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자정리 거자필반 / 연두 (이생규장전)
네번째2020. 4. 10. 20:42송도(지금의 개성)에 사는 젊은 총각 이생(李生)은 공부하러 학당에 다니다가 노변에 사는 양반집 처녀 최씨녀를 알게 되었다. 서로는 시를 주고받는 등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처음에는 부모의 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최씨녀의 애정과 굳은 노력으로 마침내 극복하고 서로 혼인하게 되었다. 이생의 장원급제로 둘의 행복은 절정에 달하게 되지만 홍건적의 난으로 양가의 부모는 물론 사랑하는 최씨녀까지 죽고 간신히 이생만 살아남게 되었다. 깊은 슬픔에 사로잡혀 있는 이생 앞에 최씨녀가 환생하여 나타나는데, 열렬히 사랑한 이생은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다시 예전처럼 함께 수년간을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최씨녀는 이승의 인연이 다했다고 말하며 사라지고, 이생은 너무 놀라 최씨녀의 뼈를 찾아 묻어 주었다. 그 뒤로도 이생은 최씨녀를 매일같이 그리워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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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 사는 열여덟 살 산하는 국학에 다니는 재원이었다. 얼굴이 말끔하고 재주가 비범하며 학문에 뜻이 있어 국학에 다닐 때 길가에서도 부지런히 글을 외우곤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집안의 뜻을 따라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그는 본디 시를 쓰고 글공부에 타고난 재주가 있어 윤 씨 가문에 먹칠은 하지 않겠다며 인정받는 수재였다.
어디 글공부에만 소질 있으랴. 훤칠한 키, 수려한 외모, 젊잖고 품위 있는 행동은 여러 여인을 홀리기에 적합했다. 물론 질투심에 뒤에서 기생오라비라고 수군대는 재원들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국학에서 치르는 시험에서 장원을 받는 것으로 대 갚아 주었다.
하루는 김 씨네 대감이 윤 진사네에 찾아왔는데 그 집 종이 보기에도 꼭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길래 일단 안으로 들여보냈다. 김 대감을 반갑게 맞이한 윤 진사는 이런저런 담소라도 나눌까 싶어 차를 내오라 했지만, 김 대감의 목적은 오롯이 윤 도령이었다.
“윤 도령, 윤 도령 안에 있는가!”
“윤 도령은 어인 일로 찾는가?”
“내 그럴만한 일이 좀 있었네. 혹 이리로 불러줄 수 있겠나?”
이틀 전, 김 대감은 열일곱이 넘어가는 제 딸에게 최 씨네 외아들과 혼인할 날을 잡아놨으니 그리 알라고 통보한 이후부터 난감한 일을 겪게 되었다.
“화월아, 내 저기 사는 최 씨네 외아들과 혼인할 날을 잡아 왔다.”
“예? 최 씨네 아들이면 최 현이요?”
“너도 이제 한 사내의 여인으로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니.”
“아버지 전 이미 저와 혼인할 상대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게 누구더냐?”“윤 진사님 댁 장남 윤산하 도령이요. 전 윤 도령이 아니면 아무하고도 혼인하지 않을 겁니다.”
화월은 시장 구경 갔다가 제 주머니를 털어가려는 도둑을 잡아준 산하에게 반해버렸고, 그 이후로 그를 수소문해서 어디 사는 누구인지까지 알아내어 미리 짝으로 정해뒀다. 알고 보니 윤 씨 가문과는 어른들끼리 안면이 있는 사이기에 오히려 잘된 일이라며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게 상책이라고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윤 도령이 글밖에 모르는 샌님이라는 사실은 마을 사람들 전부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흑심을 품고 들이대는 여인들도 있었다. 화월처럼. 김 대감은 윤 도령이 여자와 혼인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부탁이라도 해볼까 싶어 길을 나섰다.
