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 별 보러 갈래? / 유니 (키차이) 2019.12.07
- 한 살 차이 / 뫄 (한 살 차이) 2019.12.06
- 대화가 필요해 / 백향과 (생각차이) 2019.12.06
- 응답하라 / 햄보끄 (생활차이) 2019.12.06
- 사랑과 운명의 한 끗 차이 / 달빛 (한 끗 차이) 2019.12.03
- 틀림과 다름의 차이 / 라온 (틀림과 다름의 차이) 2019.12.03
- 민혁 선배 / 익명 (온도 차이) 2019.12.03
- 신분차이 / 달무리 (신분차이) 2019.12.03
- 2045년의 딸기우유 / 앙짱 (인간과 로봇의 차이) 2019.12.03
별 보러 갈래? / 유니 (키차이)
세번째2019. 12. 7. 00:03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또 다. 민혁은 저 멀리 보이는 노란 머리통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 분명히 그만 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한 귀로 흘려버렸나 보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느려졌다. 마주치면 또...
“이틀만이네요.”
“그러게.”
“어디가.”
“학교 가지 어디가.”
“아, 맞다. 나도 형 따라 학교 가는 거예요. 원래는 가기 싫어서라도 안 가는데. 이렇게 일찍 일어나고.”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이 딱 달라붙어 샛노란 머리통을 들이미는데 민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좋게 봐주려고 해도, 하나도 좋게 봐질만한 게 없었다. 누가 봐도 노는 애다 싶을 정도로 탈색한 머리와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교복만 보아도 단정한 민혁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민혁이 걸음을 빨리하자, 뒤따르는 걸음도 빨라졌다. 최대한 무시하고 싶은데 저렇게 눈에 띄는 모습으로 쫓아오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조금만 떨어져 걸으면 안 돼?”
“왜요? 전 이렇게 딱 붙어가는 게 좋은데.”
민혁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다시 어깨를 딱 붙이고 따라 걷는다. 민혁은 어쩔수 없다는 듯이 산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꽤나 키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머리 한번 쓰다듬어달라고 허리를 숙이고 다니는 꼴이 불쌍해서다. 그러니까 민혁은 산하에게 맞춰 주는 게 절대 어디가 맘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냥, 안타까워서 맞춰주는 거 뿐이다.
별 보러 갈래?
w. 유니
민혁은 생긴 것처럼 사랑에 대해서도 아주 순정파에 가까웠다. 그놈의 첫사랑이 뭐라고 하루가 멀다 하고 민지의 뒤통수만 바라본 지도 벌써 2년이나 됐다 이 말이다. 반이라도 다르면 조금 생각하는 시간도 줄어들 텐데 하필 2년째 같은 반이라 민혁은 항상 뒷자리를 선택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민지의 뒷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마음을 이제 접어야 한다는 사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민지는 올해 중순에 남친이 생겼고, 그 남친은 민혁이 옆 학교에서 제일 잘생기고 똑똑하다고 소문이 난 남자애였다. 민혁은 그 소식을 늦게나마 전해 듣고 밤새 자신을 자책했다. 뒷자리에서 바라보기만 하지 말고 말이라도 한마디 더 걸고, 더 친해질걸. 첫 짝사랑의 아픔을 겪는 중인 소년에게는 약도 없었다. 모든 것이 우울했고, 가슴이 아팠다.
“형 밥 으러 가요.”
그렇게 처음 느끼는 사랑의 아픔에 시달리느라 정신을 놓고 있으면, 금방 점심시간이 됐고, 그러면 항상 산하가 민혁의 반으로 찾아왔다. 그럼 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민지의 뒤통수만 또 바라보다가 자신의 시야로 들어오는 눈에 띄는 노란 머리칼을 보고 또 한숨을 푹. 아픔이 치유될 시간도 없이 이상한 애한테 시달리게 된 저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또, 또 그 표정.”
“여기 마음대로 들어오면 안 되는데.”
“웃어요, 좀.”
억지로 민혁의 얼굴을 붙잡고는 엄지로 미소를 짓는 듯이 입꼬리를 올려준다. 민혁은 너 때문에 더 울고 싶어지는 걸 아냐고 묻고 싶었다. 계속해서 풀죽어 있는 민혁의 모습을 보는 산하도 속상하긴 마찬가지. 생긴 건 아무나 맘에안들면 다 패고 다닐 거처럼 강하게 생겨서는 첫사랑 실연당했다고 며칠을 앓는 중인 제 짝남을 보면 속이 상하면서도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곧 방학이라 다행이면 다행이었다. 민혁을 아프게 하는 주체를 당분간은 만날 일 없으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요.”
“알겠으니까 껴안지 좀 마.”
“왜 이리 까칠해요, 맨날 말랑말랑하더니. 요즘 너무 예민해.”
산하의 말에 민혁이 당황한 표정을 한 채로 굳었다. 내가, 너무 예민했다고. 그동안 전혀 들어본 적 없던 말이었다.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산하도 놀랐다. 민혁의 얼굴을 끌어당겨 안은 산하가 급하게 민혁을 달랬다.
“장난이에요, 얼른 밥 먹자, 형아.”
“알았으니까, 놔라. 숨 막혀.”
품에 끌어안은 민혁의 얼굴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라도.
산하가 민혁을 쫓아다니기 시작한 시점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봄에 열린 학교 축제에서 혼자 춤을 추던 민혁의 모습을 보고 반한 산하가 뜬금없이 민혁의 반으로 찾아와 인사를 건넨 것을 시작으로, 산하는 줄기차게 민혁을 쫓아다녔다. 민혁은 가끔 저를 왜 이리 좋아하냐 물었지만 그렇다고 차갑게 쳐내는 일은 없었기에, 산하도 몰라요, 그저 그렇게만 대답하고 민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했다.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마음대로 살려고 작정했던 어린 윤산하에게 찾아온 박민혁이라는 첫사랑은 강렬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하고, 하여간 그랬다. 산하는 그냥 민혁의 뇌리에 박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시절 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대학은,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만약 가게 된다면 민혁과 같은 학교에 가고 싶고. 아무래도 민혁이라면 좋은 산하는 그래서 민혁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밝혔을 때도 그닥 슬퍼하지 않았다. 운명처럼 바로 시작되는 사랑이야 꿈같은 이야기잖아.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민혁이 실연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던 사랑하는 사람의 우울함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를 경험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민혁이 웃을까, 괜히 말장난을 걸기도 하고 애처럼 치대면서 안기기도 하고. 그럼에도 딱히 즐거워 보이지 않는 민혁을 볼 때면 속이 상했다. 민혁에게 즐거움만 주고 싶다는 욕심은 날로 커지는데, 민혁은 저가 본인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
[오늘 꼭 같이 가는 거예요. 알겠죠?]
무작정 남겨진 카톡에 결국 졌다는 듯이 알았다고 대답한 민혁이였다. 찬 공기가 잔뜩 흐르는 밤의 공기를 마시며 기차를 타러 나오니 아직 눈에 잠이 가득했다. 피곤이 가득해 보이는 민혁을 그저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산하가 민혁의 지퍼를 잠가 올려주었다. 이렇게 나오면 춥다니까. 그런 말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민혁에, 산하가 민혁을 끌어당겨 안았다.
“이렇게 같이 여행가니까 너무 좋다.”
“나 말고 니가 더 추울 거 같은데.”
“그럼 형이 안아주면 되죠.”
“근데 갑자기 겨울 바다는 왜.”
“그냥, 형이랑 가고 싶었어요.”
방학식 날부터 바다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산하였다. 중간중간 민혁과 통화를 할 때도 그랬다. 바다에 꼭 같이 가자고. 민혁은 어디서 뭘 듣고 왔길래 그러나 싶었다. 산하는 그저 민혁의 왜? 라는 물음에 그냥. 이라는 말로 대답을 반복하며 딱히 큰 얘기는 하지 않았다. 새벽의 바다로 향하는 기차는 한가했고, 민혁도 산하도 서로의 어깨에 기대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더니, 정신을 차리니 도착이었다. 한산한 역을 빠져나오자 다시 찬 바람이 물었다. 코를 훌쩍이는 민혁을 보다가 손을 내어 잡았다.
“추워.”
“거봐, 니가 오자고 해놓고 이렇게 춥게 입고 오면 어떡해.”
“그러니까 형이 나 안아줘야 해.”
“말은.”
그러면서도 민혁은 산하의 찬 두 손을 끌어당겼다. 진짜 꽁꽁 얼었네. 하, 입김을 불어 산하의 손을 식혀주다 자신의 점퍼 주머니로 산하의 손을 끌어당겨 넣었다. 산하는 이런 민혁의 작은 배려들이 좋았다. 투덜거리면서도 산하가 조금이라도 어려워 보이거나 하면 도와주고 안아주고 하는 것들이. 그리고 알고 있었다. 저가 아무리 들이대도 싫다던 민혁의 세계에 저가 점점 색을 물들이고 있다는 것을. 조금만 더 다가가면 온전히 민혁이 자신을 좋아하게 될 수 있으리라고.
천천히 철길을 따라 걸었다. 건너편의 바다는 아직도 새까만 하늘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산하는 자꾸 모래사장으로 내려가자는 말을 했다. 추워 죽겠다면서. 민혁의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혁을 끌고 모래사장으로 온 산하가 중간에 철푸덕 앉았다. 엉덩이 더러워질 텐데. 잔소리하는 민혁에게 형도 앉으라며 팔을 끌어당기니 결국 민혁도 산하의 옆에 앉았다.
“형이 그랬잖아요. 내가 별 따주면 나랑 사귀어준다고.”
“내가, 그랬어?”
“또 기억 못 하지. 그랬어요.”
“미안, 기억 안 난다.”
“아무튼 내가 별은 못 따줘도 이렇게 별이 가득한 하늘은 보여줄 수 있는데.”
산하가 말을 끝내고는 하늘을 바라보는데, 어두워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달빛에 비친 옆모습이 참 예뻤다. 민혁은 마치 지금 이 순간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그랬다. 항상 산하를 귀찮고, 애 같고, 그렇게만 생각해왔었는데 이렇게나 감성적인 말을 전하는 소년의 모습은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산하를 따라 하늘을 한번 봤다. 내가 언제 별을 따주면 사귀어준다고 그랬었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쩌면 그 말을 했던 것이 나쁜 일은 아니었는지도.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이상하게 별보다 산하를 더 보고 싶었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너, 별 같다.”
“이제 알았어요?”
“응?”
“형이 별 좋아한다고 해서 나 머리도 노란색 한 건데.”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산하의 머리는 원래 이렇게 밝은 탈색 모는 아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별, 그리고 윤산하. 민혁은 멍하니 손을 들어 산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내가 그렇게 좋아? 이렇게나? 갑자기 윤산하의 감정에 대해 궁금한 질문들이 하나둘씩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냥 말없이 산하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니, 가슴이 몽글해졌다.
“형도 사실 내가 좋죠.”
“무슨 말이야.”
“맨날 내가 치대도 다 받아주잖아.”
“그건, 그냥...”
“그냥이라고 해도.”
산하의 눈이 빛났다. 순간적으로 숨을 훅, 들이마시자 갑자기 심장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산하가 웃는데 민혁은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키스해도 돼요?”
예전 같았으면 무슨 소리냐면서 쳐냈을 말에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민혁이 가만히 눈을 감으니 산하가 천천히 다가왔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따뜻한 숨결이 달라붙는 듯하더니 곧이어 뜨끈하고 말랑한 입술이 맞닿았다. 부드럽게 민혁의 입술을 감싸는 산하의 입술에 민혁이 자연스레 산하의 어깨에 두 팔을 감았다.
“내가 형한테 별이 될래요.”
산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별이 온전히 민혁의 품에 안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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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2019. 12. 6. 18:38
3, 2, 1, 2, 2, 5.
민혁은 도어록 자판을 누를 때마다 우리의 보금자리는 언젠가 한 번은 털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산하와 저의 생일만 알기만 하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집인데. 아니, 그전에 털릴만한 물건이 있었던가? 하고 골똘히 생각하며 민혁은 차가운 문고리를 당겨서 문을 열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먼저 귀가한 산하의 스니커즈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게 보였다. 요 며칠 잦은 야근으로 항상 저가 먼저 산하를 맞이하곤 했었는데. 민혁은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 산하의 스니커즈 옆에 두었다.
“윤산하, 나 왔는데. 왜 안 안아줘.”
이 집에는 귀가 관례가 있었다. 누구 하나가 먼저 현관에 발을 들이든, 둘이 함께 귀가하든 등 뒤로 현관문이 닫히면 서로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민혁이 고개를 들어 산하의 입술에 살짝 입 맞춘다.
무언가 평소와 달랐다. 민혁이 아무리 말꼬리를 늘이며 산하를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복도 끝의 부엌에 형광등이 켜져 있는 게 어렴풋이 보이고 분명 무언가 팔팔 끓는 소리가 들리는데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게 이상스러웠다. 서프라이즈라도 준비했나? 잠깐, 오늘 무슨 기념일이던가? 아닐텐데. 저녁 준비하다가 물 올려놓고 잠들었나? 민혁의 발 아래의 대리석 바닥에선 냉기가 올라왔고 자연스레 불 켜진 부엌으로 발을 옮기는 민혁의 머리 속엔 별별 시나리오가 다 떠올랐다.
부엌에 다다라 산하야. 하고 부르면, 허리에 손을 짚고 있던 산하가 등을 돌려 민혁을 응시했다. 둥그렇고 까만 뒤통수 반대편에 숨겨져 있던 삼백안이 드러났다. 왔어? 평소와 다르게 무거운 산하의 음성이 냄비에서 팔팔 끓어오르는 수증기와 함께 뒤섞여 부엌을 채웠다. 민혁은 육감으로 산하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걸 알았다.
“형, 나한테 뭐 숨기고 있는 거 없어?”
“애인한테 숨길 게 뭐가 있어. 나 그런 거 없는데.”
“진짜 없어?”
“산하야, 화났나?”
“그럼 이건 뭔데?”
산하가 집게로 끓어오르는 냄비에서 건져낸 살구색 덩어리는…
씨발! 내 딜도!
[산밤] 대화가 필요해
오후 세 시가 넘어가니 배는 부르고, 사무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을 햇빛은 등을 따스하게 감싸니 산하의 고개가 꾸벅 또 꾸벅하며 떨어졌다. 이내 비죽 튀어나온 아랫입술에 침이 고이려는 찰나에 사내 메신저가 산하의 잠을 깨웠다. 그 주인공은 빈이었다.
[ 야 윤산 ]
[ 오늘 업무 나한테 다 주고 일찍 퇴근해도 되니까 ]
[ 나 주말에 은우랑 캠핑 가는데 램프 좀 빌려줘 ]
[ 제발 ]
[ 자냐? ]
[ 자냐고 ]
[ 미친놈아 ]
메일 읽고 있었습니다. 문 대리님. ^^.
큰 두 눈을 한번 껌뻑이곤 차분하게 키보드에 손을 올리는 산하였다. 낮은 파티션 넘어로 보이는 빈이 금방이라도 저의 자리로 찾아와서 때릴 듯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살기를 띈 빈의 얼굴을 봤다가 어후, 하며 한숨을 내쉬다가도 간만에 일찍 퇴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금새 싱글벙글해진 산하였다.
산하는 평소에는 손도 안 대던 흑마늘 진액을 쪽쪽 빨면서 두 시간 내내 인터넷으로 장을 봤다. 요즘들어 살이 쪽 빠진 민혁을 떠올리며 삼계탕 할 생닭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스테미너에 좋다는 굴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하더니 결국 오붓한 분위기엔 스테이크지! 하며 스테이크용 채끝살을 샀다. 얼마만에 보내는 둘만의 로맨틱한 저녁인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입을 비집고 나왔다.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여섯 시 땡 치자마자 산하는 미리 챙겨둔 가방을 들고 빛의 속도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퇴근길 1호선 지옥철 안에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 사람은 산하 하나 뿐이었다. 가방을 끌어안고 집을 향해 달려가던 산하는 아파트 단지 앞 편의점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참, 콘돔. 이런 날에 콘돔이 필요없을 리가 없다. 어떻게든 마지막엔 침대로 향하게 되어 있으니까. 산하의 귓가에 ‘콘돔 없이 어떻게 섹스를 해‘ 하는 민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습관처럼 서로가 써본 것 중에 가장 좋았던 초박형 콘돔을 두 개 고르고, 편의점 한 바퀴를 돌다 바나나 우유까지 계산했다.
다녀왔습니다. 산하는 분명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누군가 집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아직 민혁이 귀가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채곤 발목을 꼬물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콧노래를 가볍게 흥얼거리며 편의점에서 산 물건을 정리하던 산하의 휴대폰이 바지 주머니 안에서 덜덜거리며 울렸다. 민혁인가 싶어 재빠르게 꺼내들면 화면엔 ‘ㅗ대리 문빈ㅗ’이 떠있었다.
“아, 왜요!”
- 너는 왜 전화받자마자 성질이냐. 죽고 싶어?
“아닙니다. 대리님.”
- 램프 찾아놨어? 내일 회사로 들고 와.
“내일 당장이요? 저 방금 집에 도착했는데요.”
- 되는지 안되는지 확인해봐야 할 거 아냐.
“아.. 예에.”
- 이랬는데 까먹으면 넌 내일 내 손에 죽는다. 끊어.
빈이 먼저 전화를 끊고 산하는 저가 도대체 뭘 위해서 문빈 밑에서 일을 배우겠다고 먼저 선언했는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하여간 성격파탄자. 문또라이. 장 봐놓은 게 곧 도착한다는 문자를 보고 고기 재워둘 생각이나 하고 있던 산하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터덜터덜 랜턴이 잠들고 있을 베란다 창고로 향했다.
창고 문을 여니 매캐한 공기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쏟아졌다. 컥컥거리던 산하는 랜턴이 든 상자를 엄지로 검지로 살짝 들어서 바닥에 내려놓은데, 동시에 검은 부직포 더스트백에 감춰진 무언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게 뭐지? 산하는 실눈을 뜨고 한참을 내려다보다 먼지로 더러워진 손을 바지춤에 쓸어내린 후 더스트백을 주워들었다. 물컹하게 만져지는 내용물에 한 번, 흉측한 내용물의 모양새에 한 번 도합 두 번의 충격을 받은 산하는 머리를 싸매고 쪼그려 앉았다. 박민혁… 알다가도 모를 애인아.
산하를 패닉으로 몰아넣은 민혁의 실리콘 딜도는 열을 내며 김을 폴폴 풍기고 있었다. 민혁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딜도가 올려진 식탁 앞에 산하를 마주 보고 앉았다. 민혁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입을 꽉 다물고 산하의 얼굴을 흘깃흘깃 쳐다보기만 했고, 산하 역시 아무런 말도 없이 시선은 딜도만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불안한 듯 앞니로 손톱을 깨물던 민혁이 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
“있다이가…”
“찾아보니까 이거 삶아서 쓰는 거라며? 온열 기능 없음. 대신 흡착식으로 어디에든 붙여서 삽입할 수 있고. 빨리 건조해지니까 젤은 듬뿍. 아, 어쩐지 요즘 섹스도 안 하는데 젤은 자꾸 줄더라. 그나저나, 우리 회사에 있는 시간 빼면 맨날 맨날 붙어있는데 이거 쓸 시간은 있었어? 아, 형이 매일 나보다 먼저 퇴근하니까 나 도착하기 전까지 이걸로 한번 하고 나랑은 키스까지만 하고 뭐 그런 건가?”
산하는 민혁이 말을 이어갈 조금의 틈조차 내어주지 않고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민혁은 그런 산하를 보며 눈을 꿈뻑이다 우응.. 하는 아쉬운 소리를 내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다급히 반박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또 다시 산하가 한 박자 빨랐다. 산하는 민혁의 딜도를 덥썩 집어들어 제 팔뚝에 가져다 댔다.
“아니 얘는, 와. 진짜 다시 봐도 너무 큰데?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내 팔뚝만하잖아. 형 이거 다 넣을 수 있어? 나랑 할 때는 내가 손가락 세 개만 넣어도 아프다고 천천히 해달라더니. 이제 형 내 크기는 만족도 못 하겠네?”
“….”
“내가 형 만족도 못 시켜줄 거면 우리 왜 자요.”
“…그런 거 아냐.”
“우리 뭐 플라토닉 러브 그런 거 하는 거야? 와, 나는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민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의자는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산하는 깜짝 놀라 헉하고 숨을 삼키며 손에 들고 있던 딜도를 내려놓았고, 민혁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곤 잠시 제자리에 서있다가 넘어진 의자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 이미 말싸움의 주도권은 민혁에게로 넘어간 듯했다.
“니는 내한테 미안하지도 않나?”
“뭐… 뭐가요.”
“와, 진짜. 내 니 이럴 줄 알았다. 니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제? 내가 그렇게 맨날 콘돔 사오라 할 때는 형 까먹어써 미아내 이카면서 어물쩍 넘어가고, 어? 콘돔 없이 해주려 해도 씻고 나오면 니는 맨날 소파에서 퍼질러 자고 있질 않나. 내는 니 최대한 덜 힘들게 해주려고 운동도 맨날 하고, 정력에 좋다는 것까지 꼬박꼬박 주문해서 사먹이는데. 그리고 내 이거 몇 번 쓰지도 않았거든! 니는 여즉 내 외로운 것도 몰랐제!”
“형.”
“뭐!”
“노콘?”
“어… 어.”
그걸 왜 이제 말해요! 쏟아지는 민혁의 사투리를 멍하니 듣고만 있던 산하의 얼굴 근육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야,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하나! 입이 툭 튀어나와 섭섭하다고 쫑쫑거리는 민혁의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을 보니 순간 마음이 동한 산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에 앉은 민혁의 등을 뒤에서 감싸 안았다. 이잉, 그걸 왜 이제 말해요. 형아, 진~짜 섭섭했겠다. 그치? 내가 잘못한 거 같네. 윤산하가 잘못했다! 막무가내로 볼을 부벼오는 산하에 민혁의 폭 패인 보조개도 움찔했다. 딜도를 놓고 펼쳐진 두 사람의 불꽃 튀는 전쟁도 끝이 보이는듯했다.
“니가 잘못했제?”
“어엉.”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엉? 무슨 벌. 민혁의 목덜미에 쪽쪽 소리를 내며 뽀뽀하던 산하가 고개를 들어 멍하니 민혁의 얼굴을 쳐다봤다. 곧 민혁이 넥타이를 끌러 산하의 두 손목을 감쌌다. 지.. 지금? 당황한 산하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덤덤히 넥타이를 묶는 민혁을 내려다봤다.
“오늘은 내 말만 듣는 거야.”
의자에서 일어난 민혁이 먼저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 밀쳐지듯 뒷걸음짓 친 산하의 등이 벽에 닿았다. 두 개의 선홍빛 혀가 빠르게 얽히고 설키는 동안, 애타는 산하는 손가락 끝만 까딱거릴 뿐이었다. 민혁은 입고 있던 자켓을 뒤로 재껴 바닥에 던지듯 내동댕이 치고 자연스럽게 오른손으로 산하의 아랫허벅지를 쓸어 올렸다. 흥분감이 차오른 산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민혁은 태연하게 툭하고 솟아오른 산하의 앞섬을 손바닥으로 둥글게 문질렀다.
“우리 침대 가서 마저 할까? 여기 바닥 너무 차가운데.”
먼저 입술을 뗀 산하가 나직하게 속삭이며 묶인 저의 손목을 민혁 앞에 내밀었다. 먼저 리드하라는 의미. 민혁은 웃으며 산하의 손목에 묶인 넥타이를 잡아 끌어 안방으로 향했다. 켜져 있던 노란 침대 조명과 타오르는 블랙체리 향초까지, 민혁은 몸으로 느껴지는 노곤하고도 야릇한 분위기에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딜도 발견하고 화난 거 아니었어? 하고 물으니 산하는 대답 대신 양쪽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산하의 손을 이끌어 침대에 걸터앉게 만든 후, 양털 매트에 무릎 꿇어앉은 민혁이 산하의 바지와 브리프를 한꺼번에 끌어내렸다. 온몸의 피가 한곳에 다 쏠린 것마냥, 터질 듯이 붉게 솟아오른 페니스가 민혁을 맞이했다. 이제껏 제 딜도가 산하의 페니스보다 크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빳빳하게 선 페니스를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도 같았다. 민혁은 침을 꼴깍 삼키고 산하의 페니스를 입에 물었다. 민혁은 아이스크림을 핥듯 조심스럽게 혀로 기둥을 쓸어 올리기도 하고, 통통한 입술로 귀두를 한껏 자극시켰다. 그럼에도 산하는 손이 묶여있으니 차오르는 사정감을 느끼며 고개를 뒤로 젖히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뒤이어 민혁은 입으로는 산하의 페니스를 물고 팔을 왼쪽으로 쭉 뻗어, 옆 협탁에서 오렌지색 뚜껑의 러브젤을 꺼내 들었다. 결박되지 않은 두 팔로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많았다. 한껏 산하의 페니스를 쓸어내릴 수도 있었고, 자신의 바지를 끌어내려 저 스스로 뒤를 풀 수도 있고.
느그 으 흔즈 즈으 흔 즐 을으?
내가 왜 혼자 자위 한 줄 알아?
귀두를 입 천장에 닿게 해놓고 저를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입속말을 해대는 애인은 누가 와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산하였다. 아, 알 거 같아. 아까도 말했잖아. 이에 웃음을 띤 민혁의 아랫입술로 맑은 침이 주르륵하고 흘러내렸다. 쫍, 촙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정성스레 애무를 하는 민혁의 입술은 물먹은 체리만 같았다. 민혁의 약간 들어간 아이홀과 깊게 진 쌍꺼풀, 위로 살짝 올라간 가느다란 눈꼬리에 진 조명 그림자가 특별히 예뻐 보이는 산하였다.
그 시각, 스스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제 뒤를 풀어야 하는 민혁은 힘이 한껏 들어간 팔과, 치아가 닿지 않게 잘 오므려야 하는 입을 동시에 신경 쓰느라 정신을 한 곳에 둘 수가 없었다. 또한, 제 애인이 내려다보는 앞에서 자위를 한다는 약간의 수치심에서 오는 흥분감에 젖은 채로 차가운 러브젤로 아무렇게나 건드려지는 내벽에 온몸을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바짝 선 페니스의 벌건 핏줄을 핥아 올리면 산하는 숨을 거칠게 뱉으며 양 팔을 잘게 떨었다. 이렇게 두면, 곧 사정해버린다는 걸 아는 민혁은 곧바로 일어나 산하의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고 콧잔등을 세게 부딪혀가며 혀를 섞었다.
“..형, 나 싸도 돼?”
