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쥐팥쥐전 / 햄보끄 (콩쥐팥쥐전)
네번째2020. 4. 10. 20:46콩쥐는 죽었다. 팥쥐는 죽였다.
콩쥐의 어머니가 죽자 계모가 자신이 낳은 딸 팥쥐를 데리고 콩쥐의 집으로 들어온다.
,
신발을 발견한 원님이 콩쥐에게 돌려주면서 결국 콩쥐와 혼인한다. 그러자 질투가 난 팥쥐가 콩쥐를 유인하여···
-혁아
“어 아저씨 안녕하세요!”
-니 웬일로 일찍 일어났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오 책 좀 읽었나보제
“모기에 물렸습니다.”
-그랬구나. 그랬어. 아버지는?
“아빠 아직 주무셔용”
-이따 점심 먹고 아저씨 집으로 와달라캐라
“넹 들어가세용”
아침 댓바람부터 철봉에 매달려 있는 이 남자의 이름은 박민혁. 아직 이른 봄이지만 아침바람 따위 두렵지 않은 낭랑 19세.
“아추추 들어가야겠다.”
..여튼 열아홉이다. 코가 빨개져서는 훌쩍 거리고 나서야 슬리퍼를 찍찍 끌며 집으로 올라갔다. 꽁꽁 얼어 감각도 없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누르고 잽싸게 들어가자 느껴지는... 스팸냄새.
“아빠!”
-어디 갔다 오냐
“놀이터요”
-오늘 아침 기온이 마이너스란다 마이나스!
“아빠 아들 열아홉이다~”
-가시나야 수저나 논나
“그놈의 가시나 가시나... 내가 진짜...”
-우리 딸내미 많이 먹어라
“아빠 좀!”
-ㅋㅋㅋ뭐
“으이그 또또 스팸 또또 후라이 좀 건강하게 좀 무라고”
-또 시작이나 니는 애기가 입맛이 왜 그러냐
“아빠는 아저씨가 입맛이 왜 이라는데”
-쪼끄만 게 뽀시락 대기는
결국 굳이굳이 김치찌개를 끓여온 민혁이 두부를 볼에 한가득 욱여넣고서는 입을 오물댔다.
“아 맞다”
-뭐
“아까 재원 아저씨가 점심 먹고 오라 하던데여”
-재원이? 알았다.
“웅”
-아빠한테 응이 뭐고
“웅”
-쪼끄만 게
“아빠 아들이거든”
-쪼끄만 게
그릇을 싹싹 비우고 소파에 흘러내려 있었는데 배도 부르겠다, 해도 떴겠다. 눈이 슬슬 감기고 금세 바닥으로 굴러가서는 또 새근새근 잘만 잔다.
벨소리에 놀라 눈을 뜬 민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두시. 아빠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아씨 아빠 좀 깨워주지...
.
.
.
-혁아 아빠 간다
“웅... 어디여..”
-재원이
“웅 아라써,,,”
-빨리 인나라
“웅...”
.
.
.
민혁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렸을 뿐 아빠는 분명 깨웠다. 학교도 안다니겠다, 동네에 친구도 없겠다. 민혁은 해가 떠있는 따뜻한 시간에 놀이터로 가서 고양이를 쓰다듬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근데 벌써 두시라니. 고양이랑 놀 시간을 두 시간이나 버렸다. 집업 하나 걸치고 또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니 아침과는 정반대로 덥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날이 좋았다. 놀이터 구석의 작은 단상위로 자연스럽게 올라가 주머니 안에서 굴러다니는 아몬드 일곱 개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가만히 앉아있으니 고양이 한 마리가 무릎위로 올라와 앉았다. 그동안 참치를 갖다 바친 성과였다. 뿌듯해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다른 열아홉들이 민혁을 보면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이게 하루의 전부였다. 아침엔 일어나서 밥 먹고 TV보고 낮엔 밥 먹고 나와서 고양이 보고 저녁엔 밥 먹고 자고. 고양이들이 너무 예쁜 탓도 한 몫을 했고, 고양이 핑계를 대고 산하를 기다리기도 했다.
작년 가을 오후 세시. 민혁은 평소보다 뜨거운 날씨에 맨투맨을 입고 나온 걸 후회하며 단상에 대자로 누워 고양이들에게 밟히고 있었다.
“저기”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동그란 까만색.
“깜짝이야”
“그 고양이”
“누구세요”
“안아 봐도 돼?”
“네... 뭐... 아니 근데 누구세요?”
하복입고 삼선에 갈머까지 세트로... 이야 이 새끼 가관이네 하고 얼굴을 보고 눈이 멀었습니다. 절대 잘생겨서 눈이 먼 게 아니라요, 해가 밝아서 눈이 멀었다고요. 아시겠어요? 절대 해가 밝아서가 아니라 쟤가 잘생겨서요. ...엥?
“이름이 뭐야?”
“박민혁이요.”
“민혁이?”
“네 근데 누구시냐고요”
“민혁이 쓰다듬어 봐도 돼?”
“네? 아뇨 그건 좀”
“아.. 그래...”
“네...”
“한번만...”
“아.. 뭐... 네”
“(쓰담쓰담)”
“그... 걔 말고 제가 민혁이거덜랑요”
“아”
“아”
싸늘하다. 가슴에 비숑이 날아와 꽂힌다.
“이름이 민혁이야?”
“네.”
“이름 예쁘다.”
“아... 네...”
“나는 산하야. 윤산하.”
“아... 네..~”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
“아... 네”
“?”
“네?”
“”
“아”
싸늘하다
“세살이요”
“어?”
“네?”
“너 세 살..?”
“아니 고양이가..”
“아..”
“”
비숑비숑
“저는 열아홉 살인데요...”
