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XX / 키르 (D-20)

첫번째2018. 12. 31. 19:35



D-XX

 

w.키르

 

민혁이 핸드폰 옆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산하와 같이 찍은 화면 위로 시계와 함께 ‘80이 떴다. D-20. 지금으로부터 고작 삼 주 남짓한 시간. 그 날은 산하가 성인이 되는 날이자 사귄지 100일 째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민혁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을 특별한 이벤트를 하고 싶었다. 민혁이 생각하기엔 그 특별한 이벤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키스밖에 없었다. 특별한 첫 키스. 민혁은 절대 산하와 키스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정말로.’ 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산하와 민혁은 사귄지 백일이 다 되도록 키스 한 번 못해본 순수 결정체 커플이었다. 그래서 민혁은 백일과 성인 기념 이벤트로 산하에게 키스를 선물하기로 얼렁뚱땅 결정지었다. 다시 한 번 절대 산하와 키스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고 하도 심하게 부정하는 민혁에 그 특별한 이벤트를 도와주러 민혁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 드림 스토어까지 친히 와준 진우는 뭘 그렇게까지..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민혁의 귀가 잔뜩 붉어졌다. 그런 민혁에 진우가 키스하고 싶은 게 어때서? 좋아하니까 키스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잖아 하고 말하자 무엇을 상상하는 건지 민혁의 얼굴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진우는 그런 민혁을 조금 놀려볼까 하다가 목까지 빨개진 민혁의 얼굴이 곧 터질 것 같아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다고?”

 

.. 평범하게 말고 좀 특별하게 하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안나서..”

 

 

시무룩한 민혁을 바라보다 진우는 생각해냈다. 이벤트에 관한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며칠 전 게임에서 산하가 자신의 뒷통수를 거하게 친 것이. 실력도 레벨도 안 돼서 복수도 못하고 배신감에 눈물만 삼켜야 했던 그 날. 그 날을 떠올리니 이벤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먼지 한 톨만큼도 남지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 키스를 성공하게 도와주지? 그러나 그러기엔 앞에 앉은 민혁이 여직 얼굴이 붉은 채로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윤산하 도우려는 게 아니라 민혁이 도우려는 거니까.. 생각을 해보자. 그러나 순조롭게 도울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윤산하에 대한 배신감이 너무 컸다. 그래서 진우는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빙빙 돌리기로 못된 마음을 먹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기대하고 있는 민혁이한테는 좀 미안했지만.

 

 

일단 깜짝 이벤트일거야. 그렇지?”

 

.”

내일부턴 산하 말고 나랑 다니자.”

 

?!?!”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귀가 아파요-!”

 

미안.. 근데 내가 왜 산하랑 말고..”

 

형이 그렇게 싫니..”

 

 

진우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민혁은 다급히 도리칠 쳤다. 민혁은 진우가 싫은 게 아니라 산하랑 계속 같이 다니고 싶었을 뿐이었다. 진우는 놀리는 족족 반응이 오는 민혁이 귀여워 민혁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이벤트 준비하러 다녀야지. 깜짝 이벤트라면서 산하랑 같이 다니게?”

 

...”

 

 

민혁은 진우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산하와 같이 다니는 시간이 줄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거리를 두라는 건 너무하지 않냐 하며 꿍얼댔다. 진우는 새삼 민혁이 산하를 정말 많이 좋아한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다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진우는 깜짝 놀라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뱉을 뻔했다. 산하가 유리창이 뚫릴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하고 죽일 듯이 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거지. 진우는 원치 않게 심장이 롤러코스터 타는 것을 경험했다. 진우가 아메리카노를 뱉을 뻔하자 더럽다는 듯 찌푸려지던 민혁의 얼굴이 창밖의 산하를 보고 환하게 펴졌다. 민혁과 눈이 마주치자 산하는 카페로 곧장 들어왔다.

 

 

민혁이형!”

 

산하야!”

 

 

떨어져 있으면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무슨 이산가족 상봉하는 것 마냥 구는 둘에 진우는 혀를 내둘렀다. 산하는 사실 밖에서 카페 유리창을 통해 민혁을 발견했을 때는 마냥 기분이 좋았는데 그 앞에 앉아있는 진우가 민혁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순간 기분이 급격히 아래로 떨어졌다. 거의 마감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그러니까 이 야심한 시간에 둘이 마주앉아 웃는 것도 모자라 지금 누구 머리를 만지는 거지.

 

산하는 질투가 꽤 있는 편이었고 그 사실은 진우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민혁을 귀여워하는 걸 아니꼽게 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진우는 자신이 따로 애인이 있는 것도 모르고 자신한테 적개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산하가 그저 귀여웠다. 굳이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말 안하는 이유는 글쎄, 진우는 그냥 이 귀여운 커플을 놀리는 게 즐거웠다. 어쩌면 이렇게 게임의 복수를 하는 건지도. 산하는 얼굴을 굳히고 민혁의 어깨를 팔로 감싸고는 딱 붙어 앉았다. 민혁은 산하가 왔다는 게 그렇게 좋은지 산하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이 진우와 있을 때와 확연히 달랐다. 진우는 이렇게 표정관리를 못해서 깜짝 이벤트는 어떻게 하려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애인이 보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진우는 생각한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산하랑 그렇게 오래 못 보는 건 싫어.. 그냥 내가 알아서 해볼게]

 

 

민혁이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해보겠다며 문자 하나 달랑 남기고 연락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못 보면 얼마나 못 본다고.. 진우는 난 지금까지 뭘 한 것인가 허탈했다. 커플 염장만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보고.. 선심 한 번 써보려고 했더니. 하긴 선심도 아니었다. 빙빙 돌리려 했으니까. 진우는 그래 니들 알아서 해라 하고는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얘네한테 시달리고 나면 항상 애인이 보고 싶어진다니까..

 

 

 

 

 

 

 

 

 

 

그 시각 민혁은 카페에 앉아 다시 아이디어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준비하는 동안 산하랑 붙어있을 수 있으면서 산하가 깜짝 놀랄 만한 이벤트가 뭐가 있을까. 날짜는 어느새 10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각나기는커녕 마치 어제 교수님이 내준 리포트에 써야할 내용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0일 동안 생각한 거라곤 고작해야 남산타워 가기, 장미꽃다발 주기, 레스토랑 가기 였다. 물론 다 기각이었다. 남산타워는 너무 추울 것 같고 장미꽃다발은 너무 흔했다. 그리고 레스토랑은.. 둘 다 취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기집을 가자니 키스에서 고기 맛이 날 것 같고. 게다가 다 너무 뻔했다. 전혀 특별하지 않고 남과 다를 것이 없었다. 민혁이 원하는 것은 특별한 이벤트였다. 여러 조건을 따지다보니 결국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진우 형한테 전화를 걸어볼까 핸드폰을 들었다가 잔소리만 잔뜩 들을 것 같아 박진우 형를 누르려던 손을 움직여 울 애깅이를 눌렀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컬러링인 의 가사가 채 들리기도 전에 울 애깅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산하야. 어디야?”

 

[.. 난 당연히 학교죠. 아직 학생이잖아요.]

 

아 맞다.. 고삼이 아닌 것 같아서.. 언제 끝나?”

 

[저 고삼이 아닌 것 같아요? 옛날에는 막 어리, 산하 너무 어려 이랬는데 고삼이 아닌 것 같다고요?]

 

아니.. 그게 아이고.. 이제 다 컸다 이 말이제..”

 

[됐어요, 나 삐짐. 이따 학교 끝나면 나 데리러 와요.]

 

... 그럴까?”

 

[지금 망설였죠. 너무해.. 형이 변했네.. 형이 변했어..]

 

무슨 소리고;; 내가 무슨, 내 데리러 갈께!”

 

[형 당황했네ㅋㅋㅋㅋ 좀 귀엽네요, .]

 

귀엽다 그것 좀.. 귀여운 건 너지, 고딩아.”

 

[저 곧 있으면 성인이거든요?]

 

알아. 그래서 그런데 31일에 만날래? 같이 있자.”

 

[되게 로맨틱한 데이트 신청이네요. 근데 당연한 거 아니었나?]

 

“...그만 끊어라

 

[형 지금 부끄럽지. 역시 귀엽다. 그럼 끝나면 전화할게요!]

 

 

전화를 끊고 민혁은 그대로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민혁의 얼굴은 찜질방에 몇 시간 있던 사람마냥 잔뜩 열이 올라 뜨거웠다. 겨우 고등학교 3학년 미자 주제에 매번 저를 설레게 하는 산하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 기분이었다. 잠시 행복에 젖어있다 문득 생각난 건 이벤트였다. 아 맞다, 이벤트. 민혁은 다시 고뇌에 빠졌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빈이 아이스 초코를 한 모금 마시고 민혁을 살폈다. 얘 또 왜 이래?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빈이 그러거나 말거나 민혁은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했다. 그런 민혁의 얼굴 앞에 손을 두어 번 휘저어 본 빈은 민혁이 반응이 없자 불퉁거리며 말했다.

 

 

야 특별한 게 뭐 별 거 있냐? 그냥 어? 서로 사랑하는 둘이 같이 있으면 어딜 가던 뭘 하던 특별한 거지.”

 

 

민혁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유레카!’ 민혁은 계속 뭐라고 쏟아내려는 빈의 얼굴을 덥석 잡고는 말했다.

 

 

. 내가 초코우유 사줄까?”

 

 

그러자 빈은 민혁의 손을 툭툭 치며 양 볼이 눌려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대꾸했다.

 

 

처커우유 말거 아이스 처커.”

 

 

같은 초코우유이면서 가격만 배로 비싼 아이스 초코를 요구하는 빈에도 민혁은 웃으며 흔쾌히 카드를 긁었다. 빈의 말 대로였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이벤트 같은 것이 없어도 서로 사랑하는 둘이 같이 있으면 어딜 가던 뭘 하던 특별한 것이 되는 거였다. 민혁은 왜 이걸 이제 알았을까 하면서도 그래도 키스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일이자 성인 되는 날에 첫 키스라는 게 특별한 건 맞잖아? 이쯤 되면 민혁이 산하와 키스가 너무 하고 싶은데 산하가 미자여서 참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민혁은 그냥 연애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날에 키스 할걸..? 하고 생각한 것뿐이었다. , 아마도.

 

 

 

 

 

 

 

 

 

 

D-7. 고대하던 크리스마스, 였는데. 산하와 민혁의 크리스마스는 예상치 못하게 대단히 시끄러워졌다. 민혁의 자취방에 불쑥 찾아온 산하가 문을 열자마자 내민 선물을 열어보고 민혁도 산하에게 선물을 줄 때까지만 해도 참 평화로웠는데. 단둘이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허상이 된 것은 동민이형이며 빈이형, 명준이형까지 양손 가득 비닐봉투를 들고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미 산하와 크리스마스 계획을 다 짜놓은 민혁은 집이 엉망이 되어도 좋으니 산하와 단둘이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색하게 웃으며 나가려는 산하가 붙잡힌 순간, 그 바람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행님들, 솔직히 크리스마스에는 커플끼리 보내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커플지옥 솔로천국 몰라? 내가 솔로인데 어떻게 커플끼리 보내게 해.”

 

 

사악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동민에 민혁은 움찔, 했다. 아 저 형 얼마 전에 헤어졌지... 간절한 눈으로 빈이형을 바라보았으나 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과자를 뜯는 데에 집중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케빈과 함께!”

 

 

동민의 외침과 동시에 티비를 틀고 과자를 먹으며 시끄럽게 구는 형들을 황망히 바라보며 민혁과 산하는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형들이 각자 과자와 티비에 집중할 때쯤 민혁과 산하는 둘을 제일 예의주시하고 있던 명준이 화장실 간 틈을 타 탈츨에 성공했다.

 

둘이 도착한 곳은 영화관이었다. 영화관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나온 커플들이 가득한 걸 본 산하가 민혁의 손을 잡았다. 민혁이 놀라 올려다보자 산하는 괜찮다며 웃었다. 미리 예매해놓은 영화를 보기 전 팝콘과 음료를 사고 상영시간이 될 때까지 잡은 손을 꼬물거리며 꽁냥거리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민혁아! 박민혁 맞지?”

 

민석이..?”

 

오랜만이다. 내가 핸드폰이 초기화 돼서 연락을 못 했어.”

 

진짜 얼마만이야. 나는 너 대학가서 다른 친구들이랑 노느라 안하나 했다.”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 핸드폰 번호 좀 알려줘.”

 

알았어. 근데 넌 여기 어쩐 일이야?”

 

오랜만에 가족끼리 영화 보러 왔어. 근데 옆에는.. 너랑 친한 동생 맞지? 크리스마스에 왜 둘이 있어?”

 

아 이건...”

 

민혁이형이랑 저랑 거의 뭐 가족이거든요. 그쪽도 크리스마스에 가족끼리 영화 보러 온 것처럼 그런 거죠.”

 

.. 그럼 나 먼저 가볼게. 연락할게.”

 

그래 잘 가.”

 

 

민석이 손을 흔들며 사라지자 산하는 연락은 무슨.. 하고 중얼거렸다. 민혁은 왠지 모르게 산하의 눈치가 보였다. 너보다 형인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하려다 산하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말 못했다. 내가 잘못 한 거 없는데 왜 눈치가 보이지...

 

 

형 저도 이제 거의 성인이에요. 이런 것쯤은 이해 할 수 있.. 있어요...”

 

 

아닌 것 같은데... 뭐라 달래보려는 순간 예매한 영화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 얼른 산하를 끌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섰다. 좌석에 앉고 불이 꺼지고 나서도 산하의 얼굴은 불퉁했다. 민혁은 산하의 기분을 풀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가족 맞잖아, 결혼하면.”

 

 

산하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조금만 더 하면 풀릴 것 같은데. 민혁은 망설이다 주변을 재빨리 살피고는 삐죽 나온 산하의 입술에 뽀뽀했다. 산하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애써 내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말하고는 부끄러워하는 민혁의 모습이 귀여워 산하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려는 것을 그만두고 민혁에게 뽀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손을 잡아오는 민혁에 산하는 이미 불가마 속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영화 내내 손을 잡고 있느라 조금 불편했지만 그런 것쯤이야. 잡은 손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놓지 않았다.

 

 

 

 

 

 

 

 

 

 

이제 산하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D-3. 앞으로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터라 산하가 성인이 된다는 게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그리고 자신과 사귀고 있다는 것도. 민혁은 그냥 흘러 가는대로 두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가는대로, 분위기가 흘러 가는대로. 산하가 미자에서 벗어나는 것이 조금, 아니 사실 아주 많이 아쉽기는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 식물까지 나이를 먹는 것은 당연했다. 민혁은 이제 특별한 이벤트를 생각해내기 위해 별 핑계를 다 대며 산하와 떨어져 있는 것보단 얼마 남지 않은 산하의 10대를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그래도..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건 산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제일 기분이 이상할 사람은 산하 자신이었다. 그런데 하도 민혁이 이상해하니 오히려 덤덤해진 것 같았다. 그래서 산하는 민혁이 애인이 미자에서 성인이 된다는 것이 참 많은 생각이 드나보다 했다. 이런 귀여운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 산하는 빈이 고구마 920126개는 먹은 것 같다는 소리와 함께 톡에서 마구 쏟아낸 말들을 보고 절로 광대가 올라갔다. 사귄지 백일 되는 기념, 그리고 성인 되는 기념으로 생각한 선물이 키스라니. 산하는 민혁이형다운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키스를 선물하겠다고 열심히 계획을 짜는 민혁을 생각하니 그 귀여움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키스 하고 싶은 거 참느라 힘들었는데, 이렇게 1일이자 100일 되는 날에 첫 키스 하는 것도 특별할 것 같네.”

 

 

산하는 작은 상자 안 두 개의 반지를 떠올리며 웃었다. 새해의 시작이 완벽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D-1. 드디어 전야의 날이 밝았다. 산하와 민혁은 이른 아침부터 만나서 춥지도 않은지 집값 비싼 역삼동을 돌아다녔다. 민혁의 목엔 남색 목도리가 둘러져 있고, 산하의 머리엔 노란 비니가 씌워져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 서로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팔짱 야무지게 끼고 돌아다니며 추운 바람에 상기된 볼이 붉었다. 어쩌면 볼이 붉어진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닐지도. 지나가다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귀가 움직이는 토끼 모자를 서로 씌워주기도 하고 점심도 먹고 연인용 장갑에 손을 넣어 꼭 잡고 마주보며 웃기도 하다가 많이 추웠는지 둘은 카페에 들어갔다. 다행히 커피값은 집값과 다르게 다른 동네 카페와 거기서 거기여서 둘은 각자 딸기 프라푸치노와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시켜 창가에 앉았다. 산하의 손엔 어느새 토끼모자며 연인용 장갑을 포함한 온갖 물건들이 가득 담긴 봉투가 들려있었다.

 

 

너무 과소비 했나.”

 

민혁이형, 어쩔 수 없었어요. 이게 다 형이 귀여운 탓이에요.”

 

또 무슨, 쓸데없이 진지해가꼬..”

 

, 저 궁서체.”

 

“...언제적 드립을 지금 하고 앉았노. 그만 해라.”

 

..”

 

 

카페에서 노닥거리다 보니 거리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둘은 카페를 나와 나란히 걸었다. 시간이 12시에 가까워질수록 말이 없어졌다. 손을 꼭 잡은 두 사람 사이에 옅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민혁은 보기엔 무표정이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매우 떨고 있었다. 12시가 되고 산하가 성인이 되는 동시에 바로 키스를 하려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키스에 대해 아는 거라곤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기본적인 지식과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키스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산하는 성인이 된다는 것도 실감나지 않고 민혁이 키스해오겠지 하는 생각을 하느라 말이 없었다. 그렇게 고요함 속에서 길을 걷다보니,

 

 

-

 

-

 

-

 

 

D-day. 제야의 종이 울렸다. 항상 걷는 집으로 가는 골목길. 민혁은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은 채 멈춰 섰다. 몸을 산하 쪽으로 돌린 민혁이 고개를 숙였다. 산하는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민혁의 붉은 귀를 못 본 채 했다. 이윽고 저를 올려다보는 민혁과 눈을 마주한 산하는 심장이 멎는 느낌을 받았다. 진갈색 눈동자가 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뿌려진 듯 반짝였다. 잠시 멎었던 심장의 떨림이 거세졌다. 한참이나 홀린 듯 그 눈동자를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머뭇거리던 민혁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민혁이형.”

 

, ..?”

 

우리 오늘, 백일. 내가 스무 살 되는 날이 백일이라니 특별하네요.”

 

산하야, 이거..”

 

손 내밀어 봐요. 끼워줄게.”

 

 

민혁의 손 약지에 은색 반지가 끼워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끼워주는 산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민혁은 말없이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많이 사랑해요. 더 오래 사랑해요, 우리.”

 

 

그렇게 말하는 산하의 약지에도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덤덤하게 꺼낸 사랑한다는 말, 사랑하자는 말. 그걸로 충분했다. 사랑한다고 고백해오는 산하가 너무 좋아서 민혁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나 원래 눈물 없는데. 울면 못생겨질 텐데. 그건 싫었다. 애써 눈물을 참고 형아답게 박력있게 계획했던 대로 키스하려 했지만 마음과 다르게 키스하자 쉽게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가는 터라 눈물이 고여 더 빛나는 민혁의 눈에 고정되어 있던 산하의 시선은 민혁의 입술로 옮겨졌다. 붉고 예쁜 입술이 벌렸다 닫혔다 망설이며 오물오물 움직이는데 빨리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형이 말하기 힘들다면 내가. 못 참겠어.

 

 

키스, 해도 돼요?”

 

“...아니.”

 

..?”

 

 

산하는 민혁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다고 생각한 터라 당연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빈이 형이 놀리려고 없는 사실을 알려준 건가..? 좋아서 우는 게 아니라 이제 헤어지고 싶었는데 키스하자고 해서 우는 거였나? 내가 너무 어려서? 이제 성인 됐는데? 산하가 혼자 온갖 삽질을 시작했을 때 민혁은 제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이 산하에게서 나와 처음엔 당황스러웠고, 그 다음은 자신이 생각해왔던 계획이니 자신이 실행하고 싶었다.

 

 

내가 할건데.”

 

 

말이 끝나자마자 한 손으로 산하의 목에 팔을 둘러 가까이 하는 민혁에 가까워진 얼굴. 눈을 질끈 감아 비장해보이기까지 하던 행동과 달리 민혁의 입술은 산하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평소에 하던 뽀뽀보다도 약하게. 입술만 붙인 그 상태로 덜덜 떠는 민혁에 산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갔던 삽질을 단숨에 멈췄다. 부딪혀온 민혁의 입술에서 떨림이 느껴져 살짝 웃고는 민혁의 허리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고개를 꺾어 아랫입술을 머금으니 놀라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산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툴게 움직이는 민혁을 리드했다. 다들 좋다 하길래 무작정 산하랑 키스 해야지 생각하기만 했지 해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해 민혁은 처음 해보는 키스에 기분이 이상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 해 버거웠고, 섞이는 뜨거운 혀가 부드럽고 말캉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온몸에 열이 나고 뱃속이 간지러웠다. 산하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좋았다.

