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XX / 키르 (D-20)
첫번째2018. 12. 31. 19:35D-XX
w.키르
민혁이 핸드폰 옆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산하와 같이 찍은 화면 위로 시계와 함께 ‘80일‘이 떴다. D-20. 지금으로부터 고작 삼 주 남짓한 시간. 그 날은 산하가 성인이 되는 날이자 사귄지 100일 째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민혁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을 특별한 이벤트를 하고 싶었다. 민혁이 생각하기엔 그 특별한 이벤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키스밖에 없었다. 특별한 첫 키스. 민혁은 절대 산하와 키스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정말로.’ 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산하와 민혁은 사귄지 백일이 다 되도록 키스 한 번 못해본 순수 결정체 커플이었다. 그래서 민혁은 백일과 성인 기념 이벤트로 산하에게 키스를 선물하기로 얼렁뚱땅 결정지었다. 다시 한 번 절대 산하와 키스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고 하도 심하게 부정하는 민혁에 그 특별한 이벤트를 도와주러 민혁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 ‘드림 스토어‘까지 친히 와준 진우는 뭘 그렇게까지..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민혁의 귀가 잔뜩 붉어졌다. 그런 민혁에 진우가 키스하고 싶은 게 어때서? 좋아하니까 키스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잖아 하고 말하자 무엇을 상상하는 건지 민혁의 얼굴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진우는 그런 민혁을 조금 놀려볼까 하다가 목까지 빨개진 민혁의 얼굴이 곧 터질 것 같아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다고?”
“그.. 평범하게 말고 좀 특별하게 하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안나서..”
시무룩한 민혁을 바라보다 진우는 생각해냈다. 이벤트에 관한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며칠 전 게임에서 산하가 자신의 뒷통수를 거하게 친 것이. 실력도 레벨도 안 돼서 복수도 못하고 배신감에 눈물만 삼켜야 했던 그 날. 그 날을 떠올리니 이벤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먼지 한 톨만큼도 남지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 키스를 성공하게 도와주지? 그러나 그러기엔 앞에 앉은 민혁이 여직 얼굴이 붉은 채로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윤산하 도우려는 게 아니라 민혁이 도우려는 거니까.. 생각을 해보자. 그러나 순조롭게 도울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윤산하에 대한 배신감이 너무 컸다. 그래서 진우는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빙빙 돌리기로 못된 마음을 먹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기대하고 있는 민혁이한테는 좀 미안했지만.
“일단 깜짝 이벤트일거야. 그렇지?”
“응.”
“내일부턴 산하 말고 나랑 다니자.”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귀가 아파요-!”
“미안.. 근데 내가 왜 산하랑 말고..”
“형이 그렇게 싫니..”
진우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민혁은 다급히 도리칠 쳤다. 민혁은 진우가 싫은 게 아니라 산하랑 계속 같이 다니고 싶었을 뿐이었다. 진우는 놀리는 족족 반응이 오는 민혁이 귀여워 민혁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이벤트 준비하러 다녀야지. 깜짝 이벤트라면서 산하랑 같이 다니게?”
“아...”
민혁은 진우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산하와 같이 다니는 시간이 줄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거리를 두라는 건 너무하지 않냐 하며 꿍얼댔다. 진우는 새삼 민혁이 산하를 정말 많이 좋아한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다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진우는 깜짝 놀라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뱉을 뻔했다. 산하가 유리창이 뚫릴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하고 죽일 듯이 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거지. 진우는 원치 않게 심장이 롤러코스터 타는 것을 경험했다. 진우가 아메리카노를 뱉을 뻔하자 더럽다는 듯 찌푸려지던 민혁의 얼굴이 창밖의 산하를 보고 환하게 펴졌다. 민혁과 눈이 마주치자 산하는 카페로 곧장 들어왔다.
“민혁이형!”
“산하야!”
떨어져 있으면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무슨 이산가족 상봉하는 것 마냥 구는 둘에 진우는 혀를 내둘렀다. 산하는 사실 밖에서 카페 유리창을 통해 민혁을 발견했을 때는 마냥 기분이 좋았는데 그 앞에 앉아있는 진우가 민혁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순간 기분이 급격히 아래로 떨어졌다. 거의 마감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그러니까 이 야심한 시간에 둘이 마주앉아 웃는 것도 모자라 지금 누구 머리를 만지는 거지.