“열아홉 살?ㅋㅋㅋ”
“네 몇 살이신데요.?”
“형 오늘 날씨 진짜 덥죠”
“야”
“예?”
그게 둘의 첫 만남이었고.
눈이 쌓여 눈 위를 아장아장 걷고 있을 때
“형”
동복에 후리스. 그리고 여전히 검정삼선. 머리는 눈 마냥 하얘져서는 온 산하였다.
“어? 산하! 또 왔네? 여기 사나”
“아뇨”
“뭐야”
“보고 싶었어요.”
“코나 닦아라”
“킁”
이게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
“형”
오늘은 그냥 티 한 장에 슬랙스. 그래도 여전한 검정 삼선. 머리는 아직 하얗네.
“왔나”
“보고 싶었어요.”
“신발 끈 풀렸다.”
“묶어조”
“넌 뭐부터 배울래.”
“ㅋㅋㅋㅋㅋ아 왜용”
“너는 학교 안다니냐?”
“그러는 형은요”
“난 안다녀”
“아?”
“안다니냐고”
“다녀요.”
“지금 두신데? 목요일인데? 왜 여기 있냐?”
“오늘 개교기념일이라 학교 안 갔어요.”
“전에는”
“전에? 아 그 땐 아파서 조퇴”
“지랄하넹..”
“진짠데..”
“야 김밥 좀 사와라”
“이제 하다하다 삥도 뜯는 거예요?”
“배고파 점심도 못먹었따고”
“알았어요. 기다려봐”
“진짜 갈라고?”
“사달라면서요--”
“웅 갔다왕”
“말리진 않네..”
“뭣하러”
“그래요...”
“ㅋㅋㅋ아냐 안 먹어도 돼”
“내가 먹고 싶어서 그래요 급식 안 먹고 나왔어”
“개교기념일이라며”
“갔다 올게요.”
“양아치새끼...”
아파트 단지에서 내려와 민혁의 시야에서 벗어난 산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혀나아 어디야?”
-저 학교
“형 김밥 두 줄만 사다주라”
-네.? 아니.. 어딘데요?
“몰랑”
-예?
“ㅋㅋㅋ여기 거기야 어디지 너 전 여친 알바 하는 데.”
-씨유요?
“어 거기 옆 아파트.”
-언제 또 거기까지 갔어요..
“아아아 형 배고파아아아 얼른와아아앙”
-과학인데..
“동혀이 가오 다죽었눙..”
-ㅋㅋㅋ가요
전화를 끊은 산하는 벽에 기대어 놀이터를 바라봤다. 얌전히 앉아서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찰랑거리는 동그란 뒷통수가... 진짜 귀엽다.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저 형은 뭔데 저렇게 귀여워? 짜증나네? 아 진짜? 귀엽네?!?
한참을 앓다가 갑자기 산하는 미친 듯이 제자리에서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에서 저를 부르며 달려오는 노란 머리가 보였다.
-형!
“좀 빨리 오지”
-학교에서 여기까지 그냥 걸어와도 12분인데 저 지금 10분만에 왔거든요
“ㅋㅋㅋ알았어 이제 가”
-근데 왜 두 개나 사요?
“알아서 모하겡~ 가 얼릉”
-알았어요 갈게요... 형 혹시 여친 생겼어요?
“그런 거 안 만들어ㅋㅋ 안가냐?”
-ㅋㅋ아 알았어요... 근데 땀은 왜 흘려요?
“싸울래?”
-갈게요!
산하 손 한번 흔들어주고는 강아지마냥 순해져서는 다시 민혁한테 달려갔지. 아무것도 모르는 민혁 땀 흘리는 산하보고 눈 동그래져서 벌떡 일어나
“야 천천히 갔다 와도 되는데”
“배고프다면서요. 아니 여긴 김밥천국도 없어요?”
“나가면 바로 고봉민 있는데...”
“...말을 해주지”
“그걸 못 본 니가 병신...”
“...먹어요”
“웅ㅎㅎ”
동현이 보면 고소각인 연기 완벽하게 해내고 숨 돌리면서 고양이 쓰다듬고 있는데 손 위로 날아온 초록색 막대기? 엥 하며 민혁 바라보니 ㅎㅎ... 거리고 있다. 아니 이게 왜 거기까지 가지..? 하면서 산하 손 위에서 오이(a.k.a. 초록색 막대기) 건져낸다.
“형 오이 안 먹어요?”
“응 맛없어”
“나이가 몇 갠데 편식을 해요”
“오이 좋아하냐? 와 그런 앤 줄 몰랐는데. 실망이다.”
“...?”
“ㅋㅌㅋㅋㅋ니도 먹어”
“알았어요”
“야”
“네?”
“너 집 나왔지”
숨이 턱 막혀 사례가 들렸다. 갑자기? 맞는 말이긴 한데, 형은 맨날 세상 순한 얼굴로 콕콕 찌르더라.
“에이 뭔..~ 나 엄마 없음 못살아요.”
“아닌데... 냄새 나는데...”
“형 가출했어요?”
“뭐래 집 나가면 개고생 모르냐 집이 얼마나 따뜻하고 좋은데”
“형은 엄마랑 사이 좋나보네 부럽다”
“없어”
“어?”
“없어 엄마”
아빠 없다는 얘기. 한 번도 입술을 깨물지 않고 말한 적이 없는데. 형은 엄마가 없다는 얘기도 무슨 잘 지냈냐고 물어보듯 아무렇지 않게 했다.
“어 미안해요”
“괜찮아 엄마 기억도 없어 나 태어나고 두 달도 안돼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대.”
“그럼 아빠랑 둘이서만...?”