“윤 도령 오랜만이네. 그간 잘 지냈는가?”“예, 김 대감님께서도 안녕하셨는지요.”“나야 뭐 늘 똑같지. 그나저나 윤 도령은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는가? 혼인할 나이가 지난 것 같아 말이네.”
“저는 아직 배울 것이 많습니다. 또한, 이 시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혼인은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생긴다면 할 생각입니다”
단호한 산하의 말에 집으로 돌아온 김 대감은 화월을 어떻게 타일러야 할지 고민이었다.
“윤 도령은 도통 여자에게 관심이 없더구나. 애야, 그만 이 아비의 말을 좀 들어다오. 내 한평생 소원이란다. 응?”
“아버님께서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렇지만 저도 최 도령과의 혼인에 관한 것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화월도 산하에 대해 알아보면서 그가 혼인에 관심이 없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다. 매일 집 아니면 국학, 가끔 뒤뜰에서 시 쓰는 것 말고 누구와 만난다던가 다른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가령 그가 혼자 있을 때를 틈타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갔을 때도 산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피하곤 했었다.
제대로 말 한 번 못 걸어본 화월이었지만, 첫사랑은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일은 일단락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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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는 국학에 갈 때마다 항상 어떤 집을 지나가는데, 하도 고요해서 사람이 살긴 하는지 매번 의구심을 품고 지나쳤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그 집 앞을 지나던 중, 벚꽃이 만개하여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아름다워 잠시 감상하던 그 사이로 한 사내가 수를 놓다가 바늘을 잠깐 멈추고 시를 읊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창에 홀로 비겨 수놓기도 귀찮구나. 꽃 숲의 꾀꼬리 다정도 하네. 마음에 부는 봄바람 원망하고자 바늘 멈추고 생각에 잠겼도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내를 본 산하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에게 더 다가가고 싶었지만, 담이 높고 안채가 깊어 까치발을 들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를 어찌할까 궁리하다가 흰 종이에 답 시를 적어 담 안으로 던졌다.
“고운 임 외로운 꿈 수고롭게 하지 마오. 행여 운우(雲雨)되어 양대(陽臺)에서 만나보세.”
(*운우: 구름과 비를 아울러 이르는 말)
(*양대: 해가 잘 비치는 대)
밖에서 부스럭대는 소리에 남자가 제 종을 시켜 밖을 내다보라 하니, 웬 종이를 들고 왔다. 시를 읊던 사내는 산하의 시를 보고는 기뻐하며 얼른 답 시를 써서 담 밖으로 던져주었다.
“님이시여 의심 마오. 황혼 가약 정합시다.”
그날 밤 산하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처음 본 사내의 시에 홀려 답 시를 보낸 행동이 제가 생각하기에도 충동적이었지만 후회가 되진 않았다. 어서 이 긴 밤이 다 지나, 그 크고 반짝이는 눈을 또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단아한 목소리로 시를 읊던 그를 떠올리니 가슴 한 켠이 간질이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왠지 잠들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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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잘 들여다보지도 않던 거울을 꺼내와 몇 번씩이나 얼굴을 확인하던 산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국학을 다니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를 생각할수록 이렇게나 심장이 뛰는데 얼굴을 마주하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름도 나이도 심지어 가장 중요한 얼굴을 모르는데 가슴에 품고선 그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것이다.
혼자 김칫국 한 사발을 들이키고는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연신 부채질을 하던 산하는 이 민망함을 피하고자 국학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렇게 점잖은 도령이 헐레벌떡 어디론가 뛰어가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그의 뒤꽁무니가 닳도록 쳐다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모든 질문에 답했을 산하인데, 오늘은 웬일인지 집중을 못 하고 계속 한숨을 쉬며 딴소리를 하자 국학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호되게 한 소리를 들었다. 주변 재원들 모두 놀랐으나 정작 본인은 무덤덤했다. 머릿속엔 온통 시 읊던 그 남자를 만날 생각으로 꽉 차 있었으니까.