 

그렇게 둘은 사람들이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는 길거리라는 자각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입맞췄다. 입술이 떨어지고, 똑바로 본 민혁의 눈이 조금 풀려있었다. 그건 산하도 마찬가지였다. 풀린 눈에 상기된 얼굴, 젖은 입술을 한 민혁을 보고 어딘가에 힘이 들어간 산하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다 황급히 하늘로 눈을 돌렸다. 민혁은 숨을 고르며 꽤 당황했는지 사투리를 썼다.

 

 

하아... 니 와이리 잘하노..?”

 

나 잘해요?”

 

니 처음 아니제.”

 

나도 처음인데. 형이 내 첫 키스.”

 

거짓말하지 마라.”

 

진짜.”

 

 

항상 다니던 길이, 집 앞이 특별해졌다. 서로가 있기에, 서로이기에.

그래서 특별한 D-XX.

 

유난히 별이 잘 보이는 선명한 겨울밤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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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 윤이 (20번)

첫번째2018. 12. 31. 19:34


늦은 저녁, 퇴근시간도 한참이나 지난 버스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줄곧 외로움보다 더 속을 파고드는 쓸쓸함에 잠기곤 했다. 예전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열정 같은 것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다를바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버스에 오를 때가 되면 그때가 되서야 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오전에는 피곤에 쩔어 잔뜩 졸며 회사에 도착했고, 일할 때는 일하느라 정신없고, 야근까지 끝마치고 나서 회사를 나설 때가 되면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내일도 같은 하루를 보내겠지. 살아가야한다는 것은 가끔 나의 의미를 잃게 했다. 분명히 색색으로 잔뜩 칠해져있던 것 같은 나의 하루였는데, 어느새 점점 바래지더니 이제는 색을 아예 잃고 말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늦었네요.”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얼굴이 있었다. 나는 심장부근에서부터 시작해서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한 이 느낌을 아주 오랜만에 경험했다. 추운 것은 아니었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보고는 밝게 웃어온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도 따라 웃었던 것은, 이 무료하고 답답하고 우울한 일상 속에서 유일하게 나의 곁에 새로운 시간들을 심어준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늦은 저녁

w. 윤이

 

 

 

 

 

 

담배 피면 폐 썩는데.’

 

처음 만났던 날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렇게 말했다. 어두운 길목에 비친 가로등으로 입은 교복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린 게 까부네.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소년의 모습은 진지했는데, 나는 그저 픽 웃고는 돌아서려고 했다.

 

왜 맨날 그렇게 슬픈 표정이에요?’

 

돌아서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냥, 한순간 들려온 그 말이, 심장을 푹 찌르고 들어왔다. 가만히 선 내 뒤통수를 계속 보고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뒤에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는 늘 여기 있거든요 아저씨가 담배피고 있는 거 매일 봤고, 슬픈 표정인 것도 매일 봤어요.’

 

뭐가 그렇게 울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어린 소년에게 니가 뭘 그렇게 잘 아냐고 소리칠 뻔 했다. 어른들의 마음을, 니가 뭘 안다고 그걸 그렇게 묻는 거냐고. 몰라서 묻는 거라면 곧 알게 될 거라고. 크게 한숨을 내쉰 내가 다시 뒤를 돌았다. 이미 담배는 필터까지 다 타버린 채였다.

 

담배라도 피면 조금 괜찮아져요?’

 

그럼 나도 알려주세요, 담배.’

교복 입고서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나름 고심해서 한 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너는 아직 어린 아이고, 나는 어른이야, 그 차이를 알려주겠다고. 그럼에도 나는 그 말을 한 것에 내 자신이 상처를 입고 말았다. 나는, 어른인데, .

 

어른 되는 날 오면 알려줄 거에요?’

너 뭐하는 애인데 이 시간에 집에 안가고 그러고 있냐.’

아저씨가 교복 입었다면서요. 저 학생이요.’

학생이 학교 끝났으면 집에 가야지.’

 

나의 말에, 아이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래, 니가 잘못한 거 맞지? 약간은 의기양양해진 표정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윤산하.’

?’

제 이름이에요.’

 

벽에 기대서는 꺼질 듯 말 듯이 깜빡이는 가로등을 보면서 그 애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결국 손에 쥐고 있던 담뱃갑을 잔뜩 구기고 말았다.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애가 갈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거. 억지로 교복을 꿰어입고서 아르바이트를 나가고, 하루 종일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늦은 저녁 야자시간이 끝나는 시간에 마쳐서 집에 돌아가고 있다는 걸. 그래서 그 애는 내가 사는 아파트 앞을 전전하고 있던 것이었다. 추울 텐데 점퍼 하나 걸치지 않고 교복에 마이만 달랑 입고서 돌아다니는 모습은 나의 부성애 같은 것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아빠가 고등학교는 나와야한다고 그래서요.’

아빠 어디계신데.’

여기 없어요. 결혼 했거든요.’

그럼 굳이 그렇게 다니지 않아도 되잖아.’

그냥, 이렇게 하고 싶었어요.’

 

앞부분만 잔뜩 헤져서 덜렁거리는 교과서의 맨 앞에는 20번 윤산하, 라고 적혀있었다. 보지도 않을 책을 가방 안에 가득 담고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아이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안타까웠다. 돌봐줄 사람 하나 없이 시간을 보내니 당연히 모든 것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집에 가.’

아직 시간이 안됐어요.’

누가 감시해?’

, 아마?’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게 장난인줄만 알았다. 하도 어른 놀려 먹는 방법을 잘 아는 아이라서, 그냥 하는 말 인줄 알았다. 평소처럼 원룸 건물의 벽에 기대서는 나를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빛은 뭔가, 조금 들떠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훨씬. 버릇처럼 츄리닝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려는데 금방 소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 나이 먹고 엄마한테도 고나리 받을 일 없었는데, 까칠한 소년 때문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빈손을 꺼냈다.

 

담배 끊으라고요,’

언제는 담배 알려달라며.’

알려줄 거에요?’

화색이 도는 얼굴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SH그룹의 이사가 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던 날이었다. 주위에서 저저, 나쁜놈. 저 자식이 그 자식 아니야? 그 데릴사위인지로 들어갔다는. 혀를 끌끌 차며 신나게 이야기 하시는 과장님의 말을 들으며,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무심하게 뉴스를 보면서, 썩어빠진 세상에 탄식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 애가 생각이 났다. 산하는 처음 대화를 나누고 난 이후부터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늘 나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서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없으면 기다려지더라. 안 그래도 어디 갈 데도 없는 애가 눈에 안보이면 괜히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쓰였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봐.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았고, 오늘 산하는 나의 원룸 건물로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창문 밖에 대고 한참이나 그렇게 줄담배를 피워댔는데도, 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리면서 결국 고개를 숙였다. 이제 와서 갑자기 뭘 기다리는 거야.

 

아저씨.”

 

아직도 수리 되지 않은 깜빡이는 가로등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니, 산하가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 얼굴에 빛이 깜빡, 깜빡, 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놀란 내가 급히 담배를 비벼 끄고는 자켓을 걸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서도 다급한 마음이 자꾸 차올라서, 속이 아팠다. 입구를 빠져나오니, 기다렸다는 듯이 소년이 있었다. 산하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은 내가 이리저리 살피다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터진 입술이며 살짝 멍이 든 얼굴은 결국 눈물이 나게 했다.

 

왜 그래, .”

들켰어요.”

괜찮아?”

아니여, 안 괜찮아요.”

 

터진 입술이 쓰라린 듯 발음이 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무슨 일 때문에, 왜 이렇게 된 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속이 상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나 오늘만 재워줄 수 있어요? 목소리를 낼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소년의 얼굴을 감싼 나의 손을 감싼 소년이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담배냄새 나. 또 담배 폈죠.”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말해오는 소년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냥, 처음부터 더 관심을 가질 것을 그랬다. 사실 나는 그동안 삶에 무료함에 지쳐 사랑도, 누군가에 대한 관심도 잔뜩 메마른 사막 같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런 나를 잔뜩 헤집어놓은 이 아이는, 사막 같은 나를 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이 아이는. 단순한 정이 들어서가 이유인 것만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마음이 아팠다. 나는 어른이고, 소년은 아이니까.

 

산하를 집에 들이고 나서는 바로 씻는 일부터 먼저 시켰다. 크게 다칠 만한 일도 없고 다치면 바로 병원에 가는 편이라 변변히 응급처치를 해둘 것이 연고나 데일밴드 뿐이었다. 산하를 욕실로 집어넣고 나서 먼지가 쌓인 구급상자를 물티슈로 닦아냈다. 잔뜩 마음이 쪼그라들어있었다. 아이에 대한 걱정에 더불어, 나에 대한 걱정까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거 봐요, 아저씨 바지 엄청 짧아.”

 

킥킥대며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까 그래도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침대에 앉아 옆을 툭툭 치며 이리오라고 하니 머뭇거리다 걸어오는 모습은 웬일로 산하답지 않았다. 잔뜩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함부로 물어볼 수도 없었다. 혹시 말하기 어려운 일일까봐. 앉은 아이의 얼굴을 돌려 손에 연고를 짜냈다. 누군가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은 학창시절 이후에 처음이었다. 어색하게 터진 입술 끝부터 약을 발라대니 아이가 잔뜩 엄살을 피워댔다.

 

, 아저씨 이런 거 디게 못하네요. 어른이 돼도 못하는 거는 있네.”

미안하다.”

장난이에요, 장난.”

 

시무룩해진 나의 얼굴을 보던 소년의 표정이 금방 나를 따라 시무룩해졌다. 나 왜 이렇게 됐는지 말해도 돼요? 물어오는 말에 약을 바르던 손이 멈추었다. 쓴 웃음은 소년이 지을만한 것이 못되었음에도 아이는 아픈 웃음을 지었다.

 

아빠한테 학교 안다니는 거 들켰어요.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 거 많은데, 너까지 왜 그러냐고 막 맞았어요. 근데 저는 아빠가 나한테 뭘 해줘도 별로 기쁘지가 않았어서 차라리 나 혼자 뭐든 해보고 싶었어요. 어차피 나는 아빠랑 같이 살수도 없고, 이제부터 계속 혼자 살아야하니까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아저씨.”

산하야.”

그리고 나, 아저씨한테 담배 말고 다른 거 배우고 싶어요.”

 

나 아저씨한테,”

 

산하의 말을 다 듣지 못하고 입술을 맞대었다. 아이라도, 어리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울 만큼 아픔도 생각도 많았을텐데. 잠깐 놀란 듯이 굴던 아이가 나의 뒤통수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나는 소년을 보면서 조금 더 자란 어른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했었는데, 생각보다 나와 소년은 비슷한 선상에 서있었다. 사실은 감정에서도, 무엇을 끊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산하보다 훨씬 더 어렸을지도 모르지. 입 안으로 타고 들어오는 뜨거운 살덩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음에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아이를 위로할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나를 위안했다. 넘어온 혀에서는 쓴 연고의 맛이 났다. 나와 산하는 그렇게 한참이나 입술을 부볐다. 어느새 뒤로 넘어간 내가 누운 채로 아이의 키스를 받아내고 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자 그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아저씨, 나 이제 어른이에요.”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나를 보며 다시 밝게 웃은 산하가 짧게 쪽,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고개를 들어 본 자명종의 시계초침은 어느새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박민혁씨, 좋아해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살며시 눈을 감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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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 오잉 (20살)

첫번째2018. 12. 31. 19:33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1.     모든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민혁은 자기 옆에서 나체로 잠들어있는 남자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주 그냥, 내가 미쳤다. 설마 미치지않고서야 원나잇을 했겠나?“

 

자신과 하룻밤을 보낸 남자는 꽤 어려보였다. 민혁은 곤히 잠들어있는 남자를 놔두고 바닥에 떨어져있는 자신의 옷을 주워 입고 헐레벌떡 모텔을 나왔다. 어젯밤엔, 얼마나 급했으면 영역표시를 한것처럼 옷이 하나하나 벗겨져 있었을까. 어젯밤을 생각하니 민혁은 허리와 뒤가 아픈거같았다. 민혁이 모텔방에서 나가고 2시간 뒤, 민혁과 원나잇을 한 남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비어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보고 하품을 했다.

 

아 학교 늦었다

 

남자는 늦은 게 걱정도 안되는지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바닥에 떨어져있는 자신의 속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켜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나 오늘 질병지각으로 처리해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침대 에 놔둔 남자는 씻기 위해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자는 어젯밤을 생각했다. 자신의 밑에 깔려 울면서 신음하는 남자가 자꾸 기억났다.

 

이름이박민혁이였나

 

 

 

2.     우연이 계속되면 인연이 된다.

 

 

 

한참 민혁에 대해 생각하던 남자는 옷을 입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시각, 남자가 여유를 부리는동안 민혁은 자신의 직장인 학교에 출근했다. 오늘 처음 출근 하는 날 이였는데 민혁은 지각할까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지각은 하지않고 학생들이 등교할떄 딱 들어왔다. 선생님들이 모여있는 회의실로 간 민혁은 다른 선생님들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민혁이 3학년 2반을 담당하게 됬다고 하자 3학년 수업을 들어가시는 선생님들이 민혁을 걱정했다.

 

어우, 그 반에 윤산하 라는 학생이 있는데 조심해요~ 교사 경력 좀 있으신 선생님들도 처리하기 골치 아픈 녀석인데 초임한 박쌤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선생님들이 하는 말을 경청하고있었던 민혁은 윤산하 라는 이름에 순간 당황했다. 민혁과 원나잇 한 남자의 이름도 윤산하 였다. 어젯밤 쉴틈없이 자신이 부른 이름과 같은 이름이여서 왠지 찝찝한 기분에 민혁은 설마 했다, 근데 친절하게 사진까지 보여주는 선생님들 덕분에 어젯밤 자신과 원나잇했던 파트너가 자신이 담당하게 된 반의 학생인걸 알았다. ‘설마가 사람잡는다더니…’ 민혁은 절망적이였다. 착잡한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가서 조회를 시작했다.

 

안녕. 전에 계시던 선생님이 다른학교로 이직하셔서 이제부터 내가 너희 담임선생님이야. 4개월 밖에 남지않았지만, 잘 지내보자.”

 

민혁의 말이 끝나자 아이들은 박수를 쳤다. 비어있는 한 자리를 보고 민혁은 아이들에게 물었다.

 

맨뒤에 비어있는 자리는 누구 자리야?”

“12번 윤산하요. 오늘 질병지각 이래요.”

 

교탁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아이가 대답했다. 그 빈자리의 주인은 산하였다. 민혁은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불행인거같기도 하고다행인거같기도 하고….일단 당장은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였다. 수업하다가 갑자기 산하 밑에 깔려서 울면서 신음하는 자신이 생각나면오우 민혁은 상상하기도 싫은지 고개를 휘저었다. 고개를 휘젓는 민혁을 본 아이들은 자신들의 담임이 이상하다 생각했다. 쉬는 시간 종이 치자, 민혁은 교실을 빠져나와 교무실로 가 수업할 준비를 했다. 민혁이 3학년 2반 수업을 맡은 시간은 4교시였다. 1교시부터 3교시까지 다른 반 수업을 하고 온 민혁은 3교시 쉬는시간이 점점 끝나가자 긴장이 되기 시작됬다. 쉬는시간 종이 치고, 민혁은 자신의 반인 3학년 2반으로 갔다. 아침조회시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맨 뒷자리도 아침조회시간과 동일하게 비어있었다. 민혁은 출석부에 12번 윤산하에 질병지각이라 쓰고는 수업을 시작하였다. 생각보다 조는 학생도 별로 없어서 민혁은 기분좋게 수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가기 10분전, 뒷문이 열리면서 윤산하가 들어왔다. 교탁앞에 서있는 민혁을 보지도않은체 산하는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교탁을 본 순간 자신을 보고있던 민혁이랑 눈이 마주쳤다.

 

안녕. 내는 오늘부터 3학년 2반 담임을 맡게된 국어 과목을 담당하고있는 박민혁 이라고한다.

헐 대박

 

기가 찾아다녔던 어젯밤 원나잇한 사람이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새로운 담임선생님인걸 알게된 산하는 눈이 커졌다. 때마침 수업이 끝난걸 알리는 종이치자, 민혁은 산하에게 교무실로 따라오라고했다. 산하는 민혁을 따라갔다. 하지만 민혁이 산하를 데리고 간 곳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출입이 별로 없는 1층 남자화장실이였다. 화장실에 산하를 끌고간 민혁은 산하에게 말했다.

 

학교에서 너랑 내가 원나잇 했던거 까발리고 다니면 내 교직생활 망하는거니까 니 조용히해야한다.”

알았어요. 근데 선생님 사투리 되게 듣기 좋다. 어젯밤엔 침대위에서 들었는데 학교에서 들으니까 뭔가 새롭네요.

 

경고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산하떄문에 민혁은 벌써부터 아찔했다. 그런 민혁의 심정도 몰라준 체 산하는 해맑게 웃을뿐이였다.

 

 

 

3.     산하는 포기하지 않긔!

 

 

 

민혁쌤! 오늘 뭐해요? 저랑 데이트 안나갈래요?”

! 따나 배고파용ㅠ 먹을거 주세요ㅠㅠ

오늘따라 더 예쁜거 같은데..오늘 우리집 갈래요?”

 

계속 되는 산하의 플러팅에 민혁이 산하를 불러서 말했다.

 

윤산하! 니 내좀 그만 쫓아다니라!”

근데 전 민혁쌤이 좋은데..”

 

 

산하가 불쌍한 척을 하며 민혁에게 애교를 부리자, 마음이 약해진 민혁이 산하에게 말했다.

 

그럼 이번 중간고사에서 평균 70점 이상 받으면 니가 원하는거 해주겠다.”

진짜요? 내가 이번 시험 잘볼게요!”

 

그날 이후 산하는 민혁의 앞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을 따라다녔던 산하가 갑자기 사라지니까 민혁은 산하의 허전함을 느꼈다. 그리고 대망의 중간고사 마지막날. 가체점을 마무리한 산하가 민혁에게 와서 말했다.

 

선생님. 저 평균 72에요!”

..윤산하 니 공부를 얼마나 했으면 점수가 이케 올라가노

이제 소원 들어주세요

그랴 니 소원이 뭐나?”

쌤한테 형이라 부르고, 데이트하는거요!”

 

그리하여, 윤산하와 박민혁은 다음주 주말에 데이트를 하게됬다.

 

쌤 오늘은 왜이렇게 예쁘게 하고왔어요?”

뭐라노..얼릉 밥부터 먹자

 

밥도먹고, 영화도 보고, 게임장에가서 게임도하고, 민혁과 산하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민혁과 산하는 급격하게 친해졌다. 예전에 비해 수업시간에 잠도 잘 자지도 않고, 등교도 꼬박꼬박 제시간에 하는 산하에 민혁은 뿌듯해졌다. 다른선생님들도 산하의 변화를 신기해했다. 하지만 가끔씩 잠은 잤다. 물론 민혁의 수업시간을 뺴고. 교무실에서도 산하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선생님들 사이에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돌았는데, ‘윤산하랑 박민혁이랑 자서 윤산하가 착해진거다.’ 라는 말로 변질이 되서 돌았다. 이런 소문 때문에 질 나쁜 학생들이 민혁에게 대들었다.

 

쌤 윤산하랑 잤다면서요? 저랑도 한번 자요ㅋㅋㅋㅋ

 

학생의 말에 민혁은 수치스러워서 얼굴이 빨게졌다. 소문의 당사자인 민혁도 그 소문을 아는데 산하라곤 모를까.. 산하도 그 소문을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민혁에게 직접적으로 피해가 간게 아니여서 민혁에게 직접적으로 피해가 간다면 처리를 할려고 했었다. 마침 소문이 더 더러워지고있어서 처리할려는데 민혁에게 시비를 턴 학생이 생겼다. 민혁에게 시비를 걸은 학생의 반에 찾아가자 그 학생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민혁에 대한 질나쁜 대화를 하고있었다.

 

야 근데 박민혁 존나 예쁘게 생기지않음? 한번 울려보고싶음ㅋㅋㅋㅋㅋ

미친놈ㅋㅋㅋㅋ

 

같이 웃고 떠들었던 친구들이 얼굴이 사색이 된 체로 말을 못하자 그 학생은 뒤를 돌아봤다. 그 학생의 뒤에는 산하가 서있었다.

 

야 다시한번 말해봐.”

“..뭐를…”

니가 여태까지 말했던거 있잖아. 울리고싶다는거. 그거 다시 말해보라고.”

~ 난 또 뭐라고. 너도 박민혁 보면서 따먹고싶어서 그런거 아니야?”

 

남자애가 말을 마치자 산하는 남자애에게 주먹을 날렸다. 예상치 못한 산하의 공격에 남자애는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니가 함부로 말할 사람이 아니야. 입 다물어.”

 

산하는 그 남학생의 위에 올라타서는 주먹질을 했다. 산하가 남학생을 때리는 행동을 멈춘 것은 복도에서 지켜보던 다른 학생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왔을때였다.

