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양심의 가책은 집어치운지 오래, 그저 윤 진사의 손가락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허리에 힘이 풀려버린 민혁이 중심을 잃어 고꾸라질 뻔하였으나, 윤 진사가 재빨리 허리를 받쳐주어 넘어가지는 않았다. 허나 요상해진 자세에 윤 진사는 멋쩍게 웃으며 민혁의 허리에 둘렀던 손을 풀었다. 귀는 빨갛게 물들이고, 손만 꼼지락대는 민혁에 다시 한번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나를 대하기가 부끄러운 것이냐, "

" ㅇ, 아닙니다.. "

" 헌데 왜 자꾸 내 시선을 피하느냐.. "

" 그런 것이 아니고...! "




민혁이 고개를 살짝 올리자마자 두 손으로 민혁의 양 볼을 잡아 오는 윤 진사였다. 당황해 눈만 꿈벅이고 있는 민혁과는 달리 싱긋 웃어 보이며 민혁의 눈이 저를 향하도록 고정했다.



" 이제 되었다. 계속 말해 보아라. "

" ...원님께서 곱다 해주시니 저도 모르게 눈을 맞추기가 부끄러웠나 봅니다.. "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끝말을 흐리는데, 그 모습이 윤 진사의 눈에는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그냥 민혁이라서 귀여운 것일지도.








"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 왜 벌써 가려고 하느냐.. 내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냐..? "



일부러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곧 동이 틀리라는 것도, 민혁이 가야 할 시간이 왔다는 것도 알았지만 또 민혁을 기다려야 한다니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했다.




" 아니, 아닙니다! 단지 곧 동이 틀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던 것입니다.. "

" 오늘도 종일 너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냐, "

" ..... "




아무런 대답도 않던 민혁도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민혁도 마찬가지였지만,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또다시 방 안을 비춰오는 야속한 해에 약속이라도 한 듯 둘 다 한숨만 푹 내쉬었다.




" 그럼 진짜로, 가보겠습니다.. "

" 내일 밤에도 또 올 것이지..? "




아직도 민혁이 갑자기 떠나버릴까 두려워하는 윤 진사의 물음에 이번에는 민혁이 살며시 웃어 보이며 말했다.



" 내일 밤에도, 모레 밤에도 또 오겠습니다. 곧 만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



민혁의 말에 온 얼굴에 미소를 그리던 윤 진사의 볼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윤 진사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민혁은 뒤도 안 돌아보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멍하게 앉아있던 윤 진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사람을 혼을 쏙 빼어놓는 재주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윤 진사는 이른 아침부터 꼭 뭐에 홀린 사람마냥 실실 웃음을 흘리고 다녔다. 홀렸다면 홀린 것이 맞을지도. 민혁의 입술이 제 볼에 닿던 순간의 촉감이 잊히질 않았다. 가슴이 자꾸만 몽글몽글 녹아내렸다. 당황해 쩔쩔매던 민혁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이렇게 앙큼한 짓을 할 줄이야.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도, 아름드리 뻗은 나무도, 수확을 기다리며 고개를 숙인 벼도. 오늘따라 모두 아름다워 보였다. 뭘 하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벌써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오늘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듯했다. 아직 민혁을 보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했지만 괜히 기분이 들뜨고 붕 날아갔다. 저만치에서 김 아전이 윤 진사를 부르며 걸어왔다. 윤 진사도 오늘만큼은 김 아전의 아부를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원님, 먼젓번에 말씀하셨던 무덤 말입니다. 제가 직접 이 고을에서도 가장 명당이라는 곳을 꼽아놨습니다, "



그제야 잊고 있었던 무덤 생각이 퍼뜩 들었다.