산하는 질투가 꽤 있는 편이었고 그 사실은 진우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민혁을 귀여워하는 걸 아니꼽게 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진우는 자신이 따로 애인이 있는 것도 모르고 자신한테 적개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산하가 그저 귀여웠다. 굳이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말 안하는 이유는 글쎄, 진우는 그냥 이 귀여운 커플을 놀리는 게 즐거웠다. 어쩌면 이렇게 게임의 복수를 하는 건지도. 산하는 얼굴을 굳히고 민혁의 어깨를 팔로 감싸고는 딱 붙어 앉았다. 민혁은 산하가 왔다는 게 그렇게 좋은지 산하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이 진우와 있을 때와 확연히 달랐다. 진우는 이렇게 표정관리를 못해서 깜짝 이벤트는 어떻게 하려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애인이 보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진우는 생각한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산하랑 그렇게 오래 못 보는 건 싫어.. 그냥 내가 알아서 해볼게]
민혁이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해보겠다며 문자 하나 달랑 남기고 연락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못 보면 얼마나 못 본다고.. 진우는 난 지금까지 뭘 한 것인가 허탈했다. 커플 염장만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보고.. 선심 한 번 써보려고 했더니. 하긴 선심도 아니었다. 빙빙 돌리려 했으니까. 진우는 그래 니들 알아서 해라 하고는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얘네한테 시달리고 나면 항상 애인이 보고 싶어진다니까..
그 시각 민혁은 카페에 앉아 다시 아이디어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준비하는 동안 산하랑 붙어있을 수 있으면서 산하가 깜짝 놀랄 만한 이벤트가 뭐가 있을까. 날짜는 어느새 10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각나기는커녕 마치 어제 교수님이 내준 리포트에 써야할 내용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0일 동안 생각한 거라곤 고작해야 남산타워 가기, 장미꽃다발 주기, 레스토랑 가기 였다. 물론 다 기각이었다. 남산타워는 너무 추울 것 같고 장미꽃다발은 너무 흔했다. 그리고 레스토랑은.. 둘 다 취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기집을 가자니 키스에서 고기 맛이 날 것 같고. 게다가 다 너무 뻔했다. 전혀 특별하지 않고 남과 다를 것이 없었다. 민혁이 원하는 것은 특별한 이벤트였다. 여러 조건을 따지다보니 결국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진우 형한테 전화를 걸어볼까 핸드폰을 들었다가 잔소리만 잔뜩 들을 것 같아 ‘박진우 형’를 누르려던 손을 움직여 ‘울 애깅이‘를 눌렀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컬러링인 ’별’의 가사가 채 들리기도 전에 ‘울 애깅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산하야. 어디야?”
[음.. 난 당연히 학교죠. 아직 학생이잖아요.]
“아 맞다.. 고삼이 아닌 것 같아서.. 언제 끝나?”
[저 고삼이 아닌 것 같아요? 옛날에는 막 어리, 산하 너무 어려 이랬는데 고삼이 아닌 것 같다고요?]
“아니.. 그게 아이고.. 이제 다 컸다 이 말이제..”
[됐어요, 나 삐짐. 이따 학교 끝나면 나 데리러 와요.]
“어... 그럴까?”
[지금 망설였죠. 너무해.. 형이 변했네.. 형이 변했어..]
“무슨 소리고;; 내가 무슨, 내 데리러 갈께!”
[형 당황했네ㅋㅋㅋㅋ 좀 귀엽네요, 형.]
“귀엽다 그것 좀.. 귀여운 건 너지, 고딩아.”
[저 곧 있으면 성인이거든요?]
“알아. 그래서 그런데 31일에 만날래? 같이 있자.”
[되게 로맨틱한 데이트 신청이네요. 근데 당연한 거 아니었나?]
“...그만 끊어라”
[형 지금 부끄럽지. 역시 귀엽다. 그럼 끝나면 전화할게요!]
전화를 끊고 민혁은 그대로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민혁의 얼굴은 찜질방에 몇 시간 있던 사람마냥 잔뜩 열이 올라 뜨거웠다. 겨우 고등학교 3학년 미자 주제에 매번 저를 설레게 하는 산하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 기분이었다. 잠시 행복에 젖어있다 문득 생각난 건 이벤트였다. 아 맞다, 이벤트. 민혁은 다시 고뇌에 빠졌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빈이 아이스 초코를 한 모금 마시고 민혁을 살폈다. 얘 또 왜 이래?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빈이 그러거나 말거나 민혁은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했다. 그런 민혁의 얼굴 앞에 손을 두어 번 휘저어 본 빈은 민혁이 반응이 없자 불퉁거리며 말했다.