고개를 뒤로 빼 먼저 맞닿은 입술을 뗀 산하가 민혁의 두 눈동자를 번갈아 마주 보며 말했다. 오래간만의 정사에 사정감이 빠르게 들어찬 듯했다. 으응? 누구 마음대로. 민혁이 산하의 두 어깨를 살짝 밀치면, 산하의 상체가 침대로 쓰러지며 매트리스가 위아래로 투덕였다. 산하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뜨면 어느샌가 눈앞에 셔츠 자락을 입에 물고 한 손으론 제 페니스를 쥐고 무릎을 바깥으로 벌렸다 오므렸다 하며 구멍을 찾는 민혁이 보였다. 민혁이 골반을 살살 돌린 끝에 귀두가 미끄러지듯 한껏 민감하고 축축한 구멍 입구에 닿았다. 넣을까 말까 하며 촘촘하게 주름진 입구를 그토록 예민한 살갗으로 부비고 있으니, 산하는 그야말로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살살, 또 살살. 애써 침착하려 숨을 참고 삽입해도, 뒤가 꽉 막혀오고 울퉁불퉁한 핏줄이 내벽을 스쳐 지나가는 느낌은 민혁을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읏.. 아!”
“아파요? 뺄까?”
“아.. 안.. 아니.”
허리 힘을 풀고 산하의 허벅지에 철퍽하고 주저앉은 민혁의 구멍은 산하의 페니스와 퍼즐 맞추기 하는 것처럼 꽉 들어맞았다. 민혁은 순간 앞이 아찔해지며 앓는 신음 소리가 입에서 자연스레 터져 나왔지만, 곧 산하의 마른 배 위에 두 손을 올리고 방아 찧기를 시작했다. 윽! 응.. 아.. 흐잉.. 살 부딪히는 정박의 소리와 엇박의 신음 소리가 뒤엉켜 침실을 가득 채웠다. 이는 꽤나 색정적이었다. 산하는 쉴 틈도 주지 않고 골반을 움직여대는 민혁에 그저 발가락만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민혁은 산하의 위에서 허리를 움직이던 중 저도 모르게 사정해버려 사정액이 산하의 말간 피부 위로 툭툭 떨어졌고, 이에 기운이 싹 달아난 민혁이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기계처럼 둔부를 움직여댔다. 이를 발견한 산하가 설렁하게 묶여있던 넥타이를 벗어 던져버리고 상체를 일으켜 민혁을 끌어안았다. 산하는 민혁의 살짝 벌려진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저가 피스톤질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면서도 산하는 민혁의 어깨와 쇄골 이곳저곳을 깊게 빨았다.
“..형, 나 이제 싸도 돼?”
잔뜩 흥분한 얼굴로 민혁을 올려다보는 산하는 삼백안을 하고 있었다.
민혁을 미치게 하는 삼백안.
나는 네게 정복 당하고 싶어.
“안에.. 안에 싸.. 흐으.. 싸주세요..”
민혁을 끌어안고 있던 산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민혁의 가슴팍에 거친 숨을 내뱉더니 민혁의 안에 파정했다. 민혁도 산하의 목을 끌어안고 있다가 아랫배가 따뜻하게 차오르는 느낌에 함께 시트 위로 쓰러졌다.
잔뜩 숨을 헐떡이던 둘은 서로의 시선이 닿자 흐흐, 하고 웃었다. 안아 줄까요? 응.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와락 하고 제 품에 안겨오는 연하 남자친구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딜도는.. 버려도 되는 거죠? 나 하나면 충분하잖아.”
“글세.. 생각해보고?”
“아, 형 진짜 이럴 거야?!”
민혁이 이불을 끌어다 껴안으며 웃었다. 윤산하,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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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 햄보끄 (생활차이)
세번째2019. 12. 6. 18:37응답하라
“헉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네 형, 다음에 시간나면 밥 한번 먹어요!”
친동생 셋이나 있으면서 동생이 나밖에 없기는, 지랄도 병이라던데, 걱정된다. 비가 와서 그런지 잠을 잘 못 잤는지 물에 잘 못 빠져서 그런지 목이 땡기고... 술도 땡기네.
“박민혁! 아직 멀었냐!”
“아 다 했다; 나가, 나가!!”
“샴푸 만들어서 쓰냐;”
“지는 린스도 안하고 나가는 주제에”
“왜 해”
“.”
“뭐”
“됐다. 니랑 말해서 얻을게 없다 얻을게, 목은 괘안나”
“아 맞다. 아까 잘 못 빠져서 목도 땡기고..”
“글믄 얼른 집가자”
“술도 땡기는데...”
“아프다매”
“입은 안 아파”
“입만 살아가지고”
“헹헹, 그래서 가 말아”
“혼자 먹어”
“외로워!!”
“나랑 먹는다고 안 외로운 건 아니잖아?”
“아 옆에만 있어달라고오”
“집 가고 싶다고오”
“술 마시고 싶다고오”
“집에 캔맥 있잖아.”
“분위기가 안 나잖아!”
“지랄도 이런 판타스틱한 지랄은 태어나서 서른 두 번째다. 야 차라리 집이 더 분위기 있지.”
“뭐래”
“안내면 진다 바위가위보라돌이”
“뚜비. 에헤 병신ㅋㅋ 주먹 그만 내라고ㅋㅋㅋ”
“ ”
“먼저 간다~”
오늘도 술안주는 뜨뜬한 ‘내가 왜 체대생이냐‘ 든든하게 서로 주고받는다. 따라오기 싫다고 툴툴대긴 했지만 오늘 유독 산하가 지쳐보였다. 민혁은 먹지도 못하는 소주를 숟가락으로 조금씩 옮기더니 문득 산하에게 말을 툭 건넸다.
“일 있나”
“일없다”
“장난치지 말고”
“니 나 걱정해주냐?”
“해주라며”
“내가 언제”
“그거 아니면 술 마시러 가는데 내는 왜 데리고 가는데”
“그냥”
“술도 못 마시는 아 데리고?” “그냥?”
“뭐”
“봐라 또 말투 팍씨 부드럽게 안하나”
눈치는 빠른 놈이 자기 기분만 모른다. 모른 체 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뭐가 됐든 세상 미련한 짓이지.
“야,”
“?”
“아무도 내 맘을 몰라줘.”
“넌 말도 참 못해”
“아 좀”
“아무도 니 맘을 모르긴 누가. 내가 다 아는데.”
“됐다. 니랑 말해서 얻을게 없다 얻을게”
“나 놀리지”
“니랑 말해서 얻을게 업ㅅ, 아 아아. 아! 아파!!”
“뭐”
“왜 때려!”
“뭐”
“왜 때리냐고오; 말 좀 해바”
“니랑 말해서 얻을게 없다~”
“됐다. 마셔라.”
“혼자 마셔”
“외로워...”
“혼자 마시라고..”
“외로운데...”
그 큰 키 움츠려봤자 얼마나 작다고, 잔뜩 웅크려 잔만 만지작거리다 “외로운데...“
나왔다. 장화신은 윤산하. 나보고 어쩌라고. 마시면 안 되는데 안마시면 안 돼. 아니 어쩌라고.
시원하면서도 답답함이 목을 메웠다. 오랜만에 들이킨 잔이라 낮선 느낌에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고개 들어 본 윤산하는 철없이 좋다고 헤헤- 웃고만 있다. 그래, 웃으면 됐다.
“헤헤- 기분 좋네”
“나도”
이상하다. 분명 아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빈말이 아니라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이래서 술이 무섭지. 하여튼 진짜 이상하다. 왜 너 눈이 네 개냐.
“야 왜, 너는 어쩌다 눈이 네 개가 되었니이?”
“취했네”
“뭐래 겨우 한잔인데”
“너 여기 더 있으면 내가 위험하다. 얼른가자. 가방 챙겨”
“으음! 앉아!”
“ ”
“앉으라고”
“무서와..”
“뭐라구우?!”
“알았어 알았어 앉아. 이거 봐. 나 앉았어.”
“흫흥, 잘했어 히”
“앉기는 뭘 앉아.. 서있거든...”
“아 나 술 안 먹는다고”
“어?”
“안 먹는다고”
“그래, 먹지 마. 이제 가자”
“어디가 윤산하 외롭다잖아”
“뭐?”
“같이 있어줘”
“갑자기?”
“외로워...”
“???”
“외로..워..흐꾹”
“아니, 하.”
“흐엉ㅇ어어어어어어웅어어어어웅ㄹㅇ렁”
“엉엉우어어워ㅓㅠㅜㅠ”
... 다음부터 내가 박민혁 데리고 술 마시러 오나 봐라. 근데 운전은 누가하지
“야”
“ ”
“박민혁”
“ ”
“민혁아”
“웅?”
“여시 같은 것.”
“헹헹헤”
“돈 있어?”
“엄마가 이상한 아저씨한테 돈 빌리지 말라 그랬어”
“아니 그니까 내가 빌리ㄴ,”
“안 돼”
“그럼 걸어간다?” “가다가 엎어져도 두고 갈거야?” “너가 걸어가자고 했어?”
“말이 많타!”
“...가자”
“레추고도리.”
그래, 내가 취한 박민혁을 데리고 뭘 하겠냐고.
“야, 내려.”
“아가아가가가가갂가갂깎가”
“가만히 있던가ㅠㅠ”
“우리 산하 등판이 아주 세렝게티의, 헐 짜파게티 끓여먹을까아??”
“말을 말자..”
“힝... 말을 말아,, 말을,,. 왜.,. 흐으엉ㅇ응우어 말을 왜 말아ㅜㅜ 아프대ㅠㅜㅠ”
박민혁을 (힘겹게) 업고 가다보니 문득 하늘이 어둡다고 느꼈다. 새벽감성을 탔나 했더니 가로등이 없구나. 어제 집에 혼자 보냈는데 용케 잘 갔네.. 하긴 저 어깨에 저 얼굴을 누가 들쳐가.
"끼융이 안뇨옹"
-묘옹
"끼융아 너네 형 너랑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야오옹"
-미요옹
"으흫? 미용 미용~"
"들어가자 들어가"
"끼웅이 잘자아"
"고양이는 밤에 안자.."
"헤헤"
“일어나 옷만 갈아입고 자자”
“잘자아”
“안 갈아입을 거면 니 침대에서 자던가..”
“굿나이이”
“말이 안 통해,.”
“말을... 말이 ㅇ, 왜 안 통해.. 말,”
“어어 자 잘 자~”
“웅”
"박민혁 자?"
"아니이..."
"산책갈까?"
"추어ㅓ..."
자는구나.. 니가 새벽산책을 설마 춥다고 마다하겠냐고.
음
어
그래 윤산하 고백은 원래 끌릴 때 하는 거라니까?
아니 그러다 차이면 어떡하고
아니 근데 이런 고민하다가 뒤져서도 쟤한테 말 못한다고
그래도 좀 더 고민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이럴게 아니라.
,
컬러링소리가 미친 듯이 방안을 두드리고 다녔다. 이 새끼는 컬러링이 쓸데 있이 화려하고 지랄이야. 지같네.
-"여보세요"
"어 야"
-"어 형"
"아니 내일 점심 좀 같이 먹자"
-"왜"
"왜가 어딨냐"
-"아 왜"
"할 말이 있어"
-"형 나 좋아해?"
"지랄하지마!!"
"...윤산하 뭐하냐"
"전화"
"...괜찮냐"
"뭐, 어디"
오 시발 작전이 완벽히 와르르 된 건가. 솔직히 이때 심장 좀 떨렸다.
"몰라서 묻냐"
이때는 진짜 존나 심장이 39568비트로 뛰었다 쿵딱락팅탕통티키타토
"뭐, 뭔데"
"아 눈 괜찮냐고"
"?뭐가"
"아 다시 두개 됐냐고..!"
"아,,, 어 두개 됐어"
"다행이네... 얼른 자아...."
하여튼 내 심장 찹쌀떡이다. 엄청 쫄깃하네. 이래가지고 고백하겠냐.
"아니 형...?"
"아 맞다. 어 내일 밥 좀 먹자고"
"방금 누구야?"
"박민혁"
"아... 아, 아아... 고백을 하겠다아... 아아...ㅎㅋㅎ 아잉 부끄뎌"
"뭐래"
"에이~ 형이 밥 쏜다는데 당연히 텨가야제 열두시에 파스타집에서 봐용"
"아니 나 돈 없는ㄷ,"
"뚝."
난 왜 선배도 후배도 이 모양이냐, ... 떨리네 잠이나 자야지.
아니 근데.
“인났냐”
“어어... 속은 괜찮냐”
“아니”
“밥 안 먹고 뭐해”
“해줘”
“뭐?”
“밥 해줘”
“설마 밥하기 싫어서 나 보고 있었던 거야?”
“응. 밥 줘 밥 배고파”
“지리네”
“더러워”
어떻게 두통보다 귀찮음이 앞설 수 있지, 좋아한다지만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나저나 뭘 해준담..
“나 김치찌개”
“워씨 깜짝아”
“김치찌개...”
“아 알았어 스팸 넣는다?”
“아;; 참치”
“장난해?”
“장난달.”
“김치찌개에 참치는 예의가 아니지”
“뭐래 누가 요즘 김치찌개에 스팸 넣냐”
“내가 넣는다.”
“아아각아가아아악 멈춰봐!”
“아 왜ㅠㅠ”
“내 숙취해손데 왜 니 먹고 싶은 거 넣는데”
“요리는 내가 하는데”
“아 진짜 니 햄 넣으면 나 오늘 수영 못해”
“뭔 논린데”
“논리가 뭐가 필요한데 내가 참치 넣겠다는데”
“어이없잖아”
“개소리야 난 어삼없다.”
“아 재미없어;”
“난 잼이 있어 개새갸 참치 넣어 더 잔다~”
“야!”
박민혁 나와 다 했어, 내꺼 뺏어먹기만 해봐라.
“뭐냐”
“뭐 참치 넣었어”
“(의심의 눈초리)”
“독 안탔거든”
“뭔데”
“내꺼 따로 했다 왜”
“찌질한 놈 그냥 먹지는”
“뭐래 한입만 달라고 해보기만 해라.”
“더러워서 안 먹어”
“깨끗하거든;”
"야 맛있다."
"당연히 맛있겠지 라면스프 넣었는데"
"이 씹"
"어어 옷에 국물 튄다."
"산하야 내가 언젠간 니 정수리에 도끼 박을 거라고 했잖아, 기대하고 있어 얼마 안 남았으니까"
"ㅋㅋㅋㅋㅋ"
되도 않는 네 말장난에 조금 웃은 뒤 금세 잔잔해졌다. 분명히 인스타에서 분위기를 잡으려면 조용한 상황에서 눈을 마주치라고 했다. 할 수 있어 윤산하
"야"
"뭐"
"아 눈 좀 보고 말하자"
"갑자기?"
"응 갑자기, 할 말 있다고"
"왜"
"그 이따가"
"풉"
"?"
"아 아니 미않ㅋㅋㅎㅌㅋ"
"왜 그래"
"눈 두개 됐네..ㅋㅋㅋ"
".,.ㅋㅌㅎㅋㅎㅌㅋ"
"아니 다시 말해봐"
"너 데리고 뭐 하겠냐 밥이나 먹어"
"아 뭔데ㅔㅔ에"
"너 못생겼다고"
"누가 누구보고"
"솔직히 난 상타취"
"응 나 씹상타"
"씹발 면상 타격?"
"뒤져"
"맛있게 먹어^^"
"응 개새끼야^^"
오늘 고백은 왠지 접는 게 좋을 것 같기도,
"윤산하 나와!!"
"어 가"
아니 꼭 해야겠다. 귀여워. 진짜 째진다.
"야 걷지 마"
"왜"
"차 몰고 가자"
"왜"
"아 좀"
"아 뭐"
"아 제발"
"얘 졔뱔~"
"내 마지막 소원이야"
"오 콜 가자"
"?"
"형이 운전한다."
"니가?"
"응!"
"진짜 니가 운전 해?"
"응!!"
"나 잔다?"
"ㅇㅋ 편하게 자"
그래 널 왜 믿 아니 믿지도 않았어 몇 분이나 걸린다고 또 자? 이쯤 되면 그냥 나 싫어하는 거 아니야? 이건 거의 증오 아니냐고, 저렇게 자다 또 목 아프다고 찡찡대겠지
쪼그려자는 습관 때문에 항상 자고 일어나면 목이 아프다며 여기저기 쫑알대며 찡찡대는 민혁이기에
산하는 목 잡아주느라 여기저기 여우짓하는 민혁 잡아 다니느라 힘들다고는 하는데,
사실 심장이 찹쌀떡, 아니 인절미 정도 되지 않을까, 운전하다가 목 잡아주면 답답하다고 찡찡대는 거 귀엽고, 여기저기 따라다니면서 자기만 보게 하면 왜 다른 사람이랑 못 있게 하냐고 찡찡대는 거 귀엽고. 곧 있으면 눈이 두개라 귀엽다 할 지경.
"으응 답답해 손 치우ㅓ..."
"어 손 치웠다."
"안 치웠자나..."
"응응 계속 자"
"우응..."
또 좋다고 발그레 해져가지곤,
"다 왔어 일어나자"
"일어나있거든"
"눈이나 뜨고"
"눈 떴어"
"내 눈 몇 개야"
"흫킇ㅎ흐 네 개"
"미친다."
"물 싫어ㅜㅠ"
"나도 싫어"
"째자"
"안돼"
"아 왜, 니 째는 거 취미잖아"
"아, 여튼 안 돼."
"아 왜ㅐ앵애애애ㅐ 왜애애 왜 왱 오앵"
"내려, 아 오늘 점심 다른 애들이랑 먹어"
"왜."
"아 깜짝야, 표정 좀 풀고"
"왜"
"후배랑 따로 먹기로 했어"
"누구"
"알빠냐"
"알빠지 아 오늘 우동 나온단말야 너꺼 가쓰오부시 내껀데"
"다른 애들꺼 뺏어먹어"
"예의가 아니지!"
"?"
"아 누구랑 가는데"
"있어"
"-.-'
"응 아니야 내려"
"밖에 추워"
"너 지금 내 롱패딩 입은 거 잊지 마."
"뭐 별로 길지도 않구만"
한참을 차 안에서 알콩달콩 투닥 거리다 점점 지나가는 시간에 결국 발을 뗐다.
"뭐냐 왜 웃냐"
"패딩 끌고 다니지 말라고ㅋㅋㅋㅋㅋ"
"? 야 이쒹ㄱ 쓸데없이 큰 거 입고 다니지 말랬지"
"무릎까지 오거든~"
"뭐."
"ㅋㅋㅌㅎㅋ 얼른 가자 춥다."
"왔어용~"
"민혁이 출쳌!"
"아 3인칭 좀"
"왜 귀엽잖아 민혀깅>< 깅깅><"
아니 야, 너 귀여운 건 아는데 왜 꽃받침은 하고 난린데, 심장은 왜 또 난린데. 다 들키겠네. ... 귀엽다 진짜. 어떡하지 진짜 이슬에 감싸서 꽃 속에 넣어가고 싶다.
-"늦게 온 주제에 염장질이나 하고 있으니,"
"모라고오??!?"
-"옷이나 갈아입어라"
"넹"
수영부이다 보니 안 그래도 집에서 나시 입은 것만 봐도 발딱발딱 하는데 웃옷을 훌렁 벗어버리니, 매일이 헬파티다. 바지는 집에서 안에 입혀 보내 다행이지, 박민혁을 좋아하게 된 이후부터는 내가 진정 못하는 것도 있지만 딴 놈들 시선 돌리느라. 그니까 넌 왜 예뻐서는. 예쁜건 넌데 왜 내가 힘드냐고. 억울행..
"얼른 들어가자"
"아 좀 나와 봐 왜 만날 깔짝대노"
"아 얼른"
"염병이다, 물 들어가기 싫다며"
"아ㅏㅏㅏ 얼른~~~"
"가자, 가"
-"제발 얼른 졸업해라"
-"쟤네보다 우리가 먼저 졸업 아니냐'
-"지랄염병."
-"인생 익사할까"
-"동반입사 가능?"
-"쌉가능"
수영장 안에서 할 이야기는 솔직히 뭐 별거 없다. 박민혁은 수영하고 윤산하는 정신 잡고. 어쩌면 수영훈련이 아니라 멘탈훈련일지도 모르겠다. 여튼, 뭐... 별 거 없..을거다.. 아닌가?
"점심"
"않,"
"점심"
"ㄱ"
"점심"
"나 오"
"점심"
" "
"점심"
" "
" "
"나 오늘 동생이랑 같ㅇ"
"점심"
"오늘 동생이랑 같이 먹어, 그니까 따로 먹어. 간다"
저 귀여운 걸 어떡하면 좋니, 아 진짜 상담이고 뭐고 때려치고 밥 먹다 와랄라 해버릴까.
-"어 형 왔네"
"뭐냐"
-"기다리고 있었지^^"
"원래 사주는 사람이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니였냐."
-"그딴 게 어딨어."
"ㅋㅋㅋ뭐먹을ㄹ"
-"나 크림파스타랑 타르트랑 자몽에이드랑 요거랑 요거."
"...?"
-"ㅎㅎ"
"넌 정말"
-"사랑스럽다구, 나도 알아 형><"
"분명 박민혁은 이 느낌이 아니었는데"
-"아 커플냄새;"
-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저희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거 이거, 이것도 주세요."
-"형 돈 많나보다. 나 감자튀김 하나만 시켜도 되냐'
"형 수영한다. 바둑 까불지마라"
-"죄송함다."
"아니 그래서"
-"꽃 줘"
"뭐?"
-"꽃 주라고"
"아니 서론이 없어"
-"꽃 주라니까?"
"아 알았어 천천히 말해ㅋㅋㅋ"
-"꽃 환장한다."
"꽃가루 알레르기 있어"
-"누가"
"둘 다"
-"가루 안 날리는 걸로 사가."
"."
-"?"
"병신"
-"지금 도와주려고 애쓰는 사람한테 병신이 할 말이가"
"니 하나 밥값이 얼만 줄 아냐"
-"큼 그럼 반지나 목걸이도 괜찮은데"
"알러지 올라와"
-"병신아 관둬라"
"뭐 고백이 꽃, 반지, 목걸이 밖에 없냐? 신박한 거 좀 없냐고"
-"목도리 떠주기"
"뜨개질 못 해"
-"기타 치면서 노래하기"
"그거 싫어해, 시끄럽대"
-"어쩌라는 거야"
"됐고 언제 할까"
-"아 밥 좀 먹자"
"먹으면서 말해"
-"에효에효 바둑판에 토해도 낸 모른다~"
"너도 사투리 쓰냐?"
-"왜, 그 사람도 쓰나"
"뭐냐 그 반투리는, 징그러워;"
-"허 억울하노"
"더러워 노노거리지마"
-"그 사람이 니 뭐하노? 그람 좋아가 헤발쩍 해질람서,'
"니랑 걔랑 같냐"
-"됐다 됐어 고백은 무조건 해 질 무렵."
"저녁 아니고?"
-"으음, 노맵시."
"...?"
-"무조건 해 질 때 해야 돼."
"야 학교 끝나면 해가 없는데"
-"아 바보야 중간에 빠져나와야지"
"둘만 있을 때?"
-"둘만 있을 때!"
"아니 근데 소문 안 나면 또 딴 놈들이 건드릴 거 아니야"
-"사귈거라고 확신해?"
"아니 사귄다는 가정하에..."
-"쪼잔하긴, 쯧"
"뭐래"
-"그럼 철판 깔고 그 사람 반응까지 계산해서 하던가"
"멘트는"
-"깔끔하게 해"
"그니까 어떻게,"
-"이건 뭐 내가 고백하는 거 아니냐"
"그러네, 닥쳐봐."
-"허?"
"좋아해,"
-"너무 깔끔해
"좋아해, 사귀자."
-"초딩같아"
"전부터 만ㅎ"
-"절대 안 돼"
"너무하네"
-"형 고백 한 번도 안 해봤어?"
"엉"
-"?"
"?"
-"?"
"왜"
-"전여친이 없어?"
"아니"
-"?"
"받아만 봤지"
-"또 지랄한다ㅋㅋㅋ"
"진짠데..."
-"진짜로?"
"어"
-"제발 흥분해서 어리바리 까고 횡설수설만하지 말아줘라"
"알았어..."
-"불길해"
"아 응원을 해줄 것이지"
-"해주고 싶은데 형이 너무"
"너무 뭐"
-"아니야"
"뭐"
-"잘생겨서 말이 안 나온다고..."
"^^"
-"..."
"나 간다."
-"벌써? 좀 더 있다가지"
"박민혁 밥 빨리 먹어"
-"에잇 퉤"
"간다."
-"오야 가라"
횡설수설 하지 말고,,, 해 질 때,,, 로맨틱하게,,, 그렇지,, 그리고 저기,,, 박민혁 있네.
"박민혁~!"
"뭐"
"밥 맛있었어?"
"응"
불길하다. 박민혁이 단답형 대답을 한다는 건,
"왜 그래? 기분 안 좋아?"
"응"
"삐졌어?"
"아니거든"
삐졌다. 망할 윤산하. 그깟 연애상담이 뭐가 중요하니
"아 미안해 진짜 급하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누군데"
"뭐가?"
"걔가 누군데,"
"그냥 후배"
"나 오늘 친구 집에서 자"
"?누구"
"그냥 친구."
"야,"
"어 선배! 저 가요!"
정말. 완벽하게 망했다. 수영장 안에서도 민혁은 산하를 피해 다녔고 산하는 화를 어떻게 풀어줄까 고백은 어떻게 하지 정말 집에 안 오면 어쩌지 생각이 엉키고 엉켜 결국 종일 코치한테 혼만 났다.
시간은 벌써 여섯시가 돼가고 해가 짧아서 그런지 초 마다 해가 지는 듯 했다. 수영이고 뭐고 시계밖에 안보였다. 화도 못 풀었는데, 어떻게 부르지.
"저 화장실 한번만 다녀올게요."
-왜?
"허벅지 찢어진 것 같아서"
-양호실 갔다가 와"
"아니에요, 그냥 헹구고 휴지로 피 좀만 닦으면 될 것 같은데,"
-알았어, 천천히 와.
"넵-! 히히"
뭐? 허벅지가 찢어져? 근데 왜 웃어? "쌤 쟤 다쳤대요?" -어, 허벅지 찢어졌대. 미치겠네. 해가 지던 말 던 달렸다. 내가 항상 상처를 달고 다니는 터라 항상 아침마다 가방에 민혁이가 구급상자를 넣어준다. 근데 그걸 니가 쓰진 않길 바랬는데, 몸을 닦지도 않은 채로 탈의실로 들어가 캐비넷에서 상자를 들고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박민혁"
" "
"다쳤어? 봐봐"
"가서 연습이나 해"
"가만히 있어"
피가 철철 흐르는데, 휴지로 닦기는 무슨. 진짜 나 없으면 어쩌려고
"야 넌 나없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가"
"나 가면 혼자 어쩌게, 구급상자 어떻게 여는지도 모르는 애가"
"니 없어도 어쩌지 안하니까 애 취급 하지 말고 그냥 가라고"
"니가 애지 그럼"
산하를 아무리 밀쳐 봐도 연고가 본드 인지 연고 바르는 손은 절대 밀리지 않았다.
"어어, 가만히 있어. 너 움직이면 아파."
"진짜 너 미친놈이야. 알아?"
"알아,"
"짜증나"
"그것도 알아"
"가"
"다 됐다. 괜히 이뻐보일라고 물 들어가지 말고 양호실 가서 쉬어 제발."