" 아.. 고맙네. 무덤을 다 만들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아시오? "



아무렇지 않은 척 물으며 마음속으로는 오래 걸리기만을 바랐다. 빨리 만들어질수록, 민혁과 함께할 수 있는 날들은 점점 줄어들어 갔기 때문에. 많이는 바라지도 않으니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민혁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 제가 빠릿빠릿한 놈들만 모아서 시켰으니, 아마 오늘 안에는 다 끝날 것입니다! "

" ...알겠네, 고맙소. "

" 아유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러십니까~ 다음에도 부탁하실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




사람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허리를 굽신대며 웃어 보이는 김 아전에 대충 미소로 화답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오늘 내로 완성된다니. 민혁과 함께할 밤은 오늘 밤이 마지막인 듯했다. 아직은 안 되는데, 벌써 이렇게 민혁을 떠나보낼 수는 없는데. 허망한 표정으로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터벅터벅 걸었다. 아침과는 사뭇 다른 윤 진사의 분위기에 어느 누구도 말을 걸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방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 도련님.. 저녁, 드셔야죠.. "



여전히 묵묵부답인 채 비어있는 눈으로 허공만 빤히 응시하는 윤 진사에 저녁상을 내온 하인도 한숨을 내쉬며 도로 나갔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인지 눈에 초점이 잘 맞춰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누구인지도 분간하지 못했다. 하인이겠거니, 하고 신경 쓰지 않았으나 터벅터벅 걸어와 제 앞에 앉는 누군가에 흐릿한 초점을 되찾아보려 눈을 찌푸렸다.






" 저.. 원님 혹시 제가 온 것이 불편하십니까...? "




귓가에 파고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저절로 시야가 또렷해졌다. 넘쳐나는 생각들에 시간을 퍼 나르다 보니 벌써 민혁이 올 시간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민혁을 못 알아볼 수 있냐며 저 자신을 꾸짖는 윤 진사였다.





" 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팔렸나 보구나. 절대 네가 불편하거나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라...! "

" 괜찮습니다. 한데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고 계셨길래 제가 들어오는 것도 몰라보신 것입니까? "





뾰로통한 얼굴로 물어오는 민혁에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속마음은 너무나도 착잡했다. 민혁은 이 밤이 아마도 우리가 만날 마지막 밤이라는 것을 알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눈물을 흘릴까. 생각들이 빠르게 머리를 훝고 스쳐 갔다. 잠시 머뭇거리던 윤 진사, 이내 민혁의 두 손을 잡고 입을 열었다.




" 그.. 무덤, 말이다. 내일쯤이면, 완성될 것이라고 하더구나.. "




민혁은 그저 잠자코 있었다. 윤 진사와 마주 잡은 손만 바라보며 이리 대봤다, 저리 대봤다 하며 의미 없는 손장난만 쳤다. 윤 진사는 아리송한 민혁의 마음에 불안한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사실 민혁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저가 방금 들은 말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 밀어내고 싶었다. 한이 풀리면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이승을 떠날 텐데, 찢기고 쓸렸던 상처들마저 두고 떠나갈 텐데, 왜 가슴 한켠이 저려오는지 의문이었다.






" 민혁아, "

" ...... "




제 이름을 불러오는 윤 진사에 하던 짓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봤다. 눈을 마주하자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들던 감정은 한순간에 거칠게 변해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하고 올라왔다. 톡, 투둑. 한 방울씩 흘러가던 눈물이 하염없이 소매를 적셨다.



" ㅇ, 원님.. 흐윽, "

" 저는 싫습니다,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





가장 떠나고 싶었던 곳이 어느새 계속 머무르고 싶은 곳이 되어있었다. 과거에 의해 산산이 조각났던 민혁의 심장은 이미 윤 진사에 의해 꿰매져 아물어있었다. 제 손을 부여잡고 엉엉 우는 민혁을 보는 윤 진사의 가슴도 찢어져 갔다. 민혁을 떠나보내기 싫은 마음은 윤 진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민혁을 위해서라면, 보내야 했다. 턱 끝까지 올라오는 눈물을 애써 달랬다.




"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매일 밤 이곳에서 원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

" 가야 한다, 민혁아.. "

" 왜 자꾸 마음에도 없는 말로 저를 보내려 하십니까, "





대답 대신에 눈물로 얼룩진 민혁의 눈에 입을 맞췄다. 너에게 아픔만을 남겨준 이 세상을 너와 함께할 자신이 없구나, 라는 마지막 말은 일부러 삼켜내고 가슴 구석에 깊숙이 묻었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콧등을 타고 내려와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놀란 민혁의 입이 살짝 벌어지자마자 두 개의 혀가 서둘러 얽혀들어 갔다. 다가올 헤어짐은 잠시 뒤로 하고 격렬히 서로의 입술만을 탐했다. 이 순간 야살스럽게 엉켜있는 혀가 무엇보다도 뜨겁고 달았다. 민혁은 벅차오는 숨에 윤 진사의 어깨를 급히 잡았고, 그제야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은색 실이 야하게 늘어졌다.