“응 둘이서만”
“어.. 뭐”
“ㅋㅋㅋ꼴에 눈치는 보이나 보다? 재혼은 안하셨어. 엄마한테 미안해서 그러나 했더니 아니라하고,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나 해도 아니라하고, 그럼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했더니 그건 또 안된다하대. 뭐 해도 나 스무 살은 꼭 넘기고 결혼하겠단다.”
“그렇구나.. 그래도 좀 부럽다”
“여기서 뭐 부러울 대사가 있었나?ㅋㅋㅋ”
“...난 아빠가 없어요.”
“그래서”
“응?”
“그래서 어쩌라고 위로라도 해주리? 내 처지에,ㅋㅋ”
형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를 꺼냈는데, 형은 당황하지도 않는다. 왜 이 형 앞에만 있으면 혼미해지는 지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그건 다 니 잘못이야”
“?”
“아버지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니가 문제라고.”
“”
“애초에 생각이 그따구인데 어떻게 엄마랑 잘 살겠냐고”
담임이 저 말 할 땐 들리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지. 형한테 들으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게 다 잘못된 것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산하야 말리지 말자. 저 형도 나한테 별 도움이 안되겠구나.
산하는 모든 일을 합리화 시키는 습관이 있다. 자기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게끔. 조금 다른 감정을 느끼긴 했지만 민혁에게도 다를 것 없이 민혁이 한 말을 모두 자기 합리화 시켰다. 형은 내 편이 아니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형이 잘못된 거야. 형은 못된 사람이야.
“형은 내 편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또 철없는 소리한다 초딩이”
“진짜 쪼끄만 게”
“안 작거든!”
대화를 마무리 짓고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대충 얼버무리고 가려고 했는데 안 작다고 발끈하는 꼴을 보니 와중에 귀엽다는 생각에 또 피식 웃었다. 민혁이 싫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자각을 했음에도 웃는 자신을 보고 속으로
윤산하 미쳤다. 나 미쳤다 어떡하냐 진짜. 박민혁 미친놈
민혁을 욕하면서도 산하의 눈에선 꿀이 떨어졌다. 미친놈이다 미친놈.
시간은 벌써 세시가 지났고 산하와 민혁은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며 돌아섰다. 형 들어가는 거 보고 가겠다는 산하 굳이 버스까지 타는 꼴을 보고서야 민혁은 집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생각해봤는데 아침부터 영 찝찝했다. 재원아저씨가 아빠를 부른 게. 두 분이 원래 자주 얘기를 나누긴 하지만 그냥 뭔가 오늘은 영 감이 안 좋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찝찝해서 12층인 집이 아닌 8층에서 열림 버튼을 눌렀다. 아저씨집인 806호에 귀를 바짝 대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뭐. 그래봤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겠냐며 다시 엘베에 탄 민혁은 가볍게 집으로 갔다. 세시쯤이면 아빠가 집에 있어야 하는데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가벼워졌었던 가슴이 순식간에 다시 쿵 하고 무거워졌다. 왜 하필 지금 없는 건지 일단 아빠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방문을 열려던 순간,
손을 먼저 씻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당.
물기를 대충 옷에 닦고 다시 방에 들어가려던 민혁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얼었다. 방안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아저씨랑 같이 있었구나. 평소였으면 들어가서 인사하고 자연스럽게 물도 떠다드렸겠지만 오늘은 뭔가 불안해서, 별건 아니겠지만 잠깐 멈췄다. 너무 탐정놀이인가.
-그래도 아직 애한테도 좀 미안하고
-누구 혁이?
아저씨의 입에서 민혁의 이름이 나오고 민혁은 살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열아홉밖에 안됐는데 아직은 안 되지
-벌써 열아홉이네. 늦었어 지금이라도 알려줘야지
-그런가, 늦었나.?
-니 말대로 내년에 스무 살 돼서 아한테 알리면. 스물 평생을 살면서 엄마가 지 낳느라 죽은지도 모르고 니만 믿었는데, 잘 키운 아들 나쁜 거 배워오면 어쩌려고. 스물이면 고삐 풀려서 뵈는 것도 없다.
-...난 모르겠다. 머리 아프다.
엄마가 지 낳느라 죽은 지도 모르고.
그랬구나. 우리 엄마는 나를 낳느라 돌아가신 거구나. 딱히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드는 생각이라 해도 왜 별 생각이 없지? 그 정도였다.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빠가 나왔다. 그리고 아저씨도 나왔다.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는 내 눈을 피했다. 아저씨가 나를 안으며 말했다.
-니 왜 우나 다 들었나, 괜찮다. 괜찮다 혁아.
사실 민혁은 엄마가 저로 인해 죽었단 얘기를 듣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너무 놀란 탓이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단 사실조차 자각 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놀란 바람에. 엄마가 나 때문에 죽었구나 라는 죄책감보단 엄마가 죽었다. 라는 말을 듣고 슬퍼하는 자신에게 놀라서였다. 지금껏 엄마라는 말에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없어요. 라고 대답하던 민혁이었기에
엄마 없이 자란 애란 말을 들어도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사실 느끼지 못했던 게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비워진 엄마의 자리라 놓아버린 거였는데. 민혁도 궁금했다. 나는 왜 엄마를 원하지 않는 거지? 한참을 돌고 돌아도 그에 대한 답은 항상 이거였다. 나는 엄마가 필요 없구나. 그도 그럴 것이 엄마 없이도 너무나 잘 살아왔으니까, 부러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줄로만 알았다. 6학년 겨울방학이었다. 방학식을 끝내고 교과서, 실내화, 한 달 치 우유와 학교에서 썼던 여러 물건들. 책가방 한 개론 턱도 없는 짐들이었다. 아빠 오늘 야간근무다. 오늘 아침에 소금김만 대충 접시에 담아 식탁에 내려둔 아빠는 야간근무라는 말만 남기고 구두를 탁탁대며 집을 나섰다. 민혁은 친구들과 손 인사를 하며 책가방과 학교에서 빌린 종이백들을 들고 교문을 나섰다.
