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단아 그냇줄을 밀어라 / 괌하 (춘향전)
네번째2020. 4. 10. 23:22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ㅋㅋㅋㅋㅋ]
[아 잠시만] 02 : 35
[어] 02 : 35
[뭐해?] 09 : 03
[바빠?] 17 : 10
성훈아 자?
손끝이 전송 버튼 주변을 맴돈다. 공연히 눈에 띈 액정 구석의 먼지만 문질러 닦아낸 나는 이내 얕게 숨을 내쉬며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덮어놓았다.
자겠지, 미국은 지금 한창 새벽일 테니까. 벌렁 침대에 몸을 던지자 시린 하늘 가득 벚꽃 잎이 흐드러진 광경이 액자에 담긴 그림마냥 창문에 걸려 있었다. 나의 어제와 오늘과 지난 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동안 나만 쏙 빼놓고 어느새 봄이다. 이성훈이 떠난 후로 맞는, 두 번째 봄.
‘그래도 자기 전에 연락 좀 해주지.’
바쁠 테니까 내가 이해하자며 혼자 마음을 달래 보아도 성훈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휴대폰이 끝도 없이 눈을 감고 있을 때면, 나 역시 액정 속 암흑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누구는 저 때문에 매일 얕은 쪽잠만 자고 수면부족에 시달리는데. 더 급한 쪽이 나인가 보지.
또다시 가라앉는 기분에 침대 옆에 떨어져 널브러진 병아리 인형을 주워 꽉 끌어안았다. 그새 연락이 왔을까 켜본 화면에는 행복하게 웃고 있는 우리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질 뿐인, '우리'.
“보고싶어, 성훈아.”
**
“형.”
“...”
“형!!"
"응? 어, 미안. 뭐라고?"
원망 섞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어김없이 원망 섞인 얼굴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또 그 사람 연락 기다려요?"
"어."
"그 사람이 무슨 이몽룡이라도 돼요? 왜 형만 기다려요."
"내가 춘향이 팔자인가 보지."
"그럼 난 뭐예요?"
"글쎄. 향단이?"
속도 모르고 놀리는 산하가 얄밉기도 했지만 걱정해주는 마음은 알고 있었다. 아랫집 꼬마였던 녀석이, 훌쩍 커버려선 남 팔자까지 걱정해주는 대학생이 되었다. 공부도 뒷전이더니 보란 듯이 나와 같은 곳에 진학한 것도 용하다. 기어코 민혁이 형네 학교에 가겠다 우겨 담임선생과 부모님을 얼척없게 만들던 고삼 윤산하를 떠올리자 새삼 웃음이 돋았다.
"그래서 왜?"
"교양 과제 했냐고 세 번은 물었거든요."
"무슨 과제?"
"최 교수님 과제요. 내일 낮까진데."
"아... 헉."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정말 정신을 놓고 살긴 하는 모양이었다. 하다하다 산하에게 한 소리 들을 짓을 하다니. 과제를 까맣게 잊은 것보다도 윤산하가 무시하는 게 더 불쾌해서 한숨이 절로 배어나왔다. 인생 뭘까... 봄이 왔는데, 유학간 애인은 잠수나 타고, 과제도 밀렸고, 윤산하놈은 이제 신이 나서 날 놀려먹겠지.
"형 오늘 오후 내내 수업 있잖아요."
우와, 내 시간표까지 꿰고 있네. 울화가 치밀어 쳐다본 산하의 얼굴은 뜻밖에 장난기 대신 염려를 띠고 있었다.
"나 자료 쓰고 남은 거 있는데."
"그런데?"
"그거 주면,"
"...?"
"나랑 주말에 데이트 해줄래요?"
그러마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한낱 학점의 노예일 뿐이고, 산하와 시간을 보내는 건 솔직히 나쁘지 않다는 걸 아니까. 거창하게 데이트라기에 무슨 계획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저녁 때가 다 되도록 산하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혼자 미리 밥을 먹어야 할지 말지 울리지 않은 휴대폰과 눈치싸움을 하던 내가 전화를 걸자 그제서야 집 앞 포장마차로 날 불러냈다. 그리곤 평소와 다름없이 마주앉아 돼지껍데기에 소주나 들이키는 게 전부였다.
나도 모르게 기대라도 했던 건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날 더 비참하게 만든 것은 윤산하의 연락을 기다리는 내내, 성훈에게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우울은 우울을 먹고 불어났고, 나는 공기만 들어찬 나를 채우기 위해 술을 들이부었다. 윤산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했고, 나는 형식적인 대답을 마주던졌다. 머리도 속도 엉망이었다. 분명히 기억나는 건 그 다음부터다.
"형, 좀 천천히 마셔요."
잔을 빼앗으려 손을 뻗는 산하에게 화를 내려던 순간,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그 때 나는 그걸 확인하지 말았어야 했다. 성훈의 SNS에 올라온 영상을, 그 안의 성훈을, 그의 품에 안겨 입을 맞추고 있던 이름 모를 여자애를.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잠시만'은 점점 길어졌고 때로는 한나절이 될 때도, 또 며칠이 될 때도 있었다. 불안이 커질수록 나는 성훈을 몰아붙였다. 그의 말이 텅텅 비어버릴 때까지, 결국 이렇게 날 목조를 때까지.
영상은 몇 초 되지 않아 삭제되었고, 그토록 기다리던 성훈의 연락이 쏟아졌다. 그의 이름 옆에 숫자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나는 한 층씩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온 몸이 조각나는 끔찍한 기분에, 내 어깨를 감싸는 윤산하를 붙잡고 그대로 입술을 물어버렸다. 나는 그렇게 내가 여기에 있다고, 날 봐달라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외쳐댔다. 그래야 내가 나를 놓지 않을 것 같아서, 나조차 나를 잃고 싶지 않아서.
산하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를 붙잡고 집으로 끌고 들어갈 때도,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부벼댈 때도 내게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그의 손길은, 마냥 따뜻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이용했다.
**
"형, 미안해요."
짧게 끊어지는 교성과 숨소리 끝에 정적만 이어지던 공간 속에서 산하가 입을 열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무어라도 떠올리면, 내가 받은 상처가, 너에게 준 상처가 전부 진짜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미안, 미안해요.. 형 기다릴 거 아는데, 반지가 없어서.."
"무슨 소리야."
"미안해요. 반지가 없어져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미안.."
"...허."
취했나. 나보고 천천히 마시라더니. 난 정신도 못 차리는 애를 데리고 뭘 한 거지. 조금씩 돌아오는 현실감에 뼈를 타고 두려움이 퍼졌다.
"그래도 말할래요."
"뭘."
"좋아해요."
"뭐?"
"내가, 이도령은 못 돼도, 어, 그래도 향단이가 더 낫지. 나는 형 절대 안 떠나요. 맨날 옆에 붙어있는데.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
"향단이도 기회 한 번 주시면 안 되나요, 아가씨."
"누가 아가씨냐.."
메말라 갈라진 곳 위로 서서히 무언가 움트기 시작한다. 기다림과 기다림으로 지쳐가던 땅에, 나는 누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봄이 찾아온다. 생각지도 못하던 씨앗이, 생각지도 못하던 양분을 먹고 언제 이렇게 자라났나. 곧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가지가 굵어지면 그네를 매달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그런 기적이 생긴다면.
"향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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