"내가 괜찮다는데,"
"고집부리지 말고 쉬어, 말 해놓을게"
"싫어"
"아 그리고, 나 할 말 있어 잠깐 기다려."
"싫어"
"야,"
"수업 쨀 생각 하지 말고 얼른 들어와"
"아니"
마른세수.. 뭐 흠뻑 젖어서 말랐다고 하긴 뭐 한데,
해졌네.., 너무 허무한 거 아닌가. 체념하고 물에 들어갔다 나오길 몇 번 반복했나, 달이 떴다.
"산하야 오늘 형이랑 술 한 잔 하고 가자"
"아, 오늘 부모님 결혼기념일이시라 밥 사드리기로 해서,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ㅠㅠ"
"역시 내 동생 아주 효자야 효자, 그래 들어가 봐"
"네엡"
큰일 났다. 박민혁 캐비넷이 비어있다. 분명 나보다 먼저 나갔는데, 나보다 빨리 씻었을 리도 없고. 혹시나 하고 수영장에도 다시 들어가 보고 화장실, 샤워실, 탈의실 구석까지 다 뒤져보아도 박민혁이 없다.
밖으로 가 봐야지, 하고 서둘러 캐비넷을 열어 옷을 챙겨 입는데 바닥에 툭 하며 차키 하나가 떨어졌다. 저거 내껀데. 옷 갈아입고 넣을 때까지 민혁이 후드티 주머니에 있던 차키.
일단 차키를 주워들고 가방을 가지고 나가려는데 가방 뒤에
분명, 아침까지 박민혁이 입고 있던 내 패딩이 놓여있었다. 애한텐 욕하기 싫었는데 미쳤냐고. 차를 끌고 간 것도 아니고, 겉옷도 안 입었고. 얘는 세상이 다 나 같은 줄 알아, 아 어딨는건데. 뭐하는데. 전화를 열여섯 통 이나 걸어도 도무지 받지를 않는다. 짜증나고 답답하고 걱정되는데 그것보다 너무 보고 싶다.
어딨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학교를 뛰어다니다가 결국 차에 탔다. 뭐하고 있는 건가 싶으면서도 이미 시동키고 돌아다닐 준비 중이다. 윤산하 개멍청이. 병신. 왜 이러고 있냐. 너 지금 박민혁 보면서 사랑한다고 하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없다. 민혁이가 좋아하는 카페, 공원, 인형 뽑기장, 동네편의점, PC방, 호수. 갈 만 한 곳은 다 가봤다. 근데 왜 없냐고.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데. 날씨가 나대신 울어주네. 집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혹시나 하고 25층 계단을 다 올라 봐도 박민혁은 없고 다시 3층으로 내려와 집으로 들어갔다. 환청인가 박민혁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하고 방문을 열었는데
설마는 설마인지 끼융이 우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끼융아,~ 작은 형이 어디로 갔을까"
-미유웅
"아 맞다. 끼융이 밥 안줬구나, 미안해 늦었지"
없네. 하다하다 끼융이 밥도 없어.
"끼융, 형이 얼른 밥 사올게"
-미야옹
"미안해 얼른 올게,"
우산이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했고. 대충 운동화를 구겨 신고 밑으로 내려갔다. 편의점 들린 김에 바나나우유 사서 민혁이 갖다 줘야지,
그래서 어딨는건데 박민혁
-13500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저거. 박민혁이지. 맞는 거 같지.
박민혁. 박민혁이야. 무슨 감정인지 단정 지을 수 없이 그 자리에 멈춰서 빤히 쳐다보았고 그제 서야 눈치를 챘는지 민혁은 뒤를 돌아 다시 가려고 했다. 어디가. 어딜. 얼마나 찾았는데.
"어디가."
"친구 집"
"어딜 가"
"친구 집 간다고"
"내 눈 봐"
"왜"
"가지 마"
"뭐?"
"가지 말라고..."
목소리가 떨리더니 산하는 고개를 떨궜다. 그러다 민혁을 한 번에 세게 껴안았고
"울어?"
"가지말라고.!,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너한테 고백하려고 동생이랑 같이 밥 먹었다,!.
찌질해서 얘기도 못하고.
그대로 말도 못하고 너가 사라졌는데.,
말없이 혼자 패딩도 두고 가고
차키도
왜 그랬는데 병신아.
갈 거면 적어도, 사람 걱정되게는 하지 말고 가야지.
여기서 비는 왜 맞고 지랄인데 집 안 들어오고 하
내가 너 얼마나 찾았는데 얼마나, 아 진짜"
"나 왜 찾았는데..."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찾았어 보고 싶어서,
너 없는데 숨이 안 쉬어 지더라.
너 진짜"
"병신,"
"뭐?"
"왜 내가 먼저 말 하게 만드냐고.
이 쯤 했으면 알아줘야지
나 씻을 때 기다려 주는 거,
술 마시고 취했을 때 챙겨주는 거,
아침밥 해주는 거,
운전 하는 거,
아프다고 걱정 해주는 거,
나 때문에 어리바리 까다가 혼나면서도 웃어주는 거,
나 몰래 나한테 예쁜 말 해주는 거,
여우 짓 하면 대신 철벽 치는 거,
싫다 해도, 미운 말 들어가면서 까지도 좋아해 주는 거,
그냥 나 쳐다보고 같이 말하는 거.
하루 종일 설레서 너 보고 웃는데 너만 몰라 병신아. 누가 누구보고 병신이래.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데, 지 혼자 소설 쓰지."
" "
" "
아차차. 둘 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뭔가 내 뱉은 것 같긴 한데 이게 무슨
"아니 그러니까"
"그래 그러니까 너도"
"너도"
"나를 좋아한다는거잖아?"
"그래 병신아"
"왜 이제 말해줘?"
"너만 모른다니까"
"아 나 고백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이게 뭐냐고"
"지금 충분히 멋있으니까 얼른 해줘"
산하가 달달하게 웃었고 민혁도 뒤따라 미소 지었다. 곧 부드럽게 입술을 맞대었고,
심장은 또 인절미 됐다 :)
"사랑해."
"뭐야ㅋㅋ 선 키스 후고백이야?"
"아 몰라 좋아"
"아 어떡해"
"응?"
"아아 떨려"
"갑자기?ㅋㅋ"
"아니, 그니까,"
"그지 오늘부터 너랑 나랑 사귀는 거지"
" "
"귀엽냐 진짜 어쩌지"
"그런 말 어떻게 하는데에"
"아니 귀여운걸 보고 귀엽다고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인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나도 어쩔 수 없어"
"짜증나아"
"뭐가요 공주"
"아 공주, 아, 아니"
"ㅋㅋㅋ아가야 진짜ㅠㅠ"
한참을 껴안고 있다가 드디어 비로 흠뻑 젖은 게 느껴질 때 쯤
"산하야"
"응?"
"들어가자 우리 감기 걸려"
"맨날 물속에 있으면서 비 맞는 건 위험해??"
"우응..."
"우응이래 어떡ㅎ,"
"그만하고 드온나"
"알았어ㅜㅜㅠ"
"끼융이 밥은?"
"헐 미친"
"왜"
"아니 너 찾아다니다가 늦게 들어와서"
"미안해요..ㅠㅠ"
"아니 괜찮아요 아악 귀여워 아니 근데 아 나 아 진짜 왜 이래"
"진정해ㅋㅋㅋ 늦게 들어왔는데"
"끼융이 밥이 없어서 사러 나갔다가"
"어..."
"너랑 만나고.."
"응..."
"지금..."
"미친년아 돌았냐 왜 애기 밥을 안 줘"
"아니 너가 집에 왔었어야지.."
"그래도 그렇지 애 밥을 왜,"
"그럼 앞에서 너 혼자 비맞고 있는데 모른 척하고 가라고??'
"아니지!"
"끼융이한테 밥을 주고 전속력으로 달려왔었어야지"
"내가 뭐 로봇이야?"
"닮았잖아"
"그건 또 뭔"
"아 얼른 달려"
참나 나 비 맞고 있을 땐 뒤돌아가더니만 끼융이 밥 안 줬다는 소리에는 아주 그냥 끼융이 친부모에요. 윤끼융, 그래도 박민혁은 내꺼다.
"끼융아~ 형아와따!"
-미요옹..
"미안해 애기ㅠㅠ 작은형아가 밥 안줬지ㅠ"
"내가 작은형아라고?"
"당연하지"
"왜..?"
"니가 나보다 작잖아"
"어느 부분에서? 누가 그래?"
"."
"ㅎㅎ"
"너 싫어"
"앟 아 미안햏ㅎ"
-미야오옹...
"아 애기 미안해 얼른 먹자"
끼융이 밥을 준 뒤 자연스럽게 산하는 주방으로 민혁은 방으로 갔다.
대충 저녁밥을 다 하고 민혁이를 불렀다. 허, 방에서 끼융이라도 된 마냥 헤헤 거리면서 총총 뛰어나온다. 귀여운 것.
"앉아"
"헤엑 뭐야 고기당~!♥"
"뭐야 낮선 그 눈빛"
"헤헹"
"ㅋㅋㅋ어떡하냐"
"어떡하냐구 그만 좀 물어 어떡하긴 어떡해 그냥 그대로 쭉 귀여워하면 되지 뭘 어떡하냐구...계속 그러구...(웅얼)"
"아 진짜 어떡해"
"내가 전부터 너 말 진짜 못한다 해찌"
"나 아직도 아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
"아니,.. 그건 잊어"
"왜?"
"어?"
"귀여웠는데??"
"아니,"
"내가 너 얼마낭 쪼아하눈데..! 너망 몰랏!"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는데"
"내가 그렇게 들었거덜랑요~"
"아니거든"
"너만 몰랑!"
"안니이ㅠㅜ"
"몰!랑!"
"그망하라구우..."
"박민혁 이거 봐라?"
"뭐어"
"왜 말투가 귀여워지지이?"
"언제!"
"나 진짜 너 놀리는 것도 아니고 진짜 멋있는 말 많이 해주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계속 어떡해 귀여워만 계속 말해도, 나 말 못하니까 봐주면 안 돼?"
"생각해보구"
"어떡해 귀여워"
"흫킇ㅋ힣크 밥 먹어 밥"
"웅웅"
"근데 있잖아 민혁아"
"응"
"사랑해"
"뭐야, 아 맞다"
"뭐?"
"사랑해."
민혁이를
산하를
하루 종일 부르고서야,
하루 종일 부르고나서, 확인까지 하고서.
그제서야
그리고나서
오늘 하루도 너로 채웠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하루도 너로 채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지금은
고갤 돌려 한번만
한번만
민혁이를 보면
산하를 보면
모든 게 완성된 것 같다.
모든 게 완성된 것 같다.
항상 물속에서만 헤엄치던 '좋아한다'는 감정이 드디어 수면 위로 나와 만났다. 우리에게 만큼은, 오늘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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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운명의 한 끗 차이 / 달빛 (한 끗 차이)
세번째2019. 12. 3. 01:48사랑과 운명은 한 끗 차이
" 끝이 같더라도, 난 다시 널 사랑할 거야. "
W . 달빛
***
" ... 하! "
" ... "
" 윤산하! "
" 어? "
왜 이렇게 넋이 나갔어, 또. 물어오는 빈의 말은 마치 음소거라도 되는 양 들리지를 않았다.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생긴 붉은 실과 이어진 민혁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했다. 민혁은 평소 생글생글 웃으며 두루두루 잘 지내는 성격 덕에 사람들과는 별 허물없이 지냈고, 그런 민혁을 산하는 정신없이 눈으로 쫓기 바빴으니까.
왜 그런 말이 있지, 자신의 새끼손가락과 연결된 붉은 실의 상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말. 산하는 원래 미신은 잘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생긴 붉은 실과 그런 자신의 붉은 실의 끝에 서 있는 운명의 상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딱 필요한 관계만 이어오며 살아온 산하에게 자신이 전학 간 학교에서 민혁이 내 온 호의는 점차 혼자만의 호감으로 커져갔다. 솔직히 처음엔 좀 귀찮았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낯가림이 있는 산하에게 누군가가 다가오는 게 달갑지만은 않았으니까. 그래도 결국엔 계속해서 자신이 우리 반 반장이랍시며 다가온 민혁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엔 없었지만. 민혁이 계속해서 산하에게 보여준 호의에 산하의 마음이, 그저 전학생이 빨리 적응하길 바라는 민혁과는 별개의 마음으로 흘러가는 산하의 마음에 산하는 자기 자신도 헷갈리는 이 감정을 정의 내리기도 직전에 발견한 건 붉은 실 이었다.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에 연결된 붉은 실.
자신과 붉은 실로 연결된 민혁을 발견했을 땐 마냥 좋다기보단 복잡했다. 그리고 막상 이 붉은 실의 상인 민혁은 둘을 이어주는 붉은 실을 보지 못한다. 산하는 이 사실을 알기까지 조금 오래 걸렸다. 민혁이 말을 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알아. 산하와 민혁이 붉은 실로 연결된 그날 민혁은 산하에게 운명이 있는 것 같냐고 알 수 없는 질문만 해 댔으니까. 하지만 민혁이 하는 행동을 봤을 땐 민혁은 붉은 실을 볼 수 없단 걸 확신했다. 산하는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정의 내리기도 직전에 붉은 실을 발견했을 땐 이미 둘은 고등학교를 졸업해 같은 학에 지원해 선택한 과만 달랐을뿐더러 민혁에겐 학에 오고 나서 애인이 생겼다. 같은 과 선배라 했나, 민혁에게 첫눈에 반했다며 민혁을 잘 챙겨줬더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민혁도 금세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산하는 혼자만의 감정으로 산하의 감정을 숨겨갔다. 그래도 민혁은 학에 들어오고 나서도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데다 이렇게 잘 통하는 친구는 너밖에 없는 것 같다며 민혁은 산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일이 종종 있었고, 이게 무슨 의도치 못 한 희망고문인지 산하는 민혁이 민혁의 애인과 있는 문제들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 그래서 그랬다니까, 으휴 진짜. "
" 니가 서운할만했네. "
" 그치, 아 진짜 너밖에 없다 산하야 "
알면서 그러는 건지, 오늘따라 유난히 더 민혁이 야속했다. 별다른 답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어도 신나게 이야기 하는 민혁이 오늘따라 미워 보였다.
" 배고파. 우리 밥 먹으러 가자 "
" 오늘은 돈까스 어때 "
" 와 메뉴 선정 박. 완전 찬성 "
왜 이렇게 잘 통해. 무슨 운명인 것 마냥 ㅋㅋㅋㅋㅋㅋ 민혁이 무심코 내뱉은 민혁의 한 마디는 산하에게 아프게 다가왔다. 오늘따라 무슨 생각인지 민혁이 애인과 헤어졌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혼자만의 심통까지 났다. 네가 헤어졌으면 좋겠어. 네가 그 사람과 잘 안됐으면 좋았을걸. 유치한 심술인 걸 알면서도 민혁의 잘못도,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닌 걸 알아도 괜스레 민혁에게 서운해졌다. 애인과 싸웠다면서도 저 끝에 지나가는 그 사람을 보며 금세 얼굴을 붉히는 민혁에 괜히 더 미안해졌다. 어디서부터 올라오는 건지, 시작점도 모를 죄책감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민혁아, 네 운명의 상래. 그래서 민혁아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그 사람이랑 헤어지게 될 수도 있어. 전부 나 때문에.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 한 말들이 입안에서 어지럽게 맴돌았다.
ㆍ
ㆍ
" 너 유학 가라. "
"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
" 그냥 갔다 오라면 조용히 갔다 와 "
" 아버지!!!!!!! "
" 시끄러워. 조용히 해라 "
집안에 하나 있는 아들 새끼라고는... 저렇게 놀기만 해서야.. 전혀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산하의 아버지에게 산하는 늘 걸림돌이었다. 이번에도 전혀 예정되어 있지 않은 계획을 무턱고 산하에게 요구하며 산하의 숨통을 조여왔다. 그때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땐 자신과 같은 잔뜩 물기 젖은 목소리를 한 채 말을 하는 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 때문인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민혁이 애인과 헤어진걸.
" 나 진짜 어떻게 해야 해 산하야 "
" 나한텐 전부인 사람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ㅇ.. "
민혁의 부름에 산하는 고민 없이 바로 옆에 걸려있던 코트를 걸치고 나갔다. 그리고 지금, 산하의 앞에 보이는 민혁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비어버린 술잔과 함께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랑과 운명은 정말 한 끗 차이라고, 사랑과 우정도 정말 한 끗 차이라더니. 처음엔 이해하지 못 했다. 지금 이 순간 무교인 산하는 신이 있다면 절실하게 민혁의 운명이 자기가 아니였으면 좋겠다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와 멀어져서 네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뭔들 못 하겠어 내가. 자신의 새끼손가락과 마주앉은 민혁의 새끼손가락을 연결 한 붉은 실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나한텐, 나한텐 정말 전부인 사람이야. 근데 그 사람이... 말을 마치 지도 못 한 채 엉엉 우는 민혁이었다. 민혁이 꽁꽁 숨기고 있던, 숨겨오던 아픈 부분을 마주하니 말문이 막혔다. 니가 이렇게 힘들어할 동안 난 뭘 한 거야.. 민혁을 좋아한다면서 혼자 힘들어할 동안 뭘 한 건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난 있잖아, 정말 그 사람이 전부였어. 운명이라는 말 솔직히 잘 안 믿었는데, 진짜 이 사람이 내 운명이다 싶을 정도로 사랑했어. 그 사람이 원하는 모습으로 맞춰가면서 내가 사라지는 것쯤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민혁의 말을 들으면서 정말 갖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자신조차도 모르고 있던 민혁이 꽁꽁 숨겨오던 아픈 부분을 자신보다 먼저 알아낸 그 사람은 민혁을 보듬어주었다. 내가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겁이 많은 사람이야, 산하야 나는.. 나는 무서운 게 너무 많아. 주변 사람들도 무섭고, 스쳐 지나가는 내 감정들도 무섭고 하다못해 분명 나인데.. 내가 너무 무서워. 분명 이건 내가 아닌데,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나를 잃어가는 거 같아서 무서워. 점점 내 모습이 사라지는 거 같아서.. 애초에 내 모습은 세상에는 있지도 않은 것처럼 사라지는 게 제일 무서워.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 산하야... 민혁의 아픈 부분은 생각보다 깊었고 어두웠다. 어떻게 그게 괜찮아 민혁아. 니가 너를 잃어갔던 순간부터 그건 괜찮지 않은 거야. 미안해, 미안해 민혁아. 내 이기심에 네가 그 사람과 헤어지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못된 생각을 했어. 그 말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네가 이렇게 힘들어할 걸 알면서도 네가 조금 더 힘들었으면 좋겠어. 그 사람을 원망하면서 날 찾을 수 있게. 내뱉지도 못할 말들을 삼켜내었다. 목구멍에 뱉지도 삼키지도 못할 말들이 모여 목소리도 제로 나오지 않는 기분이었다. 민혁은 가장 믿고 의지하던 하나의 관계가 무너지니 이내 곧 자신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단단한 줄 알았던 민혁을 단단히 받쳐주고 있던 그 사람이 사라지자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민혁아 좋아해. 진짜 너무 많이 좋아해. 흘러들어간 술에 취한 건지, 산하는 꺼내지도 못 한 말이 머리에 맴돌며 머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네가 왜 헤어졌는지 내가 아는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좋아한다고 해. 산하는 울다 지쳐 테이블에 기 잠든 민혁을 보니 자꾸 숨이 막혀 괜히 뿌연 연기로 가득 찬 천장을 바라보았다. 민혁이 민혁의 애인과 헤어진 게 다 이 붉은 실 때문인 것만 같아서. 우리가 사실은 서로 운명이라 네가 그 사람이랑 헤어진 거라고, 사실로 처음부터 모든 걸 말하고 마주할 민혁의 얼굴이 무서웠다. 산하는 말했다. 좋아해 민혁아, 미안해.
민혁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산하에겐 오히려 당사자인 민혁보다 더 힘들었다. 오히려 민혁이 괜찮은 척을 하는 모습이 가장 아프게 다가왔다. 민혁을 제정신으로 마주하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죄책감에 숨이 막혀와 도체 어디서부터 사실을 말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내가 네 운명이야, 그래서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됐어. 단언하긴 힘들지만 민혁이 잘 지내던 애인과 헤어지게 된 이유로 산하는 이것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민혁에게 바른로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할 수 있었다. 근데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어서. 울렁거리는 속에 산하는 한참이나 속을 게워냈다.
민혁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 사람을 잃고 나서 하도 괜찮아, 괜찮을 거야. 자기최면을 걸어온 탓인지, 아니면 본래 자기 모습을 돼 찾아온 덕인지 생각보다 괜찮았다. 한 가지 괜찮지 못 한 점이 있다면 애인과 헤어져 산하와 술을 마신 그날, 민혁은 산하가 하는 말을 들었다.
" 좋아해 민혁아, 미안해 "
눈물만 났다. 산하의 감정을 듣고도 모른 척 무시해 버리는게, 산하의 감정을 알면서도 전부 짓밟는 것만 같아서 미안해서 그랬나. 도체 언제부터 자기를 향해 그런 감정을 품었는지, 미안했다. 지나가다 산하를 마주치면 쌓여있는 말들이 마구 뒤엉켜 쏟아져 내릴까 의도적으로 산하를 피해 다녔다. 물론 정리되지 못 한 감정으로 어지러운 건 민혁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산하를 피했을까, 이건 정말 못 할 짓인 것만 같아서 그만뒀다. 죄책감만 들어서. 그래서 둘은 평소로 함께 학식을 먹고, 다른 수업을 듣고, 집으로 가는 길도 함께 했다.
" 민혁아 "
" 응 "
" 유학 가게 됐어, 나 "
아버지가 가라고 해서 가는 유학인지, 사실로 민혁에게 말할 자신이 없어 도망치는 유학인지 산하는 도저히 분간할 길이 없었다.
" ... 아버지가 그러신 거지? "
산하는 나오지도 않는 웃음을 살풋 보여주며 말했다.
" 응, 그런 거 같네. "
티는 내지 않아도 민혁을 안심 시키기 위해 괜히 빙빙 돌려 말했다. 민혁은 산하에 해 잘 알았다. 산하도 그런 민혁을 마다하진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관계에서 민혁은 산하의 집안 사정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혁은 산하에게 별다른 위로의 말만 뱉어냈다.
" 응.. 몸 조심히 다녀와 산하야 "
가벼운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민혁은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자꾸만 한 끗 차이로 자꾸 틀어지는 둘 사이는 왠지 서글펐다. 사랑과 운명은 정말 한 끗 차이라더니, 예전에 들었던 말이 요즘들어 왜이리 자주 생각이 나는지, 아주 작은. 좁혀지지 않는 한 끗 차이로 엇나가는 게 오늘따라 유난히 와닿았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둘은 말할 수도 해결할 수도 각자의 고민으로 울렁거렸다.
" 조심히 가. "
" 응, 얼른 들어가 "
더 가까운 민혁의 집에 도착하고 민혁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산하는 뒤돌아 얘기했다.
" 민혁아 "
" 응 "
" 좋아해 "
등 뒤에서는 이어질 민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내 젖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왜 울어, 민혁아. 나.. 나는... 응, 괜찮아 민혁아 왜 울어... 둘은 한참을 정적 속에서 산하는 민혁을 달랬고, 민혁은 눈물을 참았다. 너 조금 뒤면 나 안 본다고 이러는 거지 그래서 그런 거지. 그만. 거기까지 해. 유학 갔다 와서 나 안 볼 것도 아니잖아 너. 민혁은 떨리는 목소리로도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가기 전에 얘기해 주고 싶었어. 미안해. 민혁은 산하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이런 마음으로 자신과는 깊이부터 다른 산하의 마음을 받기엔 너무 미안했다. 그날을 처음으로 산하와 친해진 걸 후회했다. 그냥 둘 걸. 전학생 오는 게 한두 번이라고 그때는 왜 그렇게 산하가 신경 쓰였는지, 분명 자신이 베푼 호의에 끝내 연결된 관계인 걸 알기에 사춘기 온 학생처럼 괜히 그때의 자신이 미워졌다.
집에 도착하고 지긋이 손끝의 붉은 실을 바라보고 있는 건 오랜만이었다. 분명 창문도 닫혀있고 바람이 나올 곳은 막혀있는데도, 우리의 손끝에 걸린 붉은 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 실과 손가락들이, 사람과 사람이 운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는 자신을 거울로 보고 있으니 손이 닿으면 끊어져 버릴 듯 붉은 실이 얇은 붉은 실이 흔들리는 건지, 너희의 관계가 더는 지속되지 못한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는지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사랑에, 운명의 장난에 두통약을 달고 살았다. 늘 지끈거려오는 머리 탓에 도통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붉은 실이 흔들리는 건지 아니면 붉은 실로 연결된 산하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 건지, 그날 밤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네가 나처럼 내 생각에 하루라도 더 뒤척였으면 좋겠어. 하루라도 네가 나만큼 내가 신경 쓰여 미치겠으면 좋겠어. 창문을 열면 스며드는 달빛에도 내가 생각나 눈물이 날 만큼 가슴이 답답했으면 좋겠어. 차라리 네가 우리의 운명을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어. 근데 이게 무슨 이기적인 생각인지,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만약 우리의 운명을 알게 되어도, 우리의 결말을 알게 되어도 네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민혁아 내가 생각한 우리의 끝과 너에게 돌아올 답이 같더라도, 난 또다시 널 사랑할 거야. 종이에 한 자 두 자 적어가는 글씨들이 떨어지는 눈물에 번져갔다.
산하는 유학 날이 다가올수록 위태로워 보였다. 두 사람의 운명의 실 위에서 외줄 타기라도 하는 양 툭 치면 곧 떨어져 사라지기라도 할 듯 불안해 보였다. 예상과는 반로 오히려 유학 당일날은 평온했다. 묵묵히 일어나 준비된 짐을 챙겼고, 조용히 공항으로 향했다.
민혁은 그러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일찍 떠진 눈에 새벽부터 일어났을 땐 창밖엔 해가 뜨고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생전 처음 보는 붉은 실이 새끼손가락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이런 게 어딨어. 고작 이 실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던 애인과 헤어지게 된 거라는 이유까지 생각이 미치기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에서 이 붉은 실의 끝에 걸린 운명의 상가 윤산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운명의 붉은 실로 이어져 있어서 그런지, 실의 끝부분에 연결된 사람을 보지 못했음에도 상당히 느낌이 익숙했다. 오래 전부터 연결돼 있었다는 듯이. 상가 이 붉은 실의 끝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무모한 일을 저질러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겉옷을 챙겨 입고 무작정 밖으로 나와 손끝에 이어진 붉은 실을 따라 걷고 있었다. 온갖 교통수단을 이용해도 공항 쪽에 가까워지는 게 영 불안하면서 초조해져 손톱을 물어뜯었다. 분명 오늘은 산하의 유학 날이었고, 공항 쪽에 다다랐을 땐 팽팽하던 붉은 실이 느슨해져 바닥에 뒹굴었다. 문을 열었고 손가락에 얄팍한 실로 연결된 상를 확인했을 때
" 윤산하 "
이래서 머리가 아프지 않은 거였어. 어쩐지 오늘은 괜찮게 지나가나 했다. 손과 손에 붉은 실이 연결된 채 마주한, 어느 한 쪽만 보는 것이 아닌 모두가 알아버린 우리의 운명을 함께 마주한 민혁은 울고 있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젠 내가 꼴도 보기 싫다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하려나, 아니면 사람을 가지고 노니 재미있었냐는 흔한 사가 나올까 무서워 사실을 알게 된 민혁을 마주하기 두려워 손이 떨렸다. 심장 박동 수가 급격히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입 밖으로 빠져나올 것 같다는 게 이런 말이었는지 몸소 느끼고 있을 때, 어쩌면 산하보다 더 슬픈 표정을 한 민혁이 달려와 산하를 끌어안았다.