-야 안 무겁냐? 아빠 안 오셔?
-저 새끼 애미 없잖아ㅋㅋㅋ얼른 와 병신아
-아.. 어
무서울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6년간 봐온 친구들. 나름 적당한 관계를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걔네한텐 불쌍한 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듯 했다. 그리고 중학교 입학식을 한 날을 기점으로 민혁은 더 이상 학교라는 곳을 가지 않게 되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민혁은 펑펑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 못가겠다고. 저긴 지옥이라고. 차라리 죽어서 천국을 가겠다고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서지도 못하고 눈은 부어서 뜨지도 못한 채로 아빠한테 빌었다. 그렇게 민혁은 자퇴를 했고 그동안 받지 못했던 아빠의 관심이 쏟아졌다. 자퇴를 하고 한동안은 사람을 못 만났다. 그냥 아빠랑 단 둘이 집에 있는 게 좋기도 했고 그러다 아빠와 마트에 갔다 오는 길에 우연히 길고양이를 발견했다. 그 후로 쭉 놀이터에서 고양이를 키우다시피 했고 그 해 한여름. 밤에 집에 있자니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아서 2시에 아빠 몰래 밖으로 나와서 단상에 앉아있었다. 골목에서 학생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저런 애들한테 내가 고개 숙일 필요가 없었구나. 그 후로 종종 새벽에 나오고 골목에서 오가는 이런 저런 말들에 저절로 독해진 것 같다.
아저씨에게 안겨 울다가 정신이 드는 순간, 아저씨의 어깨 너머로 아빠와 눈을 마주쳤다. 아빠가 눈을 피했다. 그동안 굳게 믿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내 눈을 피했다. 그동안 가장 듬직했던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저씨의 품에서 빠져나와 집을 나갔다. 집에 있으면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아서. 민혁아. 기다려봐. 아빠가 어깨를 잡아 나를 세웠고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가 밉지 않았다. 싫지도 않았다. 왜 그랬는지도 잘 알고 있지만 이성을 놓아버렸다. 아빠 지금까지 나한테 거짓말 한 거예요? 그렇게 당당한 얼굴로? 내 말을 들은 아빠는 초점 잃은 눈으로 나를 주시했고 손에 점점 힘이 빠지더니 팔을 축 늘였다. 이번엔 내가 먼저 눈을 피했다. 아빠를 뒤로한 채로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1층에서 올라오고 있다. 씨발 진짜 되는 일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계단으로 미친 듯 달려 내려갔다. 아빠가 오길 바라면서도 잡히지 않길 원하면서. 아파트를 빠져나오자 옷 속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에 긴장을 해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그렇지만 놀이터까지 또 달렸다. 사냥꾼에게 쫒기는 사슴처럼 긴장을 하고 있었다. 단상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다리에 힘이 다 풀려 앉아 있기도 힘들어 힘없이 쓰러졌다. 막상 나오니 더 숨이 막히는 듯 했다. 정신을 차리고 숨을 쉬어 보려 해도 심장이 자꾸 뛰어 조절이 안됐다. 결국 다시 허리를 세웠다. 쓰러지면 숨이 안 쉬어지는데, 일어나면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숨이 가쁜 와중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형 피나요 하지 마”
뒤에서 들리는 말이었다.
“어?”
“입술 깨물지 말라고요.”
민혁이 고개를 돌리니 산하가 서있었다. 오전과 똑같은 차림으로. 산하를 보자마자 민혁은 참았던 눈물이 결국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멀찌감치 서있던 산하가 머리를 긁더니 조심스레 다가와 살짝 안고서는 민혁을 토닥여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숨 쉬어요”
“엄마, 산하야, 엄, 엄마 내가, 나,”
“응 엄마가, 천천히 얘기해요. 괜찮아. 진정하자”
연신 괜찮다며 토닥여주는 산하에 민혁은 진정이 되어 어느새 꽉 안은 산하의 허리를 놓아주고서는 큼큼 댔다.
“이제 괜찮아요?”
“..어”
동생 앞에서 너무 철없이 군 것 같아 조금 후회됐다. 쟤는 뭘 안다고 토닥여 주고 있어...
“왜 이러고 있어요, 해도 다 졌는데”
민혁은 숨을 몇 번 가다듬고 산하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아빠가 미운 것도 아니고 왜 그랬는지도 다 이해 되는데 그냥 답답해서...”
“그랬구나.. 놀랐겠다. 괜찮아요 그럴만했어. 잘못한 거 아니네 뭐”
“그치..? 근데 아빠두 놀라가지고..”
“형 걱정이나 해요. 눈 팅팅 부어가지곤”
“왜 뭐... 근데 왜 아직두 여기 있냐”
“어? 이제 곧 가려고 했어요.”
“너 옷에서 담배 냄새 나..”
“골목에 있다 와서 그런가 봐요ㅋㅋ”
“골목에 있었어?”
그냥 순수한 의도로 물은 것 같은데 젖은 얼굴로 올려다보니 괜히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말을 돌렸다.
“뭐 형사에요?ㅋㅋㅋ 그냥 있었어요. 내가 그런 거 할 애 같아요?”
“충분히...”
“쪼그만 게”
“주글래 쪼매나”
훌쩍대는 와중에도 할 말은 하는 형이 오늘도 오지게 귀여웠다. 저거 어떡해. 확 들고 튀어버려.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민혁이 먼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 안되겠다. 먼저 간다.”
“갑자기요?”
“아빠 걱정되잖아.. 나 진짜 나쁘게 쳐다봤는데...”