 

 

 

4.     순정파 윤산하.

 

 

민혁과 산하는 아무말도 안하고 마주보고 앉아있다. 그 정적을 깬건 민혁이였다.

 

왜 떄렸나?”

“…..”

 

아무말도 하지 않는 산하에 민혁은 속이 답답했다.

 


산하야 니가 말을 해야 내가 니를 감싸줄수가 있다. 말하기 싫나?”

“…걔가 쌤이랑 자고싶대요.”

그래도 때리면 안됬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참아요. 난 쌤 좋아해서 그런건 못참아요.”

 

산하의 말에 민혁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때마침 산하에게 맞은 학생의 부모님이 교무실로 들어왔다. (산하에게 맞은 학생= A)

A의 부모님은 산하의 뺨을 때렸다. 산하가 맞는걸 본 민혁은 놀라 눈을 크게 뜬 상태로 A의 부모님을 말렸다.

 

“A 어머님! 이러시면 안되요!”

 

뺨을 맞은 산하는 민혁에게 말했다.

 

“A가 잘못한건데 A 어머니한테 제가 맞아야하는거에요? 저 전화 한통만 할래요 쌤. 저도 부모님 부를게요.”

 

산하가 부모님에게 전화를 할 동안 민혁은 A의 부모님과 이야기 중 이였다.

 

우리 아들이 잘못했다는 소리는 무슨 소리인가요? 저희 아들이 저 학생한테 맞았잖아요!”

“A가 안좋은 얘기를 해서 그런거같네요…”

그 안좋은 얘기가 뭐길래 우리애를 저렇게 때린건가요! 저희는 절떄 합의 못해줘요.. 그보다 쟤 부모는 언제오나요? 애를 혼자 냅두니까 애가 싸움을 하고다니는거지..어휴

 

그떄 어떤 중년의 여자가 교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산하가 엄마라 부르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어휴. 너는 사고치지 말라니까 또 사고를 치니. 이번엔 뭐야.”

쟤가 쌤한테 자기랑 자자고하고 울리고싶다고해서 때린건데..일이 커졌어. 그냥 알아서 처리해줘.”

안녕하세요. 산하 엄마입니다.”

“A 엄맙니다.”

저희 산하가 그쪽 A학생을 때렸다던데듣기로는 A학생이 선생님에게 성희롱을 했다고 하네요. 그쪽이 저희를 학교폭력으로 신고하면, 저희는 그쪽을 교권침해로 넘겨도 되는건가요?”

 

산하 부모님의 말의 A 부모님은 할 말이 없어졌다.

 

이제 할 말 없으시죠?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 치료비 드려야지.”

 

산하의 부모님은 명찰 하나를 내밀었다. SH기업 회장의 명함이 였다.

 

나중에 여기로 청구해주세요. 그럼 진짜 가보겠습니다. 안녕히계세요.”

 

산하의 부모님이 나가고, 머쓱해진 A의 부모님은 간다는 말 조차 안하고 교무실을 나갔다. 일이 다 풀리자, 산하는 민혁에게 안겨왔다.

 

 

쌔애앰나 진짜 쌤 좋아하는데 나랑 진짜 사귀면 안돼요…?

 

 

 

 

5.     엔딩은 역시 해피엔딩

 

 

산하야..닌 너무 어리다. 나중에 20살 되면 만나자.”

알았어요나중에 20살 되면 바로 올게요!”

 

시무룩해진체 교실로 돌아가는 산하의 뒷모습을 보며 민혁은 마음이 싱숭생숭 해졌다. 일단 나중에 만나자고는 했는데..자신이 산하를 좋아하는지 모르기때문이다. 하지만 얼마뒤 확실히 깨닳게됬다. 산하가 자신에게 고백한 이후 자신에게 찾아오는 일이 별로 없었다. 민혁은 왠지모를 서러움을 느꼈다. ‘차였으니까 이제 안보이겠다이런건가 라는 생각이 생겨서 시무룩해졌다. 사실 산하는 민혁이 자신 때문에 시무룩한걸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회사 경영수업, 수능 준비 때문에 민혁에게 찾아갈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민혁이 평소보다 일찍 끝나는 날. 산하는 민혁을 위해 시간을 뼀다. 아까 하교한 산하가 교문 앞에 있자, 민혁은 어리둥절했다. 그런 민혁에게 산하가 다가와서 하고있던 목도리를 둘러주며, 민혁에게 말했다.

 

날도 추운데왜 이렇게 춥게 입고다녀요. 사람 걱정되게..”

니 뭐꼬? 요새 안보이니만 이제야 나타나네.”

너무 오랜만에 찾아와서 삐졌어요? 아 박민혁 삐돌이네

니는 쌤한테 그게 뭔소리고!”

알았어요ㅋㅋㅋ민혁쌤 우리 밥부터 먹으로 가요.”

 

밥을 다먹고 산하와 민혁은 근처에 있는 공원을 돌았다. 아무말도 없이 걷다가 민혁이 먼저 산하에게 말을 걸었다.

 

니 요새 바쁘나?”

살짝 바빠요. 근데 이제 곧 있으면 끝나요.”

내도 니 좋아하는거 같다그냥 20살 말고 지금 내랑 연애할래?”

쌤이 20살에 하자면서요. 그니까 안돼요.”

아씨윤산하 니 나빴다…”

ㅋㅋㅋㅋㅋ뭐가 나빠요. 역시 박민혁은 삐돌이가 맞았어ㅋㅋㅋ

아 쌤이라 부르라 했잖아.”

알았어요, 민혁쌤.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20살 되자마자 바로 쌤한테 와서 고백할거니까.”

 

산하의 말의 민혁은 얼굴이 빨게지고선, 빠른걸음으로 산하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민혁의 귀여운 행동을 본 산하는 민혁에게 달려가서 백허그를 했다.

 

부끄러워요?”

“…”

이렇게 부끄럼타고는 박민혁 나랑 어떻게 잤대?

그떈 술에 취해있었고,,,”

나중에 20살되고 사귀면, 이런거 저런거 다할거에요.”

알았으니까 이 손좀 풀어봐라.”

싫은데요?”

아 진짜 윤산하

 

말투는 산하를 탓하는 말투였지만, 민혁의 말에는 웃음이 섞여있었다.

 

그리고 수능이고 뭐고 다끝난 1231. 산하는 민혁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썜 오늘 집에 들어가지 말아요.”

 

산하의 당돌한 말에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11. 산하와 민혁은 모텔방을 하나 잡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쎔 먼저 씻을래요?”

그래

 

물을 맞으면서 민혁은 이래도 되나 곰곰히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얼굴만 빨게질 뿐이였다. 민혁이 안나오자, 산하가 욕실 문을 두들기며 민혁에게 말했다.

 

! 무슨일 있어요?”

아니! 얼른 나갈게

 

민혁은 샤워 가운을 입고서는 밖으로 나왔다. 자신이 나오자 바로 산하가 들어가서 샤워를 했다. 침대에 앉아서 산하가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보다 일찍 샤워를 마치고 나온 산하는 볼이 빨간 민혁을 놀렸다.

 

쌤 무슨생각을 했길래 볼이 이렇게 빨게요ㅋㅋㅋㅋ

아무것도, 아니다!”

 

12시가 되기 5분전, 산하는 민혁에게 말했다.

 

. 키스해도 괜찮아요? 쌤이 싫으면 안할게요.”

아니야,,

 

민혁의 긍정인 대답에 산하가 민혁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드디어 12. 산하가 20살 성인이 됬다.

 

, 아니 민혁이형. 나 이제 성인인데, 나랑 사겨줄래?”

 

민혁은 대답대신 산하에게 입을 맞췄다. 민혁이 입을 맞추는 걸 시작으로 20살인 윤산하와 27살의 박민혁의 연애가 시작됐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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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2018. 12. 31. 18:19



"선생님"

조용한 방 안,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가만히 앉아있던 민혁이 고개를 휙 돌려 산하를 쳐다봤다. 왠일로 선생님이래. 정작 학생이였을땐 기회를 노려서 형, 선배님거리더니. 조근조근 팩트를 날리는 민혁에 금세 찡찡거리며 안겨오는 산하였다.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웅얼거리는 산하를 귀엽다는듯 웃은 민혁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산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서둘러 민혁에게서 떨어졌다. 의아함을 가지고 산하를 바라본 민혁이 대답을 요구하자 마지못해 말을 꺼내는 산하였다. 


"형이 나 애처럼 볼까봐 싫어서..."

"푸흡, 어떻게 학생때랑 다른게 없어..."

저도 모르게 웃어버린 민혁을 밉지않게 쏘아본 산하가 다시 주제를 되돌려 뻔뻔하게 표정을 바꾸곤 선생님, 하고 말을 시작했다. 


"선생님, 저 선생님 처음 봤을때부터 완전 좋았어요."

"야... 이러니까 학생한테 고백받은거 같아서 양심이 아파."

"진짜 선생님다워요."

그런가? 네. 그러니까요 선생님. 우리 초심을 가지고 한 번 놀아볼까?







"안녕하세요 쌤!"

"안녕한데, 난 쌤 아니고 선생님이라고 해줄래?"

"아 죄송합니다... 선생님!"

첫만남은 둘 다 괜찮았다. 과외선생님과 학생으로 만난 둘은 만나기 전까지 온갖 걱정을 했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참 마음에 들었다 이거다. 민혁은 요즘 학생들 답지않게 싹싹하고 밝은 산하가 마음에 들었고, 산하는 늦은 공부를 시작하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 마냥 좋았던 것이다. 물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랜시간 자주 집을 비우시는 부모님때문에 삭막했던 집이 그래도 사람 한 명이 드나들면서 나름대로 따듯함이 생겨났다. 바쁜 대학 생활에서도 알바를 하는 민혁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싶은 것이 많았지만 단호한 첫인상에 산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두번째 수업시간이였다. 민혁의 설명을 듣던 산하가 크게 하품을 했다. 굳은 표정으로 설명을 멈추는 민혁에 산하가 놀라 얼어붙자 민혁은 웃으며 예상밖의  말을 꺼내었다. 


"어, 많이 피곤해? 조금 잘래?"

"선생님 죄송해ㅇ, 네?"

"어... 말 그대로야. 사실 잠이 엄청오면 5분이라도 푹 자고 일어나는게 잠깨는데 도움이 되거든. 개인차는 있지만 나는 그랬어. "


대뜸 사과부터 하는 산하에 민혁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잠시 쉬자는 제안을 산하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에 감겨오는 눈을 억지로 막지 않았다. 민혁은 자연스럽게 일어나곤 '실례 좀,' 조용히 말한 뒤 집안 화장실을 찾아갔다. 다소 복잡한 구조임에도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헤메지 않고 화장실을 찾아낸 민혁을 잠시 이상하게 생각하던 산하는  밀려오는 졸음에 책상에 고개를 파묻었다. 잠시 후 방으로 돌아온 민혁이 곤히 자고 있는 산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잘생겼네, 평소같으면 입 밖으론 내지 못할 말을 속삭이듯 내뱉은 민혁이 자신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제 손으로 틀어막았다.  책상에 엎드려 있는 모습도 퍽 귀여워 깨울 생각은 하지도 못한채 산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눈을 뜬 산하와 시선이 마주쳤다. 민혁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선생님?"

"아... 너무 잘 자는것 같아서 못깨우겠더라."


더듬더듬 말을 끝내자마자 활짝 웃는 산하에 다시금 민혁의 얼굴이 붉어졌다. 본디 양쪽 모두 순수한 마음이였다. 하지만, 민혁은 이제 순수한 감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 과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민혁은 작게 중얼거렸다. 


"미친 박민혁, 또..." 




민혁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사랑에 빠지는 타입이였다. 조금만 괜찮은 부분이 있으면 그 사람을 좋아하려는 이유를 굳이 찾아내서 짝사랑을 시작하곤 했다. 산하는 고딩답지않게 어른스럽고 씩씩한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다. 금사빠기질로 인해 제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대번에 깨닫게 된 민혁이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저가 많은 사랑을 해봤다지만 학생은 조금 무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하를 가르치면서 학생을 좋아한다는 것이생각보다 괴롭다던지 힘들지는 않다는 걸 민혁은 깨닫았다. 사랑에 빠진 자신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민혁이 지금 당장 산하를 끌어안고 어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산하가 저에게 평범한 학생인 척 대할 수 있었다. 한창 공부할 아이에게 민혁이 줄 수 있는 도움은 성섬성의껏 가르치는 것, 응원해주는 것뿐이였기에 민혁의 제 할 일을 정확하게 해냈다. 과외선생님이라는 것은 정당한 명목으로 곁에 있을 수 있는 너무나 좋은 직책이였다. 과외 후 첫 시험을 일주일 남긴 날, 무언가 힘이 되어주고 싶었던 민혁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이번 시험 잘치면 미리 후배라고 불러줄게."


열심히 끄덕거리면서도 긴장한 얼굴로 주먹을 꼭 쥐는 산하는 모순되게도 어른스러웠다. 그에 민혁은 또다시 다짐했다. 절대 저 아이와는 선생과 제자, 그 이상으로 엮기지 않겠다고. 산하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었던 순수한 민혁이였다. 




 



산하는 학교에서 흔히 말하는 '인싸'였다. 잘생긴 외모에 큰 키, 지금은 공부까지 열심히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호감형 인간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건지 산하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연스레 정보도 많이 모였다. 어느 여름, 산하가 복도를 거닐고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인싸에 속하는 이상연이라는 애의 목소리가 복도 전부로 울렸다. 소란스럽게 퍼지는 목소리가 산하의 귀로 흘러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야 내가 존나 재밌는 썰 풀어줄까?"

"씨발 존나 콜."

"내가 작년에 과외한거 알지? 

"그래, 존나 니 팔자에 없는 공부를 하겠다고 아주 지랄을~"

"좆까고. 듣기 싫냐?"

"치사한 천재새끼."

"ㅇㄴ, 그나마 낫네. 오키 풀어준다! 그때 그 과외쌤이 과외를 하러 왔으면 공부를 시켜줘야지, 나를 좋아한다네?"

"됐고, 예뻤냐?"

"뭐래 씨발, 남자였거든?ㅋㅋㅋㅋ 게이새끼가 존나 좋은 학교를 다니긴 해요, 그래서 써먹을대로 써먹었지."

"오, 이상연 존나 게이가 좋아하는 얼굴인가?ㅋㅋㅋㅋㅋㅋㅋㅋ"


더러운 언행에 눈살을 찌푸린 산하가 둘의 대화 내용을 다시 생각해봤다. 과외선생, 남자. 이 두개의 단어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였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산하는 차분하게 상연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변 사람들 모두 갑작스런 행동을 하는 산하에 상연이 가까히 할 사람이 아니라며 만류했지만 산하는 아까의 얘기에 이끌려 주저없이 다가갔다. 



"안녕?"

"어, 윤산하? 왠일이야?"

"아,,, 아까 네가 하던 말이 재밌어서. 나도 말해줄래?"

"넌 그런거 신경 안쓸 것 같았는데, 너도 관심있나보네?"



저속한 손짓을 동반한 상연의 말에 억지웃음을 지은 산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에 신이 나서 말을 해대던상연이 무의식적으로 민혁의 이름을 뱉었다. 그에 놀란 표정을 짓던 산하가 다시 표정을 바꾸고 자연스레 되물었다. 그래서, 박민혁이라는 과외쌤이 널 좋아했다고? 남잔데? 못믿겠다는 듯 말하자 발끈하며 말하는 것이 상연의 말을 진짜라고 알려줬다. 볼도 빨갛게 물들어서는, 나중에 내가 막 물어보니까 고백하더라니까? 당황해서 사투리도 막 내뱉던게 존나 촌스러웠지만. 산하는 당장이라도 상연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욕구를 참아야만 했다. 그날, 산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을 정리했다. 첫째, 지금 과외선생님인 박민혁 선생님은 게이다. 둘째, 민혁선생님은 전에 자신의 학생이였던 이상연을 좋아했다. 여기까지 다다른 생각에 민혁의 평소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본 산하는 무언가 상연과 겹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붉어졌던 선생님의 볼. 선생님을 마구 욕보이던 상연에 대한 분노. 혼란스러운 마음이 머릿 속을 어지럽혔다. 당장 오늘 만날 선생님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산하야, 오늘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해? 무슨 일 있어?"

"..아뇨, 선생님."

"왜에, 말해봐. 형처럼 생각해도 좋은데."



산하는 평소에는 딱딱하기 그지없던 선생님이 변한 것이 어색했지만 긍정적인 편이였다. 반면 민혁은 본인이 내뱉은 말에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하려 애썼다. 자꾸 감정을 감추고 편하게 대하려니 말이 너무 편하게 나가게 된 것이였다. 산하는 이상한 감정이 감정이 들었다. 스스로에게 몇번 질문을 하던 산하가 충동적으로 민혁에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은 사투리 안써요?"

"어?"

"아니, 그게 아니라..."


자신의 잘못에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해하는 산하를 보던 민혁이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산하에게 책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건지 모르겠지만, 다시 집중해서 해보자. 다시 딱딱해진 말투에 산하는 조용히 책으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꾸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자 계속해서 지적을 받은 산하가 눈가를 부볐다. 민혁에게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게 싫었다. 산하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던 민혁이 연이어 한숨을 내뱉고는 오늘은 좀 쉬는게 좋겠다며 갈 준비를 하던 민혁은 산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힘내고. 지금 하루하루가 중요한 시기인건 알고있지?"


그런데 선생님은 왜 볼을 빨갛게 물들이셨어요? 이상연은 왜 좋아했었어요? 등의 질문이 입 밖으로 차마 나오지 못하고 맴돌았다. 결국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네, 선생님. 이 네 글자뿐이였다. 이 복잡한 감정의 이름은 아직 어린 치기심이 분명했다. 결국 민혁이 떠난 후 집안에 남은 허전함이 지금까지의 모든 부정들을 긍정으로 변화시켰다. 




자신의 모든 마음을 깨닫게 된 이후로는 무서울게 없었다. 민혁이 도덕심을 내세워 밀어내면 상연을 앞세워 다시 다가가면 된다. 이제 산하는 수업도중에 다른 생각을 하거나 조용히 듣고만 있지않았다. 먼저 질문을 잔뜩한다던가 민혁의 쪽으로 붙는다던가 하는 것들이 자연스러워질 정도로. 민혁은 그저 당황스러웠다. 얼마전 우울하게 있던 모습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전보다 더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버린게 어떤 이유라도 있는건지, 맛있는거라도 쥐어주며 물어보고 싶은 참이였다. 산하가 주어진 문제를 다 풀고는 해맑게 웃으며 민혁에게 칭찬을 바라는 듯한 행동을 했다. 이제 민혁은 정말 울고싶어졌다. 접으려고 생각하고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산하가 알게모르게 들이대니,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아도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수준이 되는 것이다. 



"선생님?"

"어? 왜?"

"저 다 맞았어요! 잘했죠?ㅎㅎ"



어, 잘했네.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사투리가 나온 민혁이 잠시 굳어있었다. 산하도 잠시 표정이 굳더니 얼굴이 밝아지는 티를 내며 모르는 척 웃었다. 민혁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전에 모르는 척이라도 하지말걸... 후회돼도 이미 지나간 과거는 어찌할 수 없었다. 민혁은 눈을 한 번 질끈 감고는 산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산하야. 




"게이랑 섹스하면 어떤 기분일까"

"미친 놈, 혹시 대가리에 돌 맞음?"

"아니 그때 그 년 생각나서. 뒤는 똑같지 않냐?"



산하는 평생 입에 잘 담지도 않던 욕을 내뱉고는 상연의 멱살을 잡았다. 상연이 당황스런 표정을 내보이다 이내 산하의 뺨을 쳤다. 시발, 윤산하 너 뭐야? 얼얼한 뺨에 잠깐 손을 대었다가 다시금 상연에게 달려들어 배를 걷어찼다. 니가 좆같은 말을 해대니까, 미친놈아. 적당히라는 말 몰라? 상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도 예전엔 관심있다고 했잖아. 어디서 정의로운 척이야?"

"좆같게, 시발."



그때 멀리서 선생님이 달려오며 둘을 떨어뜨려 놓았다. 이상연! 너는 언제 정신차릴래? 너 고삼이야, 알아? 그리고 산하 넌 왜 그러는거야? 왜 뒤늦게 바람이 들었어! 상연이 신경질적으로 선생님을 쳐다봤다. 내일 보호자 불러와. 단호한 선생님의 말에 산하는 그제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저, 엄마. 어디세요?"

"엄마? 지금 베를린인데 왜? 아들 용돈 부족하니? 지금 바로 입금해줄게~"

"아니... 알겠어요 엄마. 입국하면 봬요."


작게 한숨을 쉰 산하가 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번의 신호음 끝에 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산하야 무슨 일이야? 피곤한지 잔뜩 잠긴 목소리였다. 그 와중에 목소리가 좋다고 느낀 산하가 민혁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저 학교에서 작은 일이 있어서, 보호자를 데려와라는데 부모님이 못오셔서 혹시... 와주실 수 있으세요?"