" 하아, 하.... "





한껏 풀린 눈, 볼 위로 남아있는 눈물 자국,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 모든 것이 윤 진사를 자극하고 있었고, 결국 다시 한번 민혁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질척하게 혀를 섞는 소리로 가득 찬 방은 후끈 달아올라 더운 기가 가득했다. 윤 진사는 자연스레 민혁을 눕히고는 급히 옷고름을 풀어나갔다.




민혁은 적나라하게 풀어헤쳐 진 제 옷이 부끄러운지 팔로 눈을 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의 목에 입술을 부벼대는 윤 진사에 흠칫 놀라며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려 그의 목을 감았다. 목을 잘근잘근 물며 혀를 감아 핥아오는 생소한 느낌에 온몸이 간지럽고 녹아드는 듯 애가 탔다. 이를 세워 여린 살을 훑고, 치골을 뭉근하게 누르자 몸을 파르르 떨더니 먼저 입을 맞춰오는 민혁이었다. 자극을 받음과 동시에 곧이곧대로 반응해오는 민혁의 몸에 윤 진사도 아래가 묵직해져 왔다. 마지막으로 남은 얇은 천 한오라기까지 벗겨내고 온몸에 구석구석 입을 맞추며 한 손으로는 민혁의 앞을 자극했다.



" 아흑, 읏... 흐..! "



민혁의 다문 입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윤 진사의 어깨를 잡아 오며 허리를 들썩이는 민혁의 몸에 하나둘 붉은 꽃잎들을 남겼다. 민혁이 신음을 참으려 제 입술을 깨물자 혹여나 고운 입술이 상할까 손가락을 물리고 다른 손으로는 배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달뜬 눈으로 제 입속의 손가락을 야하게 핥아오는 민혁에 윤 진사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이성의 끈 한 가닥마저 내려놓았다. 한순간에 얇은 허리께에 걸쳐있던 바지를 내려버리고, 민혁의 것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위아래로 몇 번 흔들자 민혁이 짧게 신음했고, 동시에 민혁의 것에서 뿌연 액이 울컥하고 뿜어나왔다.



" 원님, 흑, 하윽.. 느낌이, 이상, 합니다.. 흐읏..! "



이내 윤 진사는 서둘러 제 옷도 벗어 던지고 제 것을 민혁의 뒤에 끼워 맞췄다. 곧 제 뒤에 가득 들어찬 윤 진사의 것에 민혁은 눈가에 눈물을 방울방울 매달았다. 윤 진사가 허리를 쳐올릴수록 민혁의 허리는 낭창하게 휘어 자극을 전부 받아내려 애썼다.






" 민혁아, 너를, 너를... 연모한다. "

" 저도 마찬가지, 히끅, 입니다.. "




서로에게 사랑을 고하며 쉴 새 없이 허리를 놀렸다. 끝내 민혁의 배에 파정한 윤 진사, 민혁을 제 품에 꼭 껴안아 주었다. 민혁은 아직 여운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숨을 색색 몰아쉬다 윤 진사의 품에 고개를 묻으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세상에 단둘만 있는 것처럼, 눈동자 속에 서로를 가득히 담아냈다. 마지막 순간. 이 순간이 지나면 더이상 볼 수 없을 것이기에 더욱 애틋하게, 더욱 완전하게 서로를 담아냈다.








" 원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제 한도 풀어주시고.. 원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아마 평생 이곳을 떠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



애써 웃어 보이며 말하는 민혁이였지만 눈에는 눈물이 떨어질 듯 말듯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그런 민혁을 바라보던 윤 진사도 눈물을 삼키며 쓰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 늘 진심으로 보잘것없는 저를 대해 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도 원님을 잊지 않을 테니 제가 떠난다고 하여도 부디 오랫동안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가끔은 제 무덤에 찾아와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눠주시고.. 저는 가만히 듣고 있겠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항상 곁에 있을 것입니다. "

" 내가 널 어찌 잊겠느냐, 항상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젠가 다시 만나자꾸나. "

" 언젠가, 언젠가는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날이 오면 처음 만났던 날처럼, 꼭 안아주십시오, "





울지 않으려 했는데, 마지막까지 눈물지으며 떠나고 싶진 않았는데. 너무 슬퍼서, 아니 지금까지의 기억이 너무나도 행복해서, 결국 눈물샘이 터져버린 민혁이었다.