어김없이 어제 그 집 앞을 지나는데 보장 좀 보태자면 태어나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뛴 적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고도의 긴장 상태였다. 소리를 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손엔 땀이 흥건했다. 이런 상태로는 그를 만나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못 해 창피만 당할 것이라 확신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누워서 다짐했다. 내일은 꼭 그에게 말을 걸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한 지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일주일 째 되던 날, 더 미루면 그 또한 자신의 얼굴을 까먹을까 봐 오늘은 꼭 그를 불러낼 것이라고 국학에서 나오면서부터 할 말을 중얼중얼 댔다.
유난히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조금 더 속도를 내서 발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그날 그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산하는 집 앞에 서서 그를 부를까 말까 수 없이 고민하다가 용기 내서 슬쩍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거기, 누구 있으십니까? 꽤 큰 소리에 안에 있던 종이 나왔다. 누구십니까? 아뿔싸 계획이 틀어졌다. 그때 그 남자가 나와야 멋있는 말을 하면서 다가가는 건데. 산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만 도르륵 굴리고 있었다. 준비해 온 말들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여 하얀 백지상태가 된 지 오래였다.
“누구시오? 뉘신데 한밤중에 찾아왔소?”
“이 집에 크고 화려한 눈을 가진 사내가 있지 않습니까?”
“아, 민혁 도련님 말씀이신지..”“예, 그분 좀 만나러 왔습니다.”
“잉, 잠시만 여서 기다려주시지요.”
남자는 말을 마치곤 집 안쪽으로 들어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집 안쪽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복숭아나무에 꽃이 화려하게 피어있었고, 남자는 머리에 꽃을 꽂고 놀고 있었다. 발소리가 들렸는지 남자는 입을 뗐다.
“복숭아 가지 속 꽃 피어 화려하고 원앙새 베개 위 달빛도 곱구나”
이에 산하가 답했다.
“어쩌다 봄소식 누설되면 무정한 비바람에 가련하지 않을까.”
“당신과 부부가 되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 하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중에 비밀이 누설된다고 하더라도 저 혼자 책임을 지겠습니다.”
민혁은 그 말을 하며 고개를 돌려 산하를 쳐다보았다. 키는 멀대같이 큰데 얼굴은 하얗고 홍조처럼 볼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얼굴이 토마토 인양 붉어진 산하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토록 상상만 해오던 일이 오늘에서야 일어났다. 박민혁입니다. 당신은요? 윤산하 라고 합니다. 복숭아 꽃이 흩날리는 바람 소리만이 둘을 에워쌌다.
산하의 걱정과 달리 첫 만남은 순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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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이후였다. 맘같아선 몇 날 며칠이고 민혁과 같이 있고 싶은데 제가 하는 일이 아무래도 국학을 다니며 공부를 하는 일인지라 집 가는 길에 잠깐 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혁의 집으로 달려갔다. 민혁과 안면을 튼 이후로 산하의 평범했던 일과가 조금씩 달라졌다. 말 그대로 지옥이었던 제 일상을 바꿔준 민혁과 같이 시장에 나가서 구경도 하고 뒷동산에 누워 풀냄새도 맡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도 하고. 엄격한 아버지께선 절대 용납 못 하실 것들이었지만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제 종에게 일러뒀다. 요즘 과거시험 준비로 국학에서 늦게 돌아오니 그리 알라고 말이다.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지만 그 집 종은 우리 도련님께서 그럴 리가 없어! 라는 생각으로 그냥 넘어갔다.
제법 날씨가 더워졌다. 그간 정인지 애정인지 모르는 것을 쌓아온 둘은 장난을 할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졌다. 대청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산하는 입술부터 맞댔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누가 윤산하를 글밖에 모르는 샌님이라고 했던가. 산하에게 첫 키스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18년간 처음 느껴보는 짜릿함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풀린 눈으로 숨을 몰아쉬다가 다시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 시각, 우연히 길을 가다가 익숙한 뒷태를 본 화월은 그 자리에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엔 도통 관심이 없다던 윤 도령이 남자와 입을 맞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남자가 어깨를 밀어내자 그제서야 소매로 입술을 벅벅 닦으며 머쓱한 듯이 웃어댔다.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입도 다물지 못하고 집으로 뛰어온 화월은 아까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반복됨을 느꼈다.