"...무슨 일인데?"

"...그게, 친구랑 좀 다퉜어요."

"하... 알겠어. 내일?"

"네, 감사해요. 그리고 번거로우실텐데 죄송해요."

"괜찮아, 내일 보자."


내일의 걱정을 뒤로한 채 산하와 민혁은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산하는 학교갈 준비를 하며 오늘 학교에서 상연과 민혁이 마주쳤을 때의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보호자라고 할 사람이 민혁밖에 없어서 민혁에게 부르긴 했지만 싸움의 이유도 어찌보면 민혁에게 있는거기에 더욱 그랬다. 또 상연을 마주한 민혁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사실 이게 제일 걱정되긴 했다. 혹시 흔들리면 어쩌지, 아직 잊지 못했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산하의 마음 속에서 일렁거렸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이사하고 단 한 번도 보지못한 이웃 역시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이웃집의 사람은 저에게 친근한 듯 말을 걸었다. 산하야, 잘잤어? 익숙한 목소리에 옆으로 돌아보자 밤톨같은 머리통이 보였다. 선생님? 산하는 세상에게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잠시 벙쩌있었을까, 엘레베이터가 20층에 도착하고 민혁이 탑승했다. 산하야, 안타? 빨리 가자. 서둘러 민혁을 따라 엘레베이터에 올라탄 산하가 제 볼을 꼬집었다. 



"아..!"

"뭐해? 산하ㅇ, 너. 이거 뭔데?"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상처잖아. 윤산하, 너 왜 싸운거야?"



산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학교로 가서 다 말씀드릴게요. 그저 이 말만을 반복했다. 지금의 상황을 모면하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둘 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몇분 걸었을까, 어느새 학교에 도착했다. 주변에서 산하를 부르며 반갑게 인사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도무지 웃을 수 없어 어색하게 인사하자 옆의 민혁을 보고 다들 물러갔다. 교무실의 문을 여니 제일 먼저 이상연이 보였다. 민혁의 눈치를 보았더니 굳어버린 표정이 확연했다. 상연은 민혁을 보더니 잠시 놀랐을까, 씨익 웃어보이며 민혁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상연의 보호자는 어째서인지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은 산하와 민혁의 관계에 대해 물었고 민혁은 자연스레 형이라고 대답했다. 상연은 가당치도 않는다는 듯 웃었다. 모든게 어색했다. 상연과의 대화가 몇번 이어지다 끊겼다. 결국 선생님의 쌍방과실이라는 판단으로 사건은 마무리 됐다. 민혁을 교문까지 데려다주는 길, 산하는 착잡한 마음으로 민혁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네가 뭐가 죄송해."

"그냥 다, 죄송해요. 이렇게 학교까지 선생님 부른 것도 죄송하고, 이상연이랑 마주치게 한 것도 죄송스럽고, 제가, 선생님 좋아하는 것도 다... 그냥 다 죄송해요."

"...산하야."

"그래도 좋아해요. 선생님, 저는 안돼요?"



잠시 움찔하던 민혁이 산하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내 후배님하면, 그때 보자."


분명히 긍정의 대답이였다. 




추운 겨울, 산하를 기다리던 민혁이 조금씩 나오는 학생들을 바라봤다. 저 멀리서 산하가 웃으며 뛰어오는 것이 분명 좋은 결과를 함께한 것이겠지. 잠시 민혁의 머릿속엔 캠퍼스를 거니는 민혁과 산하가 스쳐지나갔다. 환하게 미소짓는 산하와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민혁이 산하에게 안겨들었다. 이제 후배라고 해주세요, 형. 우리 후배님 많이 컸네? 아마 20층은 두 집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을까, 산하와 민혁이 서로를 꽉 껴안은 것처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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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2018. 12. 31. 18:17





※트리거 워딩 : 자살 기도, 자해












M

 

딱 스무 번째 였다. 오직 자살기도 때문에 응급실에 간 게. 그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도로 눈을 떴을 때 내 옆에 서 있던 건 뜻밖에도 엄마가 아니었다. 명절에나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촌 형이었다. 형제 하나 없는 나한테 느껴지는 거리감으론 나와 한 십촌쯤 되는 사람 같았다. 뭔가 언짢은 듯 미묘하게 인상을 쓴 형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내가 깨어난 걸 봤을 텐데 형은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무슨 반응을 취해야 할지 몰라 뻘쭘했다. 눈을 마주치면 웬일이냐며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형을 올려보는 대신 그저 잠시 눈을 감았다. 화장실을 다녀온 건지 손이 축축한 엄마는 새삼스레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곧 의사와 간호사들이 와 내 상태를 확인했다. 엄마가 입원 수속을 밟는 동안 형은 굳이 부탁하지도 않은 부축을 해주며 날 병실로 데려갔다.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부축을 받으니 되려 걸음이 어정쩡했다. 형은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가 형에게 더 기댈 수 있게 자세를 고쳤다.

 

"너 벌써 이게 몇 번째라며? 위에 빵꾸 나겠다 새끼야."

 

틈만 나면 약을 몇 십 개씩 주워 먹고 위세척을 했다. 형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겠지만 형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진짜 위세척을 자주 하면 위에 구멍이 나려나, 그럼 죽을까? 같은 생각을 했다. 형은 아까부터 할 말을 준비해뒀다가 지금 한 번에 하는 건지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다. 나는 대꾸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날 병실 침대에 앉히기까지 임무를 완수한 형이 또 팔짱을 낀 채 날 가만 내려봤다. 아마 내 머리에 감긴 붕대를 보는 것 같았다. 병신같이 약기운에 비틀대다 탁자 모서리에 머리가 찍혀 이마가 찢어졌다. 피까지 흘리면서 바닥에 쓰러져있는 날 보고 엄마는 이번에야말로 내가 진짜 죽어버린 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내가 깨어난 걸 보고 그렇게 놀란 모양이었다.

 

"죽고 싶으면, 딱 일 년만 더 살아. 너 내년에 스물이잖아. 스무 살도 안 돼보고 죽으면 너 후회한다 진짜."

 

정말 진심으로 하는 얘기를 듣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밥을 먹는 게 괴로운 사람이 스무 살이 된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형은 날 이해할 수 없고 나는 형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내 웃음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형은 스무 살이 내게 이유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명분이 되었다. 내가 죽기까지 426일이 남은 날이었다.

 

 

 

너의 시간이 흐르도록

윤산하×박민혁

 

 

 

우선은 학교에 다시 다녀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체처럼 누워만 있다가 스무 살이 지나자마자 죽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는 내가 지겹도록 싫었으니까. 출석일수가 한참 부족한 나는 한 해가 지나도 여전히 고3이었다. 고작 1년이긴 하지만 살기로 결정했다고 갑자기 내 병이 낫고 무언가를 해내는 게 쉬워지진 않았다. 근데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니까 움직여지긴 했다. 병이 낫기까진 절대 못할 줄 알았던 등교를 하고 수업을 듣고 급식을 먹었다. 머릿속으로 날 수백 번씩 죽이다보면 학교생활도 견딜만했다. 학교에 내가 우울증에 걸려 학교를 쉬었다는 소문이 잔뜩 퍼졌던 걸 안 날엔 조금 울었긴 했다. 사실 많이 울었다.

 

손목에는 흉터가 희미해지기도 전에 며칠을 간격으로 끊임없이 새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족들은 이 정도면 다행이라 생각했고 학교 애들은 그런 날 몰랐다. 소리없이 죽어가고 있는 나를.

 

 

/

 

나는 손목을 가리기 위해 계절에 상관없이 어중간한 두께의 가디건을 걸치고 다녔다. 가디건에는 주머니인지 구멍인지 애매한, 내 손의 딱 절반 정도가 들어가는 주머니가 있었다. 스무 살이 되고는 줄곧 그 안에 담배가 들어있었다. 담배는 아침마다 한 갑씩 사서 하루 동안 다 피웠다. 시험기간이면 한 갑으론 부족했다. 스무 살이 되고 나서 성인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여럿 해봤다. 형의 말처럼 후회할까 봐는 아니었다. 그런 일들이 대게 몸에 해로운 것들이어서였다. 성인이 아니래도 어떻게든 해보라면 해볼 수 있을 것들이었지만 술 담배 같은 것엔 관심이 없어 모두 처음 경험해보는 것들이었다. 내가 지금 피우는 걸 제외하곤 아는 담배 이름도 없었다.

 

가장 독한 게 뭐예요? 편의점 알바는 무표정한 얼굴로 진열대에서 빨간 케이스의 담배를 꺼내 계산기에 찍었다. 왜 그런 걸 찾냐고 물으면 죽고 싶어서요, 하고 대답할 심산이었는데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좀 구질구질해 보이긴 했다. 살려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

 

한여름이었다. 특강을 듣기 위해 방학마다 학원을 다녔다. 내가 다닌 학원은 학생을 성적순으로 받았는데 그 덕에 학원 내 학생들끼리 경쟁이 치열했다. 뭐 하나라도 책을 잡히면 얄짤없이 학원에서 영구 퇴출이었다. 내가 학교를 갈 때보다 학원에 갈 때 담배 냄새를 더 많이 신경 쓴 이유였다. 학원에 갈 때면 항상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탈취제까지 뿌렸다. 귀찮아도 예민한 고삼생들을 속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수학 문제 백 개를 풀고도 담배 한 개비조차 바로 필 수 없다는 거였다. 그날그날의 수업이 다 끝나고 나면 정해진 분량의 문제를 모두 풀어야만 학원을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늘 가장 먼저 문제를 다 풀었다. 내가 가장 똑똑해서가 아니라 빨리 풀지 않으면 강의실에서 담뱃불을 붙여버릴 것 같아서였다.

 

가디건 주머니 속에 든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최대한 빠르게 문제를 풀어내렸다. 마지막 문제까지 채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주머니에 간당간당 들어있던 담뱃갑이 바닥으로 다이빙했다. 그 마찰음이 담배가 아니라 내 심장이 떨어져서 나는 소리 같았다. 누가 보지 못하게 바로 쭈그려 앉아 손을 뻗었는데 그보다 빨리 발 하나가 담뱃갑을 약하게 지르밟았다. 태연하게 담배를 제 책상 아래로 끌어가는 놈은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윤산하였다.

 

뭘 하든 신경전만 난무하는 이곳에서 유별나게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며 학생들에게나 강사들에게나 사교성이 좋은 녀석이었다. 나한테도 몇 번 말을 걸었지만 너무 가벼워 보이는 성격이 싫어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도 더는 친구같은 걸 만들 생각이 없었다. 윤산하는 성격만큼이나 입도 가벼울 것 같았다. 짧은 순간 동안 그려지는 미래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나서 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주머니에는 손가락까지 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문제지를 강사에게 제출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의실을 나왔다. 뒤통수로 윤산하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날아드는 것 같았다.

 

 

일등으로 문제를 풀고 나왔지만 주머니가 텅 비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학원 앞 편의점을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 알바생이 윤산하만큼 못 미더운 관상은 아니었지만 당장 저 편의점 안에 다른 시간대 학원생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근데 이런 걱정을 하나마나 이미 다 들킨 거 아닌가. 그렇게 담배를 피워대는 데도 내 몸 어디 하나 담배 냄새가 밴 곳이 없었다. 결벽증 환자처럼 샤워를 하고 온 덕분이었다. 요즘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흔치 않아서 간접흡연조차 할 수 없으니 니코틴 부족으로 손이라도 떨릴 기세였다. 내가 타는 버스는 7분 후 도착이었다. 7분 뒤에 버스를 타고 집까지 가는데 대략 15분 정도 걸리니까 22,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는 동안 몇 분이 걸리지... 쓸데없는 시간 계산으로 머리를 굴리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를 퍽 쳤다. 누가 봐도 고의적인 거였다.

 

"야 너도 여기서 버스 타?"

 

인상을 쓰고 뒤를 돌아보려다 말았다. 젠장. 이 상황에 활기찬 윤산하 목소리까지 들으니 속이 꼬이는 기분이다. 아는 척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버스가 들어오는지만 확인했다. 누군가한테 말이 씹히는 게 익숙한지 윤산하는 민망해하는 기색도 없이 지금까지 왜 한 번도 못 본 거냐며 몇 번 버스를 타냐는 둥의 말을 걸어댔다. 한동안 내게 말을 건 적이 없었는데 이건 필히 담배 때문이었다. 상대의 약점을 쥐고 있는 인간은 심히 즐거워 보였다.

 

"왔다."

 

순간 내가 말을 한 줄 알았다. 윤산하는 내가 기다리던 버스를 탄다고 줄을 섰다. 따라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솔직히 둘 다 구린 선택이라 망설여졌다. 버스는 내 선택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승객이 다 타자마자 쏜살같이 출발해버리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잠시 바라보다 허무하게 의자를 찾아 앉았다. 집으로 가는 유일한 버스인데. 다음 버스는 20분 뒤였다.

 

 

거의 40분을 견뎌낸 끝에 담배를 손에 쥐었다. 편의점에서 나오자마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자 탁한 연기가 목 안으로 퍼진다. 모순적이게도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집 밖에 잘 나오지 않아서 담배를 피울 때면 꼭 줄담배를 피웠다. 다 타버린 담배를 신발 밑창에 비벼 끄고 두 번째 담배를 입에 걸쳤다.

 

라이터 불이 탁 켜지는 동시에 길 반대편에 서있는 윤산하와 눈이 마주쳤다. 이게 무슨 드라마냐. 아오. 나는 못 본 척을 하려고 눈알을 이상하게 굴렸다. 쟤가 왜 여깄는 거지. 신기루나 환각 같은 거라 믿고 싶었는데 몇 초가 지나도 윤산하는 그대로 서 있었다. 도로 위로 차 한 대 지나가지 않았다. 횡단보도도 없는 길이었다. 윤산하가 웃음 띤 얼굴로 걸어오는 게 공포영화가 따로 없었다. 모르는 사람인 척 다른 방향으로 걸어서 도망을 쳤다.

 

"와 박민혁 길빵한다. 개민폐."

 

도망 중에도 도덕심은 있었다. 내가 뚝 멈추자마자 내 어깨 위로 윤산하의 팔이 얹어졌다. 흔히 연출되는 학교폭력 가해자랑 피해자의 모습 같았다. 재수 없게 윤산하는 키까지 커서 더 그랬다. 나는 몇 번 빨다 만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윤산하에게 끌려갔다. 그깟 학원 잘려도 상관없다, 고 생각 하고 싶었으나 지난달 모의고사 등급이 머리를 스치고 나니 절로 발이 움직였다.

 

동네 할머니들이 자주 모여 만담을 나누던 지붕 달린 평상이었다. 내 어깨를 잡고 있는 (어깨동무라 말하기 싫다.) 윤산하가 평상에 앉아서 어쩔 수 없이 나도 평상에 걸터앉았다. 윤산하는 아예 신발을 벗고 올라와서 기둥에 등을 기댔다.

 

"뭔데?"

"뭐가?"

"왜 끌고 왔냐고."

"내가 끌고 왔어?"

 

. 기가 찼다. 윤산하가 내게 말을 씹히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건 익숙해서가 아니라 그냥 애초에 윤산하는 얼굴에 철판을 깐 뻔뻔한 놈이기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어 습관처럼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담배를 한참 들고 있어 손에 냄새가 뱄을 것 같았다. 연기를 뱉어내며 윤산하를 돌아보니 왠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진짜 안 어울린다."

 

실실 웃으면서 말하는 윤산하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 고막이 자체 음소거를 했다. 대신 지붕 위로 뭐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 갑자기 수를 셀 수 없는 빗줄기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 아 진짜 드라마네 이거. 여기서 집까지 가려면 7분은 걸어야 했다. 당황한 나와 달리 윤산하는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우는 나에 대한 감상평만 했다. 너 엄청 독한 거 피더라. 피우는 거 못 봤으면 담배셔틀 하는 건 줄 알았을 텐데.

 

"야 내 가야 된다."

"우산 없잖아."

"함 평생 여기 있을기가?"

"너 사투리 귀엽다."

"미친놈."

"우산 갖다 줄 테니까 기다려. 나 여기 살아."

 

윤산하가 손가락질한 아파트는 평상에서 열 발자국만 걸어가면 도착일 거리였다.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 같은 동네 사람이었다니 충격에 약간 멍했다. 우리 중학교에서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배정된 건 나뿐이었다. 물론 윤산하도 나와 다른 학교지만 그 주변 일 테니까, 이 동네에서 그쪽으로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또 있는 줄 몰랐다. 심지어 그게 윤산하라니. 이건 분명 운명적인 악연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섬주섬 신발을 신은 윤산하는 나를 한 번 돌아보고는 빗속으로 뛰었다. 그리고 바로 아파트 입구. 3초 만에 도착한 것 같다.

 

윤산하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 나도 빗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윤산하가 가져다주는 우산을 쓰느니 감기에 걸리는 게 낫지. 이번에도 둘 다 구린 선택지긴 했다. 윤산하랑 엮이고 나서 상황이 자꾸 구려졌다. 누구랑 엮이든 마찬가지다. 내가 내 부모와 엮인 게 가장 구렸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가 와 어두컴컴한 집안에서 잠깐 울었다. 엄마가 오기 전에 씻어야 했다. 젖은 옷을 벗어 빨래통에 넣고 갈아입을 옷과 커터 칼을 챙겨 화장실 문을 잠갔다. 찬 비를 맞은 몸에 따뜻한 물을 뿌렸더니 몸이 찌릿찌릿했다. 열기가 오른 몸에 빨간 줄을 몇 개 그었다. 피는 밖으로 흐르는데 수돗물은 벌어진 상처로 스며들어 따가웠다.

 

이런 날에는 도저히 책상에 앉을 기력이 없었다. 엄마가 집에 있는 알약이란 알약은 죄다 갖다 버려서 찾아 먹을 감기약이 없었다. 날 보면 항상 죽어버리라는 인간이 왜 내가 죽으려고 하면 막는 건지. 내일 아침이면 목이 잔뜩 부을게 분명하다. 이왕 아플 거 치료제도 없는 병에 걸려버렸으면 했다. 내일은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

 

눈 뜨기가 힘겹긴 했지만 불행히 눈은 떴다. 먹는 것도 없고 활동량도 없는 덕에 면역력이 바닥이었다. 예상대로 목이 붓고 머리가 띵했다. 기침을 할 때마다 십 년은 담배 피운 아저씨처럼 묵직한 소리가 났다. 내 미랜가. 아니 나는 담배를 십 년 피울 때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다.

 

 

강의 시간이 조정돼서 하필 또 학원을 가야 했다. 학원에 도착한 즉시 학원에 온 걸 후회했지만 다시 돌아갈 기력이 없었다. 나만 빼고 모두 더워서 교실 안은 에어컨이 최고치로 가동되고 있었다. 긴 팔에 긴 바지를 입고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구겨앉았다. 얼굴은 뜨겁고 손발은 차가웠다. 박민혁!! 여기가 노래방인 줄 아는지 윤산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문을 벌컥 열었다. 문도 어찌나 세게 열었는지 문이 벽에 맞고 다시 튕겨져 윤산하의 종아리를 때렸다. 뻔뻔한 윤산하는 아픈 기색도 없다. 너 왜 그냥 갔어. 존나 나빠 진짜. 윤산하는 벽에 기대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날 보고 아마도 심통 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나는 그런 윤산하를 올려보지도 않았다. 나쁜 건 내 상태가 존나 나빴다. 불쑥 커다란 손이 앞 머리칼을 비집고 들어왔다.

 

"펄펄 끓네 아주. 기도한 보람이 있구만."

 

중얼중얼 거리는 윤산하의 손을 쳐내지 않았다. 수업을 들을 힘을 비축해야 했다. 내 옆자리 책걸상을 내 책상과 딱 붙인 윤산하는 그게 지자리인 것처럼 가방을 풀었다. 너 춥지. 윤산하가 문제집이나 봤으면 좋겠는데 걔는 자꾸 내 얼굴을 봤다. 대답 없이 몸을 더 웅크렸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수업이 1분 남았는데 윤산하는 또 문을 거세게 열고 교실을 나갔다.

 

"먼지 나 윤산하!"

"그러게 왜 담요를 안 빨아놨어요!"

 

복도에서 강사쌤과 윤산하가 다투는 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환청은 아니었는지 다들 보던 페이지를 정리하고 수업 준비를 했다. 나는 그제야 문제집 표지를 넘겼다. 문이 열리고 선생님 뒤로 담요를 든 윤산하가 따라들어왔다. 토끼 무늬가 새겨진 남색 담요를 내 몸에 둘러주는 윤산하는 꽤나 뿌듯한 얼굴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런 감정을 준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았다. 날 보고 뿌듯해하던 부모가 날 죽고 싶게 한 원인이 됐으니까. 그러나 이미 수업이 시작해버린 탓에 윤산하에게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수업은 들을만했다. 눈을 감으면 머리가 깨질 것 같고 눈을 뜨면 머리가 깨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만 빼면.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눈을 꾸욱 감았다 떴다. 눈알이 뜨끈뜨끈했다. 제대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은 수업내용을 다시 훑었다. 글자가 하나하나 분해돼서 들어와 머릿속에서 엉망으로 뒤섞엿다. 첫 줄을 무한 번 반복해 읽고 있는데 윤산하가 내 문제집을 덮었다.