" 이제 정말로 가보겠습니다, "

" 그래, 몸조심하고, 그곳에서는 편히 푹 쉬어라.. "





민혁의 한을 풀어준 것도, 가야 한다고 말했던 것도, 모두 저인데. 민혁을 붙잡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함께 하자고 소리치고 싶었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옷을 여미고 일어서는 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마 붙잡지 못했다, 소리치지 못했다. 윤 진사는 문고리를 잡고 머뭇거리는 민혁을 보며 속으로 외쳤다. 가지 말아라, 내 곁에 있거라, 제발..




잠시 윤 진사를 돌아보더니 결국 문을 열고 나서는 민혁이었다. 민혁의 그림자마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윤 진사는 삼켜왔던 눈물을 토해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흐리게 변했다. 한을 풀어달라며 제 앞에 나타났던 민혁이, 자신의 품에 안겨 눈물짓던 민혁이, 이제는 떠나버린 민혁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은 민혁도 마찬가지였다. 제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던, 다정하게 저를 바라봐주던, 따뜻하게 품 안에 안아주던, 윤 진사의 모습이 새록새록 기억났다. 이제 막 사랑을 틔우려던 참인데. 멀어지는 관아를 보며 둘을 갈라놓는 하늘을 원망했다.








아침은 또다시 밝아왔다. 윤 진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을 나서려다 제 뒤를 돌아봤다. 민혁의 허상이라도 떠다니면 민혁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텅 비어 차가운 기운이 가득한 방에 마음이 찢어져 갔다. 힘들게 방을 나서니 분주히 돌아다니는 하인들이 보였다. 그 후로는 기억이 나질 않는 윤 진사였다. 그저 계속 허망한 마음을 안고 사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모르게 걷고, 밥을 먹고, 또 일을 했다.





" 원님..! 부탁하셨던 무덤이 다 완성되었답니다. 한 번 보러 가시겠습니까? "

" 내 나중에 가서 보도록 하겠네, 지금은 잠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





윤 진사는 김 아전에게 무덤이 어디 있는지 묻고는 후에 홀로 무덤을 찾아갔다. 외진 길을 따라가다 산길로 들어 조금 더 걸으니 무덤이 보였다. 김 아전의 말대로 손꼽히는 명당인지 기운이 곧고 맑았다. 준비해 간 과일, 약소한 주전부리, 그리고 술잔과 술을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 술을 따라 한 잔은 무덤에 뿌리고, 한 잔은 저가 들이켰다. 혀에서 목을 타고 전해지는 술이 오늘은 왜인지 달게 느껴졌다.



" 지금쯤이면 갔으려나, "



무덤 옆에 앉아 민혁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민혁의 앞에서는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자고 다짐하며 밝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 민혁아, 오늘은 하늘이 참 맑구나. 네가 가는 날인 것을 하늘도 아셨는지 저리도 푸르게 펼쳐져 있다. 너는 무얼 하고 있는지가 궁금하구나. 벌써 그곳에 도착하였는지, 그곳은 좀 어떠한지.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다. 내 잘 기억해뒀다가 후에 너를 만나면 모두 물어볼 터이니 언제가 되었든 한 번쯤 다시 만나길 소원한다, "






그렇게 민혁의 무덤 앞에서 혼잣말을 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즈음 돌아갈 채비를 했다. 내일 또 보자꾸나. 작별 인사를 남기고 발걸음을 뗐다. 그날은 일부러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밤이 오면 혹여나 민혁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멀리 떨쳐내고 잠을 청했다. 꿈속에서 눈을 뜨니 윤 진사는 제 방에 누워있었다.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켜는데 방문이 열려 고개를 돌렸다.





이젠 꿈속에서도 민혁이 제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덧없이 행복한 마음뿐이었다. 꿈속이라도, 헛된 상상 속이라도 민혁의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 민혁아.. 보고 싶었다. 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아느냐, 네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



꿈속의 민혁은 싱긋 웃어 보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윤 진사는 민혁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들떠 홀로 떠들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며, 무덤에 갔던 이야기며 모두 말하고 난 후에도 민혁은 여전히 가만히 앉아 미소만 지어 보였다.



