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 윤이 (20번)

첫번째2018. 12. 31. 19:34


늦은 저녁, 퇴근시간도 한참이나 지난 버스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줄곧 외로움보다 더 속을 파고드는 쓸쓸함에 잠기곤 했다. 예전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열정 같은 것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다를바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버스에 오를 때가 되면 그때가 되서야 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오전에는 피곤에 쩔어 잔뜩 졸며 회사에 도착했고, 일할 때는 일하느라 정신없고, 야근까지 끝마치고 나서 회사를 나설 때가 되면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내일도 같은 하루를 보내겠지. 살아가야한다는 것은 가끔 나의 의미를 잃게 했다. 분명히 색색으로 잔뜩 칠해져있던 것 같은 나의 하루였는데, 어느새 점점 바래지더니 이제는 색을 아예 잃고 말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늦었네요.”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얼굴이 있었다. 나는 심장부근에서부터 시작해서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한 이 느낌을 아주 오랜만에 경험했다. 추운 것은 아니었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보고는 밝게 웃어온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도 따라 웃었던 것은, 이 무료하고 답답하고 우울한 일상 속에서 유일하게 나의 곁에 새로운 시간들을 심어준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늦은 저녁

w. 윤이

 

 

 

 

 

 

담배 피면 폐 썩는데.’

 

처음 만났던 날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렇게 말했다. 어두운 길목에 비친 가로등으로 입은 교복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린 게 까부네.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소년의 모습은 진지했는데, 나는 그저 픽 웃고는 돌아서려고 했다.

 

왜 맨날 그렇게 슬픈 표정이에요?’

 

돌아서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냥, 한순간 들려온 그 말이, 심장을 푹 찌르고 들어왔다. 가만히 선 내 뒤통수를 계속 보고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뒤에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는 늘 여기 있거든요 아저씨가 담배피고 있는 거 매일 봤고, 슬픈 표정인 것도 매일 봤어요.’

 

뭐가 그렇게 울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어린 소년에게 니가 뭘 그렇게 잘 아냐고 소리칠 뻔 했다. 어른들의 마음을, 니가 뭘 안다고 그걸 그렇게 묻는 거냐고. 몰라서 묻는 거라면 곧 알게 될 거라고. 크게 한숨을 내쉰 내가 다시 뒤를 돌았다. 이미 담배는 필터까지 다 타버린 채였다.

 

담배라도 피면 조금 괜찮아져요?’

 

그럼 나도 알려주세요, 담배.’

교복 입고서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나름 고심해서 한 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너는 아직 어린 아이고, 나는 어른이야, 그 차이를 알려주겠다고. 그럼에도 나는 그 말을 한 것에 내 자신이 상처를 입고 말았다. 나는, 어른인데, .

 

어른 되는 날 오면 알려줄 거에요?’

너 뭐하는 애인데 이 시간에 집에 안가고 그러고 있냐.’

아저씨가 교복 입었다면서요. 저 학생이요.’

학생이 학교 끝났으면 집에 가야지.’

 

나의 말에, 아이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래, 니가 잘못한 거 맞지? 약간은 의기양양해진 표정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윤산하.’

?’

제 이름이에요.’

 

벽에 기대서는 꺼질 듯 말 듯이 깜빡이는 가로등을 보면서 그 애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결국 손에 쥐고 있던 담뱃갑을 잔뜩 구기고 말았다.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애가 갈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거. 억지로 교복을 꿰어입고서 아르바이트를 나가고, 하루 종일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늦은 저녁 야자시간이 끝나는 시간에 마쳐서 집에 돌아가고 있다는 걸. 그래서 그 애는 내가 사는 아파트 앞을 전전하고 있던 것이었다. 추울 텐데 점퍼 하나 걸치지 않고 교복에 마이만 달랑 입고서 돌아다니는 모습은 나의 부성애 같은 것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아빠가 고등학교는 나와야한다고 그래서요.’

아빠 어디계신데.’

여기 없어요. 결혼 했거든요.’

그럼 굳이 그렇게 다니지 않아도 되잖아.’

그냥, 이렇게 하고 싶었어요.’

 

앞부분만 잔뜩 헤져서 덜렁거리는 교과서의 맨 앞에는 20번 윤산하, 라고 적혀있었다. 보지도 않을 책을 가방 안에 가득 담고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아이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안타까웠다. 돌봐줄 사람 하나 없이 시간을 보내니 당연히 모든 것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집에 가.’

아직 시간이 안됐어요.’

누가 감시해?’

, 아마?’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게 장난인줄만 알았다. 하도 어른 놀려 먹는 방법을 잘 아는 아이라서, 그냥 하는 말 인줄 알았다. 평소처럼 원룸 건물의 벽에 기대서는 나를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빛은 뭔가, 조금 들떠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훨씬. 버릇처럼 츄리닝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려는데 금방 소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 나이 먹고 엄마한테도 고나리 받을 일 없었는데, 까칠한 소년 때문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빈손을 꺼냈다.

 

담배 끊으라고요,’

언제는 담배 알려달라며.’

알려줄 거에요?’