 

"뭐고."

"너 진짜 독하다. 열이 40돈데 쉬는 시간엔 좀 자지."

"됐거-, ."

 

대답을 하다 목이 메어 끝음절이 묵음 처리 됐다. 낄낄거리며 비웃던 윤산하는 날 억지로 책상에 엎드리게 했다. 엎드리고 있으니 눈꺼풀이 무거워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윤산하는 수업 종이 치면 깨워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앞자리 애에게 주의를 받고 나서도 입을 다물지 않고 굳이 내 귀에다가 깨워줄 테니 마음 놓고 자라며 속삭였다.

 

 

잠깐이라도 자고 나니 학원에 오기 전 약국에 들러 사 먹은 약기운이 도는 듯했다. 옆으로 엎드린 채 한결 가벼워진 눈을 껌뻑거리고 있으니 가방을 정리하는 윤산하가 보였다. 가방을 정리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교실에는 윤산하와 나 둘 뿐이었다. 윤산하 머리 넘어 벽에 달린 시계를 쳐다봤다. 732. 잠깐 잔 게 아니었다. 수업이 끝난 지가 한참이었다.

 

"니 진짜 미친놈이가?"

"너무 잘 자길래 차마 못 깨웠다, 미안. 대신 필기는 했어."

 

경멸의 찬 눈으로 윤산하를 올려보며 말하니 윤산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가방을 다 쌌는지 지퍼를 지익 잠근 윤산하가 제 책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공책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대신 필기를 했다는 말이 너무 당당해서 미안하다는 말에 진심이 0.1퍼센트도 담겨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내밀어진 공책에는 내 이름이 버젓이 쓰여있었다. 니 내 가방 디볐냐? 그게 뭐야? 뒤졌냐고. 에이 날 뭘로 보고. 뒤진 게 아니라 살핀 건데? 눈치가 개똥인 건지 아님 날 개똥으로 보는 건지 짜증 섞인 물음에도 윤산하는 늘 그렇듯 느긋했다. 도로 이마에 열이 끓는 것 같았다.

 

"그래. 니 믿고 잔 내 잘못이다."

"너 걱정돼서 그런 건데 왜 그렇게 화를 내."

 

한탄하는 내게 윤산하가 얼굴을 찡그렸다. 걱정, 걱정. 그놈의 걱정의 대상은 언제나 내가 아니라 본인들이었다. 걱정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자기는 날 걱정하고 배려했다고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냐고. 사람들이 말하는 걱정은 날 욕하기 위한 도구였다.

 

윤산하한테 마구 소리치고 화내고 싶은 걸 꾸역꾸역 참았다. 화를 내다보면 항상 울음이 터졌다. 숨이 뜨거웠다. 수업 몬 들으면 필기를 뭔 수로 이해하는데.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을 꺼냈다. 목소리도 한껏 억눌려 나는 듯했다. 감기 덕분에 그게 티 나지는 않았다.

 

"아 뭐야. 내가 설명해주면 되잖아."

"?"

"내가 설명해준다고. 나 그런 거 잘해. 많이 해봤어 애들한테."

 

초면이었던 윤산하의 찌푸려진 얼굴은 금세 평상시처럼 웃음 띤 얼굴로 돌아왔다. 들뜬 목소리로 많이 해봤다며 자랑처럼 얘기하는 윤산하는 역시나 미덥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른 수가 있지도 않아서 나는 개미 콧구멍만 한 목소리로 알았다 대답하며 가방을 들고일어났다. 윤산하에게 건네받은 공책도 가방 안에 고이 넣었다. 신경질적으로 굴기엔 내 공책이라 구겨지게 할 수 없었다. 토요일날 디스토어에서 만날래? 디스토어는 우리 동네 유일한 카페 이름이다. 윤산하가 디스토어를 안다는 사실이 새삼 소름이었다. 니 쪼대로 해라, 라고 말할 생각으로 입을 벌렸으나 입에서는 어억, 하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로 성큼성큼 윤산하 앞을 지나가다 쓸데없이 긴 윤산하의 다리에 걸려 넘질 뻔 해서였다. 다급하게 책상을 짚었더니 책상이 요란한 소리로 밀려났다. 아무튼 넘어지진 않았다. 넘어진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수치스럽긴 했다. 윤산하는 비웃는 건지 걱정하는 건지 모르게 웃음 섞인 목소리로 얔핳하괜챤냐핰캭 거렸다. 나는 대답도 않고 교실문을 박차고 나갔다. 아까의 윤산하처럼. 다행히 문에 다리를 얻어맞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박민혁 같이 좀 가!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최대한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이 건물은 개념 없이 왜 4층까지 있으면서 엘리베이터도 안 만들어 놨어. 평소에 뛰면 내가 날다람쥐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오늘은 물속에서 달리는 것처럼 움직임이 굼떴다. 아직 아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결국 한 층을 남겨두고 걸음을 멈췄다. 바로 뒤따라 온 윤산하가 내 어깨를 잡아챘다. 달리다 뒷덜미가 잡히는 것보다 모양새가 괜찮은 것 같았다. 멈춰서길 잘 했네. 어쨌든 윤산하의 손을 떨쳐냈다. 윤산하는 아무렇지 않게 내 팔뚝을 잡았다.

 

"너 왜 멈춰서?"

"같이 가자먜."

 

힘든 티를 안 내려고 코로만 숨을 푸식푸식 내쉬었다. 근데 그게 윤산하의 걱정을 증폭시킨 듯했다. (사실 걱정인지 잘 모르겠다. 그냥 오지랖 같다.) 커다란 손이 또 불쑥 내 이마를 덮었다. 내 이마는 따뜻하게 미지근했고 윤산하의 손은 차갑게 미지근했다. 열은 많이 내렸는데. 윤산하가 중얼거리며 손을 치웠다. 비슷하면서 다른 미적지근함만 찝찝하게 이마에 머물렀다.

 

윤산하는 나보다 앞서 계단을 내려가면서 계속 뒤를 돌아보며 날 올려다봤다. 윤산하가 내 머리 아래 있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더럽게 느린 걸음이 거슬렸다. 실수인 척 윤산하의 운동화 뒤축을 밟았다. 윤산하는 휘청하더니 급하게 난간을 붙잡고 죽을 뻔했다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미안하단 소리도 없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정도로 안 죽어, 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가 많이 해봐서 알아, 라는 말은 더더욱. 내 반응을 보고 윤산하는 급조용해져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뭐 어쩌라고의 표정을 짓는데도 시선이 멈추지 않아 윤산하 정강이를 툭 찼다. 그제야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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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는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게 미덕이라 믿고 2년을 살았는데 윤산하의 집요한 오지랖이 내 믿음을 이겼다. 때문에 나는 토요일 오후 156분에 디스토어에 앉아있다. 윤산하가 어제 굳이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손 흔들기를 오만 번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른 디스토어 210!! 보다 14분 이른 시각이었다. 우리 동네 유일한 카페지만 내부에 들어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심플한 외면과 다르게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했다. 환한 조명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어두운 델 좋아하는 건 곧 죽을 사람의 습성인가. 그나마 조명이 덜 비추는 구석자리 소파에 가 앉았다. 가져온 문제집을 뒤적이면서 윤산하에게 물어볼 것들을 확인했다. 집에서 쭉 읽으면서 모르는 것만 체크해왔다. 20분이면 집에 갈 수 있으려나.

 

할 짓을 다 하고도 윤산하는 더럽게 오질 않았다. 내가 일찍 온 거지만 왠지 윤산하가 늦는 기분이 들어 불쾌했다. 카페 안 에어컨이 너무 정부규제 온도에 맞춰졌는지 다른 사람들은 안 더울지 몰라도 가디건을 입은 나는 슬슬 땀이 날 것 같았다. 여름은 분조장의 계절이다. 치미는 짜증스러움을 견디다 못해 카페를 나왔다. 카페 때문에 생긴 그림자에 쭈그려 앉아 담뱃불을 붙였다. 한숨처럼 짙은 연기를 뱉으면서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구경했다. 사실 구경했다기보다 그냥 보였다. 여기저기 아지랑이 파티였다. 별안간 시야에 지렁이 같은 발가락 달린 발이 들어찼다. 샌들을 신은 윤산하였다.

 

"박민혁 폐 썩는 소리가 들린다."

"우짜라고."

"어허. 민혁 학생 5분 뒤에 수업 시작인데 아직도 교실에 안 들어가고 이거 이거-"

 

윤산하 말투가 우리 학교 교장 같았다. 웃긴데 짜증 났다. 그 결과 비웃음이 나왔다. 윤산하는 눈이 타피오카 펄처럼 똥그래져서 내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디밀었다. 당황스러움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확 밀쳐버리려다가 갑자기 든 생각을 테스트 해볼 겸 그 얼굴로 후 바람을 불었다. 연기는 이미 다 날아가서 담배 냄새만 났을 텐데 윤산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손을 마구 휘저었다. 내가 담배 피우는 걸 꼰지르지 않는 이유가 윤산하도 담배를 피워서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내가 상상한 윤산하의 이미지는 실제와 맞는 게 없었다. 윤산하는 내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아서 휴지통에 패대기 처넣었다. 저거 불나면 니 책임이다. 나 간접흡연 때문에 목에 구멍 뚫으면 너 책임이야. 예예.

 

 

"다 봐왔다고? ! 내가 설명해준댔잖아."

"대충 함 봤더니 별로 안 어렵더라."

"나 진짜 열심히 공부했는데 ."

 

내게 선생질할 생각으로 들떠 보이던 윤산하는 문제풀이는 물론이고 채점까지 다 된 내 문제집을 보고 황당한 얼굴을 했다. 비유를 하자면 결혼식 하루 전 애인에게 바람맞은 사람 정도의 얼굴. 지 같아도 한 번 보고 왔을 거면서 뭘 저렇게 배신당한 얼굴인지. 좀 열심히 보긴 했다. 윤산하랑 내가 몇 시간씩 붙잡고 설명 듣고 문제 풀고 할 사이는 아니잖아. 그런 사이가 되고 싶은 마음도 물론 없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재주 같은 건 있어본 적이 없다. 원래 그랬고 우울증으로 골골대면서는 그런 척을 할 기력도 없었다. 집에만 있다 보니 그나마 알던 사람들과 연락이 다 끊긴 데다 더이상 새로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나는 몇 달 뒤면 죽을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어디에 들켜선 안됐으니까.

 

그 생각을 하면서 가디건 소매를 잡아당겨 아예 손까지 전부 가디건 속에 감춰버렸다. 한심하고 불쌍한 또는 미친(정신병자니까 미친 게 맞을지도) 사람 보듯 날 대하는 게 화나기보단 무서웠다. 의식적으로 날 자신들과 다르게 보는 그 시선과 행동들이 날 세상 밖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그래서 안 들을 거야? 내 설명?"

 

입술이 툭 튀어나와 보채는 윤산하를 가만 쳐다봤다.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면서 눈꼬리며 입꼬리며 축 처져 울상이 되는 게 웃겼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그 얼굴을 한 번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봤다. 분침이 4를 조금 지났다. 약속은 없었지만 토요일에는 오래 밖에 있을 수 없었다. 왜냐면 토요일은 이불 속에 틀어박혀서 죽은 듯이 자는 날이라고 내가 정해놨거든. 윤산하가 다 망쳤긴 했지만. 한참 초침을 돌아가는 걸 쳐다보다가 크게 호흡을 했다. 한 번 해보던가.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할 겸 듣는 거였는데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고로 지루했다. 윤산하의 설명이 나쁘지는 않았다. 많이 해봤다는 말이 허세가 아니었는지 윤산하는 친절한 반장처럼 조곤조곤 내용을 읊어줬다. 내가 봤던 윤산하 중에 제일 차분한 모습이었다. 어느새 윤산하 얼굴을 빤히 봤다. 대놓고 딴 데를 볼 수가 없어서 문제집이나 윤산하 둘 중 하나를 봐야 했다. 쓸데없이 윤산하의 얼굴을 감상한 소감을 말하자면 윤산하는 좀 애같이 생겼다. 아기같이 생겼다고는 말하기 싫다. 키는 멀대같이 커서 겅중거리고 다니니까. 코도 입도 귀도 다 작았다. 심지어는 피부까지 청소년기 남학생 같지 않게 잡티 하나 없이 하얬다.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쪽수가 적힌 곳에 좌우 반전된 을 그린 윤산하가 드디어 볼펜을 놨다. ! 하고는 작게 박수를 쳤다. 수업 들으신 소감 말해보세요. 니 연두부같이 생겼다. 윤산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와 웃노. 떨떠름해져서 또 가디건 소매만 죽죽 늘였다.

 

"너 내 얼굴만 보고 있었지? 수업에 집중해야지 안 되겠네 이 학생."

"뭐래. 내가 니 얼굴을 뭐 한다고 보냐."

"잘생겨서 봤겠지. 나도 알아."

"내 이제 갈란다."

 

급속도로 기분이 싸해져 문제집을 정리하는 나를 붙잡았다. . 내 설명 중에 틀린 거 있을 수도 있잖아. 혹시 모르니까 번호 좀^^. 덧붙이는 눈웃음이 헛수작 부리는 아저씨 같아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어이가 없네.

 

"너무 뻔한 수작 아이고?"

"그럼 뭐 물 쏟고 세탁비 물어줄 테니까 번호 달라고 할까?"

"니 내한테 뭐 바라는 거 있나. 왜 자꾸 달라붙어."

"친구하는데 뭐 바라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 나쁜 놈이지 그건."

"닌 내랑 친구가 하고 싶나?"

"."

 

진지하고 단호한 한 마디에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몰랐다. 울고 싶은데 겉으론 웃었다. 아닌가. 안 웃었을지도 모르겠다. 몸이 뻣뻣해져서 내가 어떤 얼굴인지도 몰랐다. 문제집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윤산하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방 지퍼까지 잠그고 나서 윤산하를 봤다. 진짜 윤산하가 아니라 테이블 유리에 비친 윤산하를. 여전히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내는 아니다."

 

마침내 그 공허한 눈과 마주쳤다. 왜 저런 표정인 거지. 카페를 뛰쳐나오면서 생각했다. 카페에서 나오기는 걸어서 나왔는데 지금은 달리고 있다. 그 공허한 눈이 혹시라도 쫓아올까 봐. 그럼 나 진짜 울어버릴 것 같아서. 윤산하라면 날 끌어올려 줄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이 잠시 들었다. 고작 며칠 말해 봤다고 몇 마디나 나눴다고.

 

 

/

 

당연한 일이지만 며칠 만에 학원을 가서야 윤산하를 다시 마주했다. 윤산하는 또 문을 부술 듯 열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보니 윤산하였다. 윤산하는 문을 여는 순간부터 날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도 한 박자 늦게 윤산하를 봤다. 윤산하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동상처럼 서서 나만 쳐다봤다. 그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서 금세 눈을 피했다. 놓쳤던 샤프를 다시 집자 문 닫히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윤산하가 터벅터벅 걷는 소리, 윤산하가 의자를 잡아끄는 소리, 윤산하가 책상 위에 책가방을 올리는 소리. 모두 작은 소리들임에도 전부 귀에 들어왔다. 왜 신경 쓰이냐. 머리를 괴는 척 윤산하 쪽 귀를 틀어막았다.

 

 

학원에서 나와 골목에 쭈그려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데 어디서 윤산하가 튀어나올까 봐 평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윤산하 때문에 담배도 편하게 못 피네. 줄담배를 피우다 눈앞에 들어온 운동화에 놀라 위를 쳐다봤다. 처음 보는 아저씨였다. 윤산하랑 비슷한 구석이 1도 없는. 다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 쓰레기 더미에 던져버렸다. 윤산하를 기대하는 내 꼴이 우스웠다. 내 얘기가 아니라 남 얘기였으면 왜 저러냐고 비웃어 줬을 건데.

 

그래서 나는 정류장에 있는 윤산하가 정말 윤산하인지 내가 하다 하다 환각까지 보는 건지 몰라 한참을 먼발치에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 윤산하가 진짜라는 걸 알고 나서야 정류장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학원이 끝난지 꽤 지난 시각이었다. 왜 아직도 여기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3시간을 같이 학원에 처박혀 있는 동안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아서 말을 걸어도 되는 건지 몰랐,

 

"아후 담배 냄새."

 

는데 걸어도 되는 모양이었다. 질색을 하는 윤산하와 거리를 멀리 두었다. 왜 갑자기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야. 뻘쭘해서 맡아지지도 않는 몸 냄새를 킁킁 맡았다. 나한테는 내 살냄새만 났다.

 

"너 나 싫어?"

"니가 담배 냄새 난다먜."

 

멀리 떨어져 앉는 날 가만 보고 있던 윤산하의 표정이 시무룩했다. 그리고는 축축히 비라도 맞은 양 울적한 목소리로 뜬금없이 던지는 물음이 얼척없었다. 쟤가 지금 뭐라카는 거고. 하도 얼탱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흥분을 했다. 텍스트로 하면 니가 담배 냄새 난다먜;;;;;; 정도였다. 이번에는 윤산하가 당황한 얼굴이었다. ,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님 뭐?"

"너가 나랑 친구 하기 싫다고 해서 ."

"니가 애새끼가? 찡얼대지 말고 말 똑띠 해라."

"니가 나랑 친구하기 싫은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안 그래?"

"."

"나랑 친구하기가 싫은 거야, 그냥 내가 싫은 거야?"

 

지 혼자 씩씩대며 말하던 윤산하가 어느새 내게 도로 한 칸 다가왔다. 날 똑바로 쳐다보는 눈이 조금 겁났다. 다 들통날 것 같아서. 나한테 윤산하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너무 기한이 짧잖아, 그런 걸 다 파악하기엔.

 

내 주변엔 마주치기 싫은 사람들만 가득했다. 한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특히 그랬다. 숨통을 억죄는 불편한 관계들. 누군가하고는 조금 덜 불편하고 싶었다. 끝내 편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그래."

"그게 뭐야. 좋다, 싫다로 대답해줘."

"좋다고, ."

 

 

지가 대답하라 시켜놓고 윤산하는 제게 고백하는 거냐며 집에 가는 내내 버스 옆자리에 붙어앉아 놀려댔다. 그것도 모자라 꺼지라는 내 말에 묵묵부답으로 대응하면서 집 앞까지 쫓아오더니 결국은 내 번호를 따갔다. 번호를 내놓지 않으면 집에 안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게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윤산하는 그 덕에 내 번호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연락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건만 집에 들어가자마자 윤산하의 알림이 핸드폰을 울려댔다. 확인은 안 했지만 마지막 톡은 [(이모티콘)] 이었다. 지 닮은 요란법석한 귀척 이모티콘이겠지. 안 봐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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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마지막 강의 날 윤산하는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언제나처럼 왜 카톡을 안 읽냐며 징징대는 걸 양손으로 귀를 막고 무시했다. 날 포함 다른 애들이 다 문제집을 읽고 있는 게 안 보이는지 흥칫뿡 모드로 관종짓을 하던 윤산하는 이내 내 폰을 가져가서 지가 지 톡에 답장을 했다. 아주 북 치고 장구 치고 걸어 다니는 풍물 악단이었다.

 

 

문제를 다 풀자마자 학원에서(윤산하한테서) 탈출하려 했건만 녀석은 내 팔뚝을 잡아채고 놓아주지 않았다. 공부 중에는 조금만 시끄럽게 해도 무섭게 쳐다보는 고삼들 덕분에 벗어나려는 시도도 하지 못했다. 하는 수없이 윤산하가 문제를 다 풀고 검사를 맡을 때까지 멍하니 앉아있었다. 윤산하가 멍 때릴 시간에 문제 채점이나 해달라고 소곤거렸지만 무시했다.

 

평소보다 10분은 늦게 학원을 나왔다. 그렇게 담배 냄새에 질색팔색하는 게 망을 봐주겠다며 쫓아오는 걸 막지 않았다. 막았어야 했는데. 망을 보긴 개뿔. 윤산하가 학원 내 최강 인싸라는 걸 잊고 있었다. 어쩜 지나가는 놈들마다 윤산하와 아는 사이인 건지 오히려 사람을 불러 모으는 꼴이었다. 다급하게 연기를 빨아들이다 현타가 왔다. 학원도 다 끝난 이 마당에 뭣하러 숨냐.

 

"고딩이 담배 피면 보기 좀 그렇잖아."

"내 스무살인데. 유급해서."

"?"

 

담배를 발로 짓이기고 쓰레기 더미 쪽으로 걷어찼다. 정확히 초록색 쓰레기봉투 위로 안착하는 꽁초를 보고 혼자 감탄사를 뱉었다. , 대박. 가디건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고 정류장으로 걸었다. 윤산하도 느릿느릿 쫓아왔다. 똑같은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 대박.

 

"어쩐지 담배를 너무 당당하게 사더라. 패기왕이라 그런 줄 알았더니 성인이었어."

"좀 닥치라, ."