“야 특별한 게 뭐 별 거 있냐? 그냥 어? 서로 사랑하는 둘이 같이 있으면 어딜 가던 뭘 하던 특별한 거지.”
민혁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유레카!’ 민혁은 계속 뭐라고 쏟아내려는 빈의 얼굴을 덥석 잡고는 말했다.
“형. 내가 초코우유 사줄까?”
그러자 빈은 민혁의 손을 툭툭 치며 양 볼이 눌려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대꾸했다.
“처커우유 말거 아이스 처커.”
같은 초코우유이면서 가격만 배로 비싼 아이스 초코를 요구하는 빈에도 민혁은 웃으며 흔쾌히 카드를 긁었다. 빈의 말 대로였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이벤트 같은 것이 없어도 서로 사랑하는 둘이 같이 있으면 어딜 가던 뭘 하던 특별한 것이 되는 거였다. 민혁은 왜 이걸 이제 알았을까 하면서도 그래도 키스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일이자 성인 되는 날에 첫 키스라는 게 특별한 건 맞잖아? 이쯤 되면 민혁이 산하와 키스가 너무 하고 싶은데 산하가 미자여서 참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민혁은 그냥 연애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날에 키스 할걸..? 하고 생각한 것뿐이었다. 음, 아마도.
D-7. 고대하던 크리스마스, 였는데. 산하와 민혁의 크리스마스는 예상치 못하게 대단히 시끄러워졌다. 민혁의 자취방에 불쑥 찾아온 산하가 문을 열자마자 내민 선물을 열어보고 민혁도 산하에게 선물을 줄 때까지만 해도 참 평화로웠는데. 단둘이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허상이 된 것은 동민이형이며 빈이형, 명준이형까지 양손 가득 비닐봉투를 들고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미 산하와 크리스마스 계획을 다 짜놓은 민혁은 집이 엉망이 되어도 좋으니 산하와 단둘이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색하게 웃으며 나가려는 산하가 붙잡힌 순간, 그 바람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행님들, 솔직히 크리스마스에는 커플끼리 보내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커플지옥 솔로천국 몰라? 내가 솔로인데 어떻게 커플끼리 보내게 해.”
사악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동민에 민혁은 움찔, 했다. 아 저 형 얼마 전에 헤어졌지... 간절한 눈으로 빈이형을 바라보았으나 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과자를 뜯는 데에 집중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케빈과 함께!”
동민의 외침과 동시에 티비를 틀고 과자를 먹으며 시끄럽게 구는 형들을 황망히 바라보며 민혁과 산하는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형들이 각자 과자와 티비에 집중할 때쯤 민혁과 산하는 둘을 제일 예의주시하고 있던 명준이 화장실 간 틈을 타 탈츨에 성공했다.
둘이 도착한 곳은 영화관이었다. 영화관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나온 커플들이 가득한 걸 본 산하가 민혁의 손을 잡았다. 민혁이 놀라 올려다보자 산하는 괜찮다며 웃었다. 미리 예매해놓은 영화를 보기 전 팝콘과 음료를 사고 상영시간이 될 때까지 잡은 손을 꼬물거리며 꽁냥거리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민혁아! 박민혁 맞지?”
“민석이..?”
“오랜만이다. 내가 핸드폰이 초기화 돼서 연락을 못 했어.”
“진짜 얼마만이야. 나는 너 대학가서 다른 친구들이랑 노느라 안하나 했다.”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 핸드폰 번호 좀 알려줘.”
“알았어. 근데 넌 여기 어쩐 일이야?”
“오랜만에 가족끼리 영화 보러 왔어. 근데 옆에는.. 너랑 친한 동생 맞지? 크리스마스에 왜 둘이 있어?”
“아 이건...”
“민혁이형이랑 저랑 거의 뭐 가족이거든요. 그쪽도 크리스마스에 가족끼리 영화 보러 온 것처럼 그런 거죠.”
“아.. 그럼 나 먼저 가볼게. 연락할게.”
“그래 잘 가.”
민석이 손을 흔들며 사라지자 산하는 연락은 무슨.. 하고 중얼거렸다. 민혁은 왠지 모르게 산하의 눈치가 보였다. 너보다 형인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하려다 산하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말 못했다. 내가 잘못 한 거 없는데 왜 눈치가 보이지...
“형 저도 이제 거의 성인이에요. 이런 것쯤은 이해 할 수 있.. 있어요...”