그러나 화월은 머리가 좋았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은 남도 갖지 못하게 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이 사실을 윤 진사네에 알려, 윤 도령을 난감하게 만든 뒤,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자신과 혼례를 치르도록 말이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개성 전체가 발칵 뒤집힐 테니 아마 엄청난 효과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윤 진사는 누구에게서 온 지 모를 서찰을 보고는 당장 윤 도령을 잡아 오라고 크게 화를 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산하는 그날 아버지께 죽도록 퍼 맞았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사내새끼랑 뒹굴고 있냐면서 꼴도 보기 싫으니 어디 산골짜기로 내려가라고. 다음 날 윤 진사는 산하를 바로 울주로 내려보냈고, 민혁은 저녁마다 대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지만 끝내 만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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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고 몇 달이 지나도 산하가 찾아오지 않자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닌지 제 종을 시켜 알아보니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오래전에 울주로 내려갔다고 했다. 그 말에 민혁은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모든 게 다 제 탓인 것만 같아서. 아무것도 먹지 않아 몸은 점점 야위어 가는데 미안함은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어렵사리 산하가 사는 곳을 알아 왔음에도 민혁은 눈물만 쏟을 뿐, 별다른 것을 하진 않았다. 그 집 종은 걱정이 되었는지 민혁의 부모를 모셔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서로 주고받은 시를 보여줬다. 본인에게 묻는 게 낫겠다 싶은 부모는 민혁에게 도대체 윤산하가 누구냐고 물었다.
“어찌 숨기겠습니까? 수만 놓던 제게 먼저 다가와 준 소중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분이 오지 않는 건 다 제 탓입니다. 그러나 한이 쌓여 쓰러진 연약한 몸이 맥없이 홀로 있으니 생각은 날이 갈수록 더욱 나고 병세는 점차 위중하여서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부모는 직접 윤 진사네에 찾아갔다. 찾아온 손님이 제 아들과 뒹굴던 사내새끼 부모라는 걸 들은 윤 진사는 매우 탐탁지 않아 했으나 일단 자신의 체면이 있으니 정중한 척 들어오라고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우리 아이가 어려서 바람이 났다 하여도 학문에 정통하고 얼굴이 유달라 장차 대과에 급제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릴 것이니 함부로 혼사를 정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예물과 의장을 저희 쪽에서 담당할 것이오니, 다만 좋은 날을 택해 화촉의 예를 치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애가 쓰러져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사온데 이렇게라도 부탁드립니다.”
민혁 부모의 끈질긴 설득 끝에 윤 진사는 둘의 혼례를 허락했다. 윤 진사는 민혁이 선비 놀음하는 가난한 도령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집안 재력에 속으로 땡잡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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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와 민혁은 혼례를 치렀다. 몇 달 동안이나 떨어져 있던 탓에 둘은 한 시라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둘의 혼례는 비밀리에 진행되었지만 둘 다 어딜 가나 튀는 얼굴인 데다가 매일같이 붙어있으니 안 들킬 리가 없었다. 특히 산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은 개성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나갔는데, 여자 얘기만 하면 얼굴이 붉어지더니 남색을 밝히는 거였냐며 더럽다고 모두 입을 모아 수군댔다. 사람들에게 소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바가 아니다. 물어뜯다가 다른 사냥감을 찾으면 발길을 돌리는 법이니까.
민혁은 그런 산하가 걱정됐지만, 산하는 오히려 당당했다. 제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빌어먹을 유교가 그런 편견을 갖게 했다면서 말이다. 산하는 걱정하지 말라며 민혁에게 입을 맞췄다.