"술도 마셔봤겠네?"

"니는 안 마셔봤냐?"

"아니. 존나 마시는데."

 

당연한 이야기처럼 말하는 윤산하를 보곤 고개를 절레 저었다. 내가 상상한 이미지랑 하나 들어맞았다.

 

 

"유급 왜 했어?"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폰을 만지던 내게 윤산하가 넌지시 물었다. 왠지 물으면 안 될 걸 묻는 사람처럼 머뭇거림이 묻어있는 말투였다. 아파서. 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잖아. 붉은 상처가 가득할 손목이 조금 욱신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아픈가 보지."

"뭐야. 언제 낫는데?"

 

고개를 돌리자 옆자리에 앉은 윤산하와 시선이 얽혔다. 11일에, 하고 입을 벌리려다 말았다. 나를 쳐다보는 빤한 시선 속에 묘한 기류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내가 신호를 보내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내 친구였던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알아듣기를 바라면서도 알아들을까 무서웠던 신호가 흔들리는 눈동자에 담겨있었다. 윤산하가 쳐다보고 있는 내 눈동자 속에. 나는, , 죽는다고.

 

"."

 

도로 핸드폰에 눈을 돌리면서 말했다. 윤산하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다지 맑은 웃음은 아니었다. 탁하지도 않았다. 다행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행이네."

 

윤산하는 그렇게 말했다.

 

 

어김없이 집 앞까지 쫓아온 윤산하는 내게 내일 또 만날 사람처럼 인사를 했다. 같은 동네에 살긴 하지만 학기가 시작되면 윤산하나 나나 서로 마주칠 여유도 없는 고삼들이었다. 얘는 이걸 알아서 저렇게 인사하는 건지 몰라서 이러는 지.

 

윤산하를 다시 못 본다는 사실 때문에 감상에 젖지는 않았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윤산하와는 대화를 튼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윤산하는 카톡 좀 읽으라며 당부의 당부를 했다. , . 대충 대답하고 황급히 집에 들어왔다. 누군가 벌써 와 있는 집이 밝아 또 서둘러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방 안은 빛없이 어두웠다. 씻지도 않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원래 윤산하랑 오래 못 볼 사람이었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텁텹한 눈가로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아직 집에 돌아가지 않았을 윤산하를 붙잡고 신호가 아닌 말을 전하고 싶었다. 나는, , 죽는다고.

 

 

결국은 씻지 않은 채로 잠에 들었다. 잠깐 울었다고 퉁퉁 부은 눈을 뻐근하게 깜박였다. 3시였다. 얼마나 오래 잔 건지, 더 이상 누워있기가 싫었다. 그래서 밖에 나왔다. 집 밖에. 방학 동안 학원, 담배를 이유로 하지 않고는 밖에 나온 적이 없었는데. 웃긴 건 윤산하와 약속이라도 잡은 것처럼 나올 준비를 하는 동안 윤산하가 눈앞에 둥둥 떠있었다. 눈에서 미세먼지가 덜 빠졌나. 윤산하가 눈앞에 떠있으니까 어제의 윤산하가 떠오르고 어제의 대화가 떠오르고. 어쩌다 보니 병원에 왔다. 다니던 병원이 어느새 위치를 옮겨 버스 정류장 바로 뒷건물로 와있었다. 우울증은 감기 같은 거라더니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 대신 다들 우울증에 걸려 병원을 많이 왔나 보다. 몇 달 만에 병원 시설이 좋아졌다.

 

박민혁 씨. 언제 들어도 어색한 호칭은 오랜만이라 더 어색했다.

 

"세 달 만에 왔네요."

 

할 말이 없어 웃고 말았다. 빈 웃음이 깃털처럼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어떻게 지냈어요?"

 

어떻게 지냈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숨 쉬고, 잠자고, 가끔 밥 먹고, 담배도 자주 피우고 .

 

"팔을 그었어요. 방학하고는 한 번도 안 그랬는데."

"왜요?"

"그냥. 불안해요. 죽고 싶은데 정말 죽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근데 사실 안 죽을 것 같아요. 죽어야 되는데 살 것 같아요."

"왜 살 것 같아요?"

"누가 살려줄 것 같아서요. 살려달라고 하면 살려줄 것만 같아요. 그래서 살려달라고 못 하겠어요."

 

야 너도 여기서 버스 타? 우산 갖다 줄 테니까 기다려. 박민혁!! 너 춥지. 너 걱정돼서 그런 건데 왜 그렇게 화를 내. 그래서 안 들을 거야? 내 설명? (닌 내랑 친구가 하고 싶나?) . 나랑 친구하기가 싫은 거야, 그냥 내가 싫은 거야?

 

유급 왜 했어? 지금은? 언제 낫는데? 다행이네.

다행이네

다행이네

 

윤산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곧 있으면 죽을 사람한테, 그것도 모르고, 몇 년지기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다정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정하게, 윤산하 목소리가, 계속.

 

고작 며칠 말해봤다고 몇 마디나 나눴다고.

 

곽티슈로 손을 뻗은 의사 선생님이 휴지 두 장을 뽑아 건넸다. 받아들은 휴지가 눈물을 머금고 금세 흐물흐물해졌다. 나도 흐물흐물 젖어드는 기분이었다. 윤산하는 나랑 몇 마디나 나눠봤다고 이렇게 빈번히 날 울리는지 모르겠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휴지는 금방 구멍이 났다.

 

 

휴지로 눈물을 벅벅 닦아내고 진료실을 나왔다. 다음 주에 또 올 것 같진 않지만 일주일치 약을 받았다. 돈을 계산하고 병원을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할 때까지도 나는 휴지처럼 흐물흐물했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마셔도 여전히 흐물흐물. 미세먼지도 여전히 눈가에 껴있나 나와 마주 보이는 방향에서 걸어오는 윤산하와 눈이 마주쳤다. 윤산하가 나를 쳐다보며 내게로 걸어왔다.

 

"박민혁 뭐냐? 왜 여깄어?"

 

요즘은 미세먼지가 말도 한다.

 

"병원 ."

 

나는 흐물흐물해서 대답을 얼버무렸다. 미세먼지인지 윤산하인지가 내가 나온 건물을 올려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 아무 말이 없다. 조금 눈동자가 커졌다. 원래 컸나.

 

"너 울어?"

 

물기를 잔뜩 머금은 박민혁은 금방 구멍이 났다.

 

"야 울지 마. 많이 아파?"

 

팔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아끄는 윤산하에게 이끌려가면서 괴상한 소리를 냈다. 엉엉 울면서 아프다고, 많이 아프다고, 그랬다. 살려달라고 하면 살려줄 것만 같아서 많이 아프다고, 만 했다.

 

 

윤산하는 내일이 친구 생일이라 생일 선물을 사러 나왔다고 했다. 그 친구는 나와 윤산하랑 같은 학원에 다니는 애라고도 했다. 생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 게 우리 다음 타임 때 수업을 듣는 애였다. 걔랑 지난번에 놀다가 윤산하가 걔 폰을 떨궈서 욕을 오지게 먹었단다. 다행히 폰은 멀쩡하고 폰 케이스가 와장창 됐다고 윤산하가 대신 제 폰을 들어 보이며 자세히 설명을 했다. 그래서 생일선물로 폰 케이스를 샀다고 선물이라 포장해서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조그마한 종이가방만 보여줬다. 윤산하는 집에 가는 내내 쉬지 않고 떠들었다. 우리 집 앞까지 날 바래다주고 손을 흔들 때까지. 자기 얘기만 했다. 나한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상한 윤산하.

윤산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항상 다 알았다.

 

 

/

 

방학이 끝났다. 여름에는 더우니까 방학을 하는 건 줄 알았는데 학교는 아직도 더웠다. 에어컨은 잘 안 켰다. 가디건 안에서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윤산하가 없는 학교는 (학교에 윤산하는 언제나 없었지만) 숨이 막혔다. 윤산하가 옆에서 시끄럽게 요란을 떨어야 숨 쉬는 걸 잊지 않았다. 학교생활에 나름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방학 동안 학교생활보다 더 윤산하에게 적응해버렸다. 방학 동안도 아니었다. 삼 주 동안이었다. 이걸 깨닫고 좀 웃었다. 학교에서 처음 웃는 거라 몇몇 애들이 날 쳐다봤다.

 

 

/

 

수능 전 마지막 내신시험이 당장 이틀 뒤였다. 그렇게 자랑하던 4계절을 잃고 오락가락해진 한국의 날씨는 9월이 되자 하복을 입기도 춘추복을 입기도 애매한 온도를 지속하더니 시험기간에 들어가자마자 급속도로 쌀쌀해졌다. 물론 나는 춘추복 혼용 기간이 되자마자 가디건을 벗어버리고 춘추복을 입었다.

 

오랜만에 춘추복을 입으니까 윤산하 생각이 났다. 윤산하는 왠지 반팔 셔츠보단 긴팔 셔츠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서늘한 와이셔츠에 팔을 꿰어 넣으며 윤산하를 떠올렸다. 윤산하를 못 본 지 한 달 째였다.

 

 

그동안 나는 몰랐던 윤산하의 의미를 깨달았다. 윤산하는 내가 아프고 나서 알게 된 유일한 사람이었다. 모든 관계를 다 끊어내고 밀어내던 나를 제 옆으로 끌어온 유일한 사람. 고작 삼 주 같이 있어놓고 윤산하는 날 당황하게 하고, 화나게 하고, 평범한 고딩들처럼 그저 떠들게 하고, 웃게 하고, 혼란스럽게 했다. 평범한 일상과 감정을 내게 돌려주었다. 죽을 날짜만을 세던 내가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정확히는 말하자면 내가 사라진 거였다. 윤산하는 한 달 동안 꾸준히 연락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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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저녁까지 전송되는 연락의 끝은 언제나 잘 자, 였다. 덕분에 나는 같이 살지도 않는 윤산하의 생활패턴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처음 일주일이 지나고 연락이 딱 끊겼을 때가 있었다. 그래봤자 3일이었다. 윤산하 다운 작심삼일이라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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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티콘)] 1

[진짜 개 나쁜 박민혁] 1

 

그 후로는 3일 전과 비슷한 내용의 연락이 이어졌다. 당연히 나는 항상 폰을 주머니에 챙겨 다녔다. 열심히 몸을 떠는 핸드폰을 보고도 단 한 번 윤산하의 연락을 확인하지 않았다. 더 이상 혼란스러워지면 안 됐다. 나는 머뭇거릴 여유 같은 게 없었다. 윤산하를 마주하면 불안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질 날 알았다.

 

그때 담배를 떨어뜨리지만 않았어도 윤산하랑 말 섞을 일 따위 없었을 텐데. 그 학원에 다니지 말 걸. 이 동네에 살지 말 걸. 살아있지 말 걸. 태어나지 말 걸. 불 꺼진 천장 아래서 넋 나간 사람처럼 생각의 꼬리를 물다 모든 게 와스스 무너져 흩어지고 나면 조금 울었고 팔을 그었고 오래도록 울다 지쳐 잠들었다.

 

 

/

 

정리노트에 시선을 꽂은 지 몇 십분째였다. 온갖 교과서 내용들로 그득그득 채워진 머리가 지끈거렸다. 담배나 피우고 오자 싶어 조용히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담배 한 대 피우고 한지 서술형 예상문제 좀 읽고 집 가야지. 후드티만 한 장 입었더니 쌀쌀한 밤공기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불 붙인 담배를 입에 물고 쭈그려 앉았다.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을 제외하곤 암전이었다. 조용하기도 조용했다.

 

"야 미친! 박민혀어어억!!"

 

저기 미친 듯이 달려오는 윤산하만 빼면 그랬는데. 아무리 밤이라 해도 그렇지 쟤는 너무 부끄럼이 없다. 목소리가 아주 동네 사람들 다 깨울 기세였다.

 

"으아!"

 

거의 다 와선 돌부리에라도 걸렸는지 휘청하더니만 금세 체조선수처럼 팔을 쫙 펴고 균형을 잡았다. 진짜 요란하다. 한 달 만인데 어색함 따위 느낄 새가 없었다. 한 달이 지났지만 달라짐 없이 윤산하는 이런 애였고 나는 그게 좋아서 또 싫었다.

 

"와 너 진짜-"

 

뛰어서인지 화가 난 건지 씩씩거리면서 입을 뗀 윤산하는 날 노려보다 별안간 내 어깨로 이마 박치기를 했다. 너무 오래만이잖아 . 내가 후드티를 입어 망정이지 얇은 티 차림이었으면 윤산하 이마나 내 어깨 둘 중 하나는 멍이 들 파워였다. 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것 같은데 윤산하는 제법 아련한 목소리를 했다. 잠깐 정적이 이어지는 걸 못 견디고 그만 치아라, 하며 윤산하를 밀어냈다. 삐치기라도 했는지 입술을 삐쭉 내민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왜 너 카톡 안 보냐. 너 빨리 폰 내놔 봐. 카톡 한 200개는 쌓였다 레알."

"돼따. 내가 니 연락을 왜 보노? 쓸데없는 말이잖아."

 

투덜대며 내 주머니 쪽으로 향하던 손이 멈칫했다. 굳은 얼굴이 몇 배는 더 보기 힘들 거라고 이미 그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생각했다.

 

"말 존나 밉게 하네 박민혁. 넌 내가 쓸데없어?"

"시비 걸 거면 그냥 가고. 나 내일 시험이야."

 

윤산하를 앞에 두고 땅바닥만 쳐다볼 수가 없어 자리를 피하려는데 윤산하가 소매를 잡아챘다.

 

"짜증나. 박민혁 내일 시험 망했으면."

"."

"아 나 너 보면 할 말 많았는데 다 까먹었잖아."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런 기색이 없었다. 내 소매를 잡고 앞서 걷는 윤산하를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어디 가는데. 내 물음에 대답을 하려다 의식적으로 입을 꼭 다무는 게 보였다. 그걸 복수라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윤산하가 옆에 있으면 숨이 잘 쉬어질 것 같았는데 마냥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에 도달하기도 전에 도로 밖으로 새는 기분이었다. 답답했다. 거짓말을 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마실래?"

"컵도 없이 어떻게 마시노. 그거 사러 나왔나?"

"그냥 병나발 부는 거지 고상한 척하기는. 수학 풀었더니 토할 것 같아서 원샷 할라고 샀음."

"니 이과잖아."

"그니까. 미쳤지."

 

손에 들린 검은 봉지에 뭐가 들었나 했더니 벤치에 앉아 부스럭대며 꺼낸 건 1리터짜리 콜라였다. 자연스러운 일처럼 병째 내미는 콜라를 거절했다. 윤산하가 다리 사이에 페트병을 끼고 뚜껑을 열자 싸아- 하고 속 시원한 탄산 소리가 퍼졌다. 원샷은 무슨 허세 부리고 있네 했는데 이 미친놈이 진짜 원샷을 할 기세로 콜라를 목구녕에 들이부었다. 내 이과 소리에 급 멈춘 게 다행이었다. 보고있는 내가 다 목이 따가웠다.

윤산하가 이과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너는 문과면서 왜 이 타임 수업 들어?"

"수학 좋아하니까."

"그럼 이과하지."

"국어 제일 못해서 정복욕 생겨서 문과했다, ."

". 곧 있으면 국어랑 섹스도 하겠네."

"뭐라노 미친새끼야! 드런 소리 말고 꺼져라 좀!"

 

나한테 몇 번 얻어맞고 내 손이 맵다며 찡찡대던 윤산하는 내가 때리려는 시늉만 해도 냅다 꽁무니를 빼고 도망을 쳤다. 그 웃긴 뒤통수가 생각나 살짝 웃었을 뿐인데 윤산하 얼굴이 날 빤히 쳐다봤다. 쟤는 왜 자꾸 내가 웃기만 하면 저러고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야 아까 한 말 그냥 한 소리지?"

"."

"나 쓸데없다 한 거."

"그걸 아직도 맘에 두고 있나. 쫌생이 새끼."

"아까 니가 겁나 차갑게 얘기했잖아!"

"기억 안 난다."

"너 그렇게 나한테 못되게 굴다가 후회한다 아주."

 

콜라를 도로 비닐봉지에 챙겨 넣은 윤산하가 봉지를 벤치 아래로 밀어버렸다. 넓어진 자리에 드러누운 머리통이 내 무릎 위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매 순간 아주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진작 여름에 얘 얼굴로 철판 아이스크림 장사를 했어야 했는데.

 

"니가 뭐라고 내가 후회를 하노."

"야 혹시 알아? 우리가 같이 대학 붙어서 자취할지."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내랑 니는 같은 대학 갈 일 절대 없다."

"왜 없어. 너 어디 갈 건데. 내가 너랑 같은 대학도 못 갈 것 같냐. 나 나름 작년에 학생회장이었어."

"학생회장 할 사람 다 죽었다."

"박민혁 수학 망했으면."

 

날 정면으로 올려보며 중얼이는 얼굴에 딱밤을 먹였다.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맞은 이마를 부여잡고 우는소리를 내는 윤산하를 보고 웃지 못했다. 멍청한 윤산하야. 우리가 같은 대학 갈 일 적어도 이번 생에는 없어. 어느새 엄살을 멈춘 윤산하가 별 박힌 하늘을 가만 쳐다봤다. 야 너도 누워 봐. 싫은데. 내가 손수 눕혀주기 전에 빨리 누워. 니는 다 문젠데 그 허세가 제일 문제다. 닥쳐. 좁은 벤치에 남고딩 둘이 겨우 머리를 부대끼고 누웠다. 누웠다고 하기도 애매한 게 하체는 다 벤치 밖으로 튀어나와 엉덩이만 가까스로 걸친 채였다.

 

"예쁘지."

"가로등 때문에 뭐 보이지도 않는구먼."

"아 쫌, 무드 좀 깨지 마 민혁아."

"니랑 무드는 무슨."

"야 분위기만 좋으면 상대가 슈렉이어도 설레는 법이거든. 여기에 잔잔하게 비지엠까지 틀고 딱 하면, ."

"하면 뭐."

"몰라."

 

신나서 얘기하다 말잇못 상태가 된 윤산하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문장을 끝마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는 윤산하를 모른 척 넘겨주기로 했다. 정말로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윤산하의 얼굴이 자꾸 시야로 넘어오는 바람에 더 그랬다. 잘 보이지도 않는다며 빈정댔던 별에 신경을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러고 보니 별이 꽤 많았다.

 

"저게 그거냐? 플레이아데스 성단인가 뭔가."

"어디?"

 

손을 쭉 뻗어 별들의 무리를 가리켰다. 고개를 움직인 윤산하가 내 손끝을 가만 보더니 내 손가락을 잡아 쥐었다. 윤산하에 의해 움직여진 손끝이 이번엔 조금 푸른 별들을 가리켰다. 그거 말고 저거. , 그래? 알겠다며 고개까지 끄덕였지만 내 손끝은 여전히 흐릿한 푸른 별을 향했다. 나보다 팔이 긴 윤산하가 내 손가락을 잡고 있는 탓에 팔을 내릴 수 없었다. 이제 놓으라는 표시로 뻗고 있던 손가락을 오므렸다. 윤산하는 별 반응이 없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 윤산하를 쳐다봤다. 내 눈 바로 옆으로 보이는 작은 입술이 소리를 낼랑 말랑 머뭇거리고 있었다.

밖에 한참 나와있어 차가워진 손이었지만 감각은 살아있었다. 윤산하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어설프게 끼워맞춰졌다. 그리고 이내 어설픔을 용납하지 않고 헐렁한 틈을 단단히 메우는 윤산하의 손을 어찌하지 못했다. 윤산하한테 또 모진 말을 하는 건 싫었다. 이래서 윤산하와 마주치기가 무서웠다.

 

"원래 수능 끝나고 말하려 했는데 지금 말할까."

"뭐를."

 

모른 척 대답을 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려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민혁아. 평소보다 더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곧바로 밀려왔다. 입을 다물고도 목소리가, 아니 이제는 몸이 벌벌 떨렸다. 민혁아. 왜 자꾸 부르냐고 빨리 할 얘기나 하라고 하고 싶은데 그 후에 돌아올 말을 감당할 수 없었다. 깍지가 껴진 손에 점점 땀이 찼다. 윤산하가 그 사실을 눈치채기 전에 얼른 손을 놓아버리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 내일 시험인데 와 이러고 있노. 가야겠다 이제."

 

떨림을 감추려고 목소리가 뜨문뜨문 나왔다. 누가 봐도 어색한 음성이었다. 1초도 되지 않는 그 간격들이 너무 숨 막혔다. 아무런 모진 말도 하지 않았는데 차갑게 식어버린 저 표정이 너무 숨이 막혔다. 윤산하가 있으면 숨이 잘 쉬어질 것 같다는 내 생각은 망상에 불과했다. 윤산하는 날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이었고 날 불안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뭐야 박민혁."

"."

"갑자기 너혼자 왜 각성하냐. 나도 내일 시험이거든."

"니도 들어가서 공부하던가."

"시험 끝나면 연락 하셈. 그때까지 카톡 안 할게."

"."