“별 게 다 걱정이다... 알았어요 가 봐요”
“또 보자 언능 들어가고”
“네”
민혁이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까지 확인을 하고서야 산하는 뒤를 돌아 땅에 떨어진 담뱃불을 밟아 껐다. 골목에서 한 대 피우고 있었는데 형 소리가 나서 그대로 달려왔다. 냄새 날까 봐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는데 너무 서럽게 우는 거야. 그래서 대충 담배 던지고 안아줬지.
민혁은 집에 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아빠에게 얘기를 들었다. 사실 아빠도 지금 재혼 계획이 있고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결혼을 하려면 너한테 엄마 얘기를 정말 솔직하게 해야 할 것 같고 지금은 네가 너무 어려서 상처받고 아빠를 미워할까 봐. 그래서 성인이 되고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생각이 컸을 때 말해주려 했다고. 충분히 이해됐다. 어쩌면 더 편안했다. 이제 아빠도 내가 아닌 다른 동반자가 생겼다니까 더 안정됐다.
솔직하게 다 털어놓은 아빠는 그날 이후로 눈치도 보지 않고 자주 나가 그 분을 만났다. 민혁은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뿌듯했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무거웠다. 산하가 그 날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자주 만나진 못했어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전화를 했던 산하인데 문자 한 번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을 하던 민혁은 습관 때문에 산하가 그 날 저의 얘기를 듣고 달라진 거라고 생각했다. 쟤도 똑같은 애였구나. 또 나를 무시하는구나. 잘 알지도 못하는 애한테 다 털어놓는 게 아니었는데, 나름 좋은 아이였다고 생각했던 산하였기에 민혁은 꽤 충격이 컸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간에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갔다. 어느새 아빠는 준비가 다 되어있었고 이제야 민혁에게 새어머니가 되실 분을 소개 시켜준다고 했다. 차에 타서 그 분의 집으로 가는 길에 민혁은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아빠에게 쉴 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옆 동네에 살고, 그 분도 사고로 남편을 잃으셨고, 민혁 또래의 아들이 한 명 있다고 했다. 민혁은 새어머니와 새 형제가 생긴다는 사실이 부끄럽거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가 더 컸고 그 쪽에서 자신을 싫어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멀리가지 않아 차를 세웠다. 평범한 아파트였다. 옆엔 바로 학교가 있었다. 산하도 여기에 다니려나.. 민혁은 밉긴 하지만 산하를 떠올렸다.
혹시 꿈인가, 차에서 내리니 아파트 입구에서 저에게 손을 흔드는 산하가 보였다. 산하와 마주치자마자 민혁은 쪼르르 달려가 장난스레 멱살을 잡으며 물었다.
“너 여기 살아??”
“왜 전화 안했어?”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잖아;;”
“나 오늘 아빠 그 분 보러 왔어”
“ㅋㅋㅋ천천히 얘기해도 돼요. 나 여기 살고, 사정이 생겨서 전화는 못했고, 아무 일 없이 잘 살고 있었고, 그거 나도 들었어요.”
느릿하게 걸어오던 아빠가 민혁에게 물었다.
-친구니?
“응! 여기 산대 놀이터 자주 놀러와 고양이도 엄청 좋아한다?”
-그래? 앞으로 여기 자주 올건데.. 우리 민혁이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네..”
“아빠 가자!”
-그래, 가자
“나도 같이 가요 심부름 갔다가 들어오는 길이에요”
“그래! 가자”
방방 들뜬 민혁은 산하와 아빠의 손을 꼬옥 잡고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
“아빠 몇 층이야?”
-5층
“너는?”
“나도 5층”
“오오 신기하네”
셋은 그렇게 같이 5층으로 올라갔고 민혁은 아빠를 앞세워 걸었다. 계속 졸졸 따라오는 산하에 민혁은 가 봐도 된다고 했다. 우리 집 가는 거예요ㅋㅋㅋ 이쯤 되면 눈치 챌 법도 한데 민혁은 또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며 걸었다. 그렇게 가장 끝 집까지 가서야 아빠는 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아 떨린다.. 산하야 이따 보자!”
“네”
민혁은 집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산하가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풀어서 문을 열었다.
“어?”
“왜요?”
“너가 왜”
“우리 집,”
박민혁 인생 한번 스펙타클하네.
“아빠 나 잠깐 밖에 좀”
“같이 가요”
“..나와”
흥분해서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방방 뛰며 따지는 민혁에게 산하는 하나하나 천천히 답변을 해주었다.
“그니까 니가 내 동생이 될 거고, 알면서 안 알려줬다?”
“네”
“왜?”
“형은 왜 그렇게 흥분 했는데요 내가 싫어요?”
“니가 싫은 게 아니라, 아니 오히려 좋아. 좋은 동생 생겨서 좋지 근데 좀 당황스럽잖아. 너는 왜 말 안 해줬는데. 넌 내가 싫어?”
“네 싫어요”
그렇게까지 걱정하던 일이이었는데, 결국 싫다는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이 때까지 잘 지내놓고서 내가 형인 건 싫어?”
“응”
“”
“형”
“”
“형”
“”
“형을 좋아하는 것도 힘들어요. 근데 우리 형을 좋아하라고 하면 나는 좀 아플 것 같아. 형이 그냥 형이었으면 좋겠어. 우리 형 아니었으면 좋겠어.”
산하는 담담한 듯 고백을 했다. 사실 긴장했지만 꽉 쥔 손 따윈 민혁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민혁은 멍하니 땅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산하에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못들은 걸로 할게. 둘만 아는 거야.”
“...응”
다시 올라가는 엘베 안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5층 문이 열리고서야 산하가 한마디를 했다.