화색이 도는 얼굴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SH그룹의 이사가 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던 날이었다. 주위에서 저저, 나쁜놈. 저 자식이 그 자식 아니야? 그 데릴사위인지로 들어갔다는. 혀를 끌끌 차며 신나게 이야기 하시는 과장님의 말을 들으며,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무심하게 뉴스를 보면서, 썩어빠진 세상에 탄식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 애가 생각이 났다. 산하는 처음 대화를 나누고 난 이후부터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늘 나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서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없으면 기다려지더라. 안 그래도 어디 갈 데도 없는 애가 눈에 안보이면 괜히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쓰였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봐.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았고, 오늘 산하는 나의 원룸 건물로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창문 밖에 대고 한참이나 그렇게 줄담배를 피워댔는데도, 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리면서 결국 고개를 숙였다. 이제 와서 갑자기 뭘 기다리는 거야.

 

아저씨.”

 

아직도 수리 되지 않은 깜빡이는 가로등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니, 산하가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 얼굴에 빛이 깜빡, 깜빡, 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놀란 내가 급히 담배를 비벼 끄고는 자켓을 걸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서도 다급한 마음이 자꾸 차올라서, 속이 아팠다. 입구를 빠져나오니, 기다렸다는 듯이 소년이 있었다. 산하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은 내가 이리저리 살피다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터진 입술이며 살짝 멍이 든 얼굴은 결국 눈물이 나게 했다.

 

왜 그래, .”

들켰어요.”

괜찮아?”

아니여, 안 괜찮아요.”

 

터진 입술이 쓰라린 듯 발음이 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무슨 일 때문에, 왜 이렇게 된 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속이 상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나 오늘만 재워줄 수 있어요? 목소리를 낼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소년의 얼굴을 감싼 나의 손을 감싼 소년이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담배냄새 나. 또 담배 폈죠.”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말해오는 소년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냥, 처음부터 더 관심을 가질 것을 그랬다. 사실 나는 그동안 삶에 무료함에 지쳐 사랑도, 누군가에 대한 관심도 잔뜩 메마른 사막 같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런 나를 잔뜩 헤집어놓은 이 아이는, 사막 같은 나를 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이 아이는. 단순한 정이 들어서가 이유인 것만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마음이 아팠다. 나는 어른이고, 소년은 아이니까.

 

산하를 집에 들이고 나서는 바로 씻는 일부터 먼저 시켰다. 크게 다칠 만한 일도 없고 다치면 바로 병원에 가는 편이라 변변히 응급처치를 해둘 것이 연고나 데일밴드 뿐이었다. 산하를 욕실로 집어넣고 나서 먼지가 쌓인 구급상자를 물티슈로 닦아냈다. 잔뜩 마음이 쪼그라들어있었다. 아이에 대한 걱정에 더불어, 나에 대한 걱정까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거 봐요, 아저씨 바지 엄청 짧아.”

 

킥킥대며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까 그래도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침대에 앉아 옆을 툭툭 치며 이리오라고 하니 머뭇거리다 걸어오는 모습은 웬일로 산하답지 않았다. 잔뜩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함부로 물어볼 수도 없었다. 혹시 말하기 어려운 일일까봐. 앉은 아이의 얼굴을 돌려 손에 연고를 짜냈다. 누군가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은 학창시절 이후에 처음이었다. 어색하게 터진 입술 끝부터 약을 발라대니 아이가 잔뜩 엄살을 피워댔다.

 

, 아저씨 이런 거 디게 못하네요. 어른이 돼도 못하는 거는 있네.”

미안하다.”

장난이에요, 장난.”

 

시무룩해진 나의 얼굴을 보던 소년의 표정이 금방 나를 따라 시무룩해졌다. 나 왜 이렇게 됐는지 말해도 돼요? 물어오는 말에 약을 바르던 손이 멈추었다. 쓴 웃음은 소년이 지을만한 것이 못되었음에도 아이는 아픈 웃음을 지었다.

 

아빠한테 학교 안다니는 거 들켰어요.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 거 많은데, 너까지 왜 그러냐고 막 맞았어요. 근데 저는 아빠가 나한테 뭘 해줘도 별로 기쁘지가 않았어서 차라리 나 혼자 뭐든 해보고 싶었어요. 어차피 나는 아빠랑 같이 살수도 없고, 이제부터 계속 혼자 살아야하니까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아저씨.”

산하야.”

그리고 나, 아저씨한테 담배 말고 다른 거 배우고 싶어요.”

 

나 아저씨한테,”

 

산하의 말을 다 듣지 못하고 입술을 맞대었다. 아이라도, 어리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울 만큼 아픔도 생각도 많았을텐데. 잠깐 놀란 듯이 굴던 아이가 나의 뒤통수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나는 소년을 보면서 조금 더 자란 어른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했었는데, 생각보다 나와 소년은 비슷한 선상에 서있었다. 사실은 감정에서도, 무엇을 끊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산하보다 훨씬 더 어렸을지도 모르지. 입 안으로 타고 들어오는 뜨거운 살덩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음에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아이를 위로할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나를 위안했다. 넘어온 혀에서는 쓴 연고의 맛이 났다. 나와 산하는 그렇게 한참이나 입술을 부볐다. 어느새 뒤로 넘어간 내가 누운 채로 아이의 키스를 받아내고 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자 그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아저씨, 나 이제 어른이에요.”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나를 보며 다시 밝게 웃은 산하가 짧게 쪽,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고개를 들어 본 자명종의 시계초침은 어느새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박민혁씨, 좋아해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살며시 눈을 감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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