" 어찌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이냐, "



대답은 않은 채로 제 저고리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보이는 민혁이었다. 자그마한 복주머니를 윤 진사의 손에 쥐여주고는 환하게 웃었다. 밝은 미소와 함께 저 뒤로 민혁의 모습이 조각조각 흩어져 날아가기 시작했다.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던 민혁의 마지막 파편이 사라짐과 동시에, 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잘 간직해주십시오, "





멍하니 넋을 놓고 흩날리는 파편들만 지켜보던 윤 진사, 귀에 들어오는 민혁의 목소리에 퍼뜩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제 손에 쥐어있는 복주머니를 조심스레 열어 안에 있는 것을 꺼내 보았다.



붉은 동백꽃 한 송이가 들어있었다. 윤 진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동백꽃을 깊이 살펴보았다. 겨울에 피어나야 할 꽃이 선선한 가을인 지금 제 손에 들려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보다도, 민혁이 왜 떠나며 이 꽃을 주고 간 것인지가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이 난데없는 동백꽃이라니.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지만 민혁이 건네는 작별 인사라고 생각하며 동백꽃을 소중히 그러쥐었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떠보니 또 같은 자리에 누워있었다. 이번에도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보았다. 따끔했다. 얼마나 민혁을 그리워했으면 꿈에 나올까 싶었다. 하늘이 불쌍하게 여기고 잠시 민혁을 제 꿈속에 보내줬던 것일까. 한숨을 쉬며 일어나는데 머리맡에 무언가가 손에 스쳤다.





" 어째서 이것이 여기에..? "



꿈속과 똑같이 생긴 복주머니가 제 베개맡에 놓여있었다. 혹시나 하고 열어서 안을 들여다보니, 마찬가지로 붉은 동백꽃 한 송이가 들어있었다. 꿈이 아니었던 것일까, 정말 민혁이 다녀갔던 것일까. 꿈속에서 들었던 민혁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귀에 울리는 듯했다. 잘 간직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전해주고 싶었던 선물인 듯했다. 윤 진사는 동백꽃을 복주머니에 도로 넣고는 제 저고리 안주머니 속에 복주머니를 넣었다. 그러고는 민혁의 말에 답이라도 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 다시 만날 때까지, 꼭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








윤 진사는 그 후에 민혁을 다시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매일 민혁의 무덤에 찾아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었고, 민혁이 그리워질 때마다 복주머니 속 동백꽃을 꺼내 보았다. 이상하게도 동백꽃은 몇 달이 지나도 시들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파릇파릇해졌다.





반대로 윤 진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췌해져 갔다. 허구한 날마다 원님이 바뀌어 불안감이 감돌던 고을은 평화로워진 지 오래였고, 사람들 사이에 떠돌던 귀신 타령도 알게 모르게 사라졌다. 일도 잘하고 베풀 줄 알았기에 두터운 신임을 얻었지만, 점점 말라가고 생기를 잃어가는 윤 진사에 고을 사람들은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 원님 말이여~ 갈수록 너무 말라지시는 것 같지 않은가? 저러다 픽하고 쓰러지실까 봐 무서워 죽겄어.. "

" 그러게 말이여..! 밥도 꼬박꼬박 챙겨 드시는 것 같고, 배를 곯으시는 것도 아닌디 왜 수척해지시는 것인지 모르겠네.. "

" 참말로 걱정이여, 일도 잘하시고 마음씨도 좋으신 분이.. 처음에 오셨을 때만 해도 저리 마르시진 않으셨는디, "

" 그러기만 했는가? 아주 눈동자가 빛났지 빛났어! 지금은 눈동자에도 생기가 없고 꼭 텅 비어있는 것 같당께... "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에도 불구하고 윤 진사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져 갔다. 결국 옆에서 지켜만보던 하인들이 윤 진사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저 도련님, 이제 그만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기운도 없으시고 건강도 좋지 않으신 것 같으니 한양에서 푹 쉬시며 벗들도 만나시고, 어머님도 만나 뵙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리던 윤 진사였지만, 어머님이 부르시고 또 하인들이 애원하니 어쩔 수 없이 다시 한양으로 떠나게 되었다. 고을을 떠나던 날, 윤 진사는 마지막으로 김 아전을 찾아갔다.