“괜찮아요. 못들은 척 해요.”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 못들은 척을 하냐고. 서둘러 빠져나와 앞장 서 걸었다. 그래봤자 다리는 산하가 한 뼘 더 길었다. 산하가 비밀번호를 눌러주는 동안 민혁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괜찮다구요ㅋㅋ 긴장 풀어요.”
웃으며 말해주는 산하에 민혁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일은 수월하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결국 산하와 민혁은 형제가 되었다. 아직 산하에게 아빠, 민혁에게 엄마라는 말은 어색했지만 아저씨 이모로도 부모님들은 만족해했다. 산하도 민혁도 그 날의 고백은 잊은채로 사이좋게 지냈고 집도 합쳤겠다. 항상 집에 친구들을 불러오는 산하 덕에 민혁은 친구도 많이 생겼다. 그리고 오늘도 해가 떴다.
-산하야 밥 먹고 가
아직 자고 있는 가족들을 깨우지 않으려 조용히 학교에 가려던 산하는 어머니에게 붙잡혔다. 오랜만에 엄마와 단 둘이 나누는 얘기였는데 다시 짜증이 났다.
“배 안고파요”
산하가 대답을 해준 것만 해도 엄마는 기분이 좋았다. 말없이 사라져 말없이 일을 저지르던 전과 비교하면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래, 일찍 들어와. 요즘 일찍 들어오더라 좀 뿌듯해?ㅎㅎ
“오늘 동현이네서 자”
-아직도 걔랑 노니?
“아 어쩌라고”
결국 또 싸한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엄마를 뒤로한 채 엄마에게 들리지 않게끔 작게 욕을 지껄이고 산하는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산하가 문을 닫는 소리에 잠에서 깬 민혁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이모! 여덟시에요?”
-어 일어났니? 응 여덟신데 무슨 일 있어?
“헐”
-왜 그래
“밥 먹어야 돼요.. 밥... 계란찜 어때요”
-ㅋㅋㅋ좋지 앉아있어
“에이 앉아계세요 제가 할게요”
-그럴래? 고맙다
잘 키운 자식 하나, 남의 자식 안
부럽다. 진짜 부럽다. 아빠랑 단 둘이 살면서 어쩜 저렇게 바르게 컸을까.
산하는 집 밖으로 나와서는 인생 최대의 고민거리가 생겼다. 지금 골목을 들어가느냐 학교로 가느냐. 아침부터 담배냄새가 산하를 자극했다. 끊으려고 했는데 왜 하필 오늘 피고 있는지. 고민은 고민이고 답은 정해져 있었다.
“형은 무슨 아침부터 이러고 있어”
-어? 산하 오랜만이다?
“불 좀”
-형 안녕하세요
“어 오랜만”
-니 학교 갈라고? 이야 내가 윤산하 교복 입는 꼴도 다 보고ㅋㅋ
-형 사람 됐잖아요.
-?뭔 소리야
“언제는 사람 아니었냐.”
-아니었지..
“김지훈 손절”
-ㅋㅋ뭔데 뭔 일이 있었는데
“울 엄마 결혼했잖아. 그 댁 아드님이 너무 순수한 바람에~”
-ㅋㅋ윤산하 개불쌍해
“오늘 동현이집 갈 건데 같이 갈래 동현아?”
-네?
-헐 나두 갈랭
-저 오늘 과외 있는데
“아 공부 잘하는 놈;; 뭐야 나 오늘 엄마한테 니네 집에서 잔다 했는데”
-죄송..
“오늘은 또 뭐하냐...”
“학교 가서 공부해야지”
갑자기 나타나서는 세상 평온한 얼굴로 산하 입에 물려있는 담배를 뺏었다. 그것도 박민혁이.
“형 그게,”
“형도 가서 공부해요. 김동현 너도 임마”
-민혁앙 보고 싶었어ㅠ
“아 형 제발;”
산하가 이런 짓 하는 거 민혁은 모르는데. 자연스러운 민혁에 벙쪄 있었다. 학교 가라며 골목에서 친구들을 내쫓은 민혁은 산하를 등지고 콜록거렸다. 아 맞다 형 담배냄새 싫어하는데, 급히 민혁의 손에서 담배를 뺏어 하수구 사이로 넣어버린 산하는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할까.
“학교 가 이런 거 하지 말고. 그리고 쟤 집 가서 자고 오기만 해봐라 너”
“어... 네”
“학교 네 시 반에 끝나는 거 다 아니까 35분 전에 들어와”
“아 그건”
“뭐 이모한테 일러바쳐?”
“알았어요.”
민혁 덕에 8교시 끝나고 방과후까지 다 마친 산하는 PC방으로 저를 끌고 가는 친구들을 뿌리친 채로 집으로 향했다. 민혁에게 칭찬받을 생각을 하니 광대가 저절로 올라갔다. 또 놀이터에 있겠지? 귀여운 뒷통수를 상상하니 얼른 뛰어가 뽀뽀를 휘갈겨주고 싶었다. 거의 도착했을 때 형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무슨 쪼꼬미야 만날 작대 내 이래봐도 어?”
-귀엽다ㅠㅠ
“말같지두 않아 진짜..”
까맣고 동그란 머리를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헤집어 놓았다. 지훈이 민혁을 쓰다듬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장 오진다고 자기 입으로 횟집 차릴 거라던 지훈이 그 땐 마냥 웃겼다. 근데 그 때랑은 다르지. 우리 형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형이기도 하니까
못들은 걸로 한다고 했을 때 웃으며 괜찮다고 했는데, 하나도 안 괜찮았다. 그 맑은 얼굴이 그렇게 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법적으로 가족이 된 그 날부터 산하는 민혁을 마음속에서 비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오늘은 형이 너무너무 예쁘니까 내일부터 비워야지 하다가 비워내기는커녕 결국 더 깊어졌다.