" 왜 말을 안 했어.. 왜.. "
" ... "
" 좋아한다면서 왜 말을 안 한 거야 "
흐느끼는 민혁이 숨을 고르기를 기다렸다. 이어지는 답은 분명 자신을 향한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서.
" 혼자 얼마나 힘들었어 "
" ... "
" 혼자 얼마나 아파했어 "
혼자서 얼마나 끙끙 앓았어, 날 좋아한다면서 죄책감에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텨냈어. 미안해.. 미안해 산하야. 너한테 모질게 굴어서 미안해. 네가 날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외면했어. 무서웠어 널 잃을까 봐. 예상 밖이었다. 산하는 심장이 떨어져 바깥에 나뒹구는 기분이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감기 기운도 있었나 생각하다 보니 오히려 민혁보다 되려 눈물이 났다. 어떻게 넌 이 상황에서 날 걱정하는 거야 민혁아. 네가 애인이랑 헤어진 것도 모두 이 실타래 때문인데 어떻게 내 생각부터 하는 거야. 어떻게 원망 한 번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날 위로하는 거야. 민혁을 달래기 위해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덜덜 떨려왔다. 목이 막혀 목소리도 내기 힘들던 목이 답답한 응어리가 빠져 정확하지 못 한 발음으로 전하지 못 한 말들이 쏟아져 내렸다.
울지 마 민혁아. 딱 4년이야. 아버지도 허락하셨어,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조금 참자. 4년 후에도 우리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면 그때 만나자. 너무 많이 울지는 마. 마지막 인사가 이런 말이라 미안해. 금방 다녀올게. 이 말을 끝으로 산하는 미련 없이 뒤돌았다. 민혁도 저 멀리 사라지는 산하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뒤엔 그로 뒤돌아섰다. 더 바라보기엔 원치 않을 미련이 생길 것만 같아서.
ㆍ
ㆍ
윤산하가 떠난 지 벌써 3년이 조금 넘었다. 4년이라고 했지,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우리는 그날 마지막 인사를 기점으로 단 한 번의 연락도 하지 않았다. 네가 됐건, 내가 됐건 연락하면 너무 보고 싶어서 당장 그곳으로 갈 거 같아서. 처음엔 산하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민혁의 손가락에 이어진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실을 바라만 보고 있는 건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았지만 말이다. 하루를 마무리 짓고 침에 누워 새끼손가락을 바라보면 좀 신기했다. 이렇게 얇아 보이는데 이 실의 끝엔 네가 있고 내가 있는 게, 이렇게 얇은 실로 운명이라는 명목하에 두 사람을 묶어 둘 수 있는 게 오늘따라 신기했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아도 도통 잠이 오지를 않았다. 전화... 해 볼까. 수차례 고민 끝에 낸 결론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해 보자 였다. 세 번의 연결음도 채 지나치기 전에 산하는 전화를 받았다. 잠시 정적이 있었지만 이내 먼저 입을 열었던 건 산하 쪽이었다.
" ... 오랜만이야 민혁아 "
" 어... 그러게 "
" 왜 전화했어? "
변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변명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가? 그냥 오늘따라 유난히 네가 생각이 나서라고 말하기엔 부끄러웠다. 그나저나 여기랑은 시차가 꽤 차이 날 텐데. 괜히 전화 했나 고민하고 있을 찰나, 산하는 입을 열었다.
" 아, 아니다. 괜찮아 "
" 응? 뭐가.. "
" 보고 싶었어. "
" ... "
" 전화하기엔 너무 염치없는 거 같아서.. 그래도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 민혁아. "
뭐가 아니라는 거지.. 생각하는 민혁에게 산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굳이 왜 전화를 했는지, 4년이라는 시간을 다 채워가는 이 상황에서 왜 지금에서야 전화를 한 건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굳이 용건이 있어야 전화하는 사이도 아니고, 민혁에게 먼저 연락 온 이 순간이 산하에게는 큰 의미였으니까.
" 여전히 바보네, 넌. "
" ... "
" 진짜 그때나 지금이나 바보야, 바보. 나는 너 엄청 기다렸는데. 그때도 지금도. "
정적이 흘렀다. 바보는 너무했나? 윤산하 삐졌어? 분위기를 느낀 민혁은 말을 이어나가기 위해 괜한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아니, 바보 맞네. 그때나 지금이나 바보 맞아. 산하도 웃으며 받아쳤다. 이렇게 쉬운 걸 왜 우리는 지금까지 안 한 거야.
" 앞으로는 전화 자주 할게. "
" 나도 "
" 그리고 "
" 응? "
" .. 아직도 나 기다려? "
... 그럼, 기다리지. 아직도 너 기다려. 아직도 너 기다리고, 앞으로도 너 만나기 전까지 계속 기다릴 거야. 기다릴 수 있어. 민혁의 확신 있는 목소리에 어디인지 모를 설렘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산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알겠어, 얼른 갈게. 보고 싶다. 늦었는데 얼른 자. 피곤하겠다. "
" 알겠어, 너도 잘 자. "
" 민혁아 "
" 응 "
" 좋아해 "
.... 나도. 끊을게, 잘 자. 이번엔 어느 한 쪽이 말한 게 아닌 두 사람이 함께였다. 좋아한다는 말에. 자신도 좋아한다고 화답했다. 우리가 언젠간 좋아한다는 말에 사랑한다고 답할 수 있겠지? 민혁은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을 허공에 던졌다. 너도 나 기다려줬잖아, 계속. 오늘도 역시 끝내 말하지 못 한 한마디가 민혁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ㆍ
ㆍ
" 믿겨져 윤산하? 일주일 남았어.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고. "
" ㅋㅋㅋㅋ 진정해 민혁아. 나도 안 믿겨져. 시간 엄청 빠르네. "
" 뭐야, 예전엔 버릇처럼 보고 싶다고 하더니 이젠 아니야? "
" 아니, 보고 싶지. "
" 그럼 좋아하는 건? "
" 여전하고. "
사실 한 번의 통화 이후로 하루에 한 번씩 밥 먹듯 이어진 통화에서 둘은 보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민혁이 깜빡하고 하지 않아도 산하는 늘상 입버릇처럼 보고 싶다는 말을 내뱉었다. 사실상 산하가 먼저 민혁에게 사랑한다고 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괜히 확인받고 싶었다. 두 사람이 함께 하기까지 길게 돌아온 길들에 이제는 지름길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산하의 귀국 날이 하루 남았던 날에는 산하도 민혁도 왠지 모를 설레임에 새끼손가락의 붉은 실을 바라보다 날을 샜다.
산하의 귀국 당일 민혁은 일찍 일어나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학을 가기 전 산하와 지금의 산하를 똑같이 할 수 없었다. 산하를 보고 얼굴이 빨개지면 어쩌지. 이런 부질없는 고민들을 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지나 비행기 도착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민혁은 4년 전 자신들이 헤어진 공항으로 가기 전, 잠시 꽃집에 들렀다. 역시 꽃은 오바였나.. 라는 생각은 잠시 치워두고 열심히 꽃을 고르기 시작했다. 무슨 꽃이 잘 어울릴까, 너에게. 고민하고 있을 찰나 눈에 들어온 꽃은 분홍색 안개꽃 이었다. 이걸로 꽃다발 만들어 주세요.
" 분홍색 안개꽃은 꽃말이 사랑의 성공이에요. "
굳이 별다른 답은 하지 않았지만, 꽃집 사장님께 살풋 웃어 보이니 이내 사람 좋은 미소로 답해주셨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꽃말 마저도 너를 닮은 것만 같아서. 감사합니다. 꽃을 받아 들고 나오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공항에 다다랐을 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민혁의 예상보다 공항에 일찍 도착해 30분쯤 산하를 기다렸을 때 저 멀리서 산하가 보였다. 울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이상하게 산하를 보니 눈물이 나왔다. 4년 전 그때가 생각나서인지, 이유는 민혁도 모른다. 애써 눈물을 참고 천천히 걸어와 자신의 앞에 서 눈물을 닦아주는 산하에게 예쁘게 웃어 보이며 꽃다발을 건넸다.
" 귀국 축하해 "
" 보고 싶었어. "
아 어떡하지.. 산하는 이내 민혁을 꼭 끌어안고 말했다. 너무 좋아서 어떡해 진짜.. 얼굴만 봤는데 이렇게 좋아서 어떡해.. 민혁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 너 귀 엄청 빨개. "
" 그건 너돈데? "
분명 장난스럽게 놀리는 말투였지만, 산하는 빨개진 귀와 얼굴을 가리는 데 급급했다. 아니다. 이제..
" 이제 안 피할래. "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악 열이 끼치는 기분이었다. 잔뜩 빨개진 얼굴로 자신이 준 꽃다발을 안고서 민혁의 앞에 서 예쁜 말만 뱉어는 산하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산하와 마주 보고 선 민혁은 꽃다발을 잡고 있는 산하의 오른손을 빼 자신의 새끼손가락과 산하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다 알기라도 한다는 듯 산하는 민혁을 향해 웃어 보였고, 민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 윤산하 "
" 응, 민혁아 "
" 귀국 축하해. "
그리고... 이제 나랑..
걸고 있던 두 손가락이 얽혀 두 사람의 손이 맞잡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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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2019. 12. 3. 01:39틀림과 다름의 차이
W. 라온
***
틀리다 (동사)
-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러게 되거나 어긋나다.
- 바라거나 하려는 일이 순조롭게 되지 못하다.
- 마음이나 행동 따위가 올바르지 못하고 비뚤어지다.
다르다 (형용사)
-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
- 보통의 것보다 두드러진 데가 있다.
===
“아니 형! 왜 자꾸 그러는데요! 그게 틀렸다고 하는 말이잖아요 지금!”
또 시작됐다. 어른인 척하고 싶은 너의 지적 질. 이때가 되면 아무리 억울하다고 한들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한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오해한 거다’라는 말을 한다면 산하의 언성을 더욱 높아지고 하얗던 얼굴은 매운 것을 먹은 거 마냥 붉어진다. 상대적으로 얇은 목소리가 높아져 날카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고 듣기 좋았던 목소리는 어느새 소음이 되어 간다. 그 상황이 끝나고 불 같이 화를 내던 산하가 잠잠해 지면 목이 쉬어 다 잠긴 목소리에 나에게 미안하다고 할 때면 괜히 내 마음이 안 좋아졌기에 그냥 조용히 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바닥만 보고 있자 산하는 그제야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등을 기댔다는 것은 자신의 화가 다 끝났다는 신호였다. 나는 그런 산하를 천천히 바라봤다. 빨겠던 얼굴은 점점 하얘지고 가쁘게 몰아쉬는 숨이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일상 속 대화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산하도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화도 낼 줄 모르던 어린 아이였다. 너와 처음 만난 건 내가 고등학생 때 알바 하던 카페에서였다. 산하는 내가 일하던 카페 근처에 있는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때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주말 알바만 했고 사실상 산하를 마주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주말 낮이라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한가로이 가게만 지키고 있었다.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아직 많이 누적되어 있어 예민하기도 하고 손님도 없고 해서 카운터에 기대어 잠을 청하려다가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움에 카운터에 박고 있던 얼굴을 살짝 내밀어 밖을 내다보니 딱 봐도 중학생처럼 보이는 무리를 보고 한숨을 푹 쉬고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우리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나 여전히 시끄럽게 조잘거리며 카운터로 오는 그 무리를 빤히 바라봤다. 그중에 제일 커 보이지만 가장 어려보이는 학생이 메뉴를 줄줄 읊으며 나에게 카드를 건넸다. 중학생 주제에 엄마 카드를 건네며 우쭐하는 꼴이 우스워 웃음을 실 흘렸다.
“손님 영수증 챙겨드릴까요?”
그 학생은 아무 말도 없었다. 어딜 보는 지 멍하니 어느 곳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손님? 영수증 필요하세요?”
“아, 아뇨! 괜찮아요...”
엄마 카드면 영수증 챙겨야 될 건데... 고개를 까딱이며 그 학생에게 카드를 돌려줬고 그 학생은 얼빠진 채로 자신의 친구들이 있는 무리로 갔다. 나는 빨리 쉬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주문이 들어온 음료를 만들었다. 마지막 음료에 휘핑을 올릴 때 아까 카드를 건넸던 그 학생이 서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학생에게 트레이를 살짝 밀었고 그 학생은 또 얼빠진 상태로 트레이를 받아 들었다. 저러다 쏟을 것 같은 느낌에 가져가는 뒷모습을 주시하니 젠장, 예상이 맞았다. 나는 빠르게 걸레를 집어 들어 어쩔 줄 몰라 하는 학생에게 괜찮다고 진정을 시킨 후 나는 걸레질을 시작했다. 내가 걸레질을 하는 중에도 그 학생은 여전히 안절부절 했다.
“학생-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요”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학생을 보자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얼굴에 열이 올랐지만 숨을 고르고 그 학생을 달래고는 바닥을 재빠르게 치우고 음료를 잔뜩 머금은 걸레를 두 손으로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라는 회의감이 한가득 밀려 올 때 밖에서 작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나는 그 소리에 눈 주변을 꾹꾹 누르며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 학생이 서있었다. 같이 온 친구들은 다 나갔는지 어느새 가게 안은 조용해졌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에요. 괜찮아요-”“저... 번호 좀”
“네?”
“번호요. 전화번호”
고작 중학생이 패기도 좋게 번호를 물어보는 것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내 답은 거절이었다. 무슨 행위능력도 없는 저런 중학생한테 내 번호를 줘야할 가치도 몰랐으니까. 나는 그저 정중히 못 준다고 가 달라고 하자 그 학생은 또 미안하다며 가게를 나갔다. 그 후로 손님은 한 명도 없었고 그래서 나는 몰래 카운터에 숨어서 잘 수 있었다.
그 후로 학교는 방학을 했고 방학을 한 동안 카페에 안 나갔다. 사장님이 카페를 이전한다고 해서 나는 따라간다고 했고 다 옮기고 나면 연락을 준다 하여 나는 알바 없는 방학을 보낼 수 있었다. 방학 동안 꾸준히 수능 문제집을 풀었다. 이번 모의고사는 다 2등급으로 끌어올릴 작정이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과 놀 시간도 없었고 그냥 집에만 박혀 살았다. 엄마는 그런 나를 신경도 안 쓴 대신 편의점에서 점심 사 먹으라고 2만원을 탁자에 두고 갔다. 문제를 풀다가 나가는 것은 흐름 끊긴다고 선호하지 않는 나여서 그냥 아침 일찍 집 앞 편의점에 갔다. 여름이라 푹푹 찌는 날씨에 에어컨 때문에 입었던 긴 바지와 긴 팔을 벗어던지고 계절에 맞는 옷을 입고 슬리퍼를 끌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나갔다. 날이 얼마나 덥던지 그 짧은 거리를 가는데도 땀이 줄줄 났다. 어서 빨리 편의점에 들어가 음료 칸을 열어 열을 식혔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인스턴트커피와 몬스터를 집어 들고 삼각 김밥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할 때 나는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아 씹...”
놀란 나머지 상스러운 말이 절로 튀어 나왔고 그 사람을 바라봤다. 그 사람은 전에 카페에서 본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게임머니를 사려고 했는지 손에 게임머니가 잔뜩 들려있었다. 그 학생은 나를 보고 당황한 눈치였고 나도 당황했다. 나한테 번호를 물어 본 학생이 동네 주민이라니. 그리고 내 시선이 게임머니를 든 손에 향해 있으니 그 학생은 성급히 손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여기 살아?”
“네?”
“이 아파트 사냐고”
“아, 네! 여기 사시나 봐요”
“응. 아, 나 반말해도 되지?”
“당연하죠! 근데 요새 알바는 안 하세요?”“너도 말 놔... 알바?”
“네, 아 응- 카페 갔는데 없길래...”
“공고 못 봤어? 매장 이전하잖아”
그 학생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학생에게 말을 건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나를 처음 보고 내 번호를 물어 본 사람이 궁금했던 건지. 그냥 동네에서 게임을 하는 중학생이 궁금했던 건지 모른다. 하지만 그냥 저 학생이 궁금해졌다. 나는 다짜고짜 그 학생에게 이름을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윤산하. 얼굴이랑 안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형은 이름이 뭐야?”
“박민혁-”
“민혁이형이라고 불러도 되지?”
“알아서 해- 근데 너는 게임머니를 얼마나 사는 거냐?”
“아... 형은 게임 안 해? 보통 다 이정도 사는데...”
“아직 애네- 게임할 시간이 어디 있냐... 공부해야지”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게임머니를 쥐고 있는 산하를 지나쳐 전주비빔 맛 삼각 김밥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갔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지는데 돈이? 응? 잠시만 내 돈이 어디 갔지? 얇은 반바지 주머니가 뚫릴 듯 뒤져보지만 먼지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 내 앞에서 5,700을 달라는 알바생의 눈빛에 더 열심히 찾아봐도 없는 건 없는 거였다. 집었던 것들을 제자리도 돌려놓으려고 할 때 뒤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같이 계산해 주세요.”
“뭐야 너”
“형 돈 없는 것 같길래. 나중에 갚아요.”
그런 산하 덕에 밥은 거르지 않았지만 이상했다.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람한테 돈을 빌려준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인 걸 잘 알고 있다.
“대신- 그때 안 준 번호 줘요.”
“어? 번호?”
“네- 그때 나한테 아직 아기라고 안 준다고 했잖아요.”
“아... 그래서 달라고?”
“네!”
“싫은데”
“네? 허어... 내가 돈도 내줬는데...”
“장난이야- 대신에 연락 많이 하지 마 나 바쁜 사람이거든?”
산하는 그런 말에도 내 번호를 받았다는 게 신나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이 순간 귀엽게 느껴졌다. 그 일이 있고 개학을 했음에도 산하에게서 온 연락은 3-4통 뿐이었다. 나는 방학동안 열심히 공부를 했고 개학하고 나서 있었던 첫 모의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나는 주말마다 알바를 다녔다. 매장이 이전을 했는데 원래 있던 위치랑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사장님 말로는 전 가게보다 더 크다는데 잘 모르겠다. 개학하고 난 후에 달라진 알바 환경은 가게 이전과 매일 가게로 출석하는 산하라는 것이다. 하는 것도 없으면서 시간만 축내고 있고. 저렇게 있을 수 있는 중학생이 부러웠다. 산하에게 달라진 것은 갑자기 키가 커졌다. 방학 중에 봤던 산하는 나와 비슷했는데 어느새 내가 올려다 봐야했다. 그리고 안경을 벗었다. 렌즈를 끼는 건지 눈이 좋아진 건지. 보는 사람마저 갑갑하게 만들던 뿔테를 안 쓰고 다녔다. 그래서 더 잘생겨진 것 같기도 하고-
“산하야- 너 렌즈 껴?”
“에? 아뇨.”“근데 왜 안경 안 써?”
“아- 그거 도수 없는 거였는데?”
허- 하고 짧은 헛웃음 뱉었다. 내가 앉아있는 카운터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산하에 처음엔 불편하고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그렇게 산하는 반 년 동안 꾸준히 가게에 출석했다. 한 해가 지나고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산하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나는 수험생이 되었기에 알바를 그만 뒀고 산하를 주말마다가 아니라 매일 만나게 되었다. 친구도 없는지 쉬는 시간마다 1층에서 5층까지 수고스럽게 올라와 나를 불러내는 바람에 산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해졌다. 산하는 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나의 곁에서 되게 많이 챙겨줬다. 같이 독서실을 다니면서 산하는 매일 나에게 초콜릿을 챙겨줬다. 그럼 나는 수학을 풀다가 잘 안 풀리면 그 초콜릿을 먹으면서 고민을 했다. 그런 산하에게 나는 많이 의지를 하게 되었다. 나는 어느새 산하한테 좋아한다는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유는 딱히 없었던 것 같다. 누구를 사랑하는 것에 서툰 산하가 마냥 어리게 보이고 모든 행동에서 어린 티가 팍팍 나서 그냥 피식 웃고 넘겼다가 시간이 가면서 산하도 커가면서 그 행동에 어린 티가 사라지기 시작하자 내 눈에 들었던 것 같다. 나는 누군가 나를 좋아해주면 그냥 나도 그 누군가를 좋아했던 성격이었기에 산하를 좋아했다. 나는 수능이 끝나고 산하에게 고백을 했다. 좋아한다고. 산하는 왜 자기가 할 말을 뺏어 가냐며 칭얼거리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고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우리는 땀이 멈추지 않는 뜨거운 여름에 처음 만나 코끝이 붉어지는 차가운 겨울에 사랑을 시작했다.
우리의 사랑은 아주 평탄했다. 산하는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나를 열심히 사랑해줬다. 나 역시도 대학 생활에 적응하면서 산하를 열심히 사랑했다. 우리는 매 주 주말마다 만나서 서로의 일주일을 공유했다. 그렇게 2년을 사랑했고 산하는 성인이 되어 내가 다니는 대학에 다니게 됐다. 산하와 같은 대학을 다니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산하는 매일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 불평의 대부분은 나에 대한 얘기였다.
“형! 그 선배랑 같이 있지 마요”
“응? 어떤 선배?”
“그 선배애! 맨날 형한테 밥 한 번 먹자고 하는 선배 있잖아요!”
“아- 재혁선배? 왜? 그 선배 착해”
“그 뜻이 아니잖아! 그 선배가 형 좋아하는 것 같다니까?”
“뭔 소리야- 그 선배 나 안 좋아해”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지금 과에서 소문 다 났단 말야...”
“오구- 그래서 질투 났어? 알겠어. 재혁선배랑 말도 안 할게! 됐지?”
“아, 또 애 취급해! 짜증나 하지마!”
“알겠어- 화내지마 우쭈쭈”
나는 산하가 질투하는 모습이 마냥 아기 같았기에 그런 모습을 아주 좋아하고 귀여워했다. 하지만 어린 취급을 받는 걸 싫어하는 산하는 그럴 때마다 짜증을 냈다. 그러던 날, 어떤 사고가 하나 터졌다. 산하가 싫어하는 재혁선배과 조별 과제를 같이하게 되었고 자료조사를 위해 나는 재혁선배와 같이 카페에 가려고 했다. 카페에 가는 중에 산하를 만났고 산하는 그런 나의 곁으로 와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을 본 재혁선배는 산하가 귀엽다는 듯 웃고는 ‘네 남친 무서워서 자료조사도 못 하겠네- 다음에 만나서 같이 하자. 산하도 다음에 봐-’ 라고 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는 내 팔을 꽉 붙들고 있는 산하를 떼어내었다. 뒤를 돌아서 본 산하의 표정은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너 무슨 일 있어?”
“형. 내가 우스워?”
“어? 갑자기?”“내가 우습냐고 저 선배랑 같이 다니지 말랬잖아”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같은 조인 걸 어떡해”
“저 형이랑 같은 수업 안 들었으면 됐잖아”
“전공이 같은데 같은 수업을 듣지”
“형은 한 마디도 안 진다”
“뭐?”
“형은 왜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해?”
“내가 왜 미안해야 되는데?”
갑자기 나한테 화를 내는 산하에 당황을 했다. 산하가 재혁선배를 싫어하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혁선배가 개인적으로 연락이 와도 다 무시해버렸다. 오늘 얼굴 본 것도 되게 오랜만에 본 거였다. 근데 갑자기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냐는 산하에 내가 미안해야 할 상황인지 궁금해졌다.
“형이 전에 나한테 말도 안 한다고 했잖아. 근데 그 약속 깬 거잖아”
순간 표정관리가 안 됐다. 저게 내가 사과를 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과하라고?”
“응. 약속 어겼잖아”
“내 생각은 다른데- 나는 그게 내가 사과를 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형 생각이 틀린 거야”
말문이 턱 막혔다. 저 말이 산하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다. 나는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산하의 얼굴은 고집으로 가득 찼기에 나는 결국 미안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러면 안됐다. 저 사건을 시작으로 산하의 질투는 점점 집착으로 변해갔고 그 집착과 억샌 고집이 만나 환장의 조화를 이뤘다. 그렇게 지금까지에 오게 된 것이다. 처음엔 산하가 어리니까 이해하려고 했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고 다른 나이의 사람이니까.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드리려고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산하는 나를 이해하기는커녕 나를 무시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생각과 의견을 뭉그러뜨리기 시작했다. 나와 산하는 매일 싸웠다. 아니, 산하가 일방적으로 화를 냈다. 저 어린 것한테 화가 뭐 그리 많은지 불 같이 쏟아내는 산하를 식을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보니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산하가 나를 좋아하는 걸까? 나는 아직 산하를 많이 좋아하는데 산하는 매일같이 나에게 화만 내는 것을 보니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그런 생각들로만 가득 차 결국 내 모든 것을 지쳐버리게 만들었다. 나는 산하와의 관계가 지쳐버린 것이다.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고 산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산하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계속해서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산하한테 보자고 했다. 오늘은 웬일로 나한테 화를 안 냈다. 오랜만에 느끼는 차분한 만남이었다.
“산하야. 우리 헤어질래?”
“장난해? 형 장난으로도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랬잖아”
“장난 같아? 네가 하는 말은 다 진심이고, 내가 하는 말은 다 장난이고?”
“형, 뭘 또 그렇게 받아드려?”
“너랑 더 이상 싸우기도 싫고 네가 일방적으로 화내는 것도 안 듣고 싶어. 진심이야. 그만 하자”
“형 선택이 틀렸어. 내가 하는 말이 맞는 말인데 안 들으려고 하니까”
“끝까지 그 말이네. 언제까지 틀렸다고 할래? 네가 교수님이야? 네가 하는 모든 게 이 세상의 정답이라도 돼? 나도 내 생각이라는 게 있어. 근데 최근 몇 달 동안 내 생각이란 생각은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네 주장만 강요하는 너 때문에 숨을 못 쉬겠어. 틀린 건 우리 관계야. 내가 아니라.”
나는 그 자리를 그냥 박차고 나왔다. 산하는 그런 나를 붙잡지도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산하와 헤어지고 나서 많이도 울었다. 산하를 아직 많이 좋아하기에 울었다. 그렇다고 헤어진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헤어지게 된 우리는 잘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헤어지기까지 해야 하는 우리의 상황이 힘들었다. 그랬기에 울었고 아파했다.
순수하게 나의 곁에서 나만을 좋아하고 뜨겁게 사랑해주던 산하는 사라졌고 어느새 마음을 꽉 채우던 사랑이 집착이 되어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나의 목을 죄이던 산하는 더 이상 내 곁에 없지만 그때 순수했던 산하는 나의 추억 속에 웃으면서 꺼낼 수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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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 선배 / 익명 (온도 차이)
세번째2019. 12. 3. 01:35민혁 선배
w. 익명
박민혁이란 사람이 있다.