요즘 산하의 관심사는 개성에 퍼진 저의 소문도 아니고 글공부도 아니었다. 바로 민혁과의 잠자리였다. 전에 만날 때만 해도 입 맞추는 것 말고는 상상도 못 해봤는데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면서 아직까지 한 번도 한 이불 속에서 잔적이 없었다. 좀만 분위기를 잡아도 민혁이 피하니까 산하는 항상 꼬리를 내리는 편이었다. 그런 산하의 마음을 알긴 하는지 자연스레 이불 두 개를 깔고 눕는 민혁이 원망스러웠다. 심지어 등지고 눕는다니!
물론 민혁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매일 밤 산하를 등지고 누워서 눈총을 받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 나이 먹어서 손잡는 것도 처음이고 입 맞추는 것도 처음인데 안는 일을 해봤을 리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오히려 눈만 마주쳐도 얼굴이 달아올라 쳐다도 못 보겠는 게 아닌가!
민혁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산하가 갑자기 민혁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또, 또 이렇게 신호를 보낸다.
“잠이 안 와?”
“나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돼요?”
“무슨 소리야, 잠이나 자자.”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면서 왜 자꾸 그래요...”
산하는 집요했다. 오늘은 꼭 성사시키리라고. 민혁이 두려워하는 것쯤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서방님 소리 듣는데..욕망 앞에선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처음으로 동침을 하던 날 둘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날 밤, 달빛이 문틈 사이로 비춰와 촛불을 집어삼켰고 그 속엔 남정네 둘이 껴안은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산하는 다음 해에 대과를 거쳐 높은 벼슬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걸으며 나날이 행복한 날을 보낼 줄로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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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공해와 개성을 함락시켜 사회적으로 큰 혼동을 주었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모조리 죽었다. 산하의 부모는 가까스로 개성에서 빠져나왔지만, 민혁의 부모는 산 깊은 곳으로 도망치다가 도적들에게 붙잡혀 결국은 목숨을 잃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뒤뜰에서 서로 꽃반지를 만들며 놀고 있던 둘은 밖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에 큰일이 났음을 감지하고 눈치를 살피다가 뒷산으로 가는 지름길로 도망쳤다. 갈대밭에 숨어 숨소리도 내지 않고 끌어안은 채 벌벌 떨고 있는데 민혁이 다리에 힘이 풀려 엉덩방아를 찧고야 말았다. 눈앞에 서성이고 있는 도적들이 우리를 죽이겠지, 차갑게 식은 몸뚱어리는 길가에 내팽개쳐지겠지.
“꼭, 꼭 살아야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민혁은 산하를 도망가게 하고 자신이 미끼가 되어 도적들에게 죽었다. 딱, 혼례를 올린 지 1년 되던 날이었다.
한바탕 일어난 소동이 잠잠해지자 산하는 아까 그 갈대밭으로 갔다. 그곳엔 민혁이 잠들어 있었고 산하는 곤히 잠든 민혁을 껴안고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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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산하는 죽지 못해 살아있었다. 민혁이 죽은 뒤로는 벼슬도 그만두고 해가 질 때까지 무덤 앞에 앉아만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무덤 앞에서 민혁의 이름을 불러대니 주변 사람들도 처음엔 안타까워했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정도에 나중엔 모두 혀를 찼다.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온 산하는 차게 식은 바닥에 앉아 또 눈물을 흘렸다. 평생 함께하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비겁하게 도망친 자신이 한심했으면서도 자신도 칼에 찔려 죽을까 봐 두려웠다. 제일 행복해야 하는 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었다.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산하는 민혁이 곁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불도 두 개를 깔고 자신은 다 낡아빠진 신을 신으면서 시장에서 예뻐 보이는 신은 죄다 사 와서 민혁의 무덤 앞에 두고 갔다. 민혁 덕에 바뀐 일상이 제자리를 찾았다. 어쩌면 그 전보다 더 지옥일지도 모르겠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중 낭하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민혁이었다. 이제 헛것을 보나, 생각하고는 제 앞에 있는 민혁에게 물었다.