 

슬며시 웃음기가 도는 윤산하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초조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방금 전까지 우리가 하던 대화를 까맣게 잊은 것처럼 사실은 잊은 척하며 윤산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성의 없이 바닥에 떨궈둔 비닐봉지를 잊지 않고 챙겼다. 독서실까지 같이 가자. 니네 집이 여 앞인데 뭣하러 같이 가노. 내 혼자 가께. 우리 집이 여기니까 너네 집이랑 우리 집 중간에서 헤어지자는 거지. 나는 언제나 윤산하를 못 이겼고 못 이기는 척 굴기도 했다. 결국은 같이 걸었다는 얘기. 윤산하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콜라가 든 비닐봉지가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냈다.

 

"근데 너 여기 다니는 줄 알았으면 나도 독서실 올걸. 왜 말 안 해줬어."

"오면 뭐해. 공부를 둘이 하나, 혼자 하지."

"하긴 카톡 300개 보내도 한 번을 안 읽는 사람이 그런 걸 말해 줄 리가 있나."

"니는 이름을 윤쫌생으로 바꿔 볼 생각 없나? 잘 어울리네."

"그러고 보니까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좀생이 별이라고 부른다더라."

 

그런가? 하고 수긍하나 싶더니 윤산하의 허연 얼굴이 짓궃어졌다. 몇 년 전 사촌누나가 탄생시킨 내 첫 조카 급으로 유치하고 얄미운 얼굴이었다. 결국에는 내가 시초 한 일인 걸 알았지만 윤산하에게 상황을 설명할 명분이 없었다. 귀찮아서 필요 없어서 안 봤다고, 한 달 내내 윤산하를 떠올린 사람으로서 쥐뿔같지도 않은 거짓말을 할 뿐이었다.

윤산하는 별 얘기를 하며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올려봤다. 나는 굳이 하늘을 보지는 않고 말했다. 윤산하 별이네.

 

 

윤산하를 보내고 독서실에서 짐을 챙겨 나와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의도치 않게 하늘과 시선이 맞았다. 힐끗 쳐다본 푸른 별들은 희미하면서도 좀처럼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윤산하 덕분에 평생 잊을 일은 없을 듯했다. 플레이아데스 성단. 좀생이 별. 윤산하 별. 독서실에서 집까지 걷는 내내 푸른 별들이 머리꼭지 위로 날 쫓아다녔다. 이제는 하늘을 봐도 윤산하 생각만 날까 봐 막막했다.

 

 

/

 

나는 윤산하 때문에 공부에 집중을 하지도 공부 때문에 윤산하에 빠져 살지도 못하고 그 어딘가에 어중간히 머물렀다. 시험기간 공부를 하는 것도 노는 것도 아닌 학생들이 대게 그렇듯 여전히 윤산하의 연락을 확인하지 않으면서 마음 한구석이 심각히 찝찝했다.

 

수능 전날까지 그랬고 수능 날이 되어서는 내 인생 스무 번째로 열리는 수능이나 처음 직접 겪어보는 그 무시무시한 수능이란 것에 정신이 없었다. 아침 공기는 쌀쌀했고 교통은 혼잡했고 예비소집 날을 제외하고 초행인 학교는 낯설었고 교실 안은 모두 경쟁 상대라는 기분이 묘했다. 나에게 그리 전투적일 이유는 없었지만 끝을 애매하게 맺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지금 11월 모의고사를 보는 건지 수능을 보는 건지 헷갈려서 긴장이 좀 풀리긴 했다. 교문 앞에 부모님이 있으면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막연한 기분으로 느린 걸음을 걸었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에 가기 싫어 수능이 끝난 대로 동네 카페에 처박혀 있었다. 당연히 디스토어였다. 아무하고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카페 정중앙을 차지하고 앉았다. 윤산하와 함께 앉았던 구석자리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자리를 찾은 거였다. 그래놓고 음료는 윤산하가 시켰던 것과 같은 걸 시킨 게 개그였다. 윤산하는 그 나이를 먹고도 커피를 못 마셨다. 달달한 음료를 쪽쪽 빨며 넋 놓고 가채점을 하다 샷 세 개를 때려 박은 아메리카노를 새로 시켰다. 이번 생은 무슨 다음 생에도 윤산하랑 같은 대학은 못 가겠네.

 

수능날이 지나고서야 폰을 켰다. 카톡 속 윤산하가 엉엉 울고 있었다. 수능을 망쳐서인지 내가 연락을 안 봐서인지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

 

유난히 좋아하는 날을 꼽으라면 1122. 내 생일도 윤산하 생일도 아닌 이 날은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이었다. 뭔가 차례까지 세세히 알고 있으니까 무슨 늙은이 같은데 소설이 첫눈이 오는 절기라 좋아하는 것뿐이다. 겨울을 가장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첫눈이 설레지 않는 사람은 아마 몇 없었다. 엄연히 따지자면 그 해의 첫눈이 아닌데도 첫눈이 내리는 날은 그 자체만으로 특별했다. 그즈음 첫눈이 온다고 절기로 지정해 놓은 걸텐데 한 번도 소설에 첫눈이 오는 걸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올해 소설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베란다에서 내려 본 새하얀 소설의 거리는 눈이 부셨다.

 

 

씻지도 않고 눈을 밟으러 나갔다. 수능이 끝나고 우울증을 핑계로 학교를 자주 땡땡이친 덕분에 오랜만에 밖에 나가는 거였다. 이미 고삼들은 학교가 다 끝났을 시각이었다. 폭신하게 솟아오른 눈더미 위를 사박사박 밟아 걸었다. 눈을 밟으면 나는 뿌드득 소리가 눈의 요정이 터져죽는 소리라는 무섭지도 않은 괴담은 매년 생각이 나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아 좀 동심 파괸가. 쌀쌀한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앞뒤 양옆 가리지 않고 여래 갈래로 발자국이 찍힌 길을 일정한 방향으로 걸었다. 내가 어딜 향해 걷고 있는 건지 눈이 달린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지력은 없는 탓에 윤산하를 마주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윤산하와 참 잘도 마주친다고 속 편한 얘기를 하기에는 늘상 서로가 서로를 찾는 걸 알았다.

 

윤산하가 말이 없으니 나도 입을 열지 못했다. 오랜만이라고 말하기에는 연락을 피한 나 때문이었고 첫눈 얘기를 할까, 소설 얘기를 할까, 수능 얘기는 안 하는 게 났겠지. 묵묵히 입을 닫은 채로 머릿속은 혼잡했다. 그 심경을 대변해 땅바닥을 파던 내 발 앞으로 눈산이 생겼다. 윤산하는 어김없이 평상 위로 다리를 모아 앉아 있었다.

 

"민혁아."

 

마침 윤산하가 내 이름을 부를 때 쨍한 햇빛이 눈에 반사되어 내게 직빵으로 조명을 터뜨렸다. 눈앞이 확 밝아지는 순간 허공으로 퍼지듯 들려온 목소리가 현실인지 상상인지 구분이 잘 안 갔다. 대답을 해야 하나 난처히 입술만 달싹였다.

 

"좋아해."

 

환한 빛에 귀가 멀었으면 좋았을걸. 새하얀 눈처럼 싱겁고 밋밋한 고백이었다. 그래서 더 깊게 몸을 파고들어와 날 찔렀다. 목이 콱 막힌 기분이 들어 그냥 이대로 숨이 멎었으면 했는데 호흡은 멀쩡했다. 윤산하와 대화를 하다 보면 나는 종종 심장이 덜컥 내려앉곤 했다. 오늘은 그 이상이었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시뻘건 심장이 눈 속에 파묻혀 차게 식어버렸다. 물어본다면 말할 수 있었다. 나도 네가 싫지 않아. 근데 너는 날 혼란스럽게 하잖아. 나는 네가 너무 무서워 산하야.

 

인정하기 무서워 생각조차하기 싫었던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어진다.

 

너를 보면 살고 싶어져.

살려달라고 빌고 싶어져.

네가 살아달라고 한 마디만 하면 난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어져.

 

윤산하는, 죽고 싶다는 생각에 대한 내 확신을 혼란스럽게 했고 죽기 위해 살아가던 나를 머뭇거리게 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의지가 어떻던 윤산하를 피해야 했다. 나 죽지 말까 산하야. 나 그냥 평생토록 너랑 같이 있을까. 도망쳐야 했다.

 

"… … 나 가께."

"가면 언제 또 올 건데. 내년에 올 거야? 아예 안 올 거지, ."

"이거 놔라."

 

도망치는 내 손목을 잡아챈 윤산하에게서 벗어나려 팔을 팽팽히 당겼다. 곧 윤산하의 손힘이 조금 풀리나 싶더니 그대로 몸이 확 끌려갔다. 너 이거 뭐야? 내 소매를 끌어올린 윤산하와 내 시선이 내 팔뚝을 향했다. 그 위로 선명한 붉은 선들이 뒤엉켜 있었다. 내 손목을 단단히 그러쥔 윤산하의 하얀 손과 대조되는 붉은 것들을 내려보고 있으니 짧은 순간 동안 정신이 아득해졌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소매를 잡아내리려 했지만 윤산하는 완강했다.

 

"뭐냐고 박민혁."

"… … 고양이."

"?"

"고양이가 그랬다 . , 내가 말 안 했나, 나 고양이 키운다고."

"."

"내 진짜 가 봐야 된다. 이것 좀 놓아줘."

 

지진이 난 성대에서 볼품없는 음성이 기어 나왔다. 고양이를 키우기는커녕 동물 털 알레르기가 있는 나였다. 윤산하의 눈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윤산하가 무슨 표정인지도 알지 못했다. 다행인 건 윤산하의 손이 내 팔을 툭 놓아버렸단 거. 다행이 맞는지 고민해볼 겨를 없이 그 길로 등을 돌려 터덜터덜 걸어갔다. 눈 덕분에 질질 끌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건 진실로 다행이었다. 윤산하는 무슨 얼굴로 내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을까. 날 보고 있기는 할까.

 

 

귀신이 들린 것처럼 폰이 끊임 없이 진동했다. 윤산하가 연락을 해온 건 대략 6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윤산하의 이름에 덜컥 겁을 먹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내 자해 사실을 안 사람들은 대게 욕을 하거나 추궁을 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어투의 동정을 했다. 윤산하가 그들과 다르단 걸 알았지만 다름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부모님에게 처음 자살시도를 들킨 날 진작 깨달았다. 날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톡, 문자, 전화 가리지 않고 온갖 연락수단으로 연락이 왔다. 기다리다 보면 잠잠해지겠지 하고 있었는데 불굴의 의지를 지닌 윤산하는 핸드폰이 아닌 현실세계로 나타났다. 창문을 두드리는 자그마한 돌멩이를 알아챘다. 한 번만 더 던지면 창문이 깨질 것 같아 열어본 창밖으로 윤산하가 보였다. 한참 아래에 있어 작아 보이는 윤산하가 폰을 들고 흔들었다. 전화가 오고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윤산하의 표정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아서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

 

"야옹."

"...."

"고양이가 사과하러 왔으니까 얼른 내려오세요."

"...."

"제가 직접 가기 전에 와요."

"...."

"- 고양이 얼어 죽는다."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그 덕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윤산하 얼굴은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다. 진짜 정말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윤산하.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자꾸만 웃는 윤산하를 보고 있으니 화가 날 지경이었다. 너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계속 날 살고 싶게 하는데. 악을 쓰며 울고 싶은데 전화로 넘어오는 윤산하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빨리 내려와 주인아, 하는 애교스러운 음성을 듣고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웃지는 않았지만 목을 꽉 틀어막고 있던 가시 돋친 얼음덩어리가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대충 슬리퍼를 신고 나가 마주한 윤산하는 방금 내가 본 얼굴이 상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예쁘게 웃었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휴지 뭉텅이로 젖은 벤치를 닦아낸 윤산하가 날 앉혔다. 마주 보고 앉은 윤산하가 가져온 비닐봉지에는 연고가 들어있었다.

 

"손 줘."

"...."

"-"

 

장난스레 인상을 썼던 윤산하가 억지로 내 손을 잡고 옷소매를 걷었다. 그새 더 늘어버린 상처를 보고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면봉에 연고를 짜고 상처 위로 살살 문지르는 얼굴이 진지했다. 막 새겨진 상차가 따가워 움찔하면 윤산하가 더 크게 놀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아파?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안 아플 리 없었지만 아파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우울증을 겪으면서 알게 된 것은 나는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단 거라고.

 

"고양이는 언제부터 키웠어? 나 고양이 좋아하는데 말 좀 해주지."

 

약을 바르는 것에 익숙해졌는지 약을 바르면서 내뱉은 말이 연고보다 더 따갑게 날 쿡쿡 찔렀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못 돼 처먹은 윤산하.

 

"어떻게 생겼는데? 사진 있어?"

"...."

"고양이 이름은 뭐야?"

"...."

"누군진 몰라도 엄청 말썽쟁이네. 형도 못 알아보고 이렇게 상처를 내놨냐. 아 수컷은 맞아?"

"...."

"? 맞아?"

 

연고를 다 바르고 한 번 후후 불어주기까지 한 윤산하가 다 쓴 면봉을 비닐봉지 안에 집어넣었다. 마침내 윤산하의 눈이 날 쳐다봤다. 피하고 싶었는데 그 시선이 너무 올곧아서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민혁아."

"."

"민혁아. 왜 울어."

 

윤산하의 말을 듣고 뒤늦게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두 눈을 질끈 감자 눈앞이 까매졌다. 서서히 눈을 뜨면 뿌옇게 밝아지는 시야 안에 상처투성이 팔뚝이 보였다. 그 위에 발려진 반투명한 연고도. 연고를 발라 놓으니 붉은 상처가 아니라 희미한 분홍색으로 팔뚝이 뒤덮였다.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는 윤산하 손등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눈물길을 만들었다. 너 때문에 내 손등도 운다. 웃음 낀 목소리가 작은 파동으로 전해져왔다.

 

"그때 우리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쳤을 때, 민혁아."

 

조그만 파동이 내 이름을 불렀다. 공기의 파장까지 보이는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

 

"그날 너가 나온 건물에, 병원은, 정신의학과 밖에 없었어."

"...."

"왜 거짓말 쳐 나한테. 나는 무조건 다 믿을 건데, 네 말. 네 거짓말."

 

투명한 눈물이, 울음이 팔뚝으로 떨어지면 연고와 섞인 희뿌연 눈물이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분홍색이 다시 점점 붉은색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불투명한 연고 위로 계속해서 투명한 울음이 쏟아졌다. 슬리퍼만 덜렁 신은 맨발은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추웠는데 숨이 너무 뜨거웠다. 윤산하 때문에, 사실은 나 때문에 감기를 걸렸던 그날보다 더 뜨거웠다. 허연 김을 후우 뱉어냈다. 입김이 담배연기처럼 윤산하 쪽으로 흩어졌다. 담배 냄새난다고 짜증 낼 것만 같은데 윤산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차갑게 굳어 나무토막 같은 손가락으로 눈물을 지워냈다. 눈물을 닦아내고도 시야가 명확해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윤산하 얼굴이 빛을 보고 있는 것처럼 밝았다.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11일 되면 뛰어내릴 거다, 여기 옥상에서. 스무 살만 지나면 죽을 거야. 더 못 견디겠다 이제."

"."

"사람들이, 부모가, 내가, 나를 자꾸 죽여. 너는 모르잖아. 이런 기분, 이런 느낌, 이런 감정."

"박민혁 ."

 

유하지 못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던 윤산하는 입꼬리를 올리는 날 보고 말끝을 흐렸다. 내 웃음에 항상 묘한 반응을 보이는 윤산하였지만 이번엔 다른 묘함이었다. 허망한 내 웃음을 보고 윤산하는 곧 울기라도 할 것처럼 미약한 표정을 지었다. 바보. 진짜 믿으려고 그러면 어떡하냐.

 

"와 그런 표정이고. 다 거짓말인데. 내 이제 추워서 들어갈란다."

"."

"안 바래다줘도 되제?"

"박민혁, 민혁아."

"담에 보자."

 

언제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는지 하얀 눈가루 묻은 슬리퍼에 대충 발을 껴 넣었다. 감각이 없는 발은 슬리퍼를 신었는지 벗었는지 느낌도 없었다. 파동은 계속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지 않았다. 아파트 현관 문이 닫히자 더는 파동이 전해오지 않았다. 이걸로 끝이다. 죽기까지 41일이 남은 날이었다.

 

 

/

 

그날을 이후로 단 한 번 밖에 나가지 않았다. 학교는 병결을 냈고 수능을 끝낸 고3이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하루 반나절 이상을 침대에 누워지냈다. 윤산하에게 거짓말을 쳤던 것처럼 고양이라도 키웠으면 조금이라도 움직였을지 모르겠다. 밥을 먹을 이유도 샤워를 할 이유도 없었다. 이런 생활을 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8kg가 넘게 살이 빠졌다.

 

새벽 한두시에 잠들어서 눈을 뜨면 초저녁이었다. 햇빛을 거의 못 보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간개념 같은 건 잊은지 오래였다. 월요일인지 목요일인지를 구분하는 건 물론이고 오늘이 어제인지 오늘인지 내일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눈을 뜨면 종종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를 않는 다고. 밥도 안 먹고 심지어 화장실도 안 간다며 질색을 했다. 아빠가 뭐라 대답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별로 대수롭지 않아하는 것 같았다. 한 번 물을 마시러 부엌에 나간 날 보고는 살이 왜 이렇게 빠졌냐며 인상을 쓴 게 다였다.

 

눈을 뜨고 있는 동안 크게 생각하는 것도 없었다.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다시 잤다. 가끔은 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D- 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쌓인 연락은 별게 없었다. 의미 없이 오는 게임 문자들이나 반톡에서 애들이 떠드는 말들뿐이었다. 그마저도 카톡을 로그아웃했더니 폰이 제 기능을 발휘할 때가 없었다. 윤산하는 아주 때때로 불현듯 떠올랐다. 보통은 까만 방 천장을 보다 플레이아데스 성단과 함께 지루한 내 머릿속을 침범해왔다.

 

 

/

 

크리스마스라고 특별할 건 없었다. 20년 인생 내도록 무교인 나와 달리 태생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인 부모님은 아침부터 방문을 열어젖혔다. 오랜만에 이른 아침 볕을 맞으니 뱀파이어처럼 몸이 부서져내려 가루가 될 것 같았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혁아 교회 안 갈래?"

"안 가요."

"오늘 교회에서 뭐 많이 할 건데. 재밌을 거야."

"문 닫아주세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웅얼거렸다. 10초 뒤 말없이 문이 닫혔다. 문 밖에서 엄마가 성질을 내는 소리가 들렸다. 저딴 식인 애한테 누가 살갑게 굴고 싶어? 저러니까 맨날 골골대고 아픈거 아니야. 빨리 졸업시키고 치워버려야지. 이 정도면 들으라고 하는 소리 맞나.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한숨을 훅 쉬었다. 울 것 같아서 조금 웃었다. 억지로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다가 종국에는 꺽꺽 울었다.

 

 

스무 번째 자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3시간 뒤면 끝이었다. 아침에 잠들어서 그제야 일어난 거였다. 핸드폰 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문자가 두 통 와있었다. 발신자명만 확인했을 뿐인데 숨이 답답했다. 몸을 반쯤 일으키고 심호흡을 몇 번 했다. 문자 두 통 가지고 참 난리였다. 하나는 커다란 트리 아래 선 윤산하 사진이었다. 갈색 니트 위에 흰 롱패딩을 걸친 윤산하가 브이를 한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연두부 닮은 거 맞네."

 

중얼이는 목소리와 함께 허탈한 웃음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내년에 같이 오자] 문자를 읽을 뿐인데 윤산하 목소리가 들렸다. 늘 내게 보여주던 다정한 말투, 목소리, 눈빛, 표정, 몸짓 하나하나 다 생생했다. 한 달을 안 보면 뭐 해. 연락 한 통 안 하다가도 이런 문자 하나에 이렇게 다 떠오르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았지만 이러길 바라고 본 거였다. 솔직히 정말 더는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보고 싶어져. 날 살고 싶게 하는 네가 무서웠는데, 이제는 살고 싶든 죽고 싶든 그런 거 상관없이 너가 무섭도록 보고 싶다. 어차피 산타 같은 거 믿지 않게 된지 한참이라서 크리스마스가 끝나갈 때까지 마냥 울었다.

 

 

다음날에는 병원을 다녀왔다. 또 몇 달 만이었다. 밖에 나온 지도 한 달 만이라 버스카드 찍는 법도 까먹고 허둥지둥했다. 상담을 하는 동안 윤산하에 대한 얘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자꾸 떠오르기는 했다. 어제 본 사진이 아른거렸다. 의사선생님도 물으셨다. 그때 그분은 어떻게 됐냐고. 도움은 요청해보셨나요? 묻는 의사선생님께 도리질을 했다. 윤산하의 관한 얘기를 소리 내어 발음하기가 꺼려졌다. 생각만으로 목이 메는 이름이었다. 내가 입을 꾹 다물자 선생님이 화제를 돌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서 별을 찾았다. 천체에 대해 잘 몰라서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찾아낸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오래오래 바라봤다. 반짝이는 별빛들이 다 윤산하라고 생각하면서. 이제는 보지 못할 얼굴을 오래오래, 그렇게.