" 이보게 김 아전, 내 한양으로 돌아가도 그 무덤을 잘 봐줄 수 있겠는가. "

" 당연하죠 윤 진사님! 제가 매일같이 찾아가 잡초도 깎고 주변도 깨끗이 정리하겠습니다..! "

" 고맙네, 내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네.. "





그렇게 김 아전에게 몇 번이고 당부한 후에야 말에 올라타는 윤 진사였다. 아득히 먼 기억 저편에서 고을에 처음 왔던 날이 생각났다. 그날은 가을이었는데, 어느덧 겨울이 시작된 지 오래였다. 아마 그날 밤, 민혁을 처음으로 만났을 테다.





" 처음에는 그리 오기 싫어했는데, 지금은 떠나고 싶지가 않구나. "





시간이 지나도 민혁의 기억은 여전히 그대로, 잊히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직도 윤 진사는 언젠가 민혁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한양에 도착해서는 정신없이 바쁜 만남을 가졌다. 어머님부터 친척 어르신들까지 인사를 드려야 했다. 윤 진사가 오랜만에 찾아왔다며 술상을 내오라고 하는 어르신들의 옆에 앉아 있자니 정신이 아주 쏙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어째서인지 한양에 와서 더욱 몸이 쇠약해지는 것만 같았다. 모든 친척분들을 뵙고 나서는 술 한 잔씩 걸치자는 벗들과의 만남에 시달렸다. 오늘도 김 진사의 손에 붙잡혀 끌려가다시피 벗들과의 모임에 갔다. 벌써 한 잔씩 마신 듯 다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말은 배배 꼬였다.




" 자자, 오늘의 주인공 윤 진사가 오셨다네! "

" 아이구 윤 진사 내 술 한 잔 올리겠네~ "

" 이게 얼마 만인가 자네..! 어서 잔들 들고, 건배하세 건배- "




분위기에 휩쓸려 주는 대로 한 잔 두 잔 술을 홀짝였다. 오늘따라 술이 달았다, 마치 민혁이 떠나간 그 날처럼. 난데없이 머릿속을 파고드는 민혁의 기억에 머리가 울렸다. 시끄러운 말소리, 술잔을 기울이는 소리, 모든 것이 머리를 아프게 했다.




" 한데 윤 진사, 정말로 그 고을에 귀신이 있었는가? "



김 진사로부터 시작된 질문이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윤 진사는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어 보이는 편을 택했다. 귀신이 없다고 말하기엔 민혁과의 만남을 부정할 수 없었고, 있다고 말하기엔 귀찮고 골치 아픈 질문들이 잇따를 것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에.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저도,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만 있는 저도 이기적이라 생각됐다.






그렇게 한 잔 두 잔이 열 잔이 되고 한 병이 되어가자 조금씩 몽롱한 기운이 감돌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집으로 돌아간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눈을 떠보니 익숙한 제 방의 천장이 보였다. 당장 일어나면 휘청거리다 자빠질 것이 분명했기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문을 열고 하인을 불렀다.





" 예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

" 그래, 물 한 잔만 가져다 다오. "





차가운 물을 들이키고 나니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듯 했다. 조금씩 조금씩 어제의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원체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일뿐더러 잘 마시지도 못하는 윤 진사는 생각 없이 술을 퍼마신 어제의 자신을 자책했다.








" 저 도련님, 어머님께서 부르십니다. "



알겠네. 짤막하게 대답한 후 한숨을 내쉬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직 정신이 온전치 않아 비틀거리다 문지방에 발을 찧기까지 했다. 아픈 발은 뒤로 하고 어머니가 계신 안채로 향했다.