정말 좋아하는 민혁의 뒷통수인데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지훈이 저를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지자 민혁에겐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싸늘한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훈이 살풋 웃으며 고개를 살짝 꺾어보였다. 산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살살 다가갔다. 민혁이 뒤를 돌아 산하를 불렀다. 하필 왜 지금 부르냐고 형
“윤산하! 너 왜 이제 와! 다섯시거든--”
차마 민혁에게 반박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을 꾸욱 감았다.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가관이네.
“들어가자”
-벌써 가게? 형 좀만 더 놀아주라ㅠ
“형두 집 들어가요 부모님 걱정하신다”
-울 부모님 맞벌이라 늦게 들어오셔..
지랄났다. 산하는 지훈의 말을 조용히 듣다가 헛웃음을 치고는 민혁의 팔을 당겨 일으켰다.
“그래도 들어가 봐야죠? 우리 부모님은 걱정하시는데”
-ㅋㅋㅎ그래 내일 보자.
민혁의 어깨를 꽉 잡고 집으로 갔다. 이걸 확 진짜..
“지훈이 형 부모님 맞벌이시구나..”
집으로 올라가는 와중에도 형은 김지훈 걱정뿐이었다. 맞벌이는 무슨 지가 지발로 집 나와놓고선 부모님이 뭐.. 진짜 좆같네 이걸 확 때려버려?
때리기엔 동그란 게 너무 쓰다듬어주고 싶게 생겼다. 결국 말 한마디 못 꺼내고 집에 도착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민혁은 점점 통화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밖에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학교 끝나고 집 앞에서 둘을 보는 일도 많아졌다. 고양이와 산하가 다였던 민혁의 하루가 이젠 다 지훈이라 생각하니 산하는 점점 초조해졌고 민혁과 지훈의 사이는 점점 위험해졌다.
오늘도 산하는 학교에 가기 전 골목에 들렀다. 매일매일 골목에 있는 애들은 비슷했다. 그리고 오늘은 지훈도 있었다.
“어 형 오랜만이네요”
-어. 안녕ㅋㅋ
-지훈이형 또 횟집 개장했다면서요.
-ㅋㅋㅋ어 애기들 존나 귀엽다
지훈이 산하를 쳐다보며 말했다. 평소였다면 욕부터 내뱉고 주먹을 날렸을 산하인데, 민혁을 생각하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여튼 박민혁 사람 빡치게 하는데 다재다능하다 왜 이런 새끼랑 엮여서는. 피하는 게 답이라는 생각이 든 산하는 부들부들 손을 떨며 일어났다.
“먼저 간다.”
-벌써 가려구? 윤산하 사람 다 됐네
“ㅋㅋ요즘 사는 게 좀 좆같아서”
-왜?
“글쎄요”
-ㅋㅋ가 봐
“네”
-왠지 오늘은 두시에 산하가 보고싶네~..ㅋㅋㅋ
애써 지훈을 뒤로 한 채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도 온통 민혁과 지훈 생각뿐이었다. 민혁에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존재인 게 너무 화가 나고 답답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민혁을 가지는 것과 그 사람에게 민혁이 받을 상처가 너무나 뻔히 보였다. 이래도 민혁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게 산하를 고통스럽게 했다.
요즘 산하의 하루는 골목 학교 골목 집 이었다.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 아픈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학교를 마치고 산하는 초점 없이 걸어 골목에 도착했다. 아침에 나오면 저녁까지 죽치고 있는 지훈인데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야 지훈이형은?”
-몰라요 새벽에 약속 있다고 준비해야 된다고 나가던데
저것도 혹시 민혁 얘기가 아닐까, 지금도 둘이 같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골목에 들어선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아파트 단지로 올라갔다. 설마 설마 했는데 민혁이 놀이터에 없었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 기분을 설명할만한 욕이 없었다. 이젠 모르겠다 하고 단상에 앉았다. 산하의 머릿속은 이미 갈 때까지 가버렸고 아무 생각도 대처도 떠오르지 않았다.
“산하야”
박민혁 씨발 장난하나
눈앞엔 자다 깨 부스스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민혁이 있었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뻔뻔하고 사악할 수가 있지 산하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형 요즘 뭐하고 ㄷ,”
민혁이 앉아있는 산하에게 그대로 다가가 폭 안겼다.
“왜 안 왔어.. 걱정했잖아... 낮잠자고 일어났는데.. 다섯시 반이나 됐는데 왜 집에 없는데..”
웅얼웅얼 털어놓는 민혁에 산하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사람 하나가 뭐라고 자기가 이렇게까지 놀아나는지. 안타깝게도 민혁은 너무 예뻤다. 따지고 보면 잘못한 것 하나 없는 착하고 순수한 형일 뿐이다. 그렇게 또 산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같이 손을 잡고 집으로 가서 도라에몽을 보며 귤을 까먹었다. 이러니 산하가 아무 말도 못하지. 민혁은 도라에몽 하나 보는데 쉴 새 없이 밝게 웃었다. 민혁을 만나고 짜증나게 귀엽다는 말만 벌써 서른 번째다.
저녁을 먹고 산하는 오늘 하루 누구 덕에 좋지 않은 컨디션에 바로 잠에 들었다. 혹시 도망갈까 품에 민혁을 가두고서.
“형...”
“응?”
“오늘 왜 지후니형 보러 안 갔어요...”
“내가 뭐 만날 지훈이형이랑만 붙어 다녀야 되냐”
“맞잖아요.. 맨날 그 새끼랑만 있으면서...”
“말 이쁘게 하랬지”
“치이...”
“좀 놔줘 어디 안 도망가”
“도망갈 것 가튼데...”
“ㅋㅋㅋ안 간다고”
“그럼 손은 잡고 자요...”