아닌 것 같은데... 뭐라 달래보려는 순간 예매한 영화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 얼른 산하를 끌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섰다. 좌석에 앉고 불이 꺼지고 나서도 산하의 얼굴은 불퉁했다. 민혁은 산하의 기분을 풀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가족 맞잖아, 결혼하면.”
산하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조금만 더 하면 풀릴 것 같은데. 민혁은 망설이다 주변을 재빨리 살피고는 삐죽 나온 산하의 입술에 뽀뽀했다. 산하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애써 내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말하고는 부끄러워하는 민혁의 모습이 귀여워 산하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려는 것을 그만두고 민혁에게 뽀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손을 잡아오는 민혁에 산하는 이미 불가마 속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영화 내내 손을 잡고 있느라 조금 불편했지만 그런 것쯤이야. 잡은 손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놓지 않았다.
이제 산하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D-3. 앞으로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터라 산하가 성인이 된다는 게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그리고 자신과 사귀고 있다는 것도. 민혁은 그냥 흘러 가는대로 두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가는대로, 분위기가 흘러 가는대로. 산하가 미자에서 벗어나는 것이 조금, 아니 사실 아주 많이 아쉽기는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 식물까지 나이를 먹는 것은 당연했다. 민혁은 이제 특별한 이벤트를 생각해내기 위해 별 핑계를 다 대며 산하와 떨어져 있는 것보단 얼마 남지 않은 산하의 10대를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그래도..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건 산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제일 기분이 이상할 사람은 산하 자신이었다. 그런데 하도 민혁이 이상해하니 오히려 덤덤해진 것 같았다. 그래서 산하는 민혁이 애인이 미자에서 성인이 된다는 것이 참 많은 생각이 드나보다 했다. 이런 귀여운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 산하는 빈이 고구마 920126개는 먹은 것 같다는 소리와 함께 톡에서 마구 쏟아낸 말들을 보고 절로 광대가 올라갔다. 사귄지 백일 되는 기념, 그리고 성인 되는 기념으로 생각한 선물이 키스라니. 산하는 민혁이형다운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키스를 선물하겠다고 열심히 계획을 짜는 민혁을 생각하니 그 귀여움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키스 하고 싶은 거 참느라 힘들었는데, 이렇게 1일이자 100일 되는 날에 첫 키스 하는 것도 특별할 것 같네.”
산하는 작은 상자 안 두 개의 반지를 떠올리며 웃었다. 새해의 시작이 완벽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D-1. 드디어 전야의 날이 밝았다. 산하와 민혁은 이른 아침부터 만나서 춥지도 않은지 집값 비싼 역삼동을 돌아다녔다. 민혁의 목엔 남색 목도리가 둘러져 있고, 산하의 머리엔 노란 비니가 씌워져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 서로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팔짱 야무지게 끼고 돌아다니며 추운 바람에 상기된 볼이 붉었다. 어쩌면 볼이 붉어진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닐지도. 지나가다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귀가 움직이는 토끼 모자를 서로 씌워주기도 하고 점심도 먹고 연인용 장갑에 손을 넣어 꼭 잡고 마주보며 웃기도 하다가 많이 추웠는지 둘은 카페에 들어갔다. 다행히 커피값은 집값과 다르게 다른 동네 카페와 거기서 거기여서 둘은 각자 딸기 프라푸치노와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시켜 창가에 앉았다. 산하의 손엔 어느새 토끼모자며 연인용 장갑을 포함한 온갖 물건들이 가득 담긴 봉투가 들려있었다.
“너무 과소비 했나.”
“민혁이형, 어쩔 수 없었어요. 이게 다 형이 귀여운 탓이에요.”
“또 무슨, 쓸데없이 진지해가꼬..”
“형, 저 궁서체.”
“...언제적 드립을 지금 하고 앉았노. 그만 해라.”
“네..”