“어디 있었던 거예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민혁은 산하의 손을 잡아 오며 말을 꺼냈다.
“내 몸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승에 다시 태어나 남은 인연은 너랑 맺을 거야. 우리 평생 함께하기로 했잖아. 다시 행복하게 살자...”
손까지 잡아 오며 대답하는 민혁에 그가 죽었다는 건 이미 뇌리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산하는 벼슬 같은 건 다 잊고 민혁과 금슬을 누리며 살아갔다. 민혁이 귀신이 된 줄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은 혼잣말하며 걸어가는 산하가 드디어 미쳐버렸다고 했지만, 산하는 마냥 행복했다. 산하 혼자 일상으로 돌아와 민혁과 손도 잡고 입도 맞추고 배도 맞췄다.
그러나 그 행복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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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민혁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 가약도 곧 끝나는데 넌 또 혼자 남겨져서 어떡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저승길은 피할 수 없어. 천연이 정해진 상태에서 내 몸은 너랑 잠깐 만난 거야. 내가 어떻게 너랑 계속 살 수가 있겠어..”
산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젠 행복할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내가 혼자 남겨진다니. 민혁이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데.
“나 혼자 여생을 살아서 뭐하겠어요. 저도 따라갈래요.”
“나는 귀신의 명부에 실려서 미련을 가지면 벌을 받게 돼. 내 뼛조각들은 무덤 옆에 뿌려져 있을 거야. 많이 사랑했어 산하야...”
그 말을 끝으로 민혁은 자취를 감췄다. 몇 년간 환상 속에서 살다가 마주한 현실은 너무나도 참혹했다. 전처럼 민혁이 찾아올 줄 알고 한없이 기다린 산하도 끝내 병을 얻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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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체험을 마친 산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쏟아냈는데 깨어나 보니 다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어서 괜히 부끄러워졌다. 특히 제 애인인 민혁이 큰 눈에 눈물을 머금고 괜찮냐며 손을 잡아 오길래 울지 말라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나니 박사님께서는 ‘전생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컸지만, 유교 사상과 전쟁으로 인한 죽음으로 잘 이어지지 못해서 현실에선 오래도록 사랑하라고 이어진 인연’ 같다며 설명해주셨다. 그 말에 산하와 민혁은 서로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전생에도 서로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때처럼 또 헤어지게 될까 봐 두려웠다. 아직도 그런 편협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아이돌’이라는 직업 특성상 마음 놓고 연애를 할 수 없을뿐더러 동성 간의 연애는 둘 다 처음이었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이게 사랑이 맞는지, 우정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들의 관계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특히나 민혁은 매일 들킬까 봐 마음 졸이며 남들 앞에선 일부러 산하와 닿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름의 배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산하는 그런 민혁이 걱정되었고, 그래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여러 가지 찾아보다가 전생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민혁보다 자신이 더 많이 울긴 했지만 말이다.)
숙소로 돌아온 둘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산하는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건 아닌지 민혁의 눈치를 봤다.
“니 왜 자꾸 내 눈치봐”
“에? 아닌데여”
할 말은 많은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둘 다 아무말이나 하는 걸 본 빈이 답답하다- 답답해- 라고 큰소리를 내며 방을 나갔다. 그런 빈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친 둘은 한참을 바라만 보다가 동시에 웃음이 터져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민혁은 그동안 자신이 남들 눈치 보느라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고, 산하는 그런 민혁의 얘기를 들어주며 다 괜찮다고 꽉 끌어안아 주었다. 다시 한번 사랑을 확인한 둘이 입을 맞췄다. 평소보다 더 진하고, 깊게.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면서도 눈은 서로만을 쫓고 있었다.
전생에 이어진 인연이 맞닿았지만,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둘은 전생에서 못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사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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