거창하게 시작하는데, 별거 아니다. 박민혁이 별거란 소린 아니고...아니 별종이긴 한데. 여튼, 그런 사람이 있다고.
자주 바람 빠지는 듯 웃어 보이고, 또 가끔은 우렁차게도 웃어 보이는 사람. 웃거나 무표정이거나 둘 중 하나다. 단순한 게 좋다는 편이지만 그 정도로 단순해버리면 오히려 더 모르겠다는 느낌으로. 대신 그 덕에 아무한테도 미움 안 살 타입. 그렇다고 누구 하나 저 사람에 대해 딥하게 아는 사람이 있냐 하면, 그건 또 없는. 근데 또 궁금해하진 않는다. 그냥저냥 흘러가듯이 있다, 박민혁이라는 사람은.
그냥저냥 흘러가듯이 있다고 해서 눈에 띄지 않는 건 아니다. 필요할 만큼의 존재감, 딱 그 정도로 다닌다.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하고 싶지 않아 하는, 약간 에너지 효율적인 사람인 거 같다. 본인 의지인지, 아니면 천성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적당히, 라는 부사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적당함의 표준. 너무 적당해서 자꾸 눈에 띈다. 너무 적당해서 별나 보인다.
학과도 다르고 학년도 다르고, 유일한 접점이라고는 동아리 정도. 그래봤자 주기적으로 모이는 시간에도 알바가 있어서 자주 못 본다. 근데 꼭 동방에 쉬러 갈 때면 노래 듣고 자고 있다. 햇살 들어오는 창 아래서 에어팟 달랑 끼고, 세상에서 제일 편하다는 양 그 좁은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있다. 햇살에 눈을 좀 찡그리길래 살금살금 가서 커튼을 쳐주면 덜 깬 눈으로 어, 고맙다, 하고 다시 자는 사람. 그것도 몇 번 반복되니깐 이제 커튼 쳐주는 사람 있으면 나인줄 알고 눈도 안 뜨고 인사해준다.
"산하 안녕."
"...안녕하세요."
"수업 일찍 마쳤네."
"어...네."
하나 더. 눈치 없는 척을 한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제일 소식통이면서 누군가 얘길 꺼내는 걸 듣고나서야 몰랐다는 듯 반응한다. 그 사이 잠깐 표정을 지어내는, 이미 알고 있었단 여유를 숨기면서. 뭐? 진짜로? 아 박민혁 진짜 눈치 없어, 그것도 몰랐냐? 아니, 진짜로?
하긴 눈치 빠른 거 들켜봤자 딱히 좋은 것도 없고, 눈치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엮이기 쉬우니 나름 좋은 생각인 거 같긴하다.
무용과 수석입학이라고 들었다. 과탑은 한번도 놓친 적 없댔고. 장학금도 받고 다니면서 알바도 꼬박꼬박 나간다. 그것도 개빡센 고깃집. 지난번에 누가 형은 장학금도 받으면서 알바는 왜 해요, 물어봤었는데 에어팟 커스텀 맡기게, 하던 걸 들었다. 아무래도 그냥저냥 넘기려고 해본 소리 같다. 내 것도 해보고 싶어서 가격을 찾아봤는데, 이만큼 일했으면 벌써 모으고도 남았을 정도다. 한학기하고 또 반학기가 다 지나가는 이 시점에, 동아리 술 자리 가서도 술 먹기 싫다고 고기나 쌈에 좀 싸먹다 가는, 술자리 싫어요 인간이 돈을 다 못 모았을 리가 없다. 대학생 돈 나가는 거 팔 할이 술값에 밥값인데, 학식만 먹고 사는 데다가, 심심하면 연습실 가서 땀 좀 흘리고 온다는 이 건강맨이 남몰래 주식이라도 하고 있는 게 아니면 말이 안된다. 아니 근데 이 선배가 주식? 진짜 개도 비웃을 조합인데.
커튼을 쳐주고, 한 삼십 분간은 침묵 속에서 개인 플레이를 한다. 선배는 좀 더 자거나, 잠시 휴대폰을 뒤적이거나 하다가 한 시 반 알람이 울리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트레칭을 좀 한다. 하품도 한 번 쩍해보고 어깨도 돌리고 하다 보면 얇은 옷을 입은 날엔 날개뼈가 뚜렷하게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나는 그 삼십 분 동안 게임을 하거나, 선배를 따라서 동방에 있는 테이블에 고개 파묻고 자거나, 시험기간엔 공부를 좀 해본답시고 책 펴놓고 졸고 있다. 마침 동방이 또 남향이라, 햇빛이 잘도 들어와서 따끈따끈하다. 이 선배랑 있으면 그 특유의 나른함에 나도 전염되는 거 같기도 하고. 산하, 산하. 나 간다. 졸고 있으면 살짝 흔들어 깨워주고 간다. 어, 선배 가세요? 연습실 가야돼서. 이 대화만 지금 반학기동안 반복하는 중이다. 진전이 없단 소리다. 괜히 깨운 건 아니지? 아뇨아뇨, 저 어차피 이 다음에 또 수업 있어서 깨긴 해야 했어요. 이 대화는 처음 존 날 했던 거고.
동방 문을 열고 나가는 선배를 보고 있으면 드는 생각은, 어색함도 익숙해지기는 하는구나, 싶은 거. 말도 안 되는 소린데 그게 지금 이 상황엔 제일 맞는 말인 거 같다. 더 이상 숨이 막히지는 않고, 오히려 나른하게 포근한 어색함. 오후 한 시의 햇빛도 한 몫 했겠지만, 그냥 그렇단 소리다. 박민혁 커튼 쳐주기 알바 세 달 차가 되어서 든 생각이었다.
날이 꽤나 쌀쌀해졌다. 더 위 쪽은 눈도 왔다더라. 지하에 있어서 더 싸늘할 동방에, 괜히 멋 부린다고 입고 나오지 않은 롱패딩 때문에 돋은 닭살을 기모 후드 위로 슥슥 문지르면서 시급 0원인 박민혁 커튼 쳐주기 알바를 하러 가던 길이었다. 롱패딩 야무지게 덮고, 여전한 오후 한 시의 햇살에 눈 찌푸리고 누워있는 민혁 선배. 에어팟 낀 것도 여전하다. 햇살에 눈 찡그리고 있는 것도 여전하고. 늘 그렇듯 조심조심 다가가 커튼 소리 너무 시끄럽지 않게 살살 펴준다.
"산하 안녕."
"안녕하세요."
"안 춥나. 패딩은."
"깜빡하고..."
"그러다 얼어죽는다..."
웅얼웅얼 말을 내뱉어대며 롱패딩 안으로 더 파고 들어간다. 히터 틀고 있으시지 그러셨어요. 아니, 혼자 있는데 좀 아깝고. 어차피 학교 돈인데요, 뭘. 그렇네, 내일부턴 무조건 튼다. 책상 위 올려져 있는 리모컨을 찾아 켜고 나니 먼지가 떨어져서 그런 건지 기침이 자꾸 나왔다. 에, 에취. 에취. 감기야? 아니, 히터에서 먼지가. 청소 좀 하지, 좀.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곤 소파 안쪽으로 돌아눕는다. 코를 몇 번 흥, 거리다가 자리에 앉았다. 플라스틱 틱 재질 의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몸을 살짝 떨었다. 엉덩이가 차갑다. 오늘은 또 다음 시간까지 뭐하고 시간을 떼울까 하다가, 좀 있으면 기말인데 공부나 할까 싶어서 책을 폈다. 진짜 눈에 하나도 안 들어온다. 와, 나 집중력이 이렇게 쓰레기였다고? 5분도 되지 않아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고딩 때 대체 어떻게 공부했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와서 야자하라 하면 아마 절대 못할 거다. 미쳤었나 봐, 진짜. 부스럭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 가세요?"
"엉, 연습실..."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데, 다시 곧장 뒤로 풀썩 쓰러진다. 아, 진짜 가기 싫네. 연습실, 진짜. 아.
"산하, 니 무슨 과였지. 경영?"
"아, 넵."
"재밌어?"
"어...점수 맞춰서 들어온 거라 가지고."
사실 졸라 재미없고 뭔소린지도 모르겠어요, 하는 칭얼댐은 겨우 목 뒤로 넘겼다. 아직 그런 칭얼거림을 내뱉을 정도로 친한 상대는 아니었으니까. 그래? 그래. 혼자 고개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나 간다, 그럼. 가세요, 선배. 일어나 걸친 롱패딩에 떡하니 OO대학교 무용과가 붙어있다. 춤추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나른하게 하품이나 하는 선배를 보면 잘 상상이 안 간다. 뭔가, 무용과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보면......화학과? 화학공학과? 뭔가 공학할 거 같다. 문과는 아닐 거 같아. 뭔가, 뭔가 이과. 자연대나 공대. 근데 좀, 뭔가 공대가 어울린다. 왜 그런지 모르겠네. 수식 가득한 필기하는 박민혁은 상상이 잘 안 가는데, 두꺼운 전공책 들고 으으으, 거리고 있는 건 좀 상상이 간다. 아니아니, 별의별 상상을 다 하네. 괜히 허공을 손으로 휘저어댔다.
저런 질문은 왜 하지, 저게 설마 말로만 듣던 대2병인가. 아니 근데 수석 하는 사람이 굳이 저런 고민을 할 필요가 있나? 아니, 할 수도 있지. 근데 무용과는, 안무가 되는 건가? 춤추나? 뭐하지. 그래도 수석 한 번도 안 놓친 사람이라니까 되게 좀, 천재? 뭐 그런건가...예술은 좀 그렇다던데. 피아노 전공하는 사촌이 그랬었다. 아 걔는 집에 돈이 많지. 걱정은 없겠다. 아니 근데 알바는 왜 하지. 음, 진짜 뭐지. 유학 준비? 수석이면 관련 장학금 그런거 없나? 보내줄 거 같은데. 우리 학교 원래 무용과 유명한 학교고.
"진짜, 뭐지."
"뭐가 뭐야?"
"아, 깜짝아."
"아니 무슨 생각하길래 사람 들어오는 것도 몰라."
유자차 홀짝이면서 맞은 편에서 말을 걸어온 건 은우 형이었다. 과제해? 아뇨, 걍 좀 있으면 기말이고. 와, 벌써 준비해? 저기요, 사람들이 다 형처럼 머리가 좋은 줄 아시나. 고마워, 칭찬한거지?
이 형 왔으니 이제 안 봐도 뻔하다. 고갤 돌려 입구 쪽을 돌아보니 고개 빼꼼 내고 들여다보는 문빈 선배가 있다. 우리 동아리 사람 아니라서 눈치 보는가보지.
"선배, 들어오셔도 되는데."
"어, 빈아. 어차피 내가 회장이야."
"아니, 그래도."
"들어오셔도 돼요."
그제서야 그럼 미안, 하고 들어온다. 빈아, 그냥 너 우리 동아리 들어오면 안돼? 아니, 학기 초에 면접도 안 봤잖아. 지금 보면 되지. 아 됐어, 됐어. 나 사진 찍는 거 별로 관심도 없고, 잘 찍지도 못하고. 괜찮아, 얘도 사진 엄청 못 찍어. 저기요. 사실이라서 할 말은 또 없다. 그냥 눈 한 번 흘기고 말았다. 폰카메라는 둘째치고 머리 염색을 포기하고 대학 입학 선물로 사달라고 한 DSLR로도 영 못 찍는다. 아니, 사진은 템빨 아니었냐고. 동아리에서 사진 찍으러 나갈 때만 들고 오고 기숙사 책장 저 한 쪽에 들어가 있는 DSLR을 떠올리니까 괜히 한숨이 나온다. 차라리 염색을 할 걸. 근데 또 원래 하고 싶었던 색으로 염색을 하면 그 머리에 맞는 옷이 없을 거 같아서 그것도 또 문제고. 그러고보니 민혁 선배는 사진도 잘 찍는다. 좀 뭐라고 해야하지, 그냥 이런 풍경사진 이런 것보다는 좀, 예술적인 거. 뭔가 사진과 입시같은데서 찍을 거 같은 것들. 예술가는 예술가인건가 싶은 그런 거.
혼자 이런저런 생각해보니 다음 강의 갈 시간도 가까워졌다. 동아리실 있는 건물에서 강의실까지 걸어도 한 10분 정도는 걸리니까 지금 일어나는 게 맞았다. 엄청 졸리는 수업이니까 그 밑에서 커피도 한 잔 사야되고. 애초에 커튼 쳐줄거라고 온 거니까. 이게, 괜히 의무감이 생겨서 이렇다. 뭔가 내가 와서 커튼 쳐줄때까지 선배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 괜히.
벌써 가냐는 물음에 수업 있어서요, 하고 나왔다. 뭔가 눈치 보여서 나가는 것처럼 비춰질 거 같아서 굳이 몇 시부터 수업이라, 하는 티엠아이도 뿌려보고.
문 닫고 나오자마자 치고 들어오는 복도 냉기에 몸을 작게 떤다. 커피, 커피. 따뜻한 거. 빨리.
발걸음이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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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냉증이라 가지고."
몸을 덮은 롱패딩 아래로 삐져나온 분홍색 수면양말을 빤히 보던 걸 들켰나보다. 추워서, 잠을 못자거든. 수면양말 없으면.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걷어진 롱패딩 속에서 보이는 힙한 후드티를 보니 그냥 핑크도 아니고 핫핑크색 수면양말이 진짜, 언밸런스다. 나도 모르게 웃을 뻔 해서 입을 꽉 다물었다. 콧평수 커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고. 그러다가 다시 피곤한듯 소파에 눕길래 나도 정해진 것처럼 탁자에 앉는데, 갑자기 산하야, 하고 불러오는 목소리에 괜히 지나치게 놀라서 움찔거렸다.
"네, 네?"
"휴학 브이에스 군대."
"어...휴학요."
"근데... 가긴 가야되잖아."
"저는 애들 간다할 때 같이 가려고요."
하긴, 나도 그럴 생각이긴 했는데. 음, 하더니 다시 고민에 잠기기라도 한건지 한동안 말이 없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또 괜히 참견하는 거 같아서 한 발짝 물러나게 된다.
"니 근데 무슨 매일같이 오전 수업인데."
이 시간만 되면 오네. 어, 네, 그, 시간표를 좀.
할 필요 없는 거짓말을 한다. 오늘 공강인데. 아 그냥 과제하러 왔다고 할 걸. 카페 가면 괜히 커피 한 잔 시켜야하니까. 사실 그냥 커튼 쳐주려고 나왔다. 어차피 기숙사에 사니까 학교도 가깝고, 특히 동아리실 있는 건물은 더 가까워서, 그러니까. 근데 이걸 곧이곧대로 말하는 것도 좀 그래서 내적으로 어버버거리고 있었는데, 힘들겠네, 하고 다시 소파 안쪽으로 돌아눕길래 다행이다 싶었다. 아니 근데 갑자기 휴학 얘기는 왜 꺼낸거지. 진짜 대2병인가. 궁금한데, 궁금한데 하다가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저...근데 선배, 휴학하실 거에요?"
한동안 말이 없길래 예민한 걸 건들였나 싶어서 급히 말을 취소하려는데, 꼭 자길 닮은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모르겠네."
가야지, 하고 곧바로 몸을 일으키는 선배를 향해 또 벌써 가세요, 하고 물어본다. 연말 공연 연습 들어가서, 좀 일찍 모이기로 했거든. 유연하게 돌아가는 어깨를 바라본다. 여전히 남향으로 뚫려있는 햇빛이 그 어깰 비췄다가, 비추지 않았다가 한다. 그럼 안녕. 평소와 같이 잠깐 인사를 해주고, 밖으로 걸어나간다. 근데 평소보다 걸음소리가 좀 둔탁하다. 탁, 탁, 탁. 하고 가볍게 떨어져 나가던 발소리가 아니고, 바닥을 꾸욱 눌리면서 억지로 한 걸음씩 옮기는 것 같은. 걸음 하나하나까지 신경쓰게 될 정도가 된 줄은 몰랐는데.
문 사이로 금새 OO대학교 무용과라는 글자가 사라진다. 그게 뭔가, 여운이 남아서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서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히터 안 끄고 나온 게 생각나서 도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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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있어도 팀플 없는 수업이라길래 신청한 건데, 개뿔. 올해부터 바뀌기라도 한 건지 교수가 떡하니 팀플을 내놨다. 그래도 같은 교양 듣던 과 동기들이 좀 있어서 팀은 금방 짰다. 수업 인원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어서 3인 1조로 하는 팀플이었는데, 그냥 조사하고 발표하고. 좀 친한 애들끼리 붙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친한 거랑 자료 조사 해오는 거랑은 별개이긴 한데. 1학기 때 데인 경험이 떠올랐다가, 뭐 좋은 거라고 떠올리나 싶어서 고갤 휘휘 저었다. 주제 정하고 조사할 거 분담하다보니 시간이 좀 늦었다. 하필 또 강의실에서 동아리실까지 걸어서 10분이라 조금 숨이 차게 뛰어본다. 선배 연말 연습 있다고, 좀 일찍 가야한다고 했는데. 동아리실 앞에 다다라서 숨을 좀 골라 보는데,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군대 갈까, 그냥."
"머리 식히려고 하는 거면, 휴학보단 군대가 효율적이긴 하지."
"하긴 휴학하면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거 같아서."
"연말 공연은 어쩌고."
"모르겠다, 지금. 아무것도 하기 싫어. 안무도 머리에 안 들어와."
"좀 쉬어. 알바도 그만 하고."
"몸이 한가하면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너 지난번에 그러다가 실려갔잖아, 과로로."
처음 들어보는 얘기다. 작년 일인가. 이 이상으로 엿듣는 건 뭔가 안 좋을 거 같아서, 도로 돌아가려는데 발걸음이 잘 안 떨어진다. 궁금했다. 개인사에 개입해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는데, 그걸 알면서도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약은 잘 먹고 있지?"
"...먹고 있지."
"처방해주는대로 먹어. 먹고 더 축쳐지는 거 같아도 꾸준히 먹는 게 낫대."
약? 무슨 약? 그 이후로 말이 제대로 안 들린다. 몸을 살짝 기울였는데, 그대로 안에서 문이 당겨져서 티가 나게 놀랐다. 처음 보는 얼굴. 민혁 선배도 당황한 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길래. 아, 미안해요. 기다리고 있는 줄 몰랐네. 그럼 간다. 그러고는 몸을 스쳐 지나간다. 살짝 고개를 숙이길래 따라서 고개를 숙여봤다. 누군지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는지 동아리 선배야, 박진우 선배. 졸업반이라서 잘 안나와, 하는 부가 설명을 붙여준다. 평소완 달리 소파에 웅크려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들었나."
"아뇨."
"거짓말하네."
"...조금."
그래,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선배가 동아리방을 빠져나가는 걸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산하, 안녕.
인사는 없었다.
-
일주일 째다. 일주일 째 히터 하나 안 틀어져 있고, 덩그러니 빈 소파만 있다.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일같이 드나들게 된다. 엿들은 건 내가 잘못한 게 맞다. 궁금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그런 변명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어디가 아픈지 걱정이 됐다. 커튼 쳐주고, 인사를 받고, 그러는 아주 사소한 일상이 사라진 것뿐인데도 뭐가 그렇게 하루하루가 공허한지 모르겠다. 남향으로 난 창문으로 햇빛은 들어오는데, 그 햇빛 때문에 찡그리는 미간이라던가, 꽉 감은 눈같은 게 없다. 이제 진짜 기말 공부할 때가 돼서, 공부하러 온다는 핑계로 기다려보기도 했다. 그 짓도 일주일 째 해봤다. 엎질러진 물이라지만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엿들어서 미안하다고. 피하지 말아달라고.
어차피 오늘은 공강이겠다, 매일같이 나와서 이것저것하다보니 과제도 성실하게 해버리는 바람에 시험 공부말고는 딱히 할 것도 없었다. 해야 할 일이기는 했는데, 과제보단 기한이 널널하니까, 자꾸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커피를 사오긴 했는데, 하도 지나치게 피곤하길래 잠시 자고 일어날 생각으로 소파에 누웠다. 얼마 했다고 벌써 바깥 하늘이 붉다. 날이 확실히 짧아지긴 짧아졌단 소리다. 자고 아예 못 일어날까 싶어 알람도 맞춰놨다. 처음으로 누워본다. 뭔가 민혁 선배 지정석같은 기분이어서 누울 엄두를 못냈었다.
"오늘은 왔으면 좋겠네..."
히터 바람이 따뜻해서 금방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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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 깜짝....아."
"선배."
"아니, 그, 뭘, 놔두고 가서. 더 자, 더."
"어차피 일어났어야 했어요."
일주일만이다. 다크서클은 더 내려왔고, 잘 안 먹고 다니기라도 하는건지 얼굴이 또 반쪽이다. 이 사람 일에 왜 그렇게 나 스스로 엮이고 싶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기분이 좀 그렇다. 그냥 평소처럼 소파에 누워있었으면 좋겠다. 조금 뒤척이고, 산하 안녕, 한 번 내뱉어주고. 그럼 가볼게, 하고 걸음을 옮기는 선배를 불렀다.
"저, 선배."
"어, 어?"
"그 때...죄송했어요.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게."
"...아니, 뭐가 미안해."
나도 알아, 니 일부러 그런 거 아니란 것쯤은. 돌리던 발걸음을 다시 돌려 자리에 앉는다. 살짝 삐걱거리는 철제 의자 소리가 반갑다. 그래서, 어디까지 들었는데? 네? 아니, 애매하게 알면 괜히 궁금하기만 하잖아. 아니, 저, 그렇긴 한데. 듣기 싫음 말고. 아니, 그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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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학원을 드나들기 시작한 건 다섯 살때부터였다. 전공을 삼으려는 생각은 없었고, 진짜 그냥 취미로. 인기 가요 같은 거 보면서 따라 추는 게 재밌었다. 민혁이 니 무용 학원 다녀볼래? 엄마가 먼저 그렇게 물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시작도 안했을 거다. 어릴 때부터 그닥 자기 주장을 할 줄 몰랐으니까.
재밌었다. 그래도 이걸로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공무원 준비하다 붙은 사촌 형이 하도 세뇌를 시켜놔서 그런 건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장래희망 칸에 꼬박꼬박 공무원이라고 써서 냈다. 민혁이는, 아, 공무원 될 거에요? 네. 안정적이잖아요. 애늙은이 같았던 시절을 또 떠올려보고.
현대무용을 시작한 건 또 그 무렵이었다. 내 꿈은 공무원이다, 외치진 않았지만 써서 내긴 했던 그 무렵. 아이돌 커버 댄스만 주구장창 배워오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하루는 엄마를 데려오라고 하더니 상담실에서 한참을 얘기하는 거다. 봉고 탔으면 벌써 집일 텐데. 그 생각하면서 학원 로비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있다.
"민혁아."
"응, 왜."
"니, 춤추는 거 많이 좋나."
"좋지."
근데, 왜? 아니다. 아니야.
그러고 정신 차려 보니까 입시반에 들어와 있었던 거다. 취미반 때보다 쉬는 시간이 더 없었고, 수업 시간은 길었다. 그냥 그 때부터는 화가 나서 죽어라 연습했던 것 같다. 턴이 안 돼서 죽어라 돌고, 넘어지고, 이 동작이 안 돼서 또 계속. 커버 댄스 추던 시절이랑 춤 출 때 내뱉는 호흡 하나하나도 다 달랐다. 그 땐 몰라서 그냥 되는대로 죽어라 하기만 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런 거 같다. 일찍 좀 알려주던가.
몸에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다리라던가, 어깨라던가. 초반엔 성장판이 자극된 건지 키도 좀 빨리 컸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멈췄다. 턴이 좀 돌아가고, 콩쿨 몇 번 나갔더니 6학년이었다. 콩쿨 왜 나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연습했다. 그 때도 마찬가지로 이 동작 하나가 안 돼서, 그 다음 연결이 안 돼서. 그런 식으로 죽어라.
어쩌다보니까 예중에 붙었다. 기뻤던 거 같기도. 성과가 나오는 건 좋은 일이니까. 재밌고. 또 그렇게 이 동작이 안 돼서 한 번 더, 저 동작이 안 돼서 한 번 더 하다보니 콩쿨을 나가고, 콩쿨을 나가다 보니 고등학교 진학할 때가 됐다. 정신 차려보니까 할 줄 아는 게 춤 추는 거밖에 없었다. 중3 무렵 되어서는 친구 하나가 연예계 기획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갔다. 우리 중학교 무용과에서 잘생겼다고 그래도 좀 이름 날린 애였다. 니 연예인 할라고? 어, 해야지, 데뷔. 스트레칭하다가 물어봤었는데, 확신에 차서 대답해오는 게 조금 부러웠나 보다. 연습생도 잠깐 찾아봤으니까. 물론 유투브에 뜬 연예계의 현실, 그런 거 보고 곧바로 접긴 했다.
또 그렇게 동작 동작 이어보다보니깐 예고에 붙었다. 합격이 뜬 모니터를 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냥 이 짓을 3년 더 하겠구나, 싶은. 기숙사제여서 좋았던 거 같다. 연습실이 넓어서 좋았고, 애들도 다 착했다. 사람이 그렇게 많은 과가 아니어서 그런지 좀 돈독했다. 콩쿨도 옹기종기 모여서 같이 나가고. 이 짓을 왜 하고 있는지 가끔 현타가 올 때면, 그냥 다시 노래를 틀었다. 춤추고 있는 동안은 동작에 신경쓴다고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또 3년. 콩쿨 몇 번 하고 입시하러 갔다오니까 졸업이었다. 딱히 기억 남는 게 없는 걸 보니 그게 다였나 보다. 입시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무용과로 유명한 대학에 수석 입학. 담임 선생님이 잘했다고 안아줬던 기억이 있다. 기억은 있는데, 감흥은 없다. 친구들이 축하해줬던 기억도 있다. 그것도 기억만. 그냥 난 그 순간에도 이 짓을 4년 더 하겠구나, 하는 마음 다짐만 하고 있었나 보다.
그냥, 재미가 없었다. 애초에 목표가 있는 춤이 아니었다. 목표라고 해봤자 그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야겠단 것 정도. 그렇게 살아온 19년이다. 질린 건 아닌거 같은데 더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왔다, 우울증이란 병은.
되게 뭔가 사연이 있어야 걸리는 병인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라. 죽고 싶단 생각이 든 건 아닌데 그렇다고 더 살고 싶단 생각도 들질 않았다. 그냥 슬럼프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되는 줄 알았다. 동작을 하나라도 더 잇지 않으니까 그 순간순간이 지나치게 허해서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 용돈벌이 하는거지, 그냥. 그 생각으로 시작한 아르바이트 덕분에 몸을 좀 더 축내고, 다시 연습실. 지쳐서 숨 깔딱깔딱 넘어갈 때까지 턴을 해보거나 수위 아저씨가 문 닫아야한다고 얘기할 때까지 연습을 하다 기숙사로 향했다. 샤워는 오래하면 오래할수록 괜한 생각을 하게 돼서 10분 안에 끝내려고 노력해본다. 초반에는 몸이 피곤하니까 잠이 잘 왔는데, 그것도 이젠 효과가 없어서 온갖 asmr을 다 들어봤다. 독방이라 다행이다 생각한 적은, 잠을 못자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내던졌을 때. 혼자 괜히 울컥 눈물이 차올라서 울던 밤들도.