카페에서 노닥거리다 보니 거리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둘은 카페를 나와 나란히 걸었다. 시간이 12시에 가까워질수록 말이 없어졌다. 손을 꼭 잡은 두 사람 사이에 옅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민혁은 보기엔 무표정이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매우 떨고 있었다. 곧 12시가 되고 산하가 성인이 되는 동시에 바로 키스를 하려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키스에 대해 아는 거라곤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기본적인 지식과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키스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산하는 성인이 된다는 것도 실감나지 않고 민혁이 키스해오겠지 하는 생각을 하느라 말이 없었다. 그렇게 고요함 속에서 길을 걷다보니,
뎅-
뎅-
뎅-
D-day. 제야의 종이 울렸다. 항상 걷는 집으로 가는 골목길. 민혁은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은 채 멈춰 섰다. 몸을 산하 쪽으로 돌린 민혁이 고개를 숙였다. 산하는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민혁의 붉은 귀를 못 본 채 했다. 이윽고 저를 올려다보는 민혁과 눈을 마주한 산하는 심장이 멎는 느낌을 받았다. 진갈색 눈동자가 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뿌려진 듯 반짝였다. 잠시 멎었던 심장의 떨림이 거세졌다. 한참이나 홀린 듯 그 눈동자를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머뭇거리던 민혁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민혁이형.”
“어, 어..?”
“우리 오늘, 백일. 내가 스무 살 되는 날이 백일이라니 특별하네요.”
“산하야, 이거..”
“손 내밀어 봐요. 끼워줄게.”
민혁의 손 약지에 은색 반지가 끼워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끼워주는 산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민혁은 말없이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많이 사랑해요. 더 오래 사랑해요, 우리.”
그렇게 말하는 산하의 약지에도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덤덤하게 꺼낸 사랑한다는 말, 사랑하자는 말. 그걸로 충분했다. 사랑한다고 고백해오는 산하가 너무 좋아서 민혁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나 원래 눈물 없는데. 울면 못생겨질 텐데. 그건 싫었다. 애써 눈물을 참고 형아답게 박력있게 계획했던 대로 키스하려 했지만 마음과 다르게 키스하자 쉽게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가는 터라 눈물이 고여 더 빛나는 민혁의 눈에 고정되어 있던 산하의 시선은 민혁의 입술로 옮겨졌다. 붉고 예쁜 입술이 벌렸다 닫혔다 망설이며 오물오물 움직이는데 빨리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형이 말하기 힘들다면 내가. 못 참겠어.
“키스, 해도 돼요?”
“...아니.”
“네..?”
산하는 민혁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다고 생각한 터라 당연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빈이 형이 놀리려고 없는 사실을 알려준 건가..? 좋아서 우는 게 아니라 이제 헤어지고 싶었는데 키스하자고 해서 우는 거였나? 내가 너무 어려서? 이제 성인 됐는데? 산하가 혼자 온갖 삽질을 시작했을 때 민혁은 제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이 산하에게서 나와 처음엔 당황스러웠고, 그 다음은 자신이 생각해왔던 계획이니 자신이 실행하고 싶었다.
“내가 할건데.”
말이 끝나자마자 한 손으로 산하의 목에 팔을 둘러 가까이 하는 민혁에 가까워진 얼굴. 눈을 질끈 감아 비장해보이기까지 하던 행동과 달리 민혁의 입술은 산하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평소에 하던 뽀뽀보다도 약하게. 입술만 붙인 그 상태로 덜덜 떠는 민혁에 산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갔던 삽질을 단숨에 멈췄다. 부딪혀온 민혁의 입술에서 떨림이 느껴져 살짝 웃고는 민혁의 허리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고개를 꺾어 아랫입술을 머금으니 놀라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산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툴게 움직이는 민혁을 리드했다. 다들 좋다 하길래 무작정 산하랑 키스 해야지 생각하기만 했지 해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해 민혁은 처음 해보는 키스에 기분이 이상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 해 버거웠고, 섞이는 뜨거운 혀가 부드럽고 말캉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온몸에 열이 나고 뱃속이 간지러웠다. 산하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좋았다.
그렇게 둘은 사람들이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는 길거리라는 자각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입맞췄다. 입술이 떨어지고, 똑바로 본 민혁의 눈이 조금 풀려있었다. 그건 산하도 마찬가지였다. 풀린 눈에 상기된 얼굴, 젖은 입술을 한 민혁을 보고 어딘가에 힘이 들어간 산하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다 황급히 하늘로 눈을 돌렸다. 민혁은 숨을 고르며 꽤 당황했는지 사투리를 썼다.
“하아... 니 와이리 잘하노..?”
“나 잘해요?”
“니 처음 아니제.”
“나도 처음인데. 형이 내 첫 키스.”
“거짓말하지 마라.”
“진짜.”
항상 다니던 길이, 집 앞이 특별해졌다. 서로가 있기에, 서로이기에.
그래서 특별한 D-XX.
유난히 별이 잘 보이는 선명한 겨울밤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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