“알았어”
그렇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게 잘못이었다. 지금 박민혁은 그 때의 순수하기만 했던 박민혁이 아니다. 악몽을 꿔 잠에서 깼더니 민혁이 옆에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민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2시 10분이었다.
-왠지 오늘은 두시에 산하가 보고싶네~..ㅋㅋㅋ
그래 다섯시에 일어났으면서 그 이른 시간에 순순히 같이 자주는 게 말이 되냐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에 머리를 박고 소리를 질렀다. 곧 죽을 사람처럼 베개를 꽉 쥔 손은 비현실적으로 하얘졌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겉옷도 입지 않은채로 반팔에 반바지 차림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엘리베이터는 쳐다도 보지 않고 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불안함에 아까부터 계속 물어뜯은 입술은 이미 터져 피가 송글송글 맺혔다. 놀이터에 민혁이 없었다. 산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놀이터에 없으면 민혁이 지훈과 있을 곳은 딱 한군데뿐인데.
맞았다. 골목으로 달려가니 그 곳엔 지훈과 민혁이 혀를 섞고 있었고 둘의 입술 사이로 흰 연기가 피어나왔다. 담배라 하면 질색하던 민혁은 어디가고 지훈의 목에 팔을 둘러대는 민혁의 꼴이 가관이었다. 더 볼 필요도 없었다. 산하는 무작정 걸어가 민혁의 손을 잡아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 지훈이 민혁의 반대쪽 손을 확 끌어당겨 셋은 멈춰 섰다.
-뭐하냐
“내가 묻고 싶은데”
-키스하잖아
“씨발 그니까 왜”
-뭐 잘못된 거 있냐? 너네 형이랑 내가 키스하는 게 뭐 잘못된 거 있냐 아님 뭐 좋아해?
“어”
-뭐?
“왜 몰랐어? 알았잖아 나 박민혁 좋아하는 거”
“산하야, 형이 다 설명해줄게 일단 가자”
“박민혁 가만히 있어. 넌, 형은 이따 봐.”
산하는 한 번 더 민혁을 자기 쪽으로 당겨 뒤에 세웠다. 처음 보는 산하의 모습에 민혁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야 지 형을 좋아하는 게 더 문제 삼을만한 거 아니냐?ㅋㅋ
“그래서 난 쟤가 내 형이 아니었음 좋겠다고”
-그래도 니 형인 걸 내가 어쩌라고 더러운년아 어차피 놀아주다 버릴 앤데 좀 기다렸다 뺏지 그렇게 아깝냐?
결국 산하는 터져버렸다. 이성을 놓고 달려들어 죽으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지훈의 피를 보고서야 민혁의 말이 들렸고 쓰러진 지훈을 한 번 더 발로 차고 나서야 산하는 말없이 민혁을 끌고 놀이터로 올라갔다.
놀이터에 도착하자마자 산하는 민혁에게 다짜고짜 혀를 섞어댔다. 순식간에 들어온 산하에 민혁은 산하를 쳐냈다.
“산하야 진정해”
산하는 민혁의 말을 무시한 채로 다시 입을 갖다 댔다. 피 맛이 비릿하게 났다. 벗어나려는 듯 자꾸 밀치는 민혁에 신경질이 나 뒷통수를 꽉 쥐고 허리에 팔을 감았다. 민혁이 수차례 산하의 가슴팍을 두드리고서야 산하가 밀려났다. 민혁은 숨을 헐떡대며 물기 가득한 눈으로 산하를 올려다봤다.
“왜 밀쳐요 저 새끼는 되고 나는 안 돼? 왜? 아까 쟤가 하는 말 못 들었어?”
“들었어. 다 들었어”
“왜 형이 그딴 말을 듣고 있는데. 내가 그러라고 이렇게 아껴줬냐고 병신아”
“응 나 병신이야 저딴 말 들어도 좋아. 내가 너한테 저런 말해도 너 나 계속 좋아 할 거잖아 아니야?”
“씨발 맞는 말만 하네 형 담배 냄새만 맡아도 기침하면서 지금 담배 빨던 애랑 키스한 거예요?”
“어”
“골 때리네 나는 왜 안 되는데요?”
“그냥 아니야. 아닌 건 아닌거야 산하야. 너랑 난 그냥 아니야. 안 돼. 그리고 형은 이딴 사랑도 좋아. 김지훈이 싸이코에 개쓰레기여도 형은 좋아. 니가 아무리 욕 해봐도 넌 아니야.”
“그런 거면 말 하지 그랬어요. 나도 싸이코에 개쓰레기 같은 거 잘해요”
“그게 아니잖아 산하야”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린다는 말 알아요?”
“”
“가질 수 없는 게 어딨어ㅋㅋ 다 뺏을 수 있어요. 내가 망가지던 형이 망가지던 간에 다, 다 가질 수 있어”
“미친놈아...”
“원했던 거 아니에요? 후회할 것 같으면 그냥 지금 말 바꿔도 돼요 사랑한다고 한번만 하면 돼”
“싫어”
“하라고”
“안한다고”
“계속 그렇게 해봐요 다 잃고 둘만 남았을 때 누가 쓰러질지”
그러자 질투가 난 팥쥐가 콩쥐를 유인하여···
죽이고는··· 콩쥐인 양 행세한다.···환생한 콩쥐가··· 팥쥐를 괴롭히자 팥쥐는··· 불태운다.··· 다시 콩쥐로··· 콩쥐의 시신을 찾아 살려 내고··· 팥쥐를 죽여··· 죽는다.
“산하야 그만해”
“그 때 사랑한다고 하지 그랬어. 내가 말했잖아 후회할거라고”
“사랑해”
“응 나도요. 이제 그만할게. 근데 형한테 남은 게 뭐가 있지? 다 잃었잖아요. 내말이 다 맞잖아 결국 우리 둘밖에 없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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