" 어머니, 소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 들어오거라. "



윤 진사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 앉아 계신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 산하야, 요새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더구나. 혹시 아픈 곳이나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것이냐. "

"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




겉으로는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속에서는 무엇인가 마음을 마구 답답하게 누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머니 앞에서 어찌 민혁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을까. 제가 한 남자아이와 입술을 맞추고 배를 맞댔습니다 라는 사실을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당장이라도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 것 같았다. 그 아이는 귀신이고, 자신이 여태까지 그 아이를 못 잊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말씀드리면 까무러쳐 돌아가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알았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한양에 돌아왔으니 나가서 장구경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하고 오는 것이 어떻겠느냐. "




사람 구경이라면 충분히 한 것 같았지만 어머니께서 저리 말씀하시니 싫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사실, 몇 개월 만에 나서는 한양 장구경도 마냥 나쁘지마는 않을 것 같았다. 윤 진사는 나갈 채비를 한 후 저도 같이 가겠다 하는 하인을 잘 달래 들여보내고 홀로 집을 나섰다.







얼마만의 한양인지. 윤 진사는 그동안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막상 한양의 도심, 시내를 누비고 다니지 못했다. 오랜만에 한양 시내를 걸으니 느낌이 색달랐다. 어젯밤에 눈이 내렸는지 소복하게 쌓인 눈으로 하얗게 물들어있는 담장들. 눈 위에 사람들의 발자국이 새겨진 길을 따라 쭉 늘어선 상점들에는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기 바빴다.




" 저기 저 명나라에서 들여온 비단 사세요~ "

" 맛 좋은 곶감 사가세요~~ "

"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신작이 나왔습니다! 어서들 오셔서 차례대로 줄 서시지요, 줄! "




비단이며 과일이며 책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윤 진사의 눈길을 끈 것은 누빔 저고리였다. 윤 진사에겐 쌔고 쌘 것이 누빔 저고리였지만 왜인지 발걸음은 이미 누빔 저고리 집에 다다라 있었다.




" 따뜻해 보이는구나.. "




풍성한 털로 뒤덮인 누빔 저고리를 보고 있자 하니 민혁의 얇은 옷이 생각났다. 한겨울에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얇은 옷을 입고 걸어가던 민혁의 모습이 또 한번 그려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윤 진사의 손엔 복슬복슬한 누빔저고리가 들려있었다.



" 허, 이게 무슨.. "



푸스스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민혁을 위해 저고리를 사놓다니, 충동적으로 벌여놓은 일이었다. 그 후로는 무슨 물건을 봐도 민혁이 떠올랐다. 민혁이 거울을 들여다보다 뒤를 돌아 해맑게 웃는 모습이 그려져 거울을 사고, 민혁의 머리칼을 빗어주는 상상을 하다 머리빗을 사다 보니 어느새 짐이 한 무더기가 됐다. 자꾸만 허공에 민혁의 모습이 아른거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윤 진사였다.






발걸음이 가는 대로 걷다 잠시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윤 진사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너는 없구나 민혁아. "



민혁만 없었다, 윤 진사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민혁만. 있을 리가 없지, 라고 생각해봐도 괜스레 슬픈 마음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애써 민혁의 생각을 떨쳐내고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윤 진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도 민혁이 눈앞에 아른거리는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여전히 익숙한 모습이 걸어가고 있었다.






무작정 그이에게 뛰어갔다. 달리고 달려 어깨를 움켜잡으니 깜짝 놀라며 그이가 뒤를 돌았다.





쌍꺼풀이 진하게 진 큰 눈, 그리고 붉은 입술. 민혁과 닮았다, 아니 똑같았다.





" ㅇ, 왜 그러십니까...? "

"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





떨리는 마음으로 이름을 물었다. 당황해 눈만 굴리던 그이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 박, 민혁이라 합니다.. 헌데 저를 아십니까..? "






기쁜 마음과 놀라운 마음이 넘쳐 물밀듯이 밀려왔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도 전에 행동이 멋대로 먼저 나갔다. 윤 진사는 그대로 제 품 안에 민혁을 안았다. 다시는 민혁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더욱더 꼭 안았다.




" 민혁아.. 어찌 이제 내 앞에 나타나느냐.. 내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




처음 보는 이가 대뜸 제 이름을 묻더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저를 안아 오니, 민혁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를 안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지, 이것은 또 무슨 상황인지 알 겨를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품 안이 너무나 포근하고 따뜻했다. 익숙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맡기고 가만히 안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 고맙구나, 다시 나를 찾아와주어서. "






민혁을 소중히 안고 있는 윤 진사의 뒤로 동백꽃의 꽃잎이 아름답게 흩날렸다.









[ 동백꽃의 꽃말 : 기다림 ]
[ 붉은 동백꽃의 꽃말 :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