 

 

/

 

간만에 깔끔히 씻고 1231일 오후 1135분에 알람을 맞췄다. 8시간 13분 뒤 알람이 울릴 예정이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받아왔던 일주일치 약을 세 번에 나눠 전부 삼켰다. 정확히 서른여덟 하고도 반 알이었다. 항상 쉽게 잠들지 못했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유독 잠이 오지 않았다. 한 시간을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알람을 잘 듣지 못해 40분이 넘어서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눈앞이 핑 돌더니 몸이 크게 휘청였다. 후드집업을 걸치고 벽을 짚어가며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인 20층에 올라갔다. 다행히 누굴 만나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아는 아파트 주민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티익스프레스라도 타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약을 여러 봉지씩 털어먹을 때마다 겪는 일이지만 이 끔찍한 두통이나 울렁거림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옥상 철문까지 걸어 올라가다 계단을 구를 것만 같았다. 고작 스무 계단 정도를 올라가놓고 철문 앞에 잠시 쭈그려 앉았다. 아 진짜 토할 것 같다. 가까스로 문고리를 눌러 쥐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S

 

우리 집에서 박민혁 집까지 거리가 이렇게 먼 줄 몰랐다. 1120분에 집에서 나오다 아빠에게 붙잡혔다. 내가한 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냐며 추궁하는 아빠와 실랑이를 하다 보니 오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박민혁이 정말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식으로 박민혁을 놓쳐버릴까 봐 야밤에 술 취한 사람처럼 마구 뜀박질을 했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에 식은땀이 났다. 십분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렸더니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목이 냉하게 아팠다. 체육 때 오래달리기 기록을 측정하던 것보다 더 힘이 들었다.

 

아파트 앞에 서서 올려다 본 박민혁네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다들 자나 보다 생각하고 싶었는데 옥상에서 뭐가 자꾸 아른아른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형체가 너무 익숙해서, 누가 모가지를 틀어잡고 날 들입다 패는 기분이었다. 사실 무슨 비유가 적당한지 모르겠다. 난생처음이었다.

이렇게 숨이 막히고 망연하고 공포스러운 상황은 겪어 볼 일이 없었다.

 

너는 모르잖아. 이런 기분, 이런 느낌, 이런 감정.

 

첫눈이 오던 날 박민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수전증도 없는데 손이 바르르 떨려서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박민혁의 번호를 누르고 연결음이 가는 동안 그 떨리는 손가락을 꽉꽉 짓씹었다. 제발 받아라. 제발, 제발 .

 

"여보세요."

"민혁아 어디야?"

 

신호음이 한참 울리다 간신히 연결이 됐다. 박민혁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숨도 쉬지 않고 물었다. 내 한껏 다급한 목소리를 느끼지 못한 건지 날 피 말려 죽일 작정인 건지 대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민혁아 너 지금 어디야?

 

"윤산하 이 미친놈아 진짜."

 

뚫어져라 보고 있던 옥상 난간으로 박민혁의 상체가 쑥 튀어나왔다. 나를 발견한 박민혁은 한숨 섞인 목소리를 했다. 그렇게 바라면서도 무의식중에 이 결과를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정말 옥상 위에 있는 박민혁을 봤지만 크게 놀랍지 않았다. 그냥 좀 절망적이었다. 그보다 아래에서 보기에 너무 아슬아슬한 박민혁의 자세가 너무 겁이 났다. 민혁아 뒤로 가. 나 보지 말고 뒤에 서 있어. ?

 

"집에 가라. 짜증나게 하지 말고."

 

박민혁은 금세 내게 등을 보였다.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 꼈다. 돌아선 박민혁이 얼핏 난간에 걸터앉는 것 같아서 마음이 급했다.

 

"민혁아 왜 또 울려고 그래. 거기서 울지 말고 이리 내려와. 아니 내려오라는 게 그게 아니라. , 아 그냥. 내가 갈게."

 

횡설수설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는 말들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튀어 나왔다.

 

"오지랖 좀 부리지 마라.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날 살려줄 것처럼 굴어. 오늘 살면 뭐해. 씨발 내일 또 이러고 있을걸."

"그럼 내가 내일 또 너한테 올게. 그 다음날도, 그다음 다음날도. 내가 너 계속 살릴게."

"이게 사는 것 같나? 니가 나였으면 니도 못 버텼을 거면서 맨날 나한테만, 왜 나만 살라고 지랄이야."

"너 이것 때문에 나 계속 피한 거잖아. 나랑 같이 얼마 안 있었잖아. 나한테도 기회 좀 줘. 내가 살고 싶게 해줄게 민혁아. 나 한 번만 믿어봐."

 

제발. 쓸데없이 거세게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난간에 위태롭게 걸쳐있는 박민혁이 어떻게 될까 봐서 함부로 아파트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었다. 입구 앞에서 갈팡질팡 어쩔 줄을 몰랐다.

 

박민혁이 막 무너질 것 같은 사람의 목소리면 차라리 안심했을 걸 이미 다 무너진 사람 같아서 내가 뭘 해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가진 건 뭣도 없으면서 박민혁을 잃을 게 무서워 한 번만 믿어달라고 애원하기만 했다.

 

"산하야 내가 죽을까 봐 무섭나?"

"무서워. 진짜로.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마."

"앞으로 맨날 이럴 거다. 틈만 나면 니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 거야. 니가 그거 견딜 수 있을 것 같나? 제정신으로 그거 못 견딘다. 니도 나처럼 미친새끼 될 거라고. 나는 그런 거 싫다."

"."

"씨발 너 잘못되는 거 나도 존나 무섭다고. 그러니까 그만 가라 제발."

 

신음같이 힘겹게 단어들을 뱉어내던 박민혁은 끝내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난간에서 내려와 바닥에 웅크려앉은 점처럼 작은 등판을 꼭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마침내 고백하고 마는 박민혁 덕분에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내 앞에서 자꾸 귓바퀴를 붉히던, 마음 숨기기에 젬병인 박민혁이 왜 그렇게 날 밀어냈는지. 단순히 자기의 미래를 예상해서가 아니라 내 미래까지 성급히 예상해버린 결과였다. 누가 문과 아니랄까 봐 자기 혼자 소설 한 편 다 쓰지.

 

"민혁아 나는 네가 내 옆에 있든 없든 미친놈이야. 알잖아. 그런 거 하나도 겁 안 나. 내가 너 살게 할게. 매일매일 웃게 해줄게."

 

나 올라갈 테니까 그렇게 가만 앉아있어야 돼. 훌쩍이는 소리만 나는 전화를 귀에 꼭 대고 바로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실제로는 1분도 안 되는 시간이 체감상 5분처럼 흘렀다. 아까처럼 절박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평안하지도 않았다. 박민혁에게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안심할 수가 없었다.

 

 

", 다 왔다."

 

20. 문이 열립니다. 맑은 기계음과 함께 20층에 도착해 지체하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야 윤산하 니는-. 서둘러 계단 오르는 데 집중해서 그런가 박민혁이 핸드폰을 멀리 두고 말을 해서 그런가 목소리가 들리다 말았다.

 

"뭐라고? 안 들렸, ."

 

말을 하다 힘이 쭉 빠졌다. 묘한 바람 소리가 고막을 메웠다. 갑자기 바람이 왜 이렇게 불어? 순식간에 온몸을 휘감는 불안감에 서둘러 물었다. 대답 없이 싸늘한 바람소리만 이어졌다. 민혁아. 콰직. 정확히 바닥과 부딪혀 내는 마찰음이었다. 떨어졌다. 핸드폰이. . 그러니까-

 

"야 박민혁."

"."

"민혁아 대답해."

"."

"박민혁. 장난치지 말고. 아무 말이나 해봐 빨리. ? . 민혁아."

"."

 

박민혁이. 박민혁이 떨어졌다.

 

 

 

//

 

"박민혁."

"."

"짜장, 짬뽕?"

 

쉬는 시간에도 문제집을 놓지 않는 박민혁 옆에 나란히 앉아 노트 맨 뒷장을 펼쳤다. 쉬는 시간이나 수업시간이나 집중력이 똑같은지 그냥 나라서 그러는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노트 제일 윗줄에 <박민혁의 양자택일> 하고 제목을 적어 넣었다. 밋밋하지 않게 제목 옆에 별 몇 개를 포인트로 달아주고 샤프 뒤꽁무니로 박민혁을 쿡쿡 찔렀다. 공부할 때 유난히 더 쌀쌀맞은 박민혁을 알지만 아랑곳 않고 물었다. 대답 없이 내 얼굴을 쳐다보던 시선이 내 노트를 향하길래 얼른 손으로 가렸다. 빨리. 짜장, 짬뽕?

 

"니랑 다른 거."

"오케이, 너한테 내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일 줄 몰랐다. 감동감동."

"도끼병 있냐?"

"됐고 다음. 부먹, 찍먹?"

"내가 왜 대답해야 되는데. 부먹."

"그냥 해. 물냉, 비냉?"

"비냉."

"아메, 라떼?"

"아이스티."

"너도 커피 못 마셔?"

"이거 커핀데."

 

반갑게 물어봤더니 책상 아래 내려뒀던 보온병을 들어 보였다. 웬일로 공통점 좀 찾았다 했더니 단호하게 선을 긋는 게 얄미워 입술을 삐죽였다. 이 날씨에 커피를 왜 보온병에 넣고 다녀. 알 바가? 빠가? 대화할 가치가 없다 니는. 몸을 틀어 등을 보이길래 의자 등받이 대신 그 위로 몸을 기댔다. 3초 만에 떨궈졌지만. 방금 물어본 질문 네 개와 박민혁의 답을 정리해 적고 있었더니 할 일을 다 했는지 그제야 관심을 보인다.

 

"그건 와 적노? 스토커도 아이고."

"수능 끝나면 맛집투어 가자."

"니가 사면 생각해보께."

"박민혁 인성 무엇?"

"싫음 말든가."

"아뇨, 제가 사겠습니다."

 

내 과장된 반응을 보는 박민혁이 큭큭 거리고 웃었다. 박민혁이 웃을 때면 항상 빤히 바라보게 된다. 지난 겨울방학과 이번 여름방학 내내 같이 수업을 들었지만 박민혁이 웃는 걸 요즘 들어 처음 봤다. 수업 중간에 선생님을 말장난을 쳐도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하는 게 로봇이라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박민혁이 내 앞으로 담배를 떨어뜨렸을 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아 얘도 로봇은 아니구나. 그냥 이 공간이 얘를 로봇처럼 만들어놓은 거구나. 어딘가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조금 답답하다고 느꼈다. 박민혁이 그럴 것 같았다. 티 나게 어디가 아파보이지 않지만 왠지 숨쉬기 버거울 것 같다고.

 

내가 박민혁을 웃게 할 수 있을까. 웃게 해주고 싶다. 욕심일지도 모를 사명감 같은 게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아마도 웃는 박민혁은 너무 예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모든 표정의 박민혁을 좋아하게 된 건 예상 밖에 일이었지만.

 

"마지막 질문. 좋아해, 사랑해?"

"뭐라노. 뭐를?"

"나를?"

"모서리로 찍는다."

 

이럴 때만 행동력 좋은 박민혁이 모서리가 뾰족하도록 문제집을 드는 걸 빠르게 제지했다. 아 우리 사이에 장난도 못 치냐? 그냥 뭔 단어가 더 좋냐고. 문제집을 내려놓은 박민혁이 초점을 책상 위 제 손에 맞춘 채 샤프의 심을 꾹 밀어 넣었다가 도로 딸깍 댔다.

 

"앞에 거."

"앞에 게 뭔데."

 

애초에 사심을 갖고 한 물음인데 이런 식으로 싱겁게 넘길 수 없어 되물었다. 박민혁이 밉지 않게 나를 흘겼다.

 

"좋아해."

 

짧은 순간 정적이 흐르자 내가 아무 말이 없을 줄 몰랐는지 박민혁이 눈에 띄게 당황해 보였다. 나는 뒤늦게 조용히 웃었다. 박민혁은 이미 다 풀린 문제집을 한 장 넘겼다가 말았다가 볼펜을 쥐었다가 샤프를 쥐었다가 소리 없이 산만하게 굴었다. 여기서 장난치면 더 당황하려나. 농담반 진담반으로 빨개진 귀 끝을 가만 보며 속으로만 중얼이고 말았다.

 

나는 사랑하는데 민혁아.

 

 

 

//

 

 

힘이 빠져 주저앉았는데 어느새 울고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을게 무서워서 더 이상 이름을 부르지 못하겠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이 순간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날 이렇게 좋아하게 만들어놓고 매번 날 밀어내는 박민혁 때문에 나는 늘 내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이건 무게가 달랐다. 공기가 날 마구 압박했다. 압력으로 몸이 터질 것 같았다. 그게 차라리 나을지 모르겠다. , 아윽 . 명치께가 너무 아파서 꾹 짓눌러 막았다. 그래도 아팠다. 그래도 울었다. 제발 그러지 마 민혁아. 울음소리가 커졌다. 이러지 마 박민혁. 존재하지 않는 박민혁에게 애원했다.

 

 

끼익- 밀려난 철문 틈새로 여린 빛이 새어들어왔다.

 

"다 왔담서 왜 찌질이같이 여 앉아 울고 있노. 고소공포증 있나?"

 

가쁘게 튀어나온 숨이 목에 턱 걸려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갈라진 성대에서부터 철문보다 기분나쁜 울음소리가 샜다. 눈 앞이 흐려 박민혁의 얼굴이 정확하지 않았다. 이거 꿈이야? 정말 내 앞에 있는 거 맞아? 물으려다 혹시 아니라고 하면 내가 정말 터져버릴까 봐 명치를 부여잡고 울기만 했다.

 

"울지 마라 나쁜 새끼야. 니 이런 거 싫다 했잖아."

 

내 앞에 쭈그려 앉은 민혁이가 손을 뻗어 서툴게 눈물을 닦아냈다. 내 몸에 닿는 박민혁이 너무 좋아서 더 목이 메었다. 근데 조금 분명해진 박민혁의 얼굴이 또 울까 봐 얼른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나 안 울어 민혁아. 드디어 입을 열고 말하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바보야 내 죽은 줄 알았나. 바람 땜에 폰 떨궜다."

 

마음이 놓여서 그것때문에 또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사실 아직 불안한데 그래도 내 눈앞에 박민혁이 가짜는 아닌 것 같아서 억지로 지워낸 눈물이 또 볼을 타고 흘렀다.

 

"지 믿으람서 이래 울어대면 내가 어떻게 믿으라고."

"아니야. 나 안 울어 민혁아. 나 믿어도 돼. 내가 너 행복하게 해줄게."

"하이고 무슨 프러포즈 같네. 행복이고 나발이고 추워 죽겠다."

 

박민혁이 후드집업 차림인 걸 그때서야 알았다. 옷을 벗어주려다가 그냥 품을 벌려 민혁이를 꽉 껴안았다. 철문 문턱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민혁이를 안는 순간 몸이 옥상으로 들어서느라 시야가 확 밝아졌다. 봐봐 민혁아. 너한테 오니까 세상이 이렇게 밝아. 깜깜한데 혼자 있는 동안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너는 모르지. 투정 부리지는 않았다.

품 안의 박민혁이 너무 작고 차가워서, 박민혁의 세상은 얼마나 어둡고 무서울지 짐작할 수 없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면서 원래의 호흡을 찾았다. 정말 추웠는지 박민혁이 꾸물대며 품을 파고들었다.

 

"니 엄청 뜨겁네."

"너가 너무 좋아서 그래 민혁아."

"웃기고 있네."

 

박민혁이 패딩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잔뜩 울어 짓무른 얼굴마저 예뻤다. 너 진짜 예쁘다. 무의식중에 속마음을 흘려보냈다. 박민혁의 동그란 눈이 날 가만 올려봤다. 박민혁과 맞닿아 있는 가슴팍에서 심장이 날뛰었다. 박민혁의 시선이 날 넘어 하늘을 바라봤다. 저거 아직도 있네.

 

"뭐가?"

"윤산하 별."

 

몸을 움직여 민혁이와 같은 하늘을 올려봤다. 푸른 별들이 아직도 밤하늘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우리처럼. 그 사실이 좋아서 박민혁 머리에 이마를 비비적댔다가 어깨를 얻어맞았다.

 

 

"민혁아 나 그거 또 말해도 돼?"

"하지 마라."

"뭔 줄 알고."

 

한치의 고민도 없이 딱 잘라내길래 뽀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니가 하는 말이 다 거기서 거기지. 헛소리하려고 그러는 거 누가 몰라. 헛소리 아닌데. 완전 대박 중요한 말인데.

 

"뭔데."

"내가 많이 좋아한다고."

"헛소리네."

"근데 왜 부끄러워해?"

 

아이거든. 패딩 속으로 숨어드는 민혁이가 옹알거렸다. 아 귀엽네 박민혁. 고개를 숨겨버린 탓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붉어졌을 귀였다.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올려보다 얼핏 저 멀리 하늘을 봤다. 헐 민혁아 저거 봐봐. 싫다. 아 빨리. 얇은 허리를 힘을 줘 끌어안자 민혁이가 눈을 빼꼼 내밀었다.

 

"뭐고."

"저기 폭죽 터진다."

 

민혁이와 함께 보는 하늘에서 색색의 폭죽이 발광했다. 큰 행사인지 먼 거리임에도 잘 보였다. 근데 지금 몇 시냐? 하늘 위를 예쁘게 수놓는 폭죽을 구경하다 말고 박민혁이 물었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M

 

0006. 밝은 화면을 보는데 기분이 오묘했다. 발끝이 저릿해 신발 속에서 꿈지럭 움직였다. 상상도 못했던 스물한 번째 하루였다. 윤산하 얼굴을 바라봤다. 연두부를 닮은 오밀조밀한 얼굴이 펑펑 울어댄 탓에 약간 부어있었다.

 

윤산하가 만들어준 스물한 번째 하루. 내 생 가장 아슬했던 스무 번째 하루들은 이제 지난 일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곧잘 내 스무 살을 상상하며 기대했다. 그때는 할 수 없는 것들을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막상 맞이한 나의 스물은 그때는 할 수 없었던 걸 가능하게 했을지는 몰라도 그 시절 가능했던 것들을 유지하지 못했다. 웃는 게 버거웠고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게 힘겨웠다. 숨 막히는 나날들이었다.

윤산하도 스무 살을 기대했겠지. 윤산하가 날 웃게 해주겠다 하지만 실은 나도 윤산하를 웃게 하고 싶다. 윤산하의 스물은 나와 다르기를 바란다.

 

"스무 살 축하해 윤산하."

 

오늘 처음 윤산하가 환하게 웃음 지었다. 윤산하의 웃음은 마냥 행복하기만 해 보여서 좋았다. 단 한 번도 그 끝이 찝찝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걸 망치는 게 그렇게 두려웠다. 여전한 웃음이 다행스러웠다.

 

"스물한 살 축하해 박민혁."

"따라하지 마."

"그래 그럼, 좋아해 박민혁."

 

저 짧은 음성이 날 얼마나 두근거리게 하는 줄 모르고 쉽게 말했다. 윤산하에게 안겨 듣기는 더 심장 떨려서 그 품을 벗어나려는데 윤산하는 날 놓아주지 않았다. 너는? 너는 나 좋아해 민혁아? 그렇게 쳐다보면 어떻게 대답을 하라고. 눈을 맞추기 민망스러워 고개를 돌리다 붙잡혔다. 내 귀 끝을 건드리는 손이 간지러웠다.

 

"이게 대답이야?"

 

아 젠장. 얼른 양손으로 귀를 가렸다. 윤산하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그럼 나도 몸으로 대답한다. 그거 좀 야한 말 같은데,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윤산하 얼굴이 내 앞으로 밀려들었다. 둘 다 한참 밖에 나와있었는데 입술은 따듯했다. 금세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는 뜨겁기까지 했다. 주춤대고 고개를 뒤로 빼자 윤산하가 잠시 입술을 뗐다.

 

"싫어 민혁아?"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시선이 거둬들지 않았다. 꼭 말로 들어야 아는 것도 아니면서 윤산하는 매번 나를 난감하게 했다.

 

"좋다고 바보야. 못 돼 처먹어가지고 진짜."

 

고개를 푹 숙였다. 윤산하가 웃을 줄 알았는데 답을 하자마자 윤산하의 손이 내 턱을 들고 곧바로 입술을 붙여왔다. 놀랄 틈 없이 진득해지는 키스가 심장을 홧홧하게 했다. 한참 뒤에야 날 놓아주고도 윤산하는 가까운 거리를 벌릴 생각이 없었다. 달아오른 숨이 주위 기온을 올렸다. 더워.

 

"민혁아."

"."

"우리 같이 자취하자."

"순수한 의미로 묻는 거가?"

 

크게 숨을 들이쉰 윤산하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했다. 장난이 아닌 것 같지만.

 

"절대 아니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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