그러다가 과로로 실려갔다. 다행히 부모님은 안 왔다. 맞벌이라서 그런지 바쁘셔서 못 받으셨나보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망가진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괜찮아요, 학교 다닐만 해. 가끔 전화가 오거나, 무너질 때면 걸던 전화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전화를 받은 건 진우 선배였다. 알바 나오기 전에 이번 주엔 활동 나오냐고 물어본다고 연락 온 거였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몇 번이나 미뤄오던 활동이었다. 아뇨, 저, 그, 이번 주도. 그래? 너무 무리하진 말고. 그게 끝. 제일 최근 연락처가 마침 선배였던 거다.
"괜찮아?"
"죄송해요, 선배. 저 때문에."
"아니, 아니. 어차피 오늘 공강이었어."
그럼 더 죄송한데. 됐어됐어. 네 걱정이나 해, 민혁아. 너 아무래도 과로인 거 같대. 네?
과로라는 걸 맨처음 들었을 때 든 생각은 별 거 없었다. 내가 되게, 허약하구나. 엄청나게 약하고 약해서, 꼭 물 먹은 휴지같이 축 쳐져있고 그런. 더 이상 화내며 다음 동작으로 이어갈 힘도 없었다. 춤 이전에, 그냥 걷는 것조차 갑자기 까먹은 사람처럼 굴었다. 알바비를 응급실에 실려간 돈으로 탕진하며 나오는 길엔, 공기가 너무 차가워서 폐가 얼어붙을 것만 같단 생각을 했다. 그 날 보이지도 않는 입김을 내뱉으며 처음으로 죽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수면제를 찾아봤다. 위세척만 하면 금방 살아난다고 하더라. 이건 패스. 그렇다고 몸에 생채기를 내기는 무서웠다. 죽고 싶으면서도 아프고 싶진 않다는 게 진짜 모순적이었다. 목매다는 건 숨통이 졸리는 느낌이 너무 무서워서 못했고, 번개탄으로 질식사. 이게 제일 나을 것만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의식이 몽롱해진다고 한다. 혼자서 하기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꽤 있어서 같이 죽으실 분 모집, 이라는 글도 심심찮게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괜찮은데. 근데 그 사람들이 죽을 사람들이 아니면 어떡하지? 다 필요 없고 그냥 숨통 끊기고 싶은 겁쟁이 넷이 모인다 치면, 그 넷 중에 결국 도망치는 사람 하나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냈던 거 같다.
그 와중에도 연습실은 뺀질나게 드나들었다. 몸동작이 둔해진 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예전만큼 이걸 극복해야겠단 오기가 생기는 것도 아니라서 필요한 만큼만 하고 곧장 기숙사로 들어와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불 안에 틀어박혀서도 괜히 추워서 몸을 덜덜 떨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시기엔 그냥, 그런 오한이 들었다.
날짜를 잡았다. 번개탄도 주문했고, 기숙사에서 죽으면 온갖 소문이 많을 테니 최대한 학교에서 먼 곳에서 죽어야겠단 생각을 하며 이곳저곳 장소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유서는 몇 번이나 썼다가 지웠다 했다. 마지막에 무슨 말을 남겨야 좋을지 그닥 생각해놓은 적이 없어서 꽤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대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노트북을 켜 끝에 대해 쓰고 있다는 게 조금 웃겼다. 무슨 말을 남겨야 좋을까. 어떤 말을 해야 조롱받지 않을까. 이해를 바랄 수는 없단 건 쓰던 도중 문득 깨달은 것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금방 유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기적일 거라면, 구구절절하게 이기적이느니, 그냥 간결하게 이기적인 게 나을 것 같았다. 주저리주저리 써놓은 글들을 백스페이스를 꾸욱 눌러 모두 지우곤 세 문장 정도를 쓰고, 그걸 입으로 읊조려봤다.
계획이 생기니까 사람이 좀 의욕적으로 굴게 되더라. 어차피 저 날엔 죽을 거니까, 그 전까지는 쥐어짜내서라도 열심히 살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쟤 원래 저랬어. 그런 말로 손가락질 받고 싶지는 않았나 보다. 그래서 더 자주 웃고, 연습도 열심히 하고 그랬다.
"민혁아."
"네?"
"다음 주부턴 기말 준비하는 애들도 있고 그래서."
이번 주 주말에 사진 찍으러 나가는데, 올래?
잠깐 생각해보니 1학기 이후로 닥친 슬럼프 때문에 2학기 땐 한 번도 동아리에 나가질 않았단 게 떠올랐다. 그럴까요, 그럼. 어, 진짜? 이왕 죽을 거 하나라도 더 해보자 싶은 생각이었던건지. 조만간 단톡방에 공지 올려놓을테니 확인하라는 진우 선배에게 고갤 끄덕였다.
사진 찍는 건 좋아한다. 셔터 소리 찰칵, 하는 게 기분이 좋다. 대학 들어간다고 하니까 카메라 하나 없어서 되겠냐고 입시 끝난 겨울 방학 때 사와주셨던 거다. 남는 거 사진밖에 없다. 그런 얘길 하셨던 거 같은데. 동아리 활동 때문에 옷을 챙겨입고 나가려는데, 문득 저 말이 떠올라 카메라에 담겨 있는 사진을 확인했다. 딱 154장. 154장의 사진으로 남겨진 올해를 찬찬히 복기해본다. 생각보다 적고, 생각보다 많았다. 이런 것도 찍었었구나. 만우절 날 교복 챙겨 입고 와서 온갖 포즈로 사진 찍다가, 동기 한 명이 다리를 쫙 찢었는데 찢자마자 바지가 터졌던 사진도 있다. 마침 나랑 성만 다른 애여서 애들이 민혁이 바지 터졌다며, 하고 오해를 받았던 기억도 난다. 그거 김민혁이거든, 하고 대꾸하던 것도. 웃겼는데. 이 날은 오랜만에 고등학교 애들 만나서 찍었던 거. 본인 주량 오늘 제대로 알아보겠다며 부어라 마셔라 하던 놈 때문에 뒷처리한다고 남은 둘이서 고생했었고. 아, 이건 동기 콩쿨 나갔을 때 찍은 거. 그리고 이건, 또.
사람 참 간사하지. 그렇게 한 장씩 보다보니까 갑자기 죽기가 싫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보다가, 진우 선배한테서 연락이 와서, 그때서야 급히 뛰쳐나갔다. 저기, 민혁아. 아니 혹시 못 오나해서. 아뇨아뇨, 제가 지금 알람을 못 들어서 늦게 일어났거든요. 먼저 찍고 계세요, 저 빨리 갈게요. 그렇게 우다다 쏟아내고 운동화를 구겨신었다. 오랜만에 진짜 걷는다, 그런 느낌이었다. 발걸음이 한 걸음씩 꾸욱꾸욱 바닥을 눌러대고, 앞으로 한 발자국.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을 비틀거림이 줄어들었다. 달려가는데 속도가 붙는다.
가을 한강이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은데, 보이는 만큼 잘 찍히지가 않는다. 몇 번을 셔터를 누르며 찰칵 소리를 울려봐도 마찬가지다. 그냥 포기하고 눈으로 담기로 했다. 수면이 너무 반짝거려서 눈살을 살짝 찌푸린다. 금새 익숙해져선 또 찌푸린 미간을 펴고, 셔터를 내리듯 감았다가 떴다. 찰칵. 선선한 바람에 알맞게 몸을 데우는 온기. 좋았다. 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이 눈을 찔러 좀 아팠지만 괜찮았다. 바람이 눈에 들어가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그냥, 다 좋고, 다 괜찮았다. 살만 했다.
살만 해서 괜찮았고, 괜찮아서 눈에 바람이 들어온다. 자꾸만 그랬다.
그제서야, 그제서야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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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또 가끔 이게, 좀 삐리하길래 상담도 좀 받고 약도 타 먹고.....우나?"
"아니, 이게, 그러니까."
괜히 울컥해서 질질 짜고 있었나보다. 황급히 손을 들어올려 손가락으로 눈을 훑었다. 금새 축축히 손이 젖어들기 시작한다. 닦이는 기분보다는 그냥 미끌거리기만 한다. 이게요, 이게. 킁, 코도 훌쩍거리고 지금. 아주 가관이 따로 없다. 당황한 건지 어어, 하다간 일어서서 휴지를 찾아 가져와준다. 감사합니다.... 코 또 한 번 킁, 거리면서 사각 티슈를 뽑아들었다. 아니, 산하, 왜 울어, 어? 아니, 선배, 힘드셨을 거 같아서, 그니까. 진짜, 뭔가. 그냥, 그냥 그랬어요. 어, 그, 어. 고마운데, 뚝. 뚝 하자, 뚝.....아니 이거는 내가 동생이 있어가지고. 나이차가 좀 나서, 어. 아니 근데 뭘 그렇게 서럽게 우냐, 응?
"진짜, 수고, 많으, 셨습니다."
목이 잠긴 것도 아닌데 사이사이로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아서 한 마디 한 마디 끊으면서 내뱉어본다. 그냥 왠지 모르게 그 말을 해줘야 할 것만 같았다. 바라봐주는 눈시울도 어느새 붉어져있다. 니는, 진짜. 별 걸로 다 울고 그러네. 별걸로 다. 타박하는 소리에 물기가 어려있다. 저기, 선배. 어?
"우셔도, 되는데."
"됐다."
"어차피 여기, 킁, 저밖에, 없어요."
"됐다니깐."
울음 소리가 말소리에 살짝씩 섞여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요, 선배. 휴지 몇 장 뽑아서 내 꺼 하고, 또 몇 장 뽑아서 선배한테 건네준다. 괜찮다니깐요. 예? 코 킁, 몇 번 하더니 눈물 한 방울 또록 흘려내준다. 그게 또 그렇게 자랑스럽고, 고맙고, 기특할 수가 없어서 또 흐엉, 하고 울었다. 니 왜 또 이러는데. 선배, 고생하셨을 거 같아서, 아 진짜, 선배.
위로 받을 사람을 본인이면서 위로해주는 손길이 투박하지만 다정하다. 그래서 또 울었다. 진짜, 니 진짜. 아 진짜 난감하네. 죄송한데요, 흑. 이게, 제,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서. 근데요, 선배.
"휴학, 하실거에요?"
"안 할게, 안 할게. 뚝, 뚝. 이제 뚝."
"군대, 군대는."
"안 간다, 안 가. 애들 갈 때 가지, 뭐."
"진짜죠."
"진짜."
"약속."
무슨 정신인지 앞으로 내민 새끼 손가락에 선배는 짧게 웃더니 자기 새끼 손가락을 걸어서 답해준다. 니 우리 동생이랑 정신 연령이 똑같네. 동생 몇 살인데요. 일곱 살. 그 정도까진 아니거든요. 몇 살인데, 그럼. 한, 열 다섯? 오버하네. 진짠데. 수족 냉증은 여전한지 마주 잡은 새끼 손가락이 영 차갑다. 그래서 더 단단히 옭아맸다. 이제 좀 풀어주지. 손 왜 이렇게 차가워요. 말했잖아, 수족냉증. 아, 좀 놔봐라. 싫은데요. 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이상한 애였네. 원래는 어떻게 생각했는데요. 공강 날에도 커튼 쳐주러 오는 이상한 놈. ...저 공강 날 없는데요. 거짓말하지마라, 니 금요일 공강이라매. 나 원래 한 번 들은 거 잘 안 까먹어서.
깜빡하고 치지 않은 커튼 틈새로 해가 지며 잔상을 남긴다. 히터 소리 웅웅 대는 사이로 아닌데요, 염불 외우는 소리가 섞였다. 짧은 웃음도.
그냥저냥 좀 따뜻해서, 나도 조금 웃어봤다.
-
꽃다발. 적당히 품에 안기고, 그렇게 크지는 않고. 지나치게 쨍한 색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오케이. 멘트는 한참 전에 시작한 스크립트 뽑았다가, 수정했다가 뽑았다를 반복하며 며칠 전에 겨우 완성했다. 연습은, 동아리 때 몰래 찍은 선배 사진 룸메 없을 때 옷장 거울 위에 붙여놓고 맹연습. 실전에선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눈은 제대로 보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뭐던 간에. 아니 그렇다고 아무거나 막 말하면 안되긴 하지만.
외운다고 외우긴 했는데, 무용과 연말 공연 본다고 지금 다 까먹게 생겼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점프를 그렇게? 그리고 몸이, 와, 몸이 어떻게 그렇게 꺾여. 그 와중에 무대 위를 활보하는 선배의 수족냉증 맨발을 잠깐 걱정도 해보고. 무대 뒤쪽 대기실이 있는 통로 쪽을 기웃거리며 꽃다발 들고 기다린 것도 벌써 20분이 다 되어 간다. 그 동안 선배가 태그된 사진들을 구경하며 한숨 한 번 내쉬었다. 셀카 진짜 많이 찍어줬네. 나랑은 한 장도 없으면서. 한 장 있긴 한데, 화면에 잘 안 들어온다고 고개를 이 쪽으로 훅 가까이 해준 바람에 손이 달달 떨려서 흔들렸다. 휴대폰 비싼 돈 주고 바꿨는데, 진짜, 이러기 있냐? 어? 알아서 자동 포커싱 어쩌고로 잡아보라고.
괜한 생각에 궁시렁대고 있는데, 대기실 쪽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게 보인다. 단체로 맞춰 입은 한복 의상 사이에, 갓을 뒤로 맨 선배가 보인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렁차게 외치는 목소리도. 날 발견하고 환하게 띈 미소도, 흔들어주는 손도.
"산하."
그렇게 불러주는 목소리도.
선배, 민혁 선배.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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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2019. 12. 3. 01:32산밤합작-신분 차이
※본 글은 픽션으로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합니다.
휘엉청 밝은 보름달이 뜬 밤, 기방 안에선 젊은 남녀들의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빨간 치마를 입고 귀걸이를 치렁치렁 단 기생들은 명성높은 양반가댁 선비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야살스런 미소를 짓고 있고 선비들은 기생들의 치마 속에 들어가 장난을 쳤다. 시끄러운 술판 분위기에 맞지않게 품위를 지키고 있는 선비 하나가 있었으니 성은 윤이오, 이름은 산하로, 윤씨 가문의 윤선비였다.
윤씨 가문은 조선 건국을 추진한 급진파에 속해있던 가문 중 하나였다. 윤씨 가문은 조선 건국 초기 때에 높은 위치를 선점하여 지금까지 나라의 고위 관리를 모두 독차지하고 나라의 충신으로써 왕의 총애를 톡톡히 받고 있다. 윤선비는 올해 성인이 된 집안 막내였고, 수려한 외모와 점잖은 품행으로 한양 전체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윤선비는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허리를 꼿꼿히 세우고 앉아 한 잔의 술을 새가 목을 축이는 양으로 나누어 마셨다. 기생들은 윤선비가 온다는 소식에 일찍히 꽃단장을 하고 조신하게 앉아있었다. 서로 윤선비의 사랑을 받으려 온갖 끼를 떨었지만 윤선비는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시선을 피했다. 사실 윤선비는 술도 잘 하지 않았고 기생들과 노닥거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친구들에게 휩쓸려 억지로 온 것이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정신없고 시끄럽기만 한 술판을 당장 벗어나고 싶었지만 혼자 빠져나가기엔 선비로써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다고 계속 있자니 기생들이 제 팔에 치근덕거리며 귀찮게 굴었다. 윤선비는 애써 양반 체통을 지키며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다렸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다들 거하게 취해 헤롱대고 있을 때 한 사내아이 하나가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는 고개를 살짝 숙여 가볍게 인사를 하곤 술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기생들만 있는 곳에 왠 사내아이? 윤선비의 눈썹이 흥미로운 듯 꿈틀거렸다. 얼굴은 앳 돼 보이고 비단 옷을 걸친 걸 보아 노비는 아니일터. 아이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사내지만 기생마냥 다소곳한 몸짓이 눈에 밟혔다. 윤선비는 아이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옆에 술에 취해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기생 하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아이의 이름이 무엇이냐?"
기생은 비몽사몽한 실눈을 뜨고 아이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뭉개진 발음으로 답했다.
"저 아이의 이름은 없습니다. 갓난아이 일때 저희 기방 앞에 버려져 있던 걸 거두어 키웠고 지금은 마땅히 갈 곳이 없다고 하여 간간히 심부름을 하며 밥값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 마님들이 저희 기방에 놀러오실 때면 말동무 해 드리라고 방에 넣는데, 마님들도 좋아하시고 저 아이 때문에 저희 기방을 많이 찾아주셔서 돈벌이도 됩니다. 사내아이가 기방 앞에 버려진 건 우습지만 아이가 싹싹하고 바르니 밉게 보이진 않사옵니다."
윤선비는 기생을 말을 듣고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서 버려진 것도 모자라 하필이면 기방에서 키워졌다니 가여웠다. 술상을 다 치우고 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윤선비가 다시 물었다.
"저 아이가 할 줄 아는 것은 없느냐?"
"걸음마를 뗀 이후부터 저희들이 남무를 추는걸 문지방을 넘어 배워 무용을 조금 할 줄 알긴 합니다만 사내자식이 남무를 배워 무얼 하겠습니까. 이제 저 아이는 신경쓰지 마시고 저희들과 같이 노시옵소서"
기생은 은근슬쩍 윤선비의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윤선비는 기생의 손을 단호하게 내리고 풀어진 옷고름을 대충 손에 감아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그리곤 저 앞에 빠르게 걸어가는 사내아이를 불러 세웠다.
"얘야."
아이는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저를 부른게 윤선비인 걸 확인하자 들고 있던 쟁반을 지나가던 부엌일 하는 처녀에게 건네주곤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윤선비 앞으로 갔다.
"부르셨사옵니까 나으리."
"올해 네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열아홉이옵니다."
아이를 가까이서 보니 계집애처럼 예쁘장하게 생겼다. 얼굴엔 분을 바른건지 뽀얗고 입술도 오동통하니 탐스러웠다. 눈은 까만 눈동자가 초롱초롱하니 별이 박힌 듯 했다. 목소리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꽤 성인티가 났다.
"기방에서의 일은 힘들지 않느냐?"
"크게 힘들진 않사옵니다. 혹여 힘들더라도 갓난쟁이였던 절 이만큼 키워주셨으니 제가 일이라도 해서 은혜를 갚는것이 마땅하옵니다."
"널 이런 곳에 버린 네 어미아비가 원망스럽진 않느냐?"
"처음엔 좀 원망스러웠으나 아무리 저를 버린 부모라도 제게 건강한 몸뚱아리를 주셨으니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고로 부모를 욕하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짓이고 전 어머니 아버지 얼굴도 모르오나 어딘에선가 행복히 살고계실 부모님께 평안을 바랄 뿐이옵니다."
윤선비는 아이의 말을 듣고 굉장히 놀라워하였다. 아이가 하는 말이 다 일리있고 중요한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기생집 출신 아이가 이리 깊은 뜻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윤선비는 아이를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얘야. 내 약소한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느냐."
"귀하신 나으리의 부탁이시라면 그게 무엇이더라도 입을 다물고 받들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네 무용 실력이 뛰어나다 들었다. 혹 지금 당장 급한 일이 없다면 여기서 한 번 보여줄수 있겠느냐? 너의 실력이 매우 궁금하구나."
아이는 입을 오물거리다 당찬 목소리로 답했다.
"보잘 것 없는 실력이옵니다만 잠시 이 자리를 빌려 짧게나마 한 번 뽐내보겠사옵니다."
그러곤 아이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자세를 잡았다. 그때의 눈빛이 마치 사냥감을 눈 앞에 둔 늑대의 눈빛 같았다. 아무 반주 없이 오로지 산들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려 스스 대는 소리에 몸을 맡기고 한 발씩 움직이는데 아까의 수줍어하던 모습은 어디가고 학이 날아오르듯 가볍고 우아한 몸짓으로 몸을 놀리는 것이었다. 손끝은 붓으로 종이에 곡선을 그리듯이 부드러웠고 몸짓은 어느 땐 범처럼 절도있다가도 금새 깃털처럼 하늘하늘 거리며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였다. 윤선비는 아이의 몸선에 홀린듯이 빠져들었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무용이 끝나자 윤선비는 큰 박수를 쳤다.
"너의 실력이 참 대단하구나. 어디서 배운 적이 있느냐?"
"송구하옵니다 나으리. 그저 어릴적 누님들이 추시는 걸 곁눈질로 보고 따라하는 것일 뿐입니다."
얼마나 힘을 주고 췄으면 아이의 이마에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윤선비는 무용에 대해 잘 몰랐지만 아이의 실력은 기생이나 광대들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이렇게 똑 부러지고 능력있는 아이가 태생 천민이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윤선비는 입맛을 쩝 다시다가 아이에게 느지막히 말하였다.
"네 이름이 없다 하였지."
"예, 그렇사옵니다."
"그럼 내가 네게 이름을 지어주겠다."
그 말에 아이는 놀라 펄쩍 뛰었다.
"아니 어찌 미천한 저에게 이름을 지어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어허. 그냥 새겨 들으래도."
윤선비는 주변에 나뭇가지를 가져와 쭈그려 앉고 아이의 얼굴을 한번 쓱 보았다. 고민 하는 듯 땅을 몇번 툭툭 치더니 금방 한자를 몇 자 썼다. 아이는 옆에서 초조해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윤선비는 바닥이 쓰인 여러 한자를 이리저리 조합해보다가 발로 땅을 비벼 모든 한자를 지우고 크게 두 자를 썼다.
"자, 이게 앞으로 쓰일 네 이름이다. 총명할 민에 빛날 혁. 민혁. 어떠느냐?"
"...감사합니다 나으리."
"맘에 드느냐?"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그래 혁아. 내 너를 어여삐 여겨 특별히 지어준 것이니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어라."
민혁. 그게 아이의 이름이 되었다. 민혁은 자기에게 이름이 생기고 그 이름으로 자기가 불리우니 아직은 얼떨떨하여 땅바닥에 적힌 제 이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윤선비는 쑥쓰러워하는 민혁을 보곤 피식 웃었다.
"혁아. 너를 만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음... 보름달이 저 버드나무 꼭대기에 걸리는 날, 밤을 통해 여기로 오시면 되옵니다."
"알겠다. 우리가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윤선비는 보름달이 뜨는 날 밤이면 기생집에 찾아가 민혁을 만났다. 보름달이 뜨지 않는 날에 민혁이 그리울때는 친구들에게 술을 사 주겠다며 꼬시고 술을 진탕 먹인 뒤에 자기는 민혁을 만나러 뒤뜰로 나갔다. 그렇게 높은 양반과 천한 천민 사이에 오묘한 감정이 생겼고 그 감정은 양반에게서 먼저 나타났다. 민혁과 만나는 날이 잦아지면서 윤선비의 마음에 민혁이 들어차 자리 잡았다. 눈을 감으면 민혁의 얼굴이 어른거렸고 자려고 누우면 창밖으로 달이 보여 금방 보고 온 민혁이 생각났다. 민혁을 만나는 날의 횟수가 점점 늘어났고 하루라도 민혁을 보지 못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조급하였다.
늦여름의 둥근 보름달이 두둥실 떠오르는 날, 어김없이 둘은 버드나무 밑에서 만났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민혁의 양볼은 열이 올라 발그래했다. 윤선비는 부치고 있던 부채를 민혁의 얼굴에 부쳐주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데도 민혁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붉어졌다.
"혁아. 혹시 원하는 것은 없느냐? 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줄 수 있느니라."
"말씀은 송구하오나 저는..."
"원하는 것이 없는게냐?"
민혁은 손을 꼼지락대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윤선비는 민혁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어서 말을 해보거라. 내가 들어주기 어려울 만큼 큰 것을 바라느냐?"
"아니옵니다. 다만... 지금 제 처지로썬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입 밖으로 내기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더냐. 내게만 몰래 말해보거라."
"실은... 글공부가 하고 싶사옵니다. 하오나 전 천민이라 그저 마음에만 두고 있는 먼 꿈이옵니다."
"하하하! 고작 글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게 그리도 어렵더냐?"
윤선비는 배를 잡고 크게 호탕웃음을 내었다. 민혁은 자존심이 왈칵 상해서 입을 비죽 튀어나와 부루퉁해 있었다. 윤선비는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한참을 웃다가 민혁의 쌀쌀맞은 표정을 보고 멋쩍은 듯 헛기침을 몇 번 하였다.
"어찌하여 웃으시는겝니까?"
"아니다. 네가 그렇게 고민하는 모습에 비해 꿈이 소박하여 그렇다. 글이야 내가 금방이라도 가르쳐 줄 수 있느니라."
"...그말이 참말이옵니까?"
"참말이다. 한번 배워보겠느냐?"
"당연합죠 나으리!"
여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민혁은 글을 모두 깨우쳤다. 민혁은 문일지십에 수불석권하여 윤선비도 가르치는데 맛이 들려 신나게 글을 알려주었다. 민혁이 글을 다 읽고 쓰게되자 윤선비는 민혁에게 문방사우를 상으로 주었다. 민혁은 선물을 받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윤선비에게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나으리 제게 이렇게 큰 상을 주시다니요! 망극하옵니다!"
"네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쁘구나."
민혁은 곧바로 벼루에 먹을 갈아 붓에 먹물을 흠뻑 적셔 종이에 글을 써내려 갔다. 윤선비는 민혁이 집중하여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꽤 긴 글을 쓴 후 민혁은 종이를 윤선비에게 주었다.
"나한테 주는 것이냐?"
"예 나으리. 나으리께 꼭 이 글을 써 드리고 싶었습니다."
윤선비는 민혁이 쓴 글을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명월)
둥근 달님 언제 오시나요?
전 여기에서 작은 등불을 들고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둥근 달님 드디어 오셨군요!
이제 전 등불을 꺼뜨리고 달님 품에 안겨 밝게 빛나고 싶사옵니다.」
"혁아 네 글솜씨가 매우 대단하구나. 글을 가르쳐준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훌륭한 글을 적어내다니 틀림없이 너는 크게 될 것이다."
"부끄럽사옵니다 나으리."
민혁은 환하게 웃으며 윤선비를 쳐다보았다. 티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언제 누구에게 이런 순수한 미소를 받을 수 있을까 잠깐 생각해보았다.
해가 바뀌고 일월의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둘은 처마 밑에서 함께 설산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윤선비는 고개를 돌려 민혁을 쳐다보았다. 이제 성인이 된 민혁은 처음 본 날보다 키도 자라고 늠름해졌다. 왠지 모르게 뿌듯하고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어 윤선비는 애꿎은 눈만 뽀드득 즈려 밟았다.
"혁아."
"예 나으리."
"이제 네 나이가 스물이 돼었구나."
"맞사옵니다."
"이제 성인인데 앞으로 무얼을 하며 살 것이냐?"
"일단 기방을 나와 한양을 떠날 것이옵니다."
"...얼마나 멀리 가려고 하느냐?"
"될 수 있으면 조선 팔도 전체를 두 발로 걸어다니며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사옵니다."
"그럼 나와 함께 저 산 너머 멀리 떠나지 않으련?"
"......"
민혁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말은 하고 싶은데 꺼내기 어려운 말일 때 나오는 민혁의 습관인건 일치감치 눈치챘다.
"왜 아무 말이 없으냐?"
"나으리. 저는 나으리가 제게 혁이라고 불러주는게 너무나도 좋았사옵니다."
"...그래서?"
"저는 나으리와 저의 인연은 여기서 더 갈 수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민혁의 말 뜻은 윤선비도 잘 알고 있다. 여기는 조선. 오랫동안 유교를 섬겨왔고 유교를 어긴다는 것은 나라의 반역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조선인이라면 유교를 따라야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었다. 윤선비는 민혁의 어께를 단단히 부여잡고 말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서로 연모하고 있지 않느냐?"
"나으리가 절 예뻐해주시고 아껴주시는 마음은 저도 압니다. 천한 제가 어찌 귀하신 나으리의 말을 거역할 수 있겠느니마는... 저희는 결코 이어질 수 없사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비록 우리 둘다 사내이고 우리의 신분 차이가 좁혀지진 않지만 함께 한다면 충분히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내일 새벽 아침 해가 뜨기 전 같이 떠나자꾸나."
"하지만...하지만..."
민혁은 끝 말을 흐렸다. 긴 침묵이 흐르고 윤선비의 얼굴이 점점 흐려지더니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이내 흐느끼는 소리가 나고 민혁의 어께가 들썩였다. 민혁은 쉽게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윤선비는 민혁을 품에 안아 파르르 떨고 있는 민혁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알았다. 네가 하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아느니라. 그동안 내가 너에게 많은 부담을 주었구나.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나도 말을 아끼겠다. 내 이 말은 없던 걸로 할터이니 네 뜻대로 하거라."
"아니옵니다... 그런게 아니오라..."
민혁은 윤선비의 두루마기를 흠뻑 적시도록 울었다. 어미아비를 잃은 순간보다 지금이 훨씬 사무치게 아프고 서러웠다. 그 모습을 보는 윤선비 또한 심장이 찢어지는 듯 했다. 민혁은 한참을 소리 내어 엉엉 울다가 훌쩍이며 잠긴 목소리로 윤선비에게 말했다.
"연모합니다 나으리... 나으리를 매우 연모합니다..."
윤선비는 눈을 감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민혁은 눈물로 얼룩진 자기 얼굴을 들이밀어 윤선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윤선비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지만 민혁은 입술을 떼지 아니했다. 윤선비는 그런 민혁을 보고 살풋 미소 짓고 민혁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살짝 벌어진 입 틈 사이에 혀를 넣어 입안을 탐했다. 붉은 혀가 하얗고 고른 이를 훑고 지나가면 민혁의 입에서 이상야릇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행여나 두 입 사이로 신물이 흐르면 한 방울이라도 놓칠 쏘냐 다 핥아 먹었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민혁이 윤선비의 몸채에 눌려 점점 허리가 꺽이더니 둘은 중심을 잃고 쿵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윤선비는 이 상황이 우스운 듯 하하 웃고 민혁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이런 요망한 것. 어찌하자고 이런 짓을 하느냐."
"이미 저희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사옵니다."
윤선비는 민혁의 입을 가린 손을 잡아 내리고 다시 민혁의 입술을 입 안 가득 담았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 서로를 원하는 몸짓이 더욱 커졌다. 둘의 타액이 섞여 미끈해진 입술을 혀로 핥고 비비고 빨다 보니 어느새 민혁이 입고 있던 저고리가 풀어져 허리춤에 겨우 달려있었다. 윤선비가 몸을 조금씩 움직일 적마다 비단끼리 부딪히며 사박거리는 소리가 났고 이내 단정히 입고있던 고운 비단옷마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겨쳐졌다.
모두가 잠든 새벽. 작은 등불 하나의 희미한 빛에 의존해 좁은 방 안에선 젊은 사내 둘이 배를 맞댄 자세로 나누는 아름다운 애무는 장밋빛 입김에 휩싸여 갔다. 이 모든게 꿈인들 이보다 더 감미로울 수 없었다. 가슴엔 붉은 꽃을 피워 분위기를 더욱 달아오르게 만들었고 위에 있는 사내가 허리를 움직이면 아래 있는 사내는 앗, 윽, 하고 짧게 끊기는 신음을 냈다. 저 멀리 동이 터오면 동시에 파정을 맞으며 서로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혁아 너를 매우 연모한다."
"저 또한 마찬가지이옵니다 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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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5년의 딸기우유 / 앙짱 (인간과 로봇의 차이)
세번째2019. 12. 3. 01:302045년의 딸기우유
-윤산하는 안드로이드를 좋아하지 않아
앙짱
민혁은 그저 이 지루하디 지루한 수업이 끝나길 바라고 있었다. 턱을 괴고 책상 위에 놓여진 학습용 디스플레이 유리를 만지작거렸다. 홀로그램 모션과 AR을 번갈아 가며 가리키시는 선생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안드로이드 로봇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2003년으로•••"
-아 지루해. 민혁은 결국 지루한 수업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책상 위에 엎드렸다. 오늘의 제 1수업은 역사였다. 안드로이드의 역사. 민혁뿐만 아니라 과반수 이상의 학생들은 모두 눈에 초점이 나간 듯 했다. 나라에서 머리 좀 좋다는 애들만 모인 곳인데 수업분위기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A-12학년이 되며 홀로그램 심화과정을 수료하게 되자, 학교에서 소위 양아치 라고 불리는 몇몇 학생들은 배운 기술을 사용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복제한 홀로그램 모형을 교실에 대신 앉혀놓기도 했다. 점점 그런 일탈을 하는 학생들이 급속도로 늘어나자 학교는 학생들에게 전파 기록 장치 시스템을 부착하는 대안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소용 없었다. 학생들은 다른 방법을 사용해 또 다른 일탈을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 학교 애들이 머리가 좋아. 하나만 가르쳐줘도 열을 아니깐. 이번엔 무엇 이려나. 전파 기록 시스템 해킹? 무엇이든 간에 하여튼. 민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안드로이드의 역사가 뭐 어쨌든, 저쨌든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수업까지 과제는 얼마 전 개봉한 안드로이드 관련 영화를 보고 보고서를 써오는 것입니다. 자, 오늘 수업은 우리나라 안드로이드에 대한 시청각 자료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홀로그램 띄웁니다, 모두 위를 봐주세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수업이 거의 마무리 되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전등의 밝기를 낮추시며 홀로그램을 띄울 준비를 하고 계셨다. 마지막에 보여주시는 홀로그램은 수업의 내용을 총정리 해주는 아주 좋은 자료이기 때문에 놓쳐서는 안 된다. 게다가 오늘 수업은 제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민혁은 몸을 일으키고 고개만 숙여 작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들어 홀로그램을 쳐다보는 순간,
"펑- 펑!! 펑!"
-..? 저게 뭐지?
민혁은 눈을 찡그려 자세히 보았다. 저것은 분명 폭죽이었다. -진짜 폭죽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지..? 해킹을 당한 건가? 라며 폭죽의 원천에 대해 생각하려다가 아름다운 불꽃에 그만 눈길이 빼앗겼다. 오색 빛갈의 불꽃들이 홀로그램화 되어 교실 위에서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었다. 먼저 작은 주황색의 불꽃이 터지고 그 위에 보라색 불꽃이 잇따라 터지고 겹쳐지며 오묘한 색감을 자아냈다. 원모양, 별 모양 등등의 다양한 모양의 폭죽이 계속해서 높게 올라가 터졌다. -이게 뭐야. 입 꼬리가 올라갔다. -누가 이런 짓을.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하루 속 이런 이벤트는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다. 오아시스 같은 달콤함을 잊고 싶지 않았다. 가방을 뒤져 찾은 콘텍트 디지털 카메라를 동공에 장착했다. 눈을 깜박 거리며 이 아름다움을 눈이 아닌 마음 속 깊이 간직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 아이들을 보니 여전히 맛이 가있었다. -그럼 애들은 아직 안드로이드 역사 뭐시기를 보고 있는 건가? 민혁에게만 폭죽 홀로그램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럼 누구지? 찾고 싶었다.
주변 아이들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폭죽의 반짝임 또한 사라졌다. 제 1수업이 종료되었습니다' 라는 홀로그램 문구가 뜨며 그렇게 지겨웠던 역사 수업이 끝났다.
민혁도 일어나 고개를 살짝 돌리며 가볍게 스트레칭했다. 그 때 고개를 돌리다 한 아이가 민혁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왠지 모르게 낯이 익는 얼굴이었다. 창가 쪽에 앉아있던 그 아이의 머리칼은 따뜻한 햇살에 비춰져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계속 바라보던 눈빛을 느꼈는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민혁과 눈을 맞추었다. 매력적인 속쌍커풀의 눈, 오똑한 콧날, 그리고 하얀 피부를 가진 그 아이는 나에게 싱긋 입 꼬리를 올려 미소 지어주었다. 그리고 곧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
"...어."
"혹시 딸기우유 좋아해?"
-이렇게 갑자기 물어본다고?
"나랑 딸기우유 먹지 않을래?
"...그래,좋아."
민혁이 얼떨결에 대답하자 산하는 싱긋 웃으며 무인편의점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민혁이 뒤따랐다. 둘은 무인편의점에서 딸기우유를 2개 산 후, 아카데미 뒤에 있는 정원의 벤치 위에 앉았다. 아이는 민혁의 우유에 빨대를 꽂아주었다.
"자, 마셔."
"고마워."
"이 딸기우유 진짜 맛있지 않아? 저번에 ☆☆회사 거 먹어봤는데 진짜 별로더라. 완전 맹물에 분말 탄 것 같아!"
"그래? 딸기우유 진짜 좋아하나 보네."
"응 달콤하면서 부드럽잖아."
-꼭 본인 같은 거 좋아하네. 민혁은 쫑알대는 아이의 입술을 쳐다보다가 본인도 곧 입을 열었다.
"아까 그거 너지?"
"이제야 물어보네. 그 얘기 언제 꺼내나 했어."
"역시 너였구나?"
"응. 너 엄청 좋아하더라. 렌즈 끼는 것 같던데, 그거 디지털 콘텍트지?"
-아 너무 나댔나. 민혁은 아까 좋아서 난리 피우던 자신의 모습이 눈 앞에 훤히 보여 조금 민망해졌다. 볼이 뜨거워졌다.
"걱정 마. 나만 봤을 테니깐. 그거 너한테만 보여."
"어, 그런 것 같더라."
민혁은 솔직히 이 상황이 조금 어색했다. 오늘 처음 보는 애랑 이렇게 아카데미 벤치 위에서 딸기우유를 먹어본 것 도 처음이었고, 대화하면서 누군가의 이런 꾸준한 시선을 받아본 것도 처음이었다. 아이는 계속해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곧 그의 딸기우유 팩에서 공기가 빨려 드는 소리가 났다. 민혁은 곧 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될 것 같아 빨아들이는 속도를 높였다.
"다 마셨다."
"그거 홀로그램으로 한 거지?"
"당연하지. A-12 되니깐 그런 것도 배워서 이런 거에다 써 먹고. 좋네."
"그러게. 너 기술력 대단하더라."
"우리 아카데미 전교 1등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너무 기분 좋네."
"허허..."
"뭐 또 궁금한 거 없어?"
"음... 그냥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홀로그램 그거 왜 한 거야?"
"그낭..심심해서."
그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랬겠지. 내가 뭘 기대한 거야. 민혁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반응. 장난이고, 사실은 너에게 관심 받고 싶었거든."
"관심?"
"응, 나 너랑 친해지고 싶어. 친구하자 우리."
그러더니 아이는 민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혁은 당황 해하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차가운 민혁의 손 보다 아이의 손이 더 따뜻했다. 아이는 맞잡은 손을 민혁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후 나머지 손으로 바람에 헝클어진 민혁의 앞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손 잡는 걸 좋아하나? 민혁은 계속해서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조금 부담스러운데.
"근데 너는 끝까지 안 물어보네?"
"뭐를?"
"내 이름."
"아... 이름.."
"안 궁금해?"
"아..아아... 아니!! 궁금해! 이름이....뭐야?"
아이는 그제서야 손을 풀고 후드 집업의 지퍼를 내려 명찰을 가리켰다.
A-12윤산하
아이의 이름은 산하였다. 아이와 아이의 이름이 소름 돋게 잘 어울렸다.
"산하구나, 네 이름. 그리고 내 이름은..."
"민혁, 박민혁. 우리 친하게 지내자."
"..어? 그래..!”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하루를 마치고 민혁은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초가을이라 덥진 않지만 춥지도 않은, 딱 적절한 온도의 날씨였다. 매일매일 이런 날씨면 정말 좋을 텐데.
이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2가지의 선택권이 있었다. 첫 번째로는 기숙사, 두 번째로는 통학이었다. 민혁의 집은 서울이었고, 혼자 살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혼자는 아니지만.
조금 걸어 하이퍼루프 승강장에 도착했다. '하이퍼루프'는 요즘 가장 많이 이용되는 교통수단이다. 하이퍼루프를 타면 아카데미가 위치한 부산에서 민혁의 거주지인 서울까지 16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A-12 가 되면서 이용요금이 조금 비싸졌는데 부담스러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 가격이면 아이스크림 하나는 더 먹을 수 있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KNT 아카데미역으로 서울 행 하이퍼루프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 발자국 물러서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산하와 민혁이 다니는 KNT(Korea National Technology)아카데미스쿨은 대한민국의 미래들이 모인 곳이었다. 최고급 시설로 이루어진 아카데미는 세계에서 과학기술 분야에 한 획을 그은 교수들로부터 강의를 들을 수 있었고, 최신 장비로 과학기술의 미래를 위한 연구를 할 수 있는 아주 고급 진 아카데미스쿨이었다.
아카데미의 학년은 크게 B(Basic), I(Intermediate), A(Advanced), ITN(InTerN) 으로 나눌 수 있었다. B는 B-1 ~ B-6까지 6년과정으로 옛날의 초등학교와 비슷했고, I는 I-7 ~ I-9 총 3년으로 중학교와 같았다. A 는 A-10 ~ A-12까지 3년 과정으로 고등학교 과정과 동일하였고 그 중 산하와 민혁은 A-12, 19살이었다.
이렇게 보면 과거의 교육과정과 비슷해 보이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대학과정이 없다는 것. KNT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대한민국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래서 대학에 가봤자 배우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현 정부의 판단 하에 A과정을 거친 후 바로 기업의 입사할 수 있도록 ITN, 인턴 개념이 생겨났다. A-12의 하반기가 되면 12년동안 아카데미에서 수료한 성적과 업적에 따라 입사할 수 있는 기업으로부터 ITN 입사 공문이 내려왔다.
하이퍼루프에 올라 탄 민혁 또한 본인 앞으로 내려온 공문을 읽고 있었다. 공문은 연갈색 서류봉투에 담겨 있었다. 요즘 시대랑은 조금 다른 아날로그 적인 방식이 꽤 맘에 들었다. 민혁은 이래 봐도 KNT의 전교 1등이기 때문에 서류 봉투 겉면의 기업 로고가 다 뉴스나 AR신문에서 자주 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우수한 기업들이었다. 물론 우리나라 기업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 같은 외국의 유명 기업으로부터도 많은 연락이 왔다. 그래도 눈에 들어온 것은 KNAC(Korea National Android Corporation). 우리나라의 진정한 인재들이 모인 곳이며 안드로이드 개발을 주로 하는 기업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전교 3등안에 들어도 갈 수 있을까 말까 한 곳이었다. 물론 국외에도 좋은 기업들이 많았지만, 민혁은 본인의 내성적인 성격도 성격인지라 해외로 나가는 것은 겁이 났다.
'띠링'
민혁이 마지막 서류 봉투를 꺼내 들었을 때 메신저 알림 소리가 났다. -누구야? -저장된 번호가 아닙니다. 대충 생각 나는 사람이 있었다. -읽어줘. 민혁의 음성이 인식되자 메신저 기능은 수신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안녕? 나 산하야. 윤산하. 내가 누군지 모르지는 않을 것 같고.]
-역시. 모를리가. 민혁은 마지막 공문을 꺼내며 미소지었다. -잠깐만. 그리고 그것을 선반 위에 잠시 올려놓은 후 다시 명령했다. -계속 읽어줘.
[우리가 오늘 친구된 기념으로 내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 뭔지 궁금하지? 바로 달콤한 초코브라우니! 방금 만들었기 때문에 아주 따뜻하고 맛있을 거야. 일단 향만 첨부해서 보낼게. 혹시 별로면 굳이 받지 않아도 돼ㅠㅠ]
-귀엽네. 민혁은 메신저를 듣는 내내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메신저를 받은 민력에게만 달콤한 초코브라우니의 향이 느껴졌다. 분명 달콤하고 촉촉하면서 부드러울 것 같았다. 산하가 첨부한 달콤한 브라우니 향에 취해있을 때 하이퍼루프는 어느 세 서울역에 도착해있었다. 민혁은 빠르게 '첨부파일수락'을 터치하고 주소를 기입한 후 짐을 챙겨 내렸다.
몇 발자국을 더 걸어 오피스텔 앞으로 도착했다.
'7108호 박민혁님, 어서오세요.'
1층 현관에서 홍채 및 음성 보안센서를 통과한 후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71층 버튼을 선택하고 문 앞에 도착하기 까지 걸린 시간은 30초. 요즘 세상은 모든 것이 빨랐다. 물론 처음에는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문 앞에 서서 카메라 렌즈에 얼굴을 가까이 하고 양 손의 손가락을 지문인식기에 올려놓았다. 잠금이 해제되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민혁아, 어서 와."
민혁은 집에서 혼자가 아니었다.
"민혁아, 오늘도 좋은 하루 보냈어? 식탁 위엔 '저장하지 않은 번호'로부터 온 초코 브라우니가 도착해있어. 오늘 날씨가 좋아. 요즘 근력이 조금 감소되었는데 가벼운 운동을 추천할게. 그리고 현재 체내 수분이 부족하니..."
-신정우 너는 날 너무 잘 알아서 문제라니까.
정우는 민혁의 안드로이드 로봇이었다. 외국에서 거주 중이신 부모님께서 혼자 사는 것이 걱정된다며 선물해주신 안드로이드였다. 외모도 준수한 정우는 아주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정우의 대해 새롭게 추가된 중요한 정보가 있다. 바로 오늘 만난 산하와 외적으로 많이 닮았다는 것. 흰 피부, 동글 날렵한 눈매, 날카로운 콧날, 통통한 입술.
정우는 원래 평범한 가사용 안드로이드였다. 하지만 민혁은 아카데미에서 배운 기술을 사용하여 정우에게 인간처럼 생각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하였다. 민혁에게 정우는 더 이상 안드로이드가 아니었다. B-1 때부터 함께한 정우였기 때문에 민혁에게 정우의 존재는 평범한 안드로이드의 존재를 넘어섰었다.
"정우야."
"응 민혁아."
정우는 민혁이의 짐을 들어주며 민혁과 함께 식탁으로 걸어갔다.
"나 오늘 친구 사귀었어."
"...친구?"
"응. 이 브라우니도 그 친구가 준 거야."
"이름이 뭔데?"
"윤산하. 근데 생각해보니깐 걔가 너랑 닮았어. 왜 낯이 익나 했네."
민혁은 산하의 번호를 저장하며 말했다. 처음엔 'A-12 윤산하' 라고 저장하려 했다가 너무 딱딱해 보여서 그냥 '산하' 라고 저장했다. 이름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저장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식탁 위에 놓여있는 브라우니 상자를 들어 소파 위로 가져갔다. 영화를 보며 먹을 예정이었다.
"아니, 잠깐만! 친구라니? 게다가 나랑 닮았다고?"
"응, 내가. 아주 괜찮은 애 같아."
"하.....짜증나."
"왜 그래...?"
"몰라, 흥!"
"...?"
-저렇게 삐쳐버린다고? 상상 의외였던 정우의 반응에 민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민혁에게 중요한 것은 눈 앞엔 맛있는 브라우니였다.
상자에서 브라우니를 꺼내니 하트 모양의 브라우니가 눈앞에 보였다.-푸흡, 하트라니! 산하 같다. 잘 어울리네 민혁은 사진을 직고 사진에 '잘 먹을게' 라는 음성 메세지를 첨부하여 산하에게 전송했다. 메세지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산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야?"
"(산하.)"
입 모양으로 대충 '산하' 라는 것을 알린 민혁은 산하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브라우니 먹어봤어?]
"응. 지금 먹고 있어. 맛 장난 아닌데? 진짜 맛있어."
빈말이 아니었다. 적절히 달았고 촉촉했으며 매우 부드러웠다. 냄새부터 장난 아니었던 산하의 브라우니는 혀가 닿을 때마다 달콤하게 녹는 듯 했다. 먹어본 브라우니 중 단언컨대 으뜸가는 맛이었다.
[진짜? 입에 맞아서 너무 다행이다. 그거 수업 땡땡이 치고 만든 거야!]
"뭐? 너 미쳤어?"
[...하하]
"아, 미안..”
[하하하핫, 뭘 그렇게 놀라. 설마 날 수업 열심히 듣는 모범생으로 착각한 건 아니지? 난 민혁이 너랑 달라.]
"아니야.. 나도 열심히는 안 들어."
[그래? 그럼 원래 머리가 좋은 건가?]
"야아..."
[하하 알겠어 그만 놀릴게! 근데 너 집이야? 수령 위치가 오피스텔로 뜨네?]
"응, 나는 집."
[서울 사는 구나~ 통학 안 힘들어?]
"뭐. 하이퍼루프 타면 금방인데."
[그렇긴 하지. 그럼 혼자 사는 거야?]
"어....그렇겠지,,?"
[그럼 나 다음에 놀러 가도 돼?]
"그건 안 돼!!!"
[왜...?]
"우리 집에서 고양이를 기르는데 이 고양이 녀석이 털이 엄청 날려~ 우리 집 오면 없던 고양이 털 알레르기도 생길걸?"
[그래? 난 괜찮은데.. 맛있는 거 들고 가려 그랬지. 아쉽다.]
"미안해.."
[아니야. 그럼 나중에 내 기숙사에 놀러 올래?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정말?"
[그럼.]
[벌써 8시네.]
“그러게 난 이제 씻고 운동하러 나가야겠다.”
[운동? 너 운동 좋아해?]
“그건 아니고 아까 정ㅇ.... 어.!! 운동 좋아하지!!”
[엄청 좋아하나 보네~ 그래 나도 이제 연구실 내려가 봐야겠다.]
"응, 내일 보자."
[어, 연락해.}
AR디스플레이에 통화가 종료되었다는 문구와 통화시간이 떴다. 2시간 3분. 브라우니를 먹기 위해 튼 영화는 꺼버린 지 오래였다. -내가 이렇게 오래 통화한 적이 있었나?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고 통화를 이렇게 오래 해본 적이 없던 민혁은 본인에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시간 동안 산하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해서 인지 산하와 체감상으로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냥, 왠지 모르게 좋았다.
민혁은 아까 산하와 통화를 하다가 산하가 집에 놀러 가겠다는 소리에 당황을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산하가 집에 와서 본인과 매우 유사한 안드로이드를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 분명 당황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아쉽지만 산하를 집에 초대할 수는 없었다. 거의 처음 사귄 친구지만 하필이면 그 친구가 안드로이드랑 너무 닮아가지고.
-맞다, 정우! 산하랑 계속 통화를 하느라 정우의 존재를 잊고 말았다. -자나? 정우의 방에 불이 꺼져 있었다. "정우야! 나 운동!" 아무 대답이 없었다. -진짜 자나 보네. 오늘 피곤한가? 민혁은 어깨를 으쓱한 뒤 후드집업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지금 몇시야?"
"수업 시작하기 7분 전."
오늘도 어김없이 둘은 쉬는시간에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둘의 입엔 초코우유가 물려있었다. 뒤늦게 고백한 민혁의 초코우유 취향에 산하가 그걸 왜 지금 말해주냐면서 반영해준 결과였다.
“이제 일어날까?”
일어나자는 민혁의 말에 산하는 민혁의 손목을 잡았다.
“우리 땡땡이 칠래?”
“뭐? 어, 미..안하지만 나 다음 교시에 수업 있어.”
"무슨 수업인데?"
"...역사2."
“진짜 해야겠네. 우리도 홀로그램 띄우자. 수업시간에 배운 거 이런 데 써먹어야지!”
“하지만, 전파 기록 뜰 텐데….”
“...해킹하자."
"할 줄 알아?"
산하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민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일탈이 지금 시작되려 한다.
"근데 너 태블릿 같은 거 있어?"
"있을 리가. 정보실 가자. 수업 시작하기 전까지 얼마 안 남았어."
정보실에 도착한 둘은 태블릿 화면을 증강현실화 시킨 후 민혁의 학생 카드를 접합시켰다.
[Absence]
산하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CMD(명령 프롬포트) 창을 띄운 후 여러 명령 키를 넣었다. 영화에서 보는 듯한 해킹 장면이 민혁의 눈 앞에서 펼처지고 있었다.처음 보는 듯한 산하의 진지한 표정에 조금 놀랐다. 곧 산하의 손이 조금씩 느려지는 것 같더니 이후 엔터 키를 누르며 멈췄다.
[Presence]
"휴! 1분 만 늦었으면 넌 결석이었다!"
"와... 너 대박이다. 이런 거 처음은 아니지?"
"아이~ 왜그래~ 홀로그램 빨리 띄워놓고 나가자."
근데 방금 나 좀 멋있지 않았냐? 진지한 표정을 풀고 다시 장난스런 미소를 띠며 어깨동무를 하는 산하였다. -그래 좀 멋있었어.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기 때문에 민혁은 시선을 아래로 하며 미소 지었다.
해킹까지 하고 학교를 벗어난 그들이 도착한 곳은 겨우 아카데미 뒤에 있는 공원이었다. 둘 다 입에 하드를 하나씩 물고 있었다.
"아~ 이 공원 오랜만이네."
"그러게. B학년 이었을 때 만해도 참 여기 많이 왔는데. 그 땐 야외 수업했으니깐."
"근데 우리 이제 몇 개월 후면 사실상 여기 졸업이야. ITN 되면 여기 더 이상 안 올 테니까."
"시간 참 빨라."
"...공문 많이 왔지?"
"많이는 아니고. 그냥 몇 개?"
"다 좋은 회사들이겠지 뭐. KNAC같은."
"왜 산하 너한테도 많이 오지 않았어?"
너 수상성적으로는 아카데미에서 상위권이잖아. 민혁은 산하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노을에 겹쳐진 산하가 왠지 모르게 조금 쓸쓸해 보였다.
"... 생각을 좀 해봤는데 사실 난 이쪽이 내 길은 아닌 것 같아."
"응?"
"그냥~ 모르겠어. 12년 동안 이 길을 향해 달렸는데 잘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솔직히 맨날 과학만 하는 것도 질리고."
"무슨 느낌인 지 알 것 같아."
"KNAC에서 연락 왔지?"
"오긴 했는데..."
"사실 나도 왔어. 의외지 참. 내가 시험성적이 초상위권은 아닌데 말이야."
산하는 다 먹은 하드 바를 공원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알고 보니깐 KNAC에서 주최한 대회에서 수상경력이 좀 있었더라고."
"아..."
"KNAC같이 빡센 곳엔 별로 가고 싶지 않아서 절대 가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공문 받으니 흔들리더라. 내 성적으로는 절대 갈 수 없는 곳이잖아."
"나랑 같이 가자. 우리 같이 KNAC 입사하면 되잖아."
"그럴까? 민혁이 너가 그렇게 말하니까 좀 흔들린다."
산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바닥을 보며 말했다. 민혁이가 같이 가자는 말을 하니 솔직히 좀 많이 흔들렸다. 이 아이면 그곳에서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그래도 되는 걸까. 그냥 민혁이와 함께 하고 싶다는 이유로 KNAC에 입사해도 되는 걸까. 나는 그냥 민혁이와 함께 하는 것이 좋은 거지 KNAC에 입사하고 싶은 건 아닌데.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산하가 KNAC에 입사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민혁 하나였다.
"산하야 무슨 생각해?"
"어?"
"산하야 저기 봐봐. 노을 너무 예쁘다."
"...그러게 너무 예쁘다. 저기 서 봐. 사진 찍어줄게."
오랜만에 보는 노을이었다. 항상 바쁜 일상 때문에 해가 뜨는 지 저무는 지 알 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랫동안 말 없이 쳐다보다 산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민혁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붉은 노을이 매우 아름다웠다. 노을을 사진에 눈으로 보는 그대로 닮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예뻤다. 찍힌 풍경도 이뻤고 찍힌 사람도 이뻤다.
황혼에 물들어 가고 있는 하늘을 보며 좀 더 걸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집에 도착하면 연락 해."
"응. 조심히 들어가."
산하는 민혁을 승강장까지 데려다 주고 다시 아카데미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른한 어느날 토요일 아침, 민혁은 크게 울리는 벨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이 이른 아침부터 누구지.
[부재중 전화] - 산하 ; 오전 7시 45분
"민혁아 벌써 일어났어? 더 자도 되는데, 평균 수면 시간보다 1시간이나 모자라."
"방금 전화가 와서. 눈이 좀 일찍 떠졌네. 정우야 나 잠깐 잠깐 전화 좀 받을게."
"걔야?"
"...응."
"그래."
탐탁지 않아하는 정우를 뒤로한 채 민혁은 산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나야. 혹시 지금 자다 일어난 건 아니지?"
"...."
"맞구나. 좀 이따 다시 걸까?"
"아니야, 괜찮아. 왜?"
"오늘 뭐해?"
"음.... 아무 것도 없어."
"그럼 나랑 과제 하러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
"...좋아!"
갑자기 잠이 확 깼다. 산하와 학교가 아닌 밖에서 따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누군가와 만나자고 약속을 잡는 것 자체가 민혁에겐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떨리고 긴장 됐다. 지금 산하와 서울역 앞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은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일단 씻자. 민혁은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며 옷을 고르고 있었다. 민혁은 근래 들어 제일 신중하게 결정하고 있었다.
"어디 나가?"
"응, 과제하러 영화관 가."
"영화? 집에서 보면 되잖아."
"산하랑 보려고."
그 이후로 정우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민혁은 머리를 다 말린 후 드래스룸으로 들어갔다.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다가 고민 끝에 흰 셔츠에 연 갈색 니트, 검정색 스키니진을 입었다. 조금 더울 것 같긴 했지만 더우면 니트를 벗으면 되니깐. 마지막으로 시트러스 향의 향수를 뿌리고 집을 나섰다.
산하 [어디야?] AM 8:40
'방금 나왔어. 금방 갈게.'
민혁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아카데미로 가기 위해 매일 가는 곳이었지만 그 때와는 다르게 기분이 색달랐다. 서울역 부근에 도착하니 멀리 산하가 보였다. 검정색 블레이저와 슬렉스를 입고 있었다. 평소 캐주얼하게 입는 산하였기 때문에 느낌이 색달랐다. 민혁은 달려가 산하의 옷 소매를 잡고 이름을 불렀다.
"윤산하!"
"? 어? 왔어!"
"밥 먹었어?"
"아니. 너는?"
"나도. 우리 그럼 영화보기 전에 뭐 간단히 먹을까?"
"그래. 근처에서 뭐 좀 먹자."
둘은 근처에 있는 브런치 카페에 들어갔다. 브런치 세트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다."
"그러게. 근데 오늘 왜 이렇게 일찍 만나자고 한 거야? 오후에 뭐 일 있어?"
"아... 실은 서울에서 누구 만나기로 해가지고."
"누구? 친구?"
"아니.. 뭐 친구는 아니고. 우리 주문한 거 나왔다. 내가 가지고 올게."
-뭐야, 뭐 애인이라도 된대?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산하가 미심쩍었지만 생각을 접었다.
큰 접시에는 계란 후라이, 소세지, 토스트, 샐러드, 과일 등이 담겨 있는 평범한 브런치 메뉴였다. 주말 아침에 오랜만에 하는 식사였다.
산하는 먼저 딸기를 입에 넣었다. 새콤달콤한 향이 입안에 번졌다.
"딸기 맛있당."
"너 딸기 진짜 좋아하는 구나?"
"나한테 처음 한 말이 딸기 우유 먹자는 거 였잖아."
"주말 아침에 아침 먹는 거 너무 오랜만이다~."
"말 돌리지 말고."
식사를 마치고 둘은 영화관에 갔다. 정오도 지나지 않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데이트 중인 커플들이 대다수였다. 굳이 따지고 보면 둘 또한 데이트 중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괜히 설레는 감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둘은 매표소를 가 상영중인 영화목록을 보았다. 그들이 봐야 할 영화는 안드로이드 로봇을 주제로 한 영화였다. 역사 과제로 영화를 본 후 보고서를 써서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산하야 밥은 너가 샀으니 표는 내가 살게."
-이 영화로 청소년 2명 예매할게요. 민혁은 티켓박스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직원의 말에 매우 당황했다.
"혹시 두 분 커플이세요?"
"예??!"
"저희 영화관 이번 달 이벤트로 커플 분들께는 20%할인 적용해드리고 있습니다. 커플이시면 할인해드리겠습니다."
"네 커플 맞아요."
-뭐라고? 커플...? 당황스러운 직원에 말에 이어 더 황당한 산하의 말이 이어졌다. 비록 산하의 말이 진심이 아닐 지라도 민혁의 심장은 계속해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네, 그러면 20%할인 적용해드려서 16000 결제 해드리겠습니다."
"와 우리 4000원이나 아꼈어! 나 잘했지?"
"어? 어... 잘했어."
민혁은 계속해서 얼이 나간 듯 했다.
"응? 너 볼 왜 그렇게 빨개? 민혁아? 박민혁!"
"...으응?"
"설마 내가 아까 커플이라고 거짓말해서 기분 나빴어?"
"아,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우리 늦겠다! 영화 보러 가자!"
-산하야 너가 참 순진해서 다행이야.
영화는 생각보다 꽤 재미있었다. 대충 로봇이 인간에게 감정을 느끼고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뭐 이런 내용이었다. 보는 내내 산하가 아까 한 말이 떠올라서 중간 중간 집중이 안 됐지만 말이다. 그리고 정우가 생각나서 마음이 좀 걸렸다. 나오는 길에 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나와서 더 걸렸다.
[밥 먹었어?] AM 10:01 1
영화 시작 전 보낸 메신저도 읽지 않았다. 얘 요즘 왜 이러지. 안드로이드에게도 사춘기가 있는 것 같았다.
"누구야?"
산하가 핸드폰을 향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응? 부모님."
민혁은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산하에겐 걸려서 안 돼.
"우리 이제 뭐할까?"
"근처에 쇼핑몰 있던데, 가볼까? 꼭 쇼핑이 아니어도 되고."
"그래.
쇼핑몰에 들어온 둘은 시선이 가는 작은 악세사리 샵에 들어갔다. 팔찌, 목걸이, 목도리, 모자 등 예쁜 것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산하는 검정색 비니를, 민혁은 알이 없는 패션 안경을 착용하고 거울 앞에 섰다. 둘 다 입고 있는 옷이랑 잘 어울렸다. 거울 앞에 서서 사진도 찍었다. 산하는 비니가 마음에 들었는지 샀고, 민혁은 고민 끝에 사지 않기로 결정했다
쇼핑몰에서 쇼핑을 마치고 나니 작은 시계바늘이 3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들어가봐야지?"
"응. 역까지 데려다 줄까?"
"아니야. 여기 근처에서 만나기로 해가자고."
"그렇구나."
"...민혁아, 이거. 아까 악세사리 샵에서 샀어. 곧 엄청 추워질 거야."
회색 목도리였다. 중간에 흰색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민혁의 마음에 쏙 들었다.
"우와... 고마워!"
"내가 해줄게."
산하는 목도리를 반 접은 후 민혁의 목에 둘러주었다. 한결 따뜻했다. 그 때 민혁의 코에 흰 색의 무언가가 떨어졌다.
"어? 뭐지?"
"왜?"
"코에 뭐가 떨어졌어."
민혁은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에서 하얀 깃털 같은 것이 흩날려 내리고 있었다.
"첫 눈이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해의 첫 눈. 작은 솜털 같은 눈이 내려 산하와 민혁의 머리에 내려 앉았다.
"우와... 나 눈 내리는 거 너무 오랜만에 봐."
"나도... 너무 예쁘다."
"우리 오늘 만나기로 약속해서 다행이다. 밖에서 보니깐 더 좋은 것 같아."
"그러게 작년 첫 눈은 시험 보는 날이었는데."
"민혁아."
"응?"
쪽-
-??뭐지??? 지금 내 볼에 뭐가 닿은 거지??
"나 갈게! 아카데미에서 보자!"
민혁은 오른손으로 볼을 감쌌다. 그리고 뛰어가는 산하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첫 눈 오는 날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안 그래도 조용한 집이 불까지 꺼져있어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정우가 나와 가방을 들어줄 텐데. 식탁으로 가보니 정우가 조용히 앉아있었다. -정우 졸린가? 이름를 불렀다.
"정우ㅇ... 으읍.."
갑작스러웠다. 정우가 성큼성큼 다가와 난데없이 입을 맞추었다. 정우를 밀어내려 해도 도무지 민혁의 힘 만으론 밀어낼 수 없었다. 정우는 양팔을 뻗어 민혁의 허리를 감쌌다. 등을 어루만지며 민혁의 입술을 더 빨았다. 산하와 닮은 정우가 자신에게 입을 맞추자 민혁도 질세라 혀를 섞었다. 오늘따라 정우가 산하와 많이 닮아 보였다. 키스를 하며 정신이 몽롱 해지니 지금 내가 빨고 있는 입술이 산하의 것인지 헷갈릴 지경까지 이르렀다. 순간적으로 정우가 산하로 느껴졌다.
"산하야...산ㅎ..."
큰 실수였다. 민혁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자극을 받은 정우는 민혁을 벽에 밀어 붙이고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또 그 새끼야? 드러난 맨 살에 정우의 거친 손길이 닿자 놀란 민혁은 정우를 진정시켰다.
"진정해..진정..."
정우의 입술에 민혁이 짧게 키스하자 정우가 손을 뗐다.
"침대로 가서 하자. 여기서 하면 불편해."
하지만 정우는 방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고 복도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오늘도 윤산하 그 놈이랑 만났다고 했지?"
"그 놈이라니 정우야."
"왜, 내가 방금 키스할 때도 그 새끼 생각한 거 아니였어?"
"미안해..."
"걔 좋아해?"
"..."
민혁이 대답이 없자, 정우는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놀란 민혁은 몇 초 동안 밖에서 어버버 거리다 방 문을 열었다. 다행히 문은 열렸다. 잠그지 않은 것을 보니 들어와 기분을 풀어 달라는 암묵적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정우야.”
정우는 창문을 바라보며 웅크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고개를 파묻은 채 울고 있었다. 민혁은 놀랐다. 정우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비록 민혁이 정우에게 감정이라는 것을 심어줬지만 눈물을 흘릴 정도로 정우가 깊게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문득 오늘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과 안드로이드는 서로 사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안드로이드가 감정을 어떻게 느낄 수 있냐며 어떻게 사랑을 하냐며 주인공에게 그것은 헛된 망상이라며 비난했다. 망상이라니, 내 눈 앞에 있는 안드로이드도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데. 안드로이드가 사랑이란 감정을 알 수 없다고? 절대 아니다. 분명 정우는 나를 좋아한다. 지금 이러는 것도 질투심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박민혁."
"응?"
"나 안아줘."
정우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민혁은 정우를 안아줬다.
"나 요즘 너무 속상해. 나 버리지마. 나 외로워. 나 무서워."
"미안해, 정우야... 미안해.."
정우를 안고 있는 이 순간에도 민혁은 정우가 아닌 산하를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혁은 정우를 안은 상태로 잠이 들었다. 진정이 된 정우는 민혁ㄹ 들어 민혁의 침대에 눕히고 기분전환을 할겸 밖으로 나갔다.
산하는 부모님과의 저녁약속을 마치고 서울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놈의 부모님은 참 나랑 말이 통하지 않는다. 오늘도 KNAC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나를 불러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그곳에 입사하라는 지겨운 잔소리를 듣고 왔다.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을 때 아주 놀라운 것을 보았다. 나랑 똑같이 생긴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리 봐도 나랑 너무 닮았다. 왠지 눈이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그냥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갔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번 역은 KNT아카데미, KNT아카데미 역입니다…" 민혁은 평소처럼 하이퍼루프에서 내려 아카데미로 걸어가고 있었다. 출근•등교 시간이라 승강장은 물론 승강장 주변까지 붐볐다. -앞이 안 보여.... 이상하게 오늘따라 인파가 장난 아니었다. -무슨 행사라도 하나? 민혁은 가방을 꽉 쥔 채 사람들을 쏙쏙 피해 걸어갔다. 그 때,
"악!"
누군가 민혁의 손목을 잡았다.
"누구,"
"하이!"
"야! 놀랐잖아!"
산하였다. 산하는 미소 지으며 민혁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이정도의 스킨십은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 많은데 나 어떻게 찾았어?"
"넌 멀리서도 잘 보여. 근데 여기 원래 이렇게 사람 많았나?"
"아니, 오늘만. 아 근데 오늘 왜 이렇게 추운거야~?"
벌써 가을이 되었다. 처음 만났던 여름을 지나 계절의 발걸음은 겨울을 향해가고 있었다. 초록색에서 빨간색으로 세상이 변해갔다. 물론 함께한 시간이 길어진 만큼 산하와 민혁은 더 가까워졌다. 기숙사에 사는 산하가 하이퍼루프 승강장 앞으로 마중 나오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어있었다.
"으휴, 내가 오늘 추울테니깐 옷 따뜻하게 입으라고 메신저 남겼는데 계~속 안보더니. 자."
산하는 민혁에게 흰색 담요를 둘러주었다. 끝에 기하학적 무늬의 자수가 새겨져있는 예쁜 담요였다.
"오! 예쁘네! 어때, 한결 따뜻하지?"
"응. 고마워 산하야."
"ㅎ 넌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
-그러게. 나 이제 너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나 너가 너무,
학교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즘 산하가 입을 열었다.
"아직 수업 시작 하려면 시간 한참 남았네. 밥은 먹었어?"
"아니. 아침엔 별로 안 고프길래 그냥 안 먹었는데 이제 좀 후회된다~!"
"음~ 지금 나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는 건가~?"
"...어휴 알겠어. 사실 나도 안 먹었어. 기숙사 가자. 근데 냉장고에 먹을 게 있을 지 모르겠네."
산하의 기숙사에 도착한 둘은 제일 먼저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
"...뭐야. 너가 내 아침을 걱정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흠... 핫케이크 먹을까? 믹스 있는데."
"그래. 나 좀 누워있는다."
산하는 침대로 걸어가는 민혁을 쳐다보았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는 힘이 없어 보였다. -뭐 힘든 일 있나. 아니면 요즘 시험기간이라 그런 가. 민혁이는 전교 1등이라 나랑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열심히 하니깐. 내심 오늘 민혁에게 맛있는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쉽게도 메뉴가 좀 허술하지만. 민혁에게 맛있는 것도 해주고 전처럼 오붓하게 대화도 나눌 겸. 그래서 평소에 혼자 핫케이크 만들 때 보다 더 정확하게 계량하고 더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소중한 사람이 먹을 거니깐.
연갈색의 핫케이크를 완성하고, 예쁘게 접시에 쌓아 올렸다. 그리고 다행히 남아있던 시럽을 살짝 뿌리고 버터를 올려 풍미를 더했다. 확실히 정성의 힘이 크구나. 냄새부터 확실히 성공이었다. 이제 희뿌연 김이 날아가기 전까지 민혁이만 부르면 된다. 산하는 민혁이 있는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하.... 박민혁.'
-너무 예쁘잖아. 민혁은 침대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누워있었다. 근데 그 모습이 마치 날개 없는 천사 같았다. -아 왜 이러지. 심장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끔 민혁이를 볼 때마다 이런 적이 있긴 했는데 오늘은 뭔가 더 그랬다. -얜 진짜...하.... 뭔가 오늘은 좀 달랐다.
-해도 되는 거 아닐까. 아까부터 살짝 벌어진 붉은빛 입술이 거슬렸다. 살짝 보이는 혀와 치아.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돌겠네 진짜. 몸을 돌려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민혁에게 가까이 가 팔을 톡톡 건드려 보았다. 미동 없음. 별 반응이 없자 무릎을 굽히고 민혁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왼손은 머리 옆에, 그리고 오른 손은 그의 눈을 가렸다. 깨도 보지 않았으면, 몰랐으면 해서. 이젠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목 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 그리고 민혁에게 더 다가갔다. 평소에는 가깝게만 잘 좁혀지던 거리가 오늘따라 좁혀지는 데 오래 오래 걸렸다. 입술이 닿았다. 말캉하고 생생한 무엇인가가 입술에서 느껴졌다. 민혁의 불그스름한 볼을 보며 민혁의 통통한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원래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로 혀를 넣었다. 혀와 혀가 닿자 처음 경험해 보는 감각이 몸에 느껴졌다. 온통 따뜻하고 말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뗐다. 하지만 손은 마저 떼진 못했다. 혹시 깨어날까 봐, 깨어나고 영영 다시 보지 못할까 봐.
그렇게 그냥 서있다가 핫케이크 생각이 나 나머지 손도 다 떼고 민혁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민혁아, 핫케이크 다 됐어."
"우응...응... "
"자, 빨리 앉아."
"와....지인짜 마시있겠다아.."
산하는 민혁을 깨워 식탁 앞까지 걸어가게 했다. 몇 분 전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평소처럼 행동해야 했다. 민혁은 눈 앞에 있는 핫케이크를 보고도 잠에서 완벽히 깨지 못했다. -진짜 깊게 자고 있었나 보네, 다행이다. 안심한 산하도 긴장을 풀고 포크를 들어 달콤한 핫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맛은 역시 괜찮았다. 정성의 힘이었다.
"맛 어때?"
산하의 물음에 민혁은 특별한 말을 하는 대신 엄지를 들어 보였다. 산하는 미소 짓고 입을 열었다.
"너 그런 소리 들어본 적 있지, 이 세상에는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살고 있다는 얘기."
"응 오플앵어(도플갱어)? 그거 보면 둘 중 한 명은 죽는다던데. 근데 왜?"
"아니, 나 며칠 전에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을 봐가지고."
",,,?"
-설마, 아니겠지. 애초에 산하는 여기 부산에 살잖아. 나랑 정우는 서울이고.
"아! 그 날이었다! 우리 같이 서울에서 논 날!!"
-뭐? 서울? 아니야... 아닐 거야. 애초에 정우는 줄곧 집에만 있었잖아. 집에만... 있었나..?
"아, 그래...? 저녁에 봤겠네...?"
"응, 약속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는 정우를 달래주고 어떻게 됐지?? 이상하게. 그 부분만 필름이 끊긴 것 같았다. 안 돼... 안 돼... 기억해야 해...
"민혁아...? 너 볼이 너무 빨개..."
"그래...? 산하야 나 배불러. 잘 먹었어. 미안, 나 먼저 교실에 가 있을게.
"괜찮아?"
"어..."
'띠링'
[산하야, 아빠다. 오늘 저녁은 함께하도록 하자. 꼭 나오렴.☆☆호텔 21층...]
-하 진짜... 그 놈의 KNAC.... 안 간다니까...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고 산하는 서울로 가야 했다. 민혁과 동선이 겹쳐 같이 가자고 했으나, 민혁은 레포트를 마무리 지어야한다며 같이 가지는 못 하겠다며 아쉬워했다. 어쩔 수 없이 산하는 혼자 서울 행 하이퍼루프에 올라 탔다.
서울에 도착해 가족과 약속 장소인 호텔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 또 그 남자를 봤다. 나랑 닮은 그 남자. 내 도플갱어.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에게 걸어가 말을 걸었다.
"저기,"
"예?"
"혹시 잠깐 시간 되세요?"
"어... 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저랑 너무 닮으셔서요!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뻔 한 것을 겨우 참았다.
"그냥, 그 쪽에게 관심이 쥼 생겨서요."
"아,.. 그럼 저희 집으로 가실래요? 이 근처인데."
"좋아요."
그 남자가 데려간 곳은 한 오피스텔이었다. 7108호의 오피스텔.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띠링'
핸드폰에 알림이 왔다.
'초코 브라우니 수령지입니다'
-???? 이게 무슨 상황이지? 초코 부라우니? 내가 민혁이에게 처음 준 선물 아닌가? 근데 이 곳이 왜... 오류인가?
당황한 산하는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이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시는 건가요?"
"아니요. 친구랑 같이 살아요."
"아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19살이요."
"아 저랑 친구네요! 저도 19살이에요."
-일단 침착해, 침착하고... 후,.. 산하는 메신저 앱을 켜 민혁에게 연락하였다.
[민혁아, 너 어디야?]
[나 지금 집 거의 다 도착했어.]
-집 거의 다 왔다고? 이런 말도 안 돼. 민혁이 이 곳으로 들어오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난 차라리 이 사람을 몰랐어야 해.
"저기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신정우 입니다. 그 쪽은?"
"아 저는,"
"산하야?"
-하. 올 것이 와버렸다.
"너가 왜 여기..? 헉,,,!"
민혁은 정우에게 급히 달려와 정우의 뒷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정우의 초롱초롱한 눈이 생기를 잃으며 정우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떻게 이 자리에 산하가 있을 수 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윤산하와 닮은 안드로이드가 있다는 것을 들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 본인에게 들킬 것이라는 최악의 경우는 더더욱.
"산하야, 여기서 뭐하는 거야?"
"되려 내가 묻고 싶어, 박민혁,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이 도플갱어는 뭐야? 사람이 아니었네? 안드로이드야? 설마 너가 만든 거야?"
"산하야 진정해, 제발."
"아니, 민혁아 미안. 난 진짜 진정 못하겠어. 나 먼저 갈게. 집에 함부로 들어온 건 아니야. 정우가 문 열어줬어."
급히 나가는 산하의 허리를 민혁이 뒤에서 감싸 안았다.
"미안해 산하야... 내가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어. 정우는, 그러니까 이 안드로이드 로봇은 내가 만든 게 아니야. 우리 부모님께서 주신 거야.”
산하는 허리에 둘러져 있던 민혁의 팔을 풀고 민혁을 마주보고 섰다.
“부모님..?”
“항상 혼자 생활하는 내가 걱정 되셨나 봐. 정우랑 같이 산지는 10년이 넘어.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말하고 싶었어. 나 안드로이드가 있는데 너랑 무척 닮았다고. 근데 어느 순간부터는 말하고 싶지 않았어.”
“왜?”
“알려줄까, 산하야? 내가 매일 밤 얘랑 어떤 짓을 해왔는지?”
어차피 다 망한 일이다. 민혁은 산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산하에게 다가가 입술을 가까이 했다. 고개를 올려 산하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런 거야. 끔찍하지, 역겹지, 너무 별로지? 너가 너무 좋아서 얘를 너 대용품으로 써왔어. 미안해.”
“끔찍하다니, 왜 그렇게 생각해.”
산하는 허리를 낮추어 민혁에게 짧게 입 맞췄다.
“너무 좋아서 미쳐버리겠어.”
-뭐? 민혁은 산하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무 좋아서 미쳐버리겠다고?
“무슨 소리야?”
“바보야, 이해 못 하겠어? 내가 널 좋아한다고.”
“언제부터..?”
“글쎄, 너보다는 분명 더 먼저 적어도 1년은 더.”
산하는 허리를 낮춰 민혁에게 입 맞췄다. 딸기우유만큼 달콤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으악!”
“신정우! 너 내가 민혁이한테 함부로 안기지 말랬지?! 얘 임자 있다! 아무리 너가 안드로이드여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뭐 어쩌라고, 민혁아 너 체중이 요즘 너무 감소했어, KNAC 생활 많이 힘들어? 부장이 막 괴롭혀? 아니면 회사 식당 음식 맛이 별로야?”
“하하하.. 아니야 회사 일은 괜찮아. 식당 밥도 맛있고.”
“민혁이 체중이 줄어들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민혁이한테만 음식 더 주라고 했는데… 아 내가 요즘 밤마다 괴롭ㅎ.. 아아악!! 아 아파!”
“못하는 말이 없어.”
산하와 민혁은 동거를 시작했다. 다니는 회사가 같았기 때문에 출퇴근을 같이 더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집 같은 회사. 둘은 거의 하루 종일 함께였다. 아침에 일어나 KNAC로 출근을 하고 8시 30분에 회사 로비에서 헤어졌다. 민혁이 36층 사무실에서 KNAC의 실적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산하는 24층 식당에서 민혁과 KNAC 직원이 먹을 음식들을 요리했다. 오후 12시가 되면 둘은 회사 식당에서 만나 산하가 요리한 음식들을 마주 앉아 즐겁게 먹었다. 오후 6시가 되면 둘은 같이 집으로 퇴근 했다. 이것이 둘의 하루 일과였다.
변한 건 없었다. 민혁도, 산하도. 모든 건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너와 함께할 수 있어서. 오늘도 저무는 노을을 보며 소파에 앉았다.
“딸기 우유 먹고 싶다.”
“갑자기?”
“응.”
민혁은 산하의 윗입술을 잠시 머금었다. –네 입술이 딸기우유 보다 더 달콤해.”
-아유 진짜, 이 사랑스러운 것!
산하는 민혁의 볼을 잡고 민혁의 통통한 아래 입술을 물었다. 민혁의 입이 저절로 열리자 혀를 깊숙이 넣었다. 말캉말캉한 혀가 얽혔다. 모든 게 따뜻했다. 오랫동안 혀를 섞다 민혁이 먼저 입술을 떼었다.
“침대로 갈까?”
노을이 지